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폭력적인 자본주의 국가기구가 낳은 비극
전지윤
TV ‘진짜 사나이’에서는 전혀 나오지 않던 이 나라 군대의 일면이 드러났다. 6월 21일 22사단 GOP에서 임모 병장이 동료 병사들을 향해 수류탄을 던지고 소총을 난사해 5명이 숨지고 7명이 다치는 끔찍한 비극이 일어난 것이다. 먼저 이 비극으로 죽어간 병사들과 그들의 지인들에게 깊은 애도를 표한다.
군대를 갔다 온 많은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군 시절을 떠올렸을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은 군대가 있는, 가야 할 아들과 형제·애인이 걱정됐을 것이다. 나도, 이제는 시간이 많이 흘러 희미해진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뛰어다니고, 욕 먹고, 벌 받고, 맞고...
그 시절의 ‘명언’은 “‘군대 좆같다’는 말 100번할 때쯤 되면 제대한다”는 거였다. 또 “제대하면 부대 쪽으로는 오줌도 안 눈다”는 말도. 그나마 “머리를 거꾸로 박고 있어도 국방부 시계는 간다”는 말이 위안이 되곤 했다. 모두들 제대할 날만 손 꼽아 기다렸으니. 하지만 제대를 얼마 안 남겨 둔 임모 병장은 그 몇 개월도 참지 못했던 것 같다.
왜 그랬을까? 노무현 정부 시절 비슷한 사건이 벌어졌을 때 우파는 ‘군기·안보 해이’를 문제삼곤 했다. 하지만 이제 박근혜 정부 하에서는 이런 말이 나오기 힘들다. 김관진, 김장수, 남재준 하에서 ‘군기’는 매우 빡세진 게 명백하니 말이다.
사실 병사들에게 ‘군기가 바짝들게’했던 군사독재 시절에 총기난사는 더 많이 일어났다. 물론 당시에는 대부분이 은폐됐고 ‘민주화’ 이후에야 봇물처럼 폭로됐다. 군에서 해마다 자살과 사고로 목숨 잃은 사람 수는 2000년대에는 200여 명이었지만, 80년대에는 600여 명에 달했다. 전쟁을 치르지 않고서도 3년마다 1개 연대 병력이 사라졌던 것이다.
언제나처럼 게임, 소설 등에도 죄를 묻고 있다. 임 병장이 판타지 소설 팬이었고, 입대 전에 하루 12시간씩 전투 게임에 몰두했다는 것이다. 과연 그는 군 막사를 컴퓨터 게임 화면으로 착각했던 것일까? 이제는 한부모 가정 출신이나 기초수급권자만이 아니라 컴퓨터 게임과 판타지 소설 좋아하는 사람도 ‘관심 사병’으로 지목해야 하는가?
물론 피해자들이 임 병장을 왕따 시킨 것이 원인을 제공한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그런데 이것은 은근히 피해자들을 탓하는 논리로 읽힌다. 군대가 문제가 아니라 왕따, ‘계급열외’ 같은 악의적 관습을 지속하는 사병들이 문제라는 것처럼 들리니 말이다.
결국 이런 악의적 관습이 사라지도록 지휘관의 지도, 병영 문화 개선 노력이 대안으로 제시될 것이다. 하지만 왜 사병들은 서로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악의적 관습을 그토록 끈질기게 지속할까? 왜 선임병들은 자신들이 졸병 때 당했던 그 악행을 고스란히 후임병에게 돌려줄까?
어떤 구조와 제도가 사병들이 서로 억압하고 억압당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바로 자본주의 핵심 국가기구인 군대가 만들어낸 억압 구조다. 이 구조 속에서 바로 몇 년 전 사병에게 인분 먹이기, 변기에 머리박기같은 얼차려도 나타났었다. 당시 한 여성 MC는 이런 소식을 보도하면서 “군대는 인간이 갈 곳이 못 되는군요”라고 무심코 정곡을 찌른 바 있다.
군대의 기원과 성격
현재와 같은 성격과 형태의 군대는 자본주의의 등장에서 그 뿌리를 찾아야 한다. 신흥 자본가들은 봉건 귀족의 견제나, 기층 민중의 반발을 힘으로 억누르고 다른 국가와의 경쟁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상비군 제도를 도입했다.
폭력을 합법적으로 독점한 국민국가를 통해 경쟁과 축적을 보호받고자 한 자본가들은 군복무를 ‘국민의 신성한 의무’로 만들었다. 그래서 많은 청년들이 인생의 가장 황금같은 시기를 군대에 가서 강제적 규율과 지독한 억압에 시달리며 전쟁 연습으로 채워야 했다. 또 전쟁이 일어나면 부지기수로 목숨을 잃었다.
