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미래
박유하 교수가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발굴했으며 사람들이 이것을 외면하고 있다는 언설을, 다름아닌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을 수용한 사람들이 하는 것은 비유할 사례를 찾기도 어려울 만큼의 역설이다. 사물의 의미는 사물 자체로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해석에 의해 부여되는 것이고, 따라서 본질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며, 현재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에 맞게 계속 재해석 재규정되고 협상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야말로 포스트모더니즘 인식론의 가장 강력한 합리적 핵심이다.
신자유주의자, 문화적 보수주의자, 국가주의자, 저항적 민족주의자, 국제사회주의자, 여성주의자가 본 '위안부' 문제의 본질은 다 다를 수밖에 없고 이것은 사람들이 제 욕망을 위해 현실을 왜곡할 때뿐만이 아니라 오로지 사실만을 채택하며 가능한한 많은 사실을 살펴보고 반론을 고려한다는 인식의 지침을 충실하게 따를 때에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역사 해석은 본디가 투쟁의 장이며, 언제나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본질이냐 정치적 이용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의 관점에서, 어떠한 맥락에서 무엇을 본질적이라 규정하느냐인 것이다.
나 자신에게 '위안부' 문제의 본질은 <군국주의는 평시의 감성으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여성에 대한 폭력과 인도적 참사를 낳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군국주의가 우세하지 않은 평시에 여성에 대한 폭력이 없다거나, 정상가족이나 성매매 성폭력 등에서 드러나는 여성에 대한 상시적인 폭력과 착취가 인도적으로 허용될 만하다는 이야기가 전혀 아니다. 다만 그러한 이유에서 폭력의 질적, 양적 특수성을 죄다 지워버리고 그럼으로써 초역사적인 실체로 규정된 '가부장제'로 문제를 환원시키는 데 반대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무엇보다도 피해당사자들에 대해서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나이든 자매들은 우리가 시혜를 베풀어 이해하고 해석해줘야 할 텍스트가 아니라 거대하고 극단적인 폭력의 증인이고, 이들이 말을 하는 것은 어떻게든 민족에 포섭되고 민족주의의 문법에 부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역사적 부정의를 바로잡고 그것이 반복되지 않도록 세계를 바꾸기 위해서이다. 현실은 그러한 변화를 거부하고 때로는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기에 이 발화는 그 자체로 투쟁일 수밖에 없어 왔다.
그것이 당사자들에게 부과하는 무게가 과하게 느껴진다면 그 현실적 조건을 바꾸어야지 그녀들이 그렇게 싸워 쟁취해낸 주체성을 탈각하고 '늘 있던 성매매와의 경계선이 희박하다'는 식으로 그녀들의 경험을 희석해서는 안된다. 어떤 맥락에서 그것을 수용하고 어떤 교훈을 끌어낼 것인가는 입장에 따라 다양할 테고 그 다양성은 그 자체로 해악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발전적인 것이지만, 그녀들의 경험맥락을 훼손하지 않으려 하는 한 '위안부'가 극단적인, 특수한 성격의 전쟁범죄였다는 것은 눙치고 지나가선 안될 문제다.
소녀상이 수동적이고 순결한 민족의 딸 이미지만을 재생산하므로 잘못되었다는 비판도 비슷한 맥락에서 동의하기 어려운데, <조센징이었기에> <아동/청소년>의 신분으로 <약취 유괴된> 피해자들(모든 피해자들이 이렇다는 게 아니다)까지 '성인 매춘부'의 이미지로 포섭하려 드는 것이 어디가 해방적인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어떤 억압 어떤 차별을 겪고 있는지를 은폐하거나 삭제하면서 온전한 주체화니 발화니가 가능할 리 없고, 그래서 무엇을 보든 상호교차성이라는 렌즈를 한 번은 들이대 봐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런 점에서 소녀상은 그렇게 나쁘지 않은 상징이라고 생각한다.
