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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혁신

원칙으로 돌아가기: SWP 민주집중주의의 진화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4. 4. 5.

[IB 편집자 주] 팻 스택은 영국 사회주의노동당(SWP)이 그 내부 구조를 어떻게 채택했는지, 그 조직 구조가 어떻게 단체 내 민주주의 부족으로 이어졌는지, 오늘날 이를 혁파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살핀다.[각주:1]

 

팻 스택(Pat Stack)

번역 조명훈


 

 

 

최근 SWP 내 분파 투쟁에서 논쟁의 중심축은 자연스럽게 민주집중주의 문제로 옮겨갔다. 민주집중주의란 무엇인가? 분파 투쟁 당시의 논쟁을 근거로 판단하건대, 민주집중주의란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정리되는 듯하다.


민주집중주의 =


•  분파는 당 대회 이전 3개월의 토론 기간에만 허용된다.

  중앙위원회(CC)는 미리 제출된 명단(slate)의 승인을 통해 선출한다.

  연례 협의회의 다수결 투표로 모든 논쟁을 마무리한다. 여기서 표차가 얼마나 근소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영구 분파는 금지한다.

  중앙위원회가 바뀌지 않는 한 당의 전략은 이후 9개월 간 유지된다.


그러나 조셉 추나라가 2013 1월 협의회에서 잘 지적했듯, 민주집중주의란 애초 민주주의 3개월, 집중주의 9개월로 규정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위에 기술한 민주집중주의 공식은 많은 SWP 당원 동지들이 유일하다고 믿고 있는 민주집중주의의 형태다. 그러나 이런 특정한 조직 방식(명단 선출, 토론 기간 3개월, 영구 분파 금지)은 오랫동안 잊고 있다 새로 발견한 레닌의 유산을 계승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특정 시기의 특정 문제를 해결할 특수한 필요에서 비롯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특별 당 대회에서 내게 무당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싶어했던 것 같다. 내가 당 대회 기간 내내 토니 클리프가 한 말을 거듭 인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이 글에서 인용한 동지들이 살아있었다면 최근 논쟁에서 내 편이나 다른 어느 편에 섰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주장은 무신경하고 어리석은 것일 뿐이다. 다만 나는 최초의 원칙들로 되돌아 가고자 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나는 신비주의자 팻이라 불리는 것을 무릅쓰고 동지들에게 토니 클리프가 이 주제에 대해 어떤 주장을 했는지 상기시키고자 한다.


민주집중주의가 전국적 또는 국제적 차원에서 제대로 구현되려면 당 내에 높은 수준의 동질성과 의식, 훈련, 평회원과 지도부 사이뿐 아니라 지도자들 사이의 신뢰가 전제돼야 한다. “장교병사가 하나로 결합된다면, 규율은 99퍼센트의 확신과 1퍼센트의 기계적 복종으로 형성될 것이다. (토니 클리프, 레닌 3)


민주집중주의에 대한 이런 해석은 너무나 적절해서 인정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해석은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돼 왔던가? 이를 위해 우리 당의 역사를 찬찬히 살펴보는 것은 나름 의미 있는 시도일 것이다.


1960년대 말의 국제사회주의자들(IS)은 아주 느슨하고 거의 극도로 민주적인 조직이었다. 1968, 보수당 국회의원 이녹 포웰의 피의 강물연설[각주:2]에 맞서 IS는 좌파의 단결을 호소했다. 이 호소가 주로 겨냥했던 것은 국제마르크스주의그룹(IMG)이었는데, 당시 IMG는 정통 트로츠키주의(4인터내셔널) 단체로 학생들의 반란 물결 속에서 당 건설에 성공하고 있었다. IMG의 가장 유명한 학생 지도자가 바로 타리크 알리였다. 당시 IMG에게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다른 정통 트로츠키주의 좌파들보다 덜 종파적이고 더 진지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IMG IS의 단결 호소를 무시했고, 한 조그만 종파적 단체(입당 전술을 통해 자신의 몸집을 불리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만이 호소에 응했다. 이 단체는 우리와 공유하는 정치가 거의 없었지만 IS가 그들의 활동을 위한 비옥한 토양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단체가 우리와 함께할 당시 IS 내에는 이미 매우 교조적인 한 분파가 존재하고 있었고, 이 두 기생하는 집단들 때문에 당 내 활동은 완전히 마비됐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이를 묘사한 존 몰리뉴에 따르면:


첫 번째 그룹인 노동자투쟁(Workers Fight) 3년 동안 사실상 IS 내 단체로서 인정받았고, 그 기간 동안 끊임없이 분란만 일으켰지 전체 조직에 기여한 바가 없다.

