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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과 주장

죽지 않고 병들지 않고 일하는 세상을 위해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8. 9. 6.

이상수(반올림 상임활동가)

 


[<일과 건강>에 실렸던 글(http://safedu.org/column/117999)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태풍 솔릭이 다가오면서 실감했다. 농성이 끝났다는 것을. 농성 기간 내내 온전히 마음 편한 날이 없었다. 해야 할 일들을 하면서 농성 당번을 채우는 건 늘 버거운 일이었다. 농성을 해보면 계절과 날씨 변화를 온 몸으로 겪게 된다. 페트병 속 물이 꽝꽝 어는 겨울밤 농성장 추위를 핫팩과 침낭만으로 버티는 일도 녹록치 않았지만, 잠깐 잠들기도 어려운 습하고 더운 한여름밤은 견디는 게 고역이였다. 비라도 와서 비닐을 쳐야하는 날은 덥고 습한 기운에 몇 시간만에 녹초가 되곤 했다.

 

최악은 역시 비바람이다. 말소리가 안 들릴 정도로 두두둑 빗소리가 커지면 상한 비닐천막 틈으로 비가 새고, 바람이 세게 불면 농성장이 통째로 날아가지 않을까 걱정스러워 농성장 지지대를 붙들고 몇 시간을 서있기도 했다. 농성기간 지킴이 텔방은 늘 걱정으로 가득했다.

 

빌딩숲 사이 땅바닥에 놓인 농성장이 이럴진대, 70미터 굴뚝 위에 놓인 곳, 하늘 높이 철탑 위에 걸린 농성장은 오죽하랴. 여기저기 농성장을 걱정하는 사람들의 마음 덕분인지 급격히 약해진 태풍 솔릭이 참 고맙다. 이 농성들이 끝나야 우리들 맘도 편해질텐데. 반올림 농성도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이랬겠구나 짐작이 된다. 고마운 마음을 모아준 덕분에 1,023일을 버티고 결국 삼성의 양보를 얻어냈다.

 

돈 없고 힘 없는 노동자라고 현장에서 화학약품에 병들고 죽어가는 것도 서러운데 10년이 넘도록 긴 시간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섭섭한 일입니다.”

 

중재합의 서명을 앞 두고 이 말을 하시면서, 결국 황상기 아버님이 울컥 목이 메이셨다. 같이 있던 종란 동지도, 콩 동지도 울었다. 페북 영상을 보며 나도 울었다. 울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떠올리면 목이 메일 정도로 긴 세월이었다. 1,023일의 농성도. 11년의 반올림 투쟁도.

 

유미씨 생전에 병이 걸린 원인을 밝혀주겠다고 했던 아버님의 약속은 직업병 인정 판결로, 그리고 이번 삼성과의 중재 합의로 또 한 번 지켜졌다. 늘 허허 웃으시는 아버님의 그 약속은 지나 온 세월만큼이나 무거운 것이었다. 처음 삼성의 제안처럼 피해자 8명의 보상 문제만 논의했다면 벌써 끝났을 문제를 함께 보상받겠다는 맘으로 기약 없는 세월을 버터주신 아버님과 혜경씨, 김시녀 어머님께 정말 감사하고 존경한다는 말씀을 드린다.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직후 나왔던 1차 조정안을 삼성이 거부하고 3년이 흐르는 동안 세상은 삼성 뜻대로 되지 않았다. 노동부가 삼성과 한 몸처럼 움직이던 시절이었지만, 직업병 인정 판결들이 느린 속도로나마 쌓여갔다. 다른 반도체 회사들에서 전향적인 보상과 예방 대책이 시행되어 삼성을 초라하게 했다.

 

결정적으로 촛불항쟁이 시작되었고, 광장에서는 직업병 문제 완전 해결했다는 삼성의 주장이 아니라 삼성직업병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는 반올림의 목소리가 더 크게 울려퍼졌다. 삼성의 재벌총수 이재용이 국정농단 범죄로 구속되었다. ‘최순실에겐 500, 황유미에겐 500만원을 준 삼성에 분노한 여론이 이재용 구속에 작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여론의 변화는 직업병 인정 추세에 가속을 붙였다. 결정적인 대법원 판결이 연달아 내려졌고, 삼성을 위해 가짜 기사를 남발했던 언론들에도 명예훼손 판결이 내려졌다. 바뀐 정부는 이전 정부의 부당한 정책을 바꾸어 직업병 인정 문턱을 낮추는 것으로 나아갔다. 이런 변화 뒤에 많은 이들의 노력이 있었다. 3년 간의 변화가 없었다면, 삼성의 양보는 없었을 것이다.

 

중재 방식에 대한 우려와 아쉬움이 없진 않지만, 반올림이 상황에 떠밀려서 내린 결정은 아니다. 삼성전자와의 직접 대화, 그리고 조정과정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경험, 짧지 않은 조정위와의 대화의 시간이 있어 내리게 된 결정이다. 중재안이 나와야 확실해지겠지만, 지난 3년간의 긍정적인 변화가 잘 반영될거라 기대한다.

 

반올림이 할 일은 여전히 많다. ‘영업비밀논리가 안 먹히자, ‘국가기밀논리를 들고나와 유해작업환경에 대한 알권리를 막으려는 삼성의 반격이 거세다. 반도체·LCD 부문을 넘어 전자산업 전반의 작업환경문제를 밝히는 일도 중요하다. 반도체 전자산업에서의 위험의 외주화도 심각하다. 반올림 농성은 끝났지만, 삼성본관 앞에는 여전히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해고자와 철거민들이 있다. 곳곳에 농성장들이 있다. 지금 싸우고 있는 이 곳에 연대하는 게 그 간 반올림에 연대해주었던 많은 이들에게 빚을 갚는 길일 것이다.

 

중재안을 기다리는 지금, 농성을 끝내며 함께 했던 다짐을 다시 새겨본다.

 

우리는 지켜볼 것이다.

 

제대로 된 사과, 배제없는 보상, 재발방지대책

 

이 정당한 요구가 실현되는 것을,

 

그리고 계속 나아갈 것이다.

 

죽지 않고 병들지 않고 일하는 세상을 위해

 


 (기사 등록 201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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