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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세상읽기 - 난민 문제/ 한반도/ 지방선거/ 최저임금/ 워커스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8. 6. 24.

전지윤

 


인종주의, 자본주의, 제국주의 모두 종식돼야 한다


 


정상가족 모델이라는 점이 아쉽긴 하지만, 위 그림에서 이민자 가족에게서 아이를 납치해 가는 것이 누군지 알 수 있다. ‘이민자 부모, 자녀 격리수용정책을 펴온 트럼프의 최근 별명은 유괴범’, ‘아동학대자들의 우두머리였다.

 

울부짖으며 생이별하는 이민자 가족의 모습은 미국 민중의 마음을 흔들었고, 거대한 분노와 변화를 불러왔다. 7개주 주지사들은 멕시코 국경에 주방위군 배치 결정을 거부했고, 승무원들은 생이별한 이민자를 실어나르는 비행의 거부를 선언했고, 심지어 트럼프의 가족들까지 이견을 드러냈다. 대규모 항의집회도 예고됐다.

 

그리고 결국 최근 트럼프가 백기를 들며 격리 수용정책을 철회했다. 중요한 승리이자 절반의 승리다. 미등록 이민자를 모두 기소, 구금하는 무관용 정책은 그대로다. ‘무슬림 입국 금지도 폐기시켜야 한다. 더 나아가 모든 벽을 허물고 누구나 어디든 자유롭게 오가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길로 나가야 한다.

 

울부짖는 이민자 가족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느꼈을 것이다. ‘우리는 인종도 피부색도 언어도 다르지만 헤어지면 울고, 맞으면 아프고, 고통받으면 피 흘리는 것은 다 똑같구나.’ 타자도 나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점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남성중심적 가부장 사회에서 많은 여성들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를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것을 비웃고 조롱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나같은 남성일수록 더욱 그렇다.

 

하지만, 지금 선은 여성불안을 이해하지 못하고 난민인권만 우선하는 남성들난민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여성안전만 중시하는 여성들사이에 그어져있지 않다. 수많은 여성과 페미니스트들이 무엇이 더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길인지 고민하며 토론하고 있다. 트럼프도 멕시코 이민자 앞에 벽을 쌓으며 우리에게 범죄와 강간을 가져오는 집단이라고 했었던 것을 기억하자. 우리의 언어와 무기는 달라야 한다.

 

남성 사회는 차별과 폭력이라는 두 가지 무기를 가지고 있다... 사회적 약자는 돈, 권력, 폭력, 제도같은 전통적인 자원이 없다. ‘우리에게 유일한 자원은 새로운 언어와 윤리뿐이다. 이 두 가지를 버릴 때 다시 말해 지배자의 도구를 욕망할 때, 사회운동은 타락하고 붕괴한다.”(정희진, ‘피해자 정체성의 정치와 페미니즘’)

 

그리고 페미니즘의 소중한 문제의식은 반자본주의, 반제국주의의 문제의식과 결코 대립되지 않으며 얼마든지 결합될 수 있다.

 

아무도 지배받지 않는 세상을 상상해보라.... 누구나 타고난 모습 그대로 살 수 있는 세상에서, 평화와 가능성의 세상에서 산다고 상상해보라. 페미니즘 혁명만으로는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없다. 인종차별과 계급 엘리트주의, 제국주의도 함께 종식해야 한다.”(벨 훅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중동의 처참한 상황과 난민 문제

 

얼마전 헬프시리아가 주최한 시리아의 밤에서 들은 이야기들 중에 기억에 남는 몇 가지를 소개한다. IS 때문이라기보다는 IS를 제거하겠다는 연합군의 폭격을 피해서 라카를 떠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IS만이 아니라 IS 척결을 말하는 세력도 문제인데, IS는 여성들에게 히잡을 강제로 씌웠고 세속주의자들은 강제로 벗겼다는 것이다. IS는 남자들에게 수염을 기르라고 강요했고 세속주의자들은 수염을 안 깍으면 잡아가겠다고 했단다.

 

시리아 민중은 국제사회의 도움을 요청해 왔는데, 이제는 국제사회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그래서 이제는 나라마다 다르게, 같은 나라라도 정부와 국민들을 구분해서 호소한다고 한다.

 

이 나라에 온 시리아인들은 1400여명인데 그중 4명만 난민으로 인정받았고, 나머지는 대부분 인도적 체류자격을 줬다는데, 아무런 권리도 보호도 지원도 없는 그런 자격으로 사는 것은 마치 IS 밑에서 사는 것과 비슷하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지금 시리아의 상황은 여전히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채 계속 악화하고 있으니, 한반도의 평화만큼이나 시리아의 평화도 기원해달라고 했다.