두 번째 그룹은 비밀리에 활동한 올바른분파(Right Faction)인데, 이들은 공개 분파로 자신을 드러내길 거부했다. 1973년 당 대회에서 모든 쟁점에서 완패한 뒤 결국 출당됐다. 그들이 활동하며 성공한 것을 들자면, 내부 회보를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 대한 모호하기 짝이 없는 글들로 가득 채운 것과 몇몇 지회를 파괴한 것 등이 있을 것이다.

IS가 노동계급 조직으로 전환하려 애쓰고 있던 때, 이런 사건들은 주의 분산과 시간 낭비를 초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가 당 내 문제를 다루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지도부 내 의견 불일치가 있다 싶으면 당의 분열을 바라고 덤벼드는 영구 분파들 때문에 지도부는 그들 내 차이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습관을 갖게 됐다.


이에 더해 IS는 심각한 분열을 겪는데(오늘날 분열을 포함해 가장 심각한 형태로), 핵심 인사들( <사회주의노동자> 신문 편집자, 전 사무총장, 저명한 대중 연설자)을 포함한 여러 동지들이 IS 반대파(the IS Opposition)라는 분파를 결성했고, 결국 출당됐다.


IS는 분파주의 문제에 더해 부르주아 국가의 편집증적 망상에 대해 잘 인식하고 있었다. 당시 영국 지배계급이 얼마나 큰 혼란에 빠져 있었는지는 지금 제대로 묘사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전후 합의[각주:3]는 급격히 해체됐다.


학생 반란이 처음 마주했던 것은 지배계급의 몰이해와 공포였고, 당시의 정치적 분위기를 반영한 노동자들의 전투성 고양은 지배계급에 심각한 위기 신호를 보내고 있었고, IRA의 폭탄 테러는 지배계급의 히스테리를 자극했으며, 두 번에 걸친 광부 파업은 지배계급에게 큰 패배를 안기며 심지어 누가 이 나라를 지배하는가?” 하는 물음을 제기했다.

지배계급 주변부의 다양한 인물들은 사병 양성 문제를 말하고 있었고, 보수당의 주요 인사들 중한 명은 자녀들에게 근심 어린 목소리로 이번 성탄절이 빨갱이들의 국가 인수 전 마지막 성탄절이 될지 모르니 맘껏 즐겨두라고 말했으며, 운동 내 첩자들은 매우 불안해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IS는 정부의 레이더망 안에 포함돼 있었고, 특히 지도적 회원들과 전투적 활동가들은 밀착 감시 대상이었다.


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IS는 당내 문제를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었다. 1975년 당 대회결정사항을 보면, 새로 개편될 전업 중앙위원회는 전국위원회(NC)가 선출해 온 이전과 달리 당 대회에서 직접 선출할 것이었다. 또 중앙위원회는 미리 작성된 명부에 기초해 선출하며, 분파는 당 대회 전 3개월만 허용될 뿐, 설사 차이가 해소되지 않더라도 그 뒤로는 반드시 해산해야 한다.

비록 이것이 공식 입장이었지만, 심각한 분열이 있었을 때(<여성의 목소리(Women’s Voice)> <불꽃(Flame)> 폐간 논쟁, “침체기 분석논쟁[각주:4] ) 비록 공식 분파는 없었지만 단체 내 누구도 3개월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논쟁에 임했다. 이 규칙은 단체 내에서 이간질을 일삼는 자들을 규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분열을 막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진 않았다.

그러나 이 점을 이해하고 이후 필요한 수정 조처들이 취해졌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이 새로운 조직 구조에 문제점이 없거나 비판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존 몰리뉴와 크리스 하먼이 대표적인데, 당연하게도 이들을 단체 내에서 이간질이나 일삼는 자들이라 부를 순 없을 것이다.

존 몰리뉴의 경우, 그의 우려는 1975년 당 대회 이전부터 있었고, 수십 년 동안 발전해 오다 2005년 중앙위원 출마로 표출됐지만, 결국 좌절됐다. 그러나 지금 보니, 아일랜드 해협 건너에 있는 내 고향 땅 푸른 초원이 내 오랜 친구의 근심을 크게 덜어 준 듯하다.[각주:5]

 

1975년의 존 몰리뉴는 이렇게 썼다:


1973년 당 대회 이후 우리는 내부 토론에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해선 안 되고 이제 밖으로 나가 당을 건설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얼마간 이 결정은 유효했으나 점차 문제가 축적되기 시작했고, 안타깝게도 지도부 내 차이를 제한된 범위 밖으로 드러내지 않으려는 습관은 지속됐다. 그 결과, 문제는 …… 곪다가 …… 영문도 모르는 평회원들의 머리 위로 터져 나오곤 했다.

