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4월 18일에 첫 세미나를 했다. 주제는 마르크스주의와 노동조합 운동에 대한 기본 개념과 이론적 틀, 지난 20년간의 한국 노동계급과 노동운동의 변화와 쟁점들에 개한 기본적 인식이었다. 발제는 교재의 핵심 내용을 대체로 잘 요약 정리해서 소개하고 문제제기도 뽑아서 제기했다.
토론은 활발했고 다양한 고민과 문제의식을 던져줬다. 그런데 교재들이 분량은 아주 많지는 않았더라도 워낙 밀도있는 내용들이어서 한정된 시간에 충분히 토론하고 내용을 소화하는 데 다소 버거운 점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문제제기와 논쟁점들이 한정된 시간 동안 충분히 토론되고 말끔히 정리되지 못한 점이 있다.
토론 참가자들의 노동운동에 대한 관심과 추적 정도에 편차가 있었던 것도 앞으로 고려해야 할 점인 것 같다. 참가자들이 세미나 커리와 교재를 충분히 이해하도록 하는 것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비판적 재구성과 재고찰도 해야 하는 데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기 위해서는 시간과 여건이 만만치 않아 보인다. 토론 내용중에 ‘정치적 노동조합운동’에 대한 문제제기나 토론이 부족했던 것이 조금 아쉽다. 이해가 필요한 쟁점이기에 말이다.
이번 세미나에서 제기된 쟁점과 토론 내용을 아래에 정리했다.(정리의 편의를 위해서 질의 응답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실제로는 많은 부분 다양한 참가자들의 주장과 토론 속에서 나온 내용들이다. 물론 정리자의 주관이 많이 개입돼서 정리된 내용이라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논쟁됐던 내용에서도 양 쪽의 입장을 동등하게 정리했다기 보다 정리자의 입장으로 써있다는 점을 주의하라. 토론 때 충분히 정리되거나 답변되지 못한 점도 정리자의 의견으로 보충했다.)
1) 교재에서 몰리뉴는 여전히 현장조합원 네트워크를 건설하자고 하는 반면 알렉스는 현장조합원 전략을 지금은 적용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데 이 차이를 어떻게 볼 것인가?:
물론 몰리뉴는 현장네트워크 건설을 강조한다. 그러나 몰리뉴도 또한 글 앞에서 현장조합원 전략을 당장 적용할 수는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한편 알렉스는 이 글을 쓸 당시 현장조합원 전략이 실패한 것을 평가하는 맥락에서 지금의 주객관적 조건에서는 적용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알렉스도 이 교재가 실린 같은 책의 다른 글에서는 현장 네트워크 건설의 필요성을 일반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결국 일반적 차원에서 혁명가들이 아래로부터 사회주의라는 관점에서 평조합원주의(평조합원들 자신의 행동과 조직을 강조하는 관점)를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평조합원 조직의 전국적 네트워크 건설과 대표자 회의 소집 등 현장조합원 전략을 추진하는 것은 구분해서 봐야 한다. 다만 지금 당장 현장조합원 전략을 전용할 수는 없다고 하면서도 현장조합원 네트워크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혼동을 일으키는 측면은 있어 보인다.
2) 노조관료주의에 대한 분석에서 바로 현장조합원 전략이 도출되는 것인가?:
노조관료와 노조관료주의는 노동조합이 존재한다면 반드시 등장하고 발전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사회주의자들은 항상 평조합원들의 자주적 투쟁과 노조 지도부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강조해야 한다. 하지만 평조합원들의 독립적인 조직과 지도부로부터 독립적인 투쟁을 건설하는 것은 특정한 주객관적 조건에서 가능하다. 따라서 현장조합원 전략의 관점과 정신을 잃지 않는 것과 그것을 당장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구분해야 한다.
3) 노조관료와 직장위원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노조관료는 대개 산별과 대형노조에서 나타나며, 동료 노동자들과 같이 노동규율에 얽매이기보다는 전임상근자로서 중재와 협상을 전문으로 하는 계층을 말한다. 따라서 이들은 갈수록 보수화하며 투쟁보다 협상을 중시하게 되고 노조를 수단이기보다는 목적으로 여기게 된다. 반면 직장위원은 보통 기업이나 단위노조에서 조합원들에 의해 직접 선출되고, 전임상근자이기보다는 동료 노동자들과 같이 노동하며 그들의 고충과 불만을 대변해 투쟁을 조직하게 된다.(물론 협상도 하지만) 어원상 봐도 원래 노조 관료를 뜻하는 영어 ‘트레이드 유니온 뷰로크라시’라는 말 자체가 산별노조 간부라고 해석할 수 있는 반면, 직장위원인 ‘샵 스투어드’는 직장위원(작업장 대표)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일반적 기준으로 봐야 하지만 그 중간에 애매하게 이런 특성이 중첩된 구체적인 경우에는 칼같이 구분하기 어려울 수는 있다. 영국에서는 산별노조의 노조관료와 구분되는 기업단위의 직장위원이 등장하는 경로였다면, 한국은 기업 단위 민주노조가 산별노조로 발전하면서 노조관료가 더 안착화하는 경로였다는 차이가 있다.
