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수경
[이 글의 필자인 남수경은 미국 뉴욕에서 도시빈민, 이주민, 여성, 성소수자 등을 대변하는 공익인권변호사로 일하고 있으며, 법률서비스노동조합(Legal Services Staff Association UAW/NOLSW)의 조합원이다. 처음에 실렸던 글(http://socialist.kr/the-victory-of-west-varginia-teachers-strike/?ckattempt=1)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필자와<사회주의자>에 감사드린다.]
<메이트완(Matewan)>이라는 영화가 있다. 1920년대 초 웨스트버지니아의 ‘메이트완’이라는 탄광촌에서 광산 노동자들이 노조 결성을 위해 피 흘리며 싸운 투쟁을 다룬 영화다. 영화에서 보여주듯이 웨스트버지니아의 광부들은 미국 노동 운동사에서 길이 남을 전투적인 투쟁을 벌였다.
거의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 우리는 다시 웨스트버지니아에서 엄청난 노동자 투쟁이 벌어지는 것을 보았다. 이번에는 광부가 아닌 교사들이 그 주역이다. 3월 6일 주 의회가 교사와 모든 주 공무원들의 임금을 5% 인상하는 안을 통과 시키면서 웨스트버지니아 뿐 아니라 미국 전역을 흔들었던 전면파업이 승리를 거두었다.
파업권이 없는 공립학교 교사들이 트럼프 지지기반으로 여겨진 ‘러스트 벨트(rust belt: 쇠락한 공업지대)’ 한복판에서 거둔 이 소중한 승리는 미국에서 여전히 전투적인 노동운동이 가능하고 단결된 노동자들의 저항이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웨스트버지니아 주 공립학교 교사 임금은 미국 50개 주에서 47위로 최하위 수준이다. 미국 전체 평균보다 약 22퍼센트가 낮다. 2014년 이후 교사 임금은 동결되었다. 그러다 올해 초 주정부는 향후 5년 동안 매년 1%씩 임금을 올리겠다고 했다. 동시에 노동자들이 부담하는 의료보험금이 대폭 인상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웨스트버지니아 주 공공부문 노동자들은 ‘PEIA(Public Employees Insurance Agency)’가 관리하는 의료보험 혜택을 받고 있는데, 주정부는 PEIA 예산 삭감과 치솟는 의료비용으로 인해 앞으로 노동자들이 부담하는 보험료가 두 배 이상 오를 것이라고 예고했다. 노동자들이 1% 인상으로 늘어나는 임금보다 더 많은 돈을 의료보험료로 내야 한다는 것은 실질 임금 삭감을 의미한다.
이에 항의해 공립학교 교사와 교직원들이 2월 22일부터 전면파업에 돌입했다. 주 전체 55개 카운티의 모든 학군이 참여한 파업으로 웨스트버지니아 주 680개의 공립학교가 휴교를 했다. 처음 파업을 시작했을 때는 이틀 동안 진행될 것으로 예상됐지만,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교사들의 결단으로 주 역사상 가장 긴 파업으로 이어졌다.
‘파업이 불법일 수 있는데 두렵지 않냐’는 질문에 한 교사는 “뭐, 설마 2만 명의 교사들을 다 해고하겠어요? 해고 되어도 더 이상 잃을게 없어요. 지금 당장 다 잃고 있는데요”라는 말로 파업 교사들의 분위기를 전해 주었다.
파업 노동자들은 의료보험료 인상 부담을 노동자에게 전가하지 말고 대신 석유·가스 회사의 세금을 올려서 충당할 것을 요구했다. 웨스트버지니아는 에너지 산업에 엄청난 세금 감면 혜택을 주는데, 그 결과 연간 세수가 4억 2천5백만 달러 이상 줄어들어 공교육을 포함한 공공서비스 예산이 계속 삭감되어 왔다. 따라서 파업은 그동안 진행되어온 긴축정책에 대한 항의이기도 했다.
플로리다 고등학교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나 수많은 사상자를 내자, 트럼프는 교사들에게도 총을 지급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웨스트버지니아의 파업은 교육 현장에서 필요한 것은 ‘총’이 아닌 ‘공교육에 대한 투자’라는 걸 잘 보여 주었다. 파업 교사들은 “기꺼이 아이들 대신에 총알을 받아낼 것이다. 하지만 그러다가 부상을 입어도 우리가 가진 의료보험으로는 커버가 안 된다”며 일격을 가했다.