상당 기간 동안 평회원들은 지도부 내 전략과 접근법의 차이를 애매한 뜬소문으로만 접하다 핵심 결정이 내려진 뒤에야 공개 토론으로 알게 되는 상황에 처했다.


그로부터 4년 뒤, 크리스 하먼은 이보다 매서운 비판을 가한다. “펑크 신문논쟁 뒤 중앙위원회 다수와 갈등을 겪은 크리스 하먼은 우리는 어떤 종류의 지도력이 필요한가라는 제목의 글을 내부 회보에 기고했다. 이 글에서 크리스 하먼은 단지 지도부만이 아니라 당 내 활동 관련 문제를 진지하게 제기했다. 당시 중앙위원회의 실패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한 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단지 중앙위원회의 구성을 바꾸는 것 이상의 급진적 해결책이 필요하다. 우리의 지도력이 작동하는 조직 구조, 무엇보다 당 내에서 문제가 제기되는 방식 자체에 변화가 필요하다.


크리스 하먼은 계속해서 SWP의 조직 구조가 갖는 문제점을 설명한다.


사실 우리는 6(나중에는 9명 또는 10) 규모의 작고 중앙집중적인 지도부를 구축해 당 내외의 원심력에 맞서 조직을 보호하려 했다. 나는 이 결정을 지지했다 …… 그러나 경험을 통해 입증된 것은 이런 조직 구조상의 변화가 잘못된 결정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변화는 잘못된 가정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 조직의 의사 결정에 참여하는 동지의 수를 제한하면, 혁명가들에게 어려운 시기에 발전할 정치적 압력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중앙위원회 바깥의 토론은 어떤 것이든 불필요한 언쟁, 단체 내 분파적 기류, 더 많은 분열과 손실로 이어질 것이라는 공포를 갖는 데까지 나아갔다. 어려운 시기에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것에 대한 공포는 우리가 전국적 관점, 전략과 전술에 대한 토론의 중요성을 후순위로 밀어버리게 만들었다.


우리는 심지어 계급 투쟁의 침체기에 우리를 단단히 묶어준 것이 우리의 올바른 정치가 아니라 이런 단단한 조직 구조 덕분이라고 믿게 됐다. 나 자신이 거의 10년 전 <당과 계급>에서 썼던 내용을 잊고 있었다.

“(민주집중주의적) 단체의 일원이 되면서 노동자들과 지식인들 모두 다른 수천 명의 과학적 사회주의 활동에 비춰 자신의 구체적 상황을 평가할 수 있도록 훈련 받는다. ‘규율이란, 개인의 경험을 당의 총체적 이론과 실천에 연계시킬 필요성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따라서 규율은 구체적 상황을 독립적으로 평가하는 능력과 배치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다. 그래서 레닌에게 규율이란 당 내 존재하는 차이를 숨기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드러내 얼마든지 주장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었다. 오직 이런 방식을 통해서만 평회원 다수가 과학적 분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 차이에 명료성과 과단성을 부여하려는 조직적 집중이 없다면, 평회원의 독립성은 훼손되고 말 것이다. 기존 지도자들에 대한 개인적 애정이나 존경으로 묶인 유대관계가 과학적, 정치적 평가보다 더 중요해지는 것이다.”[강조는 크리스 하먼의 것, 마지막 문장은 지금 들어도 오싹할 정도로 적절하다.]


물론 크리스 하먼이 이후 지도부(특히 토니 클리프)와 차이를 해소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후 시간이 지나며 그의 우려는 잠잠해졌지만, 그의 글 중 많은 부분이 오늘날에도 울림이 있고, 이런 문제의식은 린지 저먼/존 리즈 체제 후반기에 크리스 하먼이 소외됐다는 추문이 돌던 시기에 다시금 그의 머리 속을 맴돌았을 것이 분명하다.

크리스 하먼이 강조한 문제들은 계급 투쟁 침체기에 강화될 것이었다. 그 시기에 SWP가 한 일이라고는 책을 읽고 이론을 수립한 것뿐이라고 말한다면 역겨운 희화화일 것이다. 실제 SWP는 광부 파업, 인쇄 노동자 파업 등 현실의 투쟁에서 제기된 다양한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우리가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기 시작했을 때, 단체의 이론적 발전이 우리의 중심 업무였다는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아주 큰 지역을 포괄하는 대규모 지회가 장려됐다.


