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미래
“사랑이 혐오를 이긴다”는 슬로건은 모범적인 동시에 한계적이고, 운동이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두 면을 모두 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혐오는 반정립이 아니라 정립이다.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는 그냥 무분별한 증오가 아니라 차별적 배제적 신념의 표현이며 그 핵심은 '성은 더럽고 함부로 해서는 안 되며 정결하고 애정이 깃든 것이어야 한다'는 관념이다. 맞든 틀리든 그것은 단순히 소극적, 부정적인(negative)인 거부가 아니고 오히려 적극적, 긍정적인 (positive) 가치의 단언이다. 거기에 대해 '남이사 뭘 하든!'으로 응대해봤자 더더욱 윤리도덕 상실한 것처럼 보일 뿐이고, 호모포비아들의 세계관을 재확인시켜줄 따름이다.
'이것은 사랑이다'라며 동성애의 의미를 전환해버리는 것만큼 효과적인 반박은 그런 면에서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는 사랑은 세상에서 제일 깨끗하고 고귀하다는(혹은 그래야 한다는) 믿음과 통하기 때문에. 나는 호모포비아들의 선전이 에이즈와 성적 문란성에 집착하는 것은 역으로 자신들이 지금 적대하는 것이 음란하고 역겨운 죄상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논박이 가장 상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세계관에 따르면 가장 적대해서는 안 될 것을 적대하는 거니까.
그리고 배제와 포섭도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더러운 게 아니라 고귀한 거다'라는 반박은 일단 '더러운 것은 문제'라는 전제를 건드리지 않고, 그래서 결혼이나 결혼에 준하는 일대일 파트너십을 맺는 동성애자들은 혐오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몰라도 원나잇스탠드를 예사로 하는 성소수자나 에이로맨틱 등 실제로 '문란'하거나 '사랑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혐오는 여전히 남게 되니까.
그것이 재생산하는 (여성이나 트랜스젠더, 혹은 남성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남성들에게 한정된) 순결주의도 여전하게 위력을 발휘할 수 있고, 따라서 여성들이 충분한 성적 지식을 가지고 남성 파트너와의 관계에서 자기 주장을 하는 것을 가로막고 성 경험이 있는 여성에 대한 혐오, 멸시를 정당화하는 사회적 억압 구조도 여전히 남는다. 퀴어 정치와 여성 해방의 핵심적인 연결고리가 끊어지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렇다고 '남이사 뭘 하든'이 좋은 대안이라 보지는 않는다. 혐오는 사실 이성보다 감정의 문제인데 이런 반박은 감정적 설득력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물론 기본적 자유의 원리를 확실히 하는 것은 중요하고, 그래서 이것 역시 중요한 논거이자 요구로 여전히 남아있어야 한다고 보지만, 그것만으로 효과가 있을지는, 글쎄.
게다가 이 슬로건은 근본적으로 사적 관계를 가치로 재단하지 말라는 언명인 점에서 공사 분리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수용할 뿐만 아니라 모든 가치를 거부하고 끝없이 유희할 자유만을 긍정하는 신자유주의 소비사회의 논리를 그대로 반영하고 재생산한다.
섹스나 이끌림, 파트너십에 '사랑'으로 표상되는 어떤 관계적, 정신적 가치가 있어야 한다는 믿음, 인간의 몸은 순간순간의 쾌락을 즐기기 위한 놀이터로만 존재할 수 없고 철학적, 실존적, 사회적 가치와 분리할 수 없이 얽혀있다는 인식이야말로 성적 자유에 관한 나이브한 긍정보다 훨씬 더 현실에 가까운 것이다. 이것은 '꼴리는 대로'보다 훨씬 보편적인 질서와 문법을 요청할 수밖에 없으며, 성해방의 이상이 그 요청에 답하지 않으면 종교와 성적 보수주의가 그 자리를 잡아먹게 된다.
사랑이 규범이 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범위를 넓히고 사랑의 의미를 다변화하는 것, 다시 말해 정상가족 정상연애 이외의 다양한 관계들 속에도 그 나름의 애정, 기쁨, 충만함, 동반, 성장, 신뢰 같은 가치들이 깃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이 배제성을 극복하는 올바르고 효과적인 길이 아닐까. 심지어 소극적 자유, 다시 말해 왜 다른 사람의 성생활을 함부로 판단하고 혐오해서는 안되며 개인의 자유를 존중해야 하는지도 이런 맥락에서 훨씬 정확하고도 설득력 있게 논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런 관계들은, 사랑이라는 말로 부를 수 있는 어떤 보편적이고 공통적인 가치를 분명히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형태와 내용 면에서 천차만별 다양하고, 그 다양한 길들 중에서 어떤 것을 택하거나 만들어갈 것인지는 결코 일반적인 정답이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최선인지, 지향할 만한지는 각자의 성격과 가치관, 상황에 따라 달라지며 그것을 가장 잘 알고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당사자 자신이라는 사실은 관계와 가치의 연결을 포기하거나 모든 선택이 동등하게 가치있다는 '절대적 상대주의'로 빠지지 않고도 충분히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다. 이것은 곧 소극적 자유나 쾌락주의보다 훨씬 적극적인 내용을 가지고 순결주의 타파와 성 해방을 밀고 나갈 수 있는 기반이기도 할 것이다.
(기사 등록 2017.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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