파업에 참여한 한 교사는 정부의 예산 삭감으로 부족해진 교재나 수업 비품을 구매하는데 일 년에 보통 1,000 달러에서 1,500 달러를 사비로 지출하고 있다고 말했다. 낮은 임금 때문에 많은 교사들이 타 주로 떠나서 교사가 제대로 충원되지 않고, 그 결과는 과밀학급과 교육의 질 저하로 이어졌다. 따라서 교사 파업은 위기에 빠진 공교육과 다음 세대에 대한 사회적 투자를 요구하는 사회정의 운동이기도 했다.
평조합원들의 잠재적 힘을 보여준 파업
지난 2월 27일 저녁, 주지사 짐 저스티스와 노조지도부는 기자회견을 열어 타결안에 합의 했다고 발표했다. 교사 임금은 5% 그리고 다른 공무원의 임금은 3% 인상을 약속했다. 노동자들이 부담할 의료보험료 인상을 임시 동결하고 앞으로 문제 해결을 위한 위원회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타협 소식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언론은 마침내 파업이 끝났다고 선언했고, 각 카운티의 학군은 학부모들에게 이틀 후 부터 정상적으로 수업이 재개될 것이라는 이메일을 보냈다. 소식을 들은 파업 노동자들은 처음에는 승리했다고 기뻐했다. 그러나 지도부로부터 타협안의 자세한 내용을 듣고는 곧 실망과 분노가 터져 나왔다. 타협안이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웨스트버지니아 주법 하에서 교사노조는 단체교섭권을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주지사와 노조 사이의 타결안은 주 의회를 통과하기 전에는 법적 효력이 없다. 교사들은 파업이 끝난 후에 공화당이 다수인 주 의회가 알아서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줄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한 교사의 말처럼, (정부는) “오랫동안 이런저런 약속을 해왔지만, 한 번도 약속이 실현된 적은 없었다.”
주지사의 말 외에 실제로 임금인상안이 주 의회를 통과할 것이라는 보장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의료보험료를 일시적으로 동결 하겠다는 약속에 대해서도 교사들은 ‘동결은 해결이 아니다’라고 외쳤다. 의회를 압박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노동자들의 단결된 힘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걸 평조합원들은 그동안의 경험 속에서 배웠다.
파업 지속 여부를 묻는 투표가 실시되었고, 평조합원들은 이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며 파업을 무기한 이어가기로 결정했다. 교사들은 이제 그만 학교로 돌아가라는 노조지도부의 지시를 무시하고 ‘와일드캣 파업(wildcat strike)’에 들어갔다. 단 한 학교의 이탈도 없었다. 임금인상이 현실화 되고 의료보험에 대해서도 임시 조치가 아닌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해결방안을 마련할 것을 요구하며 파업은 계속 되었다.
파업 교사들의 예상은 맞았다. 주지사의 타협안이 나온 뒤에도 주 의회는 임금인상안 통과에 미적거렸다. 집행할 예산이 부족하다는 핑계였다. 그러자 주의회 의사당에 집결해 항의를 계속하던 노동자들 사이에서 의사당을 점거하자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2011년 공무원 노조의 단체교섭권을 제한하는 반노조 법안에 반대해 주의회 의사당을 점거했던 위스콘신 주의 노동자들처럼 말이다. 매일 매일 파업 노동자들과 지지자들은 이른 아침부터 주의회 의사당을 가득 메우고 항의시위를 벌였다. 학생들도 파업에 지지를 보내며 피켓시위에 동참했다. 미 전역에서 웨스트버지니아 파업을 지지하는 연대의 메시지와 행동이 점점 확대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나는 항의와 압력에 직면해 결국 주 상하원은 파업 노동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3월 6일 주 의회는 교사 뿐 아니라 전체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임금을 모두 5퍼센트 인상하는 안을 통과 시켰다. 파업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도 같이 쟁취한 것이다. 의료보험 개선을 위한 태스크 포스도 이달 13일까지 구성 하겠다고 약속했다. 소식을 들은 노동자들은 기쁨에 겨워 일제히 구호를 외쳤다. “우리가 역사를 만들었다!”
파업이 승리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노동자들이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며 단호히 맞서 싸운데 있다. 수천 명의 파업 노동자들과 지지자들이 하루도 빠짐없이 주의회 의사당에 모여 피켓시위를 벌였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의사당이 있는 주도 찰스톤으로 몰려서 교통이 정체될 지경이었다. 각 지역 학교에서도 매일 피켓라인이 형성 되었다.