 

그 다음주에는 난민영화제에 가서 <라스트 맨 인 알레포>를 봤다. 우박처럼 쏟아지는 통폭탄과 가루가 된 건물들, 흙무더기 속에서 죽은 아이들과 갈가리 찢겨진 시신 조각을 꺼내는 장면이 2시간 내내 이어졌다. 7년간 시리아 전쟁의 끔찍한 현장. 영화 속 인물들은 끝없이 신보다 강한 것은 없다’, ‘신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고 되뇌었다.

 

나라도 그럴 거 같았다. 저런 상황에서 그런 믿음과 희망마저 없다면 단 1초도 살 수 없을 거 같았다. 영화가 끝나고 GV에서 압둘 와합 헬프시리아 사무국장은 이슬람이 폭력적이고 여성차별적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한국 사람들은 미디어 특히 서방 미디어를 너무 믿는 거 같다. 무슬림이 다 나쁘다는 건 비무슬림은 다 틀렸다는 IS처럼 단순한 논리다. 한국에서 성폭력을 저질러 온 것은 아랍인이 아니라 한국남성들이지 않나?’

 

트럼프의 무슬림 입국금지가 악독한 인종주의이듯이, 지금 예멘 난민을 거부하자는 주장도 틀린 것이다. 트럼프는 무슬림이 아니지만 누구보다 성차별, 성폭력적이다. 아랍인과 무슬림은 결코 서방 미디어가 묘사하듯이 악마가 아니다.

 

물론 그들은 천사도 아니고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다. 성차별적인 편견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지영은 이번에 김부선을 방어하면서 길거리에서 깡패에게 맞고있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인성이나 과거를 확인해서 막아주냐고 했다.

 

이 세상에서 여성들이 느끼는 불안감을 이해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것이 성차별과 성폭력을 방지하는 법과 제도에 대한 요구가 아니라 난민 거부로 나갈 이유는 하나도 없다. 이것은 여성주의와 자매애로서도 용납될 수 없다. 강대국들이 지옥으로 만든 중동을 떠나온 난민들에게 벽을 쌓을수록, 그 안에서 여성들은 더욱 더 남성에게 종속되면서 더 많은 성폭력과 착취에 내몰려 왔다.

 

여성의 권리를 나중으로 돌렸던 사회와 맞서 싸우다가, 이제 난민의 권리를 나중으로 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의 분노와 요구는 또다른 약자가 아니라, 약자끼리 서로 미워하고 싸우도록 만드는 시스템과 거기서 이득을 챙기는 집단들에게 돌아가야 한다.

 

 

북미정상회담과 지방선거 평가

 

북미정상회담 합의문에서 빠졌다던 CVID는 하루 뒤 지방선거 결과에 담겼다. 색깔론과 지역주의에 기반해 온 친미냉전우파의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몰락이다. 역시 2017년 촛불은 한국 사회를 뒤흔든 대지진이었고 그 여진은 계속되고 있다.

 

센토사 합의에 대한 냉전우파의 반응에서 이미 선거 결과는 점쳐지고 있었다. 트럼프마저 비난하면서 평화와 화해를 저주하는 이들의 태도는 어떤 공감도 얻기 어려웠다. 아마 많은 사람들은 트럼프를 만난 김정은의 첫마디에 더 공감했을 것이다. “여기까지 오는 길이 그리 쉬운 길은 아니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이겨내고 이 자리까지 왔다.” 분단, 전쟁, 냉전, 독재, 대결,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그 자리를 만들어낸 한반도의 민중들에게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트럼프도 칭찬받아야 하는가? 트럼프는 단지 핵이 있어야만, 나아가 그걸 미본토로 날릴 미사일을 가져야만 상대를 존중하는 제국주의의 생리를 입증했을 뿐이다. 물론 존 볼턴보다 더한 매파가 돼서 트럼프를 비난하는 미국 민주당도 웃기는 집단이다. 이들은 트럼프가 북한 악마화라는 동아시아 패권전략의 뼈대를 흔든다고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언제나 모든 건 변하고, 변화는 분열과 논쟁을 불렀다. 민주당 자신도 3년전에 악마카스트로와 손잡은 적이 있고, ‘악의 축이란과도 합의한 적 있다.