당 밖의 정세는 엄혹했다. 투쟁은 패배했고, 토니 클리프가 묘사했듯 이따금 재앙적 패배가 함께한 패배의 시기였다. 혁명적 정치로부터의 후퇴는 실질적이었다. 운동주의와 (특히 노동당 좌파 토니 벤이 중심이 된) 좌파 개혁주의의 부상이 이전까지 혁명가였던 이들에게 굉장한 매력으로 다가왔고, 극좌파의 다수가 자신의 정치를 포기했다. 이런 경향에 맞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를 보존하기 위해 운동의 역사와 전통을 탐구하는 모임이 우리 관점의 중심이 됐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민주집중주의가 어떻게 기능했는가 하는 것이다. 직장 위원들과 교류하고 그들을 견인하는 일이나 매일매일의 노동자 투쟁, 학생들의 불만 표출 등의 내용이 더 이상 평회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따라서 민주집중제의 핵심이라 할 평회원들과 지도부 간 쌍방향 긴장이 형성되지 않았다.


사실 누가 토니 클리프보다 러시아 혁명을, 크리스 하먼보다 독일 혁명을, 던컨 핼러스보다 코민테른을 더 많이 알았겠는가? 설사 독특한 개인이 정설에서 벗어난 관점을 발전시킨들, 이 관점은 어떻게 검증할 것이며 평회원들이 자신의 일생을 바쳐 이 문제를 탐구한 사람들이 아닌, “괜한 소란을 일으키는 예비 지식인을 신뢰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다시 말해, 과연 누가 교사들을 가르칠 수 있겠는가?


고도의 정치적 식견을 갖춘 간부들은 양성됐지만, 이들에게 지도부에 도전하는경험은 일천했다. , 민주주의 부족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계급 투쟁의 침체기에는 이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금 당 밖의 투쟁에 전면적으로 뛰어들려고 하자, 많은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문제는, 우리가 분파주의, 입당 전술[각주:6], 국가의 감시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이런저런 조처들을 취했지만 당이 계급 투쟁 침체기에 전혀 다른 문제들을 마주하고 있을 때조차 이런 조처들이 수정되지 않고 계속됐다는 점이다. 당의 조직 구조에 대한 비판이 계속되는 가운데, 존 몰리뉴와 크리스 하먼이 우려했던 문제들이 현실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우리를 제외한 나머지 좌파들을 가리키며, “우리가 저들보다 사태를 더 제대로 파악하고 있어라고 말하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사실이기도 했다. 지금껏 상당수 좌파들이 몰락할 동안 우리는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진실이 곧 우리에게 문제가 없음을 뜻하진 않았다.


1990년대와 2000년대에도 계급 투쟁 침체기와 마찬가지로 지도부에 대한 도전이 부재한 상황은 지속됐다. 심지어 동지들의 일상 활동에서 사태가 정상적이지 않음이 드러나기 시작했는데도 이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이런저런 계획들이 전국위원회에서 우리 활동의 우선순위로 제출될 수 있었지만 이후 두 차례쯤 전국위원회가 지나고 나면 아무 설명도 없이 사라져버리곤 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누구도 감히 그 이유를 묻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가올 1년을 전망하는 당 대회 사전 토론 자료집 내용이 옳았는지 사후에 평가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동지들은 당이 곳곳에서 성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지회 모임의 규모는 계속 줄고 있었고, 그 모순을 따져 묻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지회는 거듭거듭 쪼개졌고, 이 지회를 유지하기 위해 오래 못 간 삼두 체제(troika)” 같은 공식들이 제시됐지만 다시 얼마 뒤 전부 폐기됐다.


2000년대 초, 몰리뉴와 나를 비롯해 몇몇 동지들이 중앙위원회와 전국위원회에 실질 당원 수와 명부상 당원 수에 대해 공개 질의를 했을 때, 우리는 한 전국위원회에서 여러 중앙위원 및 전국위원들에게 맹비난을 받았다. 한 전국위원은 심지어 우리가 역겹다는 말까지 내뱉었다.


이따금씩 중앙위원회 내부에서 실질적인 긴장과 차이가 드러났지만, 평당원들은 알 수가 없었다. 공식적으로 중앙위원회는 늘 단결했고, 간부들은 늘 충성스럽게 그들을 따랐다. 조직자들의 역할은 결국 중앙위원회의 지혜를 전달하는 데 한정됐다. 조직자들은 자기가 속한 지역의 현실을 전하긴커녕 중앙위원들이 (때로는 우리가) 듣고 싶어하는 소식을 전하기에 급급했다. 크리스 하먼은 조직자 회의가 마치 본사에 실적을 보고하려 경쟁하는 영업사원 모임 같다고 꼬집은 적이 있다.