또한 지도부에 의존하지 않고 평조합원들이 주체가 되어 건설한 풀뿌리 운동이 파업을 승리로 이끈 결정적인 힘이 되었다. 노조 지도부가 주지사와 타협하고 조합원들에게 학교로 돌아가라고 명령 했지만 노동자들은 요구조건이 관철될 때까지 물러서지 않았다. 한 노조 대변인의 말처럼 노조 지도부조차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파업에 대한 지지와 연대는 시간이 갈수록 뜨거워졌다. ‘교사의 노동조건은 곧 학생들의 교육환경’이라며 학생들과 학부모들도 교사 파업을 지지했다. 광부노조 등 다른 노조들도 교사 파업에 지지를 보내면서 피켓라인에 힘을 보태주었다. 미국 전역에서 파업을 응원하는 메시지와 지지기금이 쏟아졌다. 주의회 의사당에 모인 교사들의 식사로 피자를 배달해주는 기금도 조직되었다. 이런 연대와 지지 속에 파업 교사들에게 우호적인 여론이 형성된 것을 의식한 교육감들은 휴교령을 내리기로 결정했다. 법적으로 불법파업이 되는 것을 막아 파업 교사들이 형사처벌 받는 것을 막아 준 것이다.
파업 노동자들은 모두가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미국의 진보신문인 <사회주의노동자>와의 인터뷰에서 한 노동자가 한 다음의 말은 지지와 연대 속에 파업이 어떻게 확대되고 발전했는지 보여준다.
“처음에는 풀뿌리 운동처럼 시작되었다. 파업을 할 수 있는 교사들과 교직원들이 나서서 우리가 직면한 의료보험과 임금 그리고 기타 법안의 문제점들에 대해 관심을 끌어냈다. 이제 파업은 그 이상을 넘어섰다. 켄터키 주에서도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펜실베니아 주도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전국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진행되는 일을 주목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파업을 제대로 계속 진행해 나가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미국의 노동계급이 우경화 되었다고?
웨스트버지니아는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주 중의 하나이다. 또한 노조 가입 의무와 노조비 원천징수를 허용하지 않는 반노조법인 소위 ‘노동권(right-to-work)법’이 실행되는 주이다. 정치적으로는 ‘레드 스테이트(red state)’, 즉 선거에서 공화당이 우세한 주로 분류된다. 현 주지사는 공화당 소속이고, 주 상하원 모두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다. 지난 대선에서는 트럼프가 68.6%를 득표해 전국에서 가장 높은 트럼프 지지율을 보여주었다.
주류 언론과 자유주의자들은 예상치 못한 트럼프의 승리를 러스트 벨트처럼 낙후된 지역의 우경화된 백인노동자들 탓으로 돌렸다. 하지만 실제 투표 결과를 들여다보면 이는 사실이 아니다. 트럼프에게 표를 준 유권자 중 대학 졸업장이 없는 저소득 백인노동자들은 25%에 불과하고, 대다수 트럼프 지지자들은 소득이 높은 중산층 이상이다.
선거가 끝난 지 7개월이 지난 후 <워싱턴 포스트>지가 “신화를 깨야 할 때: 트럼프 지지자의 대부분은 노동계급이 아니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지만, 여전히 ‘교육수준 낮은 백인노동자=트럼프 지지자’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다. 이번 파업은 자유주의자들이 경멸적으로 낙인찍은 이 고정관념이 역동적인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않음을 다시 확인해 주었다.
웨스트버지니아처럼 전통적으로 민주당 지지기반 이었던 러스트 벨트 지역 노동자들이 민주당에게 등을 돌린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노동계급이 우경화 되어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정책 하에 기업의 이윤만을 보호하고 노동자의 임금과 생활수준을 공격해 온 민주당 탓이다. 예를 들면, 웨스트버지니아에서도 엄청난 기업세 감면으로 공공부문 예산을 대폭 삭감한 것은 10년 전 민주당 소속 주지사 하에서 일어난 일이다. 희망을 걸었던 오바마 정부 하에서도 노동자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고, 그 결과 민주당을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은 투표장에 나가지 않았다.
글 초반에 쓴 것처럼 웨스트버지니아 노동자들에게는 빛나는 투쟁의 전통이 있다. 교사들은 파업 기간 내내 자신들이 오래 전에 시작된 그 투쟁의 전통을 다시 이어가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밝혔다. 웨스트버지니아의 투쟁은 미국의 계급투쟁이 역동적이라는 것과 새로운 노동운동의 재점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지금 현재 오클라호마 주의 교사 4만 명이 파업에 들어갈 것을 예고하고 있다. 오클라호마 주도 웨스트버지니아처럼 교사 임금이 전국 최하위이고, 교사 파업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지난 대선에서 트럼프가 65% 이상 득표한 곳이기도 하다.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은 켄터키 주와 애리조나 주에서도 교사 파업이 일어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웨스트버지니아에서 시작된 투쟁의 들불은 지금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다.
(기사 등록 2018.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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