손을 모으고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수동적이라면 글쎄... 소녀상이 머리에 띠를 두르고 주먹질이라도 하고 있었다면 그거야말로 현실을 왜곡하면서까지 '투사'의 이미지를 덧씌우는 셈이었을 테고, 그걸 일본 대사관 앞에 가져다 놓는 건 그야말로 싸움 거는 제스처로 보였을 테다. 비폭력은, 이미지든 실천이든, '위안부' 투쟁의 전유물도 여성의 전유물도 아니었다. 간디가 온순하고 힘없는 식민지인에 대한 이미지를 재생산한다고 비판하는 사람은 별로 없잖아.
저항에서 폭력의 필수불가결함에 대한 정치적 확신과 비폭력 일변도의 담론에 대한 경계심과는 별개로, 제국주의, 식민주의의 외양이 노골적인 군사적 침략으로 드러나던 시절의 범죄에 대항해서 좀더 높은 경지를 제시하는 수단으로 비폭력은 나름대로의 가치와 의미가 있었고 그것은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게 불만이라면 성인 매춘부 동상도 만들고 시위하는 노인의 동상도 만들어서 소녀상 있는 곳마다 옆에 세우면 어떨까? 일본 대사관 앞에 동상을 가져다 놓고 사과를 요구하는 것 자체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라면 그 편이 더 생산적이지 않나.
지난 일을 가지고 언제까지 그러냐고? 피해자에게 끝나기 전까지 사건은 끝난 것이 아니다. 가해에 연루되었던 개인들이 죽고 다음 세대가 들어섰다고 해서, 남한이 식민지 조선의 태를 벗고 반중심부의 부국으로 떠올랐다고 해서, 강점과 초과착취의 트라우마를 지닌 세대가 죽어 없어지고 있다고 해서 우리에게 가해의 인정과 명확한 해결을 멋대로 건너뛰고 일반론적인 성찰과 평가로 넘어가버릴 권리가 생기지는 않는다.
더구나 중국 코앞에 미군 레이더를 갖다놓을 부지로 남한이 선정된 상황, 강경한 대북 정책을 지지하는 보수세력 중에서도 제일 예측불허의 우익 포퓰리스트가 미국 대통령의 자리에 올라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황에서 평시의 여성 억압·착취보다 훨씬 극단적이고 체계적인 전시 성폭력의 특수성을 강조하고 그것을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될 범죄로 못박는 데에는 거시적인 의미가 있다.
전시 동원체제는 평시에는 허용될 리 없는 여성에 대한 체계적 범죄를 가능하고 필요하게 하며, 여기에 민족 차별이 더해지면 강대국 본토에서 차마 할 수 없는 짓을 기꺼이 저지를 수 있는 대상인 약소민족의 여성들에게는 상황이 훨씬 더 끔찍해진다. 당장 오늘내일 중에 전쟁이 나지는 않을지라도 세계의 최강대국이 한반도 앞바다에서 온갖 최신 무기로 불장난을 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으리라고 마냥 확신하고 낙관할 수도 없다.
그것이 반복되는 곳이 설령 한반도가 아닐지라도, 내 민족이 아닐지라도, 혹은 피해자들이 여성이 아닐지라도 그것은 똑같이 끔찍한 일이다. 가해자들이 진상을 인정하는 것, 군국주의의 직접적인, 정말로 직접적인 책임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유감을 표하는 정도가 아니라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악행을 저질렀다는 것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사죄하는 게 그래서 중요하다.
나의 이해관계는 여기서 물질적 제도적 담론적 상징적 수단 모두를 망라해서 전쟁이 안 일어나게 하는 데 있고, 그 맥락에서 '위안부' 문제의 본질은 전쟁이 여성에게 무슨 짓까지 할 수 있는가이다. 전쟁을 여성에 대한 재앙으로 파악하는 것은 여성운동과 반전운동을 잇는 핵심적 고리 중 하나이기도 하고, 지금의 정세에 비해 한국에서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얼마나 미약한지를 생각하면 이 지점은 지금보다 훨씬 더 발굴되고 강조될 필요가 있다.
(기사 등록 2017.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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