이것은 이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한국 군대는 일제 황국군대를 모태삼았기에 더 심했다. 한국 군대 초기 형성 과정에서 장교의 많은 수가 일본군, 만주군 출신이었다. 이들은 일본군에서 배운 엄격한 위계 질서, 억압적 내무반 제도, 구타와 가혹행위 등을 그대로 가져 왔다. 1948년 단독정부 수립에 항의하는 제주도민 4만여 명을 학살한 것이 이 군대였다.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 쟁탈전을 벌이고 남북한 정부가 그 대리인 구실을 한 한국전쟁 과정에서 상황은 더 악화했다. 전쟁 과정에서 남한 정부는 전시동원체제를 만들며 젊은이들을 폭력적으로 강제징집했다.(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도 이것이 묘사돼 있다.) 수백만 명이 죽어간 전쟁 속에서, 극도의 억압과 통제가 만연했고, 사병들의 인권은 고려되지 않았다.
이후에도 한국사회에서 군대는 오랫동안 독재정권과 군부독재를 지탱해 온 힘이었다. 4.19 때 군대는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노동자·학생들에게 총을 쏘며 이승만 독재를 지키려 했다. 1980년 5월에 광주를 피바다로 만든 것도 전두환 신군부의 군대였다.
이처럼 민중들이 기존 체제에 저항해 일어날 때 군대의 본질이 드러난다. 이것은 군대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킨다’는 신화를 뒤집어 보게 한다. 군대가 과연 누구의 이익을 무엇으로부터 지키는가 묻게 한다.
‘빈민개병제’라는 말이 있듯이 군대는 주로 노동계급과 민중의 자식들로 구성된다. 지배자들은 보통 병역 기피나 면제를 통해 자식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으려 해 왔다.(요즘에는 편한 부대·보직에 배치하거나, 엄청난 휴가를 보장하는 식으로 변화하고 있다.)
게다가 지배자들은 극히 소수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이 체제는 ‘군복입은 노동자와 그 자식들’을 통해 군대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외국 국민자본과의 경쟁이나, 자국의 노동자·민중의 저항으로부터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게 한다.
군대의 본질과 체제의 본질
군대가 극도의 억압과 관료적 상명하복체제를 유지해야 할 필요성은 여기서 비롯한다. 착취와 억압에 기초한 계급 사회에서 군대는 이 체제를 지탱하는 가장 억압적이며 조직된 폭력기구인 것이다. 그래서 군대는 평범한 젊은 남성들을 사회에서 격리시킨 후 억압과 폭력을 가하게 된다.(‘범죄와의 전쟁’을 만든 윤종빈 감독의 2005년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는 이를 놀랄 만큼 생생하게 그려낸다.)
만약, 그런 억압과 폭력·강제가 없다면 평범한 노동자의 자식들이 자신들의 구실에 의문을 품고 소극적으로 임하거나 이탈하기 십상일 것이다. 결국 이런 억압적 구조에 사병들이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누군가는 가혹행위를 하고 누군가는 그 피해자가 되는 것이다. 누군가는 ‘고문관’이 되고, 누군가는 그를 따돌리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런 구조적 억압과 폭력을 견디지 못해 자살하게 되고, 누군가는 다른 동료들에게 총부리를 돌리게 되는 것이다.
최근 5년간 군 내 사망자는 559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자살자는 377명으로 전체 사망자의 67.4%였다. 2010년 이후 발생한 군 총기 사고는 무려 19건이다. 문제는 사람을 ‘갈구고’ 억눌러야지만 유지되는 자본주의 군대의 본질이다.
박근혜 정부와 국방부는 이번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보다는 덮기에 급급한 모습이다. 그래서 희생자 유가족들은 대책위를 구성해서 “실체적 진실이 밝혀지고 책임 있는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유가족들은 “군 당국의 무책임하고 안일한 병영관리를 보면서 임 병장에게도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진실을 밝혀야 할 뿐 아니라,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군대가 낳은 구조적 억압과 폭력을 조금이라도 완화하는 게 필요한 일이다. 실제로 군부독재를 끝낸 ‘민주화’ 이후 군대에서 자살 사고 사망자 수는 어느 정도 줄어든 게 사실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맞물려 민주적 권리에 대한 공격이 늘고 우파 정권이 연달아 집권하면서 후퇴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군내 자살자 수는 2008년 75명, 2010년 82명, 2012년 97명으로 계속 증가하고 있다.
따라서 군비·병력 축소와 군복무기간 단축, 모병제 전환, 사병 처우 개선, 내무반 제도 폐지, 양심적 병역 거부 인정과 대체복무제 도입 등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개혁이 성취되더라도 자본주의 군대의 억압이 뿌리뽑히진 않을 것이다.
트로츠키는 “군대는 사회가 앓고 있는 온갖 질병을 훨씬 고열로 앓고 있다”고 했다. 철저한 계급 체계와 상명하복, 이것은 사실 군대뿐 아니라 이 체제의 본질이다. 따라서 억압적 군대 기구를 없애는 길은 억압적 체제를 변혁하는 길과 맞물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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