그 다음으로 간부들이 중앙위원회에 그들이 듣고 싶어하는 내용을 보고했다. 개개인들의 마음 속에는 불안과 우려가 커지고 있었지만, 공식적으로는 모두 밝고 활기찬 소식들뿐이었다. 문제가 생긴다면, 신이 도울 것이다. 사실상 왕따나 다름없는 논쟁과 비난이 있곤 했는데, 이것은 우리 정치 경향의 전통을 완전히 왜곡한 것이었다.


이런 왜곡된 실천의 상당 부분은 한때 인정되기도 했다. 맨 앞에서 이런 실천에 앞장선 인물들인 존 리즈, 린지 저먼, (약간 뒤늦게) 크리스 뱀버리가 지도부에서 제외됐고(또는 그들 스스로 물러났고) 평당원들의 빗발치는 민주주의 요구에 민주주의위원회(DC)가 수립됐다. 크리스 하먼은 이 위원회를 준비하며 닐 데이비슨의 내부 회보글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회칙상 동지들에게 민주적 권리가 부족하지는 않습니다. 닐 데이비슨 동지가 인정하듯, 당 대회는 매년 중앙위원회의 구성을 자유롭게 바꿀 수 있고, 매년 새 전국위원회를 선출하며, 전국위원회의 다수가 원한다면 중앙위원회를 불신임할 수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매년 최소 두 차례씩 전국 대표자 회의가 있습니다 …… 문제는 우리의 조직 구조가 당원들이 실질적으로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하도록 독려하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동지들은 의사 결정을 하는 데서 중앙위원회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여 왔습니다. 그 배경에는 매우 중요한 결정들, 예컨대 반자본주의 운동에 대한 태도라든지 전쟁저지연합 출범에서 주도력을 발휘한다든지 하는 문제에서 중앙위원회의 결정이 옳았음을 그들 스스로 확인한 경험도 있을 것입니다. 그 결과가 바로 이런 악순환, , 동지들은 중앙위원회에 결정을 미루고, 중앙위원들은 자신만이 의사 결정을 할 능력이 있다는 착각에 빠지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는 전업 중앙위원들만이 아닌, 더 광범한 전국 지도부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현재의 조직 구조보다 더 나은 형태를 고안하려 애써야 합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최근 몇 년간 발전해 온 태도에 대한 문제뿐 아니라 실질적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나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당 대회에서 선출된 위원회가 권고안을 마련하는 것이 내부 회보에서 3개월 간 토론을 하는 것보다 더 진전된 방식이라 생각합니다. 부디 이 위원회가 국내외 운동의 역사에서 유사한 경험들을 살펴보고, 당에 오랫동안 헌신해 온 평당원들과 이 문제를 허심탄회하게 논의하고, 명확한 제안들(또는 대안적 제안들)을 표결에 붙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민주주의위원회는 그동안 무엇이 잘못됐는지, 또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으려면 어떤 실천이 필요한지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1970년대의 조직 구조는 바뀌지 않은 채 유지됐고, 그 결과 크리스 하먼이 강조한 문제들은 여전히 미해결 상태로 남아있다.


그래서 나는 최근 분파 투쟁에 뛰어들게 됐다. 확신컨대, 이 분파 투쟁이 크게 빚지고 있는 사실은 참으로 오랜만에 젊은 당원들이 대규모로 입당했다는 것[각주:7], 그리고 지도부의 명령을 맹목적으로 따르기를 단호히 거부하는 인상적인 젊은 간부들을 우리가 길러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분파 투쟁이 확대된 것은 그 문제 자체의 속성 탓[각주:8]이 크다.

그러나 분파 투쟁이 이 과정에서 당원 350, 학생 당원의 약 90퍼센트가 탈당했다 더 악화한 것은 우리가 계승했지만 고치는 데 실패한 고장 난 민주주의 구조 탓이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서 참조할 만한 더 나은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언 버철에게 1970년대 중반 IS 반대파의 분열 당시 분파 투쟁이 오늘날과 같은 방식으로 다뤄졌는지 물었고, 그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전해 줬다:


반대파가 주장을 펼칠 수 있도록 당 대회 참석이 장려되는 것이 관행이었지. 히긴스(Higgins)파가 출당될 때 나는 당 협의회의 일원이었어. 폴 매크니(Paul Mackney)는 대의원으로 선출되지 않았지만 히긴스파의 대표로 연단에 설 수 있도록 초청받았지. 기립 박수나 악선동, 위협 같은 것은 없었고, 서로의 관점에 대한 진지한 토론이 이어졌어.