물론 노조의 역사가 올래된 영국에서 대형산별노조의 연봉 5억받는 노조 관료와 노조 역사가 짧은 한국의 민주노총 관료를 단순히 동일시할 수는 없다.
4) 한국에서 노조관료와 직장위원을 구분할 수 있는가?:
한국에서도 민주노총 중앙과 산별과 연맹, 대형노조의 상층 간부들은 명백히 노조 관료로 분석할 수 있다. 이들은 직위는 바뀌더라도 계속 상근 간부 구실을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소규모 단위 작업장이나 산별노조의 기층 지부나 분회 간부들은 노조 관료라기 보다는 직장위원(작업장 대표)의 성격을 보인다. 물론 어느 직위가(예컨대 과장) 어느 기업에서는 중간관리자이지만 어느 기업에서는 노동자이듯이, 산별노조 지부장이나 분회장이라고 해서 일괄적으로 직장위원일 수는 없다. 구체적으로 위에서 말한 기준에 따라 분석해야 할 것이다. 즉 전임상근자인지, 협상이 주된 업무인지, 동료와 같이 작업장의 노동규율에 얽매여 있는지 등을 봐야 한다.
5) 서울대병원 지부장은 노조관료인가 직장위원인가?:
앞서 지적했듯이 산별노조의 지부장이면 무조건 노조관료 또는 직장위원이라고 단순하게 규정할 수 없다. 현장순회 등을 통해 현장 노동자들과 자주 접촉한다는 것도 그가 노조 관료가 아니라는 유의미한 판단 기준으로 보기는 힘들다.
중요한 것은 그가 전임상근자로서 협상을 주된 업무로 하고 있고, 협상에 대한 실질적 통제권과 체결권을 갖고 있고(현대차 위원장도 형식적으로는 금속노조에서 교섭권을 위임받는 형식이지만 실질적인 권한을 갖고 있다.) 동료 노동자들처럼 노동규율에 얽매여 있는 게 아니라면 노조 관료의 성격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그 직위가 자주 교체되고, 현장과 물질적 거리가 가깝다는 점은 현장의 압력에 더 민감하게 된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6) 한국에서 현장조합원 전략을 적용할 수 있는가?:
앞에서 봤듯이 현장조합원 전략은 특정한 주객관적 조건 속에서 적용할 수 있다. 심지어 영국에서도 그것은 역사적으로 매우 예외적인 시기에 적용됐고 성공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87년에 한국노총에서 독립적인 민주노조가 등장할 때는 명백히 현장조합원 운동의 성격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 노동운동에서 현장조합원 전략을 적용할만큼 계급투쟁의 수준이 발전돼 있는지, 노조관료와 현장조합원들 사이의 세력관계에서 노조관료가 주도권을 잃고 있는지, 현장조합원들이 독립적인 조직과 투쟁을 건설할만큼 자신감이 높은지를 보면 그렇지 않다.
7) 직장위원도 신디컬리즘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지적은 어떻게 봐야 하는가?:
현장조합원 전략을 취할 때도 영국 SWP는 직장위원들과 평조합원 조직이 노조의 기층 활동가와 조직으로서 노조의 근본적 한계인 부문주의와 경제주의에서 자유롭다고 보지 않았다. 항상 그 한계를 지적했고 그것을 경계했다. 다만 노조 관료들의 위로부터 협상을 통한 개혁주의와 달리, 평조합원조직의 개혁주의는 아래로부터 투쟁을 통한 개혁 추구라는 점에서 다르고 혁명적 방향으로 나갈 잠재력이 있다고 본 것이다. 동시에 이런 한계가 있기 때문에 혁명적 사회주의자가 현장조합원 운동을 주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들만이 부문주의와 개혁주의에서 벗어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8) 현장조합원 전력이 가능하지 않은 상황에서 현장네트워크를 건설하자는 주장은 무의미하고, 오히려 그것을 실제로 추진할 경우에 폐해만 있는가?:
현장조합원 전략이 당장 적용 가능하지 않더라도, 즉 당장 현장조합원들이 노조 관료로부터 독립적으로 투쟁하거나 전국적 네트워크를 건설해서 투쟁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현장의 투사들의 네트워크를 건설하는 것은 바람직하고 가능하다.