 

그때 오바마를 움직였던, 지금 트럼프를 움직이는 것도 방향은 같다. 중국이 유라시아 대륙을 통제하는 사태가 오지않게 동맹을 재구성하고 힘을 집중한다는 것이다. 물론 중국 일대일로에 대응해 오바마가 추진하던 TPP를 취임 즉시 파기하고, 대서양 동맹이 무너지든 말든 무역전쟁을 하려는 트럼프는 분명 미국의 전통적 패권전략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트럼프의 계산도 분명하다. 보호무역주의로 미국의 경제적 쇠퇴를 막고, 오바마가 눈감아준 사이에 힘을 키우며 러시아와 손잡은 이란을 손보겠단 것이다. 세계 교역량의 30%, 중국 수출량의 90%가 지나는 남중국해에서 중국을 확실히 봉쇄하려는 것이다. 이런 아메리카 퍼스트에 도움이 된다면 북한과도 손잡겠다며, 폼페이오는 김정은에게 전략적 결단을 촉구했다.

 

이런 전체 구도를 빼놓고 단지 북한의 핵과 미사일, 문재인의 중재노력, 김정은의 협상기술, 남북공조 등으로만 설명하고 낙관할 순 없다. 미래는 트럼프가 김정은에게 보여준 5분짜리 영화의 기회의 문이 활짝 열린 번영의 세계같지 않을 것이다. 지금 북한 민중은 신자유주의적 시초축적 초기단계의 문 앞에 서 있는 것일지 모른다.

 

3년전에 이란 민중이 미국과 핵합의에 안도하며 한반도의 불안정을 걱정해 줬다면, 이제는 우리가 중동의 불안정을 내일처럼 걱정해줄 차례다. 중국과 손잡고 미국 패권을 위협한다면 북한은 언제든 다시 악마가 돼 '선제공격과 참수작전'에 직면할 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중동과 동아시아가 번갈아 위험에 빠지는 이 구조를 어떻게 없앨지 고민할 시간이다.

 

한미동맹, 색깔론, 지역주의에 의존해 온 우파의 위기와 대혼돈이 계속되는 지금이 기회다. 우파는 머지않아 경제적 불만을 기반삼아 소수자 혐오를 무기로 젊은층을 파고드는 새롭고 더 위험한 세력으로 재편될 수 있다.

 

문정부와 민주당은 여기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어렵다. 우파 철새들을 대거 흡수하고 중년남성들로 가득채운 민주당의 이번 공천은 사실 엉망이었다. 김부선, 공지영 씨를 '마약한 허언증 관심종자''결혼 몇번한 이상한 여자'로 모는 이재명쪽의 대응도 경악스러웠다. 하지만 진보진영과 노동운동은 아직 분명한 대안을 만들지 못했다.

 

민주당이 집권여당이 돼서 야권연대도 사라진 이번 선거에서 드러난 진보정당들의 실력은 매우 아쉽다. 진보에 대한 열망은 경남노동벨트에서마저 민주당으로 흡수됐다. 10% 가까운 정의당의 정당득표는 다행이지만, 나머지 진보정당들의 아쉬운 성적과 연결돼 진보의 협력이 더욱 어려워질까 우려된다. 울산에서는 갈등과 불신은 그대로인 상황에서 형식적 단일화의 한계도 드러났다. 그나마 신지예 후보 등이 보여 준 가능성에서 희망을 찾아야 할까?

 

촛불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더욱 더 성찰적이고 협력적이고 열린 자세로, 혐오에 반대하고 소수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그것을 반자본주의 반제국주의의 과제와 연결할 수 있는 새로운 진보와 좌파의 등장을 기대한다.

 

최저임금 개악 등이 보여주는 미래의 위험

 

얼마전 정부 발표를 보면 지난해 최저임금 인상이 저임금 노동자들의 임금을 끌어올렸다는 것이 통계적으로 입증된다. 종업원 고용 자영업이 더 늘었다는 통계는 인건비 부담으로 자영업이 무너진다는 것도 엄살이었음을 보여 준다.

 

물론 소득격차가 늘고, 하위계층의 소득이 줄었다는 통계도 나왔다. 이것은 사회적 보호 밖의 사각지대와 취약계층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지불능력이 취약한 영세업체에 있거나, 법과 노조 보호 밖의 고령빈곤층이나 실직자일 것이다. 새정부의 경제정책을 무력화하기 위한 대자본들의 의도적 투자나 고용 회피, 약자에게 부담 전가 등도 작용할 것이다.