SWP는 동지적이지 않은 논쟁이나 보복으로 입을 손실을 감수할 만큼 여유가 있지 못하다. 중앙위원회는 우리 당이 지금껏 가장 심각한 위기를 겪었을 때, 1천 명이 당 관련 모임에 참석했다고 주장했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 분파가 그 수치를 약 13백 명으로 봤다는 점이다.


우리의 체급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기에 대한 말들이 참 많았고, 또 그것은 사실일 수 있지만, 이 수치들이 정확하다면(이것이 틀릴 이유를 찾기란 어렵다) 심지어 분파의 더 높은 추정치를 기준으로 삼더라도 우리의 체급은 우리가 대부분 사실이라고 믿어 온 수준보다 훨씬 낮은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3, 4, 또는 5백 명이 또 떨어져 나가는 것은 재앙일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런 잠재적 재앙의 핵심에는 민주집중주의에 대한 기계적 관점이 있고,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도전이 필요하다. 우리 간부 중 다수가 새롭게 받아들여야 할 민주집중주의의 관점은 그들이 자신의 경험과 관점을 당에 끌어오고, 충성심에 대한 걱정이나 죄의식 없이 이견을 개진하고, 혁명 정당은 솔직하고 개방된 토론과 논쟁 속에서만 제 기능을 할 수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내 생각에 그들 중 다수는 우리에게 전국위원회, 당 협의회, 당 대회 등이 있기 때문에 민주집중주의가 충분히 구현되고 있다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그 동지들은 이 기구들이 정말 제 기능을 하고 있는지 아주 솔직하게 자문해 봐야 한다.


중앙위원회는 결코 무오류일 수 없다. 그들은 도전 받아야 하고, 정직한 보고를 받아야 한다. 이 점은 토니 클리프, 크리스 하먼, 던컨 핼러스가 있던 중앙위원회에게도 적용됐던 것이고, 지금껏 큰 충돌과 갈등을 겪어 본 적 없고, 우리 경향의 이론적 기초를 닦는 책임을 져 본 적 없고, 이전 지도자들만큼 다양한 경험을 쌓지 못하고 성장해 온 오늘날의 중앙위원회에게는 더 엄격히 적용돼야 할 진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민주집중주의의 진정한 정신으로 되돌아 가기 위한 문화적∙정치적 변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런 급진적 변화를 위해서는 몇 가지 실질적 변화가 있어야 한다.

첫 번째 물음은 다음과 같다. 오늘날 우리 단체의 규모에 비춰 즉각적으로 제기되는 요구는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의 규모와 우리가 마주한 과제에 대해 현실적일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 단체의 활동적 회원은 (최근 분열이 있기 전에) 15백 명이 안 되는 수준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 권력을 쟁취하기 직전의 볼셰비키에게 적용되던 모델은 우리에게 전혀 적절치 않다.


투쟁이 전진하고 상승하는 것처럼 보일 때, 평당원, 특히 전투적 노동자 당원의 수가 급증할 것이라는 예상에 기초한 모델 또한 부적절하다. 특히 이 모델이 앞서 제시된 특정한 문제들을 해소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더욱 부적절하다.

내가 보기에 우리는 오늘날 당으로서 두 가지 중첩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첫째는 우리가 계속해서 체급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때 우리 앞에 놓일 투쟁과 캠페인, 운동에 효과적으로 개입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오늘날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우리 계급이 어디에 있는지, 계급 세력 관계가 어떠한지에 대한 더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관점을 갖는 것이다. 이로부터 공동전선, 오늘날의 억압 문제, 학생 운동의 상태 등 더 광범한 문제들이 파생된다. 우선 우리는 어느 혁명적 단체에게든 핵심이라 할 행동 통일이 필요하다. 두 번째로 자의적인 시간 제한이나 규칙에 방해 받지 않고 광범한 주제를 둘러싼 토론, 의견 교환과 논쟁을 할 수 있는 민주적 개방성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 모든 문제들의 답이 오늘날 새로운 동지들이 합류하기 수십 년 전에 이미 나왔다는 인식과 단절해야 한다. 우리는 이 동지들이 단지 우리 입장을 배우기만 하면 된다는 인식과 단절해야 한다. 다시 던컨 핼러스를 인용하면:


전투적 활동가들이 교조로 가득한 척박한 환경에서 스스로 배우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자립심과 자기 생각에 대한 자신감은 사상의 차이가 자유롭고 공개적으로 논의되는 분위기 속에서 진정한 토론을 통해 길러진다. ‘획일적 정당은 스탈린주의적 개념이다. 획일성과 민주주의는 양립할 수 없다.