예컨대 근래에 ‘공투단’을 보면 쌍용차, 코오롱, 재능, 세종호텔, 기륭 등의 장기 투쟁 작업장의 활동가들이 서로 품앗이를 하며 네트워크화돼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네트워크가 무슨 강력한 힘으로 상황을 바꾸지는 못하지만, 정보를 공유하고 서로의 투쟁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희망버스를 봐도 송경동, 김진숙 등의 주도로 전국의 진지한 활동가들이 느슨하게 네크워크를 구성하고 필요할 때 결집하는 양상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작업장에서 연대파업 건설 등을 할 수는 없지만 나름 의미있는 사회적 연대를 구축하는 경우가 많다.
‘노연’은 주로 평등파와 노동당이 관여하는 이런 네트워크에 대해 ‘노동자 연대’라기 보다는 ‘사회적 연대’라며 다소 평가절하해 왔는 데 그럴 필요는 없을 것이다.
9) 독자노조 건설은 항상 잘못된 것이라면 KT와 KBS의 새노조는 어떻게 볼 것인가?:
혁명가들만의 적색노조 건설과 달리 독자노조 건설은 구체적 상황에서 판단해 볼 필요가 있다. 한국노총에서 민주노총이 분리한 과정도 일종의 독자노조였고, 대형작업장에서 비정규직 독자노조 건설은 어느 정도 불가피한 과정이기도 했다.
KT의 경우는 3만 노조에서 수십명이 독자노조를 건설하는 것이 부적절해 보인다. 민주동지회가 하듯이 노조 민주화를 추진하는 게 적절해 보인다. 게다가 몇 년전 노조 선거에서 아깝게 결선에서 패배한 적도 있다. KBS 새노조는 구노조와 비교해서 단지 소수가 아니고, 당시 구노조의 행태를 볼 때 분리의 정당성은 있어 보이지만 노조 분리의 결과 단결된 투쟁의 효과가 떨어진 것은 사실로 보인다. 다만 구체적 파악이 필요하다.
10) 서비스 산업에서 조직화의 어려움이 있다는 말은 일리있지 않은가?:
서비스 산업이 발전하면서 노조 조직화에 분명히 어려움이 돼 왔다. 이 나라의 서비스 산업은 여전히 자영업자가 많다. 이 나라의 자영업자 규모는 5백만 명에 달하는 데 이것은 OECD 최고 수준이다. 또 한국의 서비스 산업은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이 압도적인데 이 노동자들은 불안정한 조건과 법적 권리의 미비로 노조에 가입하거나 단체 행동을 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 때문에 노조 조직율은 하락해 왔다. 전체 노동계급의 수가 늘어나는 데 노조 조합원 수는 그대로라는 것은 분명히 노동운동의 위기를 보여 준다. 이것을 보면서 조직된 노동자의 수는 유지되고 있다고 자족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이런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대안이 필요하다.
11)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를 어떻게 볼 것인가?:
다함께는 노조 관료주의에 대한 일반적 원칙에서 이 문제를 접근해 왔다. 즉 노조 관료에 대한 평조합원들의 민주적 통제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전임자 임금은 사측이 아니라 조합비에서 나와야 한다는 기본 원칙을 제시해 온 것이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이 나라에서 전임자임금 지급 금지는 민주노조에 대한 공격으로 추진돼 왔다. 당장 소규모 작업장이나 비정규직 노조는 이 조치로 더 어려워진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형식적으로 사측이 아니라 노동자가 지급해야 한다는 점을 중시하기 보다는 실질적으로 이 조치가 누구에게 피해를 주고 있는가라는 점에서 접근하고 대안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12) 대산별이냐 소산별이냐 논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
노조의 부문주의라는 한계 속에서도 가능한 가장 큰 범위로 노동자들을 조직한다는 점에서 대산별을 지지하는 게 일반적으로 옳다. 예컨대 자동차 업종 소산별 노조 보다는 금속산업의 대산별 노조가 더 낫다. 자동차 대기업과 부품업체 중소기업 노동자를 하나로 조직하니 말이다. 그러나 투쟁의 필요 속에서 구체적인 접근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 예컨대 공공운수 대산별 노조 속에서 화물연대를 보자. 화물연대가 투쟁할 때 공공운수대산별 속에서 지역본부 차원의 연대보다는 화물운송 업종의 노동자들의 전국적 연대가 더 효과적일 수 있다. 따라서 업종별과 지역별은 투쟁 속에서 결합될 필요가 있다. 산별노조의 조직형식보다 그 내용이 더 중요한 것이다.
13) 기타:
정규직 노동자들 속에서 비정규직 방패막이론이 제기되는 근거가 없는가? 노동귀족론이나 대기업 정규직 특권론이 먹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노동운동 지도부가 보수화하고 기층 노동자들 속에서 실리주의가 확산되며 위기가 왔다는 분석을 어떻게 볼 것인가? 등이 제기됐는데 이것은 다음 번 세미나 토론 주제와도 겹치고 시간상 한계 때문에 다음으로 미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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