 

이 상황에서 필요한 대책은 무엇인가. 더 많은 노동자들을 법과 노조의 보호 아래 들여놓고, 기초연금와 사회복지를 늘리고, 부양의무제를 없애 고령빈곤층과 실직자들을 지원해야 한다. 중소업체와 영세자영업에 대한 인건비 보조를 체계화하고, 저임금 의존 산업구조의 장기적 전환을 추진해야 한다. 정부정책을 현장에서 무력화하며, 약자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대자본에 대한 강한 통제도 시도해야 한다.

 

그런데 문정부는 자본이 아니라, 거꾸로 노동을 통제하며 최저임금 인상 효과를 뒤엎기 시작했다. 뭐라 변명하고 복잡하게 설명해도 재벌과 우파야당, 적폐언론의 반발에 밀려 타협, 후퇴한 것이 명백하다.

 

최저임금 인상 효과가 저임금 노동자에게 제대로 돌아가게 하겠다면서, 저임금 미조직이나 이주노동자들에게 가장 타격이 클 조치를 내놨다. 기형적 임금체계를 바로잡겠다면서, 낮은 기본급을 유지해도 되는 대책을 내놨다. 가장 큰 모순은 기업의 부담을 줄이려 한다면서 노동자들에게 피해는 없을 거라는 논리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모를 수 없는데 한사코 스스로를 속이며 진실을 외면하고 있다.

 

물론 최저임금 인상의 혜택이 고임금 노동자들에게 가는 게 문제라고 느낄 순 있다. 그렇다면, 기업주들이 기본급을 높이고, 노동시간을 줄이는 식으로 적응하도록 유도하면 됐다. 하지만 이번 개악으로 그러지 않아도 될 길만 열어줬다. 계산만 복잡해져 노무사 도움얻을 기회도 없는 저임금 미조직 노동자들에게 더 불리해졌다.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합의하는 과정은 전혀 없었던 반면, 재벌과 우파야당, 적폐언론의 목소리를 듣고 합의하는 과정만 있었다. ‘노동존중, 소득주도등의 방향에 저항해온 김동연 등 경제관료들의 입김만 더 커졌다. 이쯤되면 참여정부의 실패에서 무엇을 배웠다는 건지, 궁금해진다. 재벌, 우파들의 압력에 밀려 후퇴하면서 지지층이 실망하고, 지지기반이 약화한 것을 기회삼아 우파는 정권을 무너뜨리려하고, 하지만 정권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들은 이미 희미해져 있고... 그때가서 누굴 탓하려는가.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미래의 위험성은 우파 정당과 후보들의 혐오발언으로 드러났다. 소수자에 대한, 세월호 피해자들에 대한, 전교조에 대한 온갖 혐오 발언들을 쏟아내는 우익정당과 후보들이 가장 문제지만 선관위의 직무유기나 민주당의 방조도 문제였다. 혐오는 전염성이 있어서 의식적으로 선을 긋고 막지 않으면 쉽게 번져가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라고 적힌 벽보가 여기저기서 찢겨나가고, 시건방진 표정이라는 반감이 좌우를 넘어서 번져간 것을 돌아보자.

 

이것은 최저임금 줬다뺐기와 무관한 문제가 아니다. 참여정부 때도 왼쪽 깜박이를 켜놓고 정작 비정규직과 빈부격차를 늘리는 정책이 이어졌고, 우익은 그것을 이용해 악선동하며 기층에서 불만과 혐오를 조직했다. 정부와 집권당은 그것을 수수방관하거나 타협했고, 그 과정에서 노사모에서 뉴라이트로 변신하는 변희재 등이 나타났다.

 

지금도 우익은 최저임금 인상이 일자리를 줄이고 빈곤층을 늘렸다고 악선동하며 사람들의 불만을 또다른 약자와 노조에 대한 혐오로 돌리려 애쓰고 있다. 이런 흐름의 위험성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노동운동이 이런 후퇴를 막아선 것은 당연하다. 중요한 건 지금부터다. 노동운동의 반대와 비판이 저임금 노동자, 최저임금도 못받는 실직자와 청년들, 고령빈곤층, 벼랑 끝의 영세자영업자들을 위한 것이었음을 일관된 행동으로 입증하면서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야 할 순간이다.