물론 이 두 요소가 꼭 그렇게 대립적인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효과적 개입을 위해 민주적 토론이 필요하고, 이론적 문제에 통일적인 (또는 다수가 지지하는)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활동에 대한 평가 없이 부산만 떨거나 주구장창 토론만 하는 집단으로 전락할 것이다. 그러나 3개월 규칙이 이런 전략적, 이론적 혁신을 이루는 데 출발점이 될 수는 없다.


이것이 곧 우리를 토론 클럽으로 바꾸는 것을 뜻하는가? 또는 더 나쁘게는, “영구 분파의 형태로 분열을 제도화하는 것을 뜻하는가? 지금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우리의 생각을 명료하게 하는 과정이다. 이미 그어진 선을 따라 분열이 고착화하는 것을 피하는 최고의 방법은 당의 조직 구조를 개방하는 것이다. 우리는 영구 분파를 원하지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다만 우리는 지속적인 토론과 논쟁, 대화를 원한다. 3개월 규칙이 1970년대 초 소종파들의 입당 전술에 대처하는 데 적절했을지는 몰라도, 오늘날 우리의 필요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제 명확하다.

따라서 우리는 똑같은 근거를 끊임없이 반복하며 영구 분파를 금지하는 것과 생각의 자유로운 교환을 위해 진정으로 당의 문호를 개방하는 것을 분명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래야만 동지들은 자신이 근본에서 비민주적이고 비레닌주의적인 실천을 하고 있다는 죄의식 없이 자유롭게 모여서, 자유롭게 소통하고, 자유롭게 글을 쓰고, 자유롭게 논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더해 우리는 중앙위원회가 반드시 생각이 비슷한 동지들로만 결성돼야 한다는 관점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지도부가 효과적으로 기능하려면 그 안에 긴장과 논쟁, 서로 다른 접근법, 의견 충돌이 있어야 한다. 볼셰비키의 역사는 지도부 내 끊임없는 전투의 역사였고, 한편에서 레닌과 트로츠키, 다른 한편에서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 사이에 존재한 차이가 그 속에서 가장 중요한 구실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네 사람은 끝까지 지도부에 남아있었다. 이것은 최근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미묘한 차이를 근거로 중앙위원 두 명을 해임한 것과 대조된다.


더 나아가 당이 거대한 투쟁, 치열한 이데올로기 전투, 또는 일생에 걸친 혁명적 경험 속에 구축되는 전업 지도부를 쉽게 만들어낼 수 없는 시기에는 지금보다 큰 규모의 지도적 기구가 필요하다. 나는 이 기구에 전업 활동가만이 아닌, 자기 일자리가 있는 동지들도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우리는 외부 활동에서 받은 느낌을 지도부에 더 많이 전달해야 하고, 대학 등 지역에서 펼쳐지는 논쟁에 더 긴밀히 연결될 필요가 있다. 당의 더 광범한 맥을 짚는 중앙위원회가 필요한 것이다.


이런 변화들이 그 자체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까? 물론 그렇지는 않겠지만, 나는 이런 조직적 변화가 나쁜 습관, 나쁜 교육에 대한 균형추로서 꼭 필요할 뿐 아니라 민주주의위원회가 불러오지 못한 문화적 변화에 대한 우리의 열정을 표현해 줄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이런 변화들이 기존 조직 구조보다 오늘날 우리 당의 필요에 훨씬 더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주변의 세계가 변화하고, 투쟁의 파고가 등락을 거듭하고, 새로운 논쟁이 발전하고, 예전에 가졌던 확신이 철 지난 아집에 불과하게 되고, 당의 규모 또한 끊임없이 변하는데 민주집중주의의 한 형태가 변화하지 않고, 도전 받지 않고, 검토되지 않는 일이 다시는 반복돼선 안 된다.


이런 사태를 피하려면 우리는 당과 계급에 나와 있는 민주집중주의의 핵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민주주의가 집중주의를 위한 그럴듯한 포장지가 아니라, 집중주의가 제대로 기능할 수 있게 하는 생명선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개입과 투쟁의 방해 요소로 기각돼선 안 된다. 경험 많은 혁명가들의 입에서 끊임없이 지속되는 민주주의 논쟁이 계급 투쟁 개입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주장을 듣는 것만큼 우울한 일도 없을 것이다.