 

법과 정의는 도덕감정과 눈물에 기반해야 한다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 앞부분을 잠깐 보면서 박판사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재판정에서 억울함과 상처를 보고 계속 눈물 훔치며 공감하는 모습 때문이었다. 이 사회와 법체계에서 그런 모습은 보통 중립적’, ‘합리적이지 않고, ‘감정적이라고 비판받는다. 양쪽 모두와 거리를 두면서 치우치지 않고, 분명한 증거가 없다면 냉정하게 판단하는 게 법의 공정성이라고들 말한다. 드라마 속에서 박판사 주변 사람들도 다 그렇게 충고한다. 과연 그런가. 고통과 피해 앞에 감정을 억누르며 냉정하게 판단하는 재판관, 가장 극단적 모습은 양승태가 아닐까. ‘법에도 감정과 눈물이 있어야 한다’? 아니다. ‘법에는 반드시 감정과 눈물이 있어야 한다는 게 재판거래 사태를 보며 드는 생각이다. 법철학자 너스바움의 지적에 깊이 공감간다.

 

감정에 호소하지 않는 법은 사실상 생각할 수 없다.... 우리가 감정을 고려하지 않으면 우리의 많은 법률적 실천의 이론적 근거를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어떠한 침해가 포악한지, 어떤 상실이 인간에게 큰 슬픔을 주는지, 인간이 지닌 어떤 취약성이 두려움의 근거가 되는지에 대한 공유된 인식이 없다면, 왜 우리가 법에서 특정한 형태의 위해와 손상에 주목해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이 세상과 우리를 연관시켜 주는 감정적 반응을 도외시한다면, 우리는 인간성의 상당 부분을 놓치게 될 것이다. 또한 민법과 형법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떤 형태를 띠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의 핵심 부분도 사라지게 된다...

감정에 북받쳐 죄를 저지른 사람의 범죄 책임을 줄여줄 수 있는 것은 바로 특정한 범죄 행위의 경우 [가해자의] 분노가 타당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는 특정한 감정적 요소와 감정 속에 담긴 타당성의 규범이 지니는 상당한 규범적 역할을 포함하지 않는 법체계를 사실상 생각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

- 마사 너스바움 <혐오와 수치심>

 

<워커스>에 대한 공격은 중단돼야 한다

 

노동자연대 분들이 또 <워커스>분들을 공격했다.성폭력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돼 준 <워커스>의 입을 언론중재위의 힘으로 막으려 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게 아니라, 반복해서 압박하는 것이다.(https://wspaper.org/article/20554)


이걸 지켜보는 사람들은 함부로 나섰다가는 우리도 <워커스>처럼 계속 괴롭힐테니 조심해야 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지 모른다. 하지만, 이 문제에 책임있던 사람으로서, <워커스>의 보도에 고마움을 느끼던 피해자의 동료로서 나는 침묵할 수가 없다. 저 분들이 또 어떤 가슴아픈 말들로 나를 비난할지 걱정되지만 말이다.


이것이 노동자연대와 관계 없는 사건이라고? 2012년 처음 공론화 당시에 전회원과 현회원이 피해자와 가해지목인이었고, 공론화 즉시 운영위원(학생팀장)과 회원들이 댓글로 피해자를 공격하면서 문제가 커졌는데, 그후 7년 동안 조직의 기관지와 정식출판물을 통해 피해자를 공격해 왔는데 어떻게 무관한가? 그렇다면 왜, 피해자를 거짓말쟁이, 자살하려한 사람, ‘인격장애라고 비난하고 사생활과 연애관계까지 아웃시켰던 것인가?


노동자연대는 피해자에게 소송을 통한 2차 가해를 하지 않았다? 단체가 직접 피해자를 고소한 적은 당연히 없고, 가해지목인에게 고소하게 했다. 이것은 이미, 2014년말에 공개된 노동자연대 내부문건을 통해 밝혀진 사실이다. 그 문건에는 노동자연대가 명예훼손 소송을 권하고, 중간에 보고받고, 코치했다는 것이 나와있다.


무엇보다 이 사실은 2013년까지 노동자연대 운영위원이었던 내가 분명히 알고 있다. 당시 누가 소송을 주장하고 변호사를 주선하고 했는지 등을. 다른 운영위원들도 이것을 기억 못할 리가 없다. 내가 이런 사실들을 더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끄집어내야만 하는가?


사실을 왜곡하면 안 된다? “중요한 요소를 빠뜨리지 않아야 온전한 진실이 될 수 있다? 지금 <워커스>분들에게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니다. 함께 반성하고 사과하자고 제발 거듭 부탁한다. 피해자와 연대자들에 대한 공격을 그만둬야 한다. 누구든 잘못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 잡는 것이다. 반성과 사과가 더 빨리 이뤄질 수 있도록 더욱 더 많은 분들이 피해자를 돕기 위한 연서명에 동참해 주시길 거듭 부탁드린다.

 

연서명 링크:  https://goo.gl/BEapde 



(기사 등록 2018.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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