나는 최근 한 모임에서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많은 동지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중에는 거의 5년 만에 처음 만나는 사람도 있었다. 오늘날 중앙위원회가 투표로 활동가들을 제압하려고 활동적이지 않은 충성스런 회원들을 끌어 모으고 있는 상황은 심각한 문제이지만, 동지들이 모임에 참석하는 것 자체는 우리 모두가 환영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지금껏 논쟁에 전혀 참여하지 않았던 이 동지들(지난 5년간 한 번도 보지 못한 그 동지를 포함해)이 한편의 주장을 채 6분도 듣지 않고, 심지어 그들의 정리 발제도 듣지 않고 투표한다는 것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당신이 이 과정을 무엇이라 묘사하든 이것은 민주집중주의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던컨 핼러스를 다시 인용하자면:


자립심과 자기 생각에 대한 자신감은 사상의 차이가 자유롭고 공개적으로 논의되는 분위기 속에서 진정한 토론을 통해 길러진다.


평당원들과 남김없이 토론하고 논쟁하지 못하는 당, 평당원들과 긴밀히 연결되지 못하는 당은 효과적으로, 또 정확하게 개입하는 당이 될 수 없다. 평당원들은 자신의 경험과 통찰, 일상의 정치 활동에서 받는 압력을 당에 전달해야 한다. 당 내 토론에는 이런 경험, 통찰, 압력이 반영돼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평당원들은 일터, 대학 캠퍼스, 캠페인에서 얻은 경험을 지회, 지구[각주:9], 전국위원회, 중앙위원회에 가져올 것이다. 이 경험들은 효과적인 행동과 개입의 전제가 되는 논쟁의 바탕이 될 것이다. 논쟁은 사치도 아니고, 우리의 주의를 분산시키는 방해 요소도 아니다.


레닌주의는 21세기에 큰 도전을 맞고 있다. 레닌주의가 죽은 신조로 여겨진다면 이 도전을 이겨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레닌의 당 비전을 이정표로 삼아 오늘과 내일의 요구에 맞게 그것을 변화시킨다면, 민주집중주의는 여전히 혁명적 변화를 일궈내는 데 핵심 가치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목표를 달성하려면, 행동 통일이라는 집중주의가 제대로 기능하는 데 민주주의, 논쟁, 대화가 결정적 구실을 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동지들은 설사 논쟁의 끝에 패배하게 된다 할지라도 그들이 참여한 민주적 구조가 개방적이고 정직하며 철저하다는, 그래서 필요할 경우에는 주장들이 얼마든지 재평가될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이런 민주주의는 3개월 내로 제약돼서는 안 되고, 규약으로 짓밟혀서도 안 되고, 명령으로 금지돼서도 안 되며, 집중주의의 문을 두드릴 때 무시돼서도 안 된다. 결국 남겨진 것이 명령과 규칙뿐이라면, 99퍼센트의 규율과 1퍼센트의 확신뿐이라면, 그것이야말로 재앙으로 가는 길이고 우리의 전통이 서 있는 토대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다.


변혁재장전과 함께 고민을 나누고 토론해 봅시다http://rreload.tistory.com/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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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하 각주는 모두 역자의 것이다. [본문으로]
  2. 당시 노동당 정부가 제출한 인종차별반대 법안을 격렬히 비난한 연설. [본문으로]
  3. 전후 영국 정치의 기조를 형성한 혼합 경제와 복지국가적 합의 정치……전후 사반세기의 영국 정치는 노동-자본 그리고 보수-노동 정당 간의 비공식적 '양해와 배려' 위에 광범위하게 구축된 합의 체제로, 같은 기간 영국은 산업혁명 이래 가장 오랜 기간 경제·사회적 안정과 번영을 구가했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부터 영국 경제의 구조적 모순이 가중되는 국제수지 적자와 파운드 위기가 함께 가시화되고, 일련의 긴축적 기조가 불가피해지면서, 합의정치의 균열이 보이기 시작했다(‘대처는 어떻게 이데올로기가 되었나’, 고세훈, <르몽드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56호) [본문으로]
  4. 여성 억압 문제를 다룬 잡지 <여성의 목소리>와 소수자 억압 문제를 다룬 신문 <불꽃>의 폐간을 둘러싼 논쟁, 계급 투쟁의 침체기 분석과 이에 따른 실천의 재조정을 둘러싼 논쟁을 말한다. [본문으로]
  5. 함께 문제의식을 공유하다 최근의 분파 투쟁에서 사실상 지도부 편을 들고 있는 존 몰리뉴를 비꼬는 표현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6. 다른 소종파들이 SWP에 입당해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시도를 가리킴 [본문으로]
  7. 2010년 대규모 학생 시위 이후 젊은 당원의 수가 급증했던 것을 뜻한다. [본문으로]
  8. 모 지도적 멤버의 성폭력 혐의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 [본문으로]
  9. 원문은 the District인데, 아마 지회(branch)보다 더 큰 규모의 단위인 듯하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