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승영
유럽에서 독일 다음으로 큰 경제규모를 가진 영국의 EU 탈퇴(브렉시트)에 대한 국민 투표가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우선 이것이 무엇에 대한 문제인지 정확하게 규정할 필요가 있다. 이 문제는 단지 경제 성장률 몇 %가 변하는 문제가 아니다. 종합주가지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것은 세월호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생존을 위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야 하는 난민들의 절박한 생사에 대한 문제다. 또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유럽에 온 이민자들의 삶에 대한 문제이며, 신자유주의 세계를 살아가는 유럽 나아가서는 전 세계 노동자 · 민중의 내일에 대한 문제다.
곤혹스런 선택
그런데 그 중요한 문제에 대한 답을 찾는 일이 매우 곤혹스럽다. 영국의 EU 잔류를 지지하든 반대하든 아니면 선거 자체를 거부하든 어떤 술잔에도 독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EU가 사라져야 할 기구임은 너무도 명백하다. 경제적 측면에서 EU는 신자유주의 기구로서 모든 회원국들에게 긴축 재정과 복지 축소 그리고 민영화를 강요한다. 정치적 측면에서 EU는 제국주의 기구로서 미국과 함께 세계 평화를 위협한다.
EU의 개혁 가능성 역시 희박하다. EU는 이미 유럽 민중들의 민주적 통제에서 벗어나 있다. 유럽의 민중들이 선출하는 유럽 의회는 EU에 영향력을 거의 미치지 못 한다. 오직 몇몇 강대국들이 선정한 관료들이 모든 중요한 결정권을 독점한다. 그들은 유럽 내 대기업들의 영향력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
이런 사실들만 보면 EU 약화를 환영하는 관점에서 브렉시트를 지지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이번 투표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가 이민이며 가장 강력한 이민 통제를 주장하는 세력이 브렉시트를 찬성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영국 내에서 그들의 목소리가 꽤 큰 것도 사실이다.
브렉시트를 가장 강력하게 주장하는 이들은 영국 독립당(UKIP) 같은 극우 인종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영국 내에서 이민자들이 NHS를 비롯한 복지정책을 누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뿐 아니라 이민자들을 내 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EU에 남아 있으면서 유럽 내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영국으로 몰려오는 것을 두려워한다.
며칠 전 영국 노동당의 조 콕스 의원을 살해한 것도 ‘영국이 먼저’(british first)라는 극우 파시스트가 일으킨 사건이었다.
다만 구도가 탈퇴 = 반(反)이민, 잔류 = 친(親)이민처럼 단순하지만은 않다. EU의 신자유주의에 반대해서 탈퇴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고, 이민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잔류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다.
브렉시트 국민투표를 공약으로 내걸고 총리가 된 데이비드 캐머런은 잔류를 지지하지만 이민 통제와 이민자 차별을 강화하는 정책을 계속 추진하고 있다. 물론 영국 독립당(UKIP) 같은 극우 인종주의자들에게는 그 정도도 만족스럽지 않겠지만 말이다.
세 가지 선택지
이 복잡한 물음 앞에서 근본적인 사회 변혁을 바라는 사람들이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크게 3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이른바 렉시트(lexit : left 와 exit의 합성어로 좌파적 탈퇴를 의미한다.) 전술이다. 탈퇴에 투표하되 인종주의가 아닌 좌파적 의미에서 탈퇴를 주장하자는 것이다. 탈퇴 운동을 전개하면서 EU의 신자유주의 · 제국주의적 본질을 폭로하고, 인종주의 선동에 반대하면서 대안 세계를 만들기 위한 운동을 건설해 나가자는 것이다.
이 선택지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민의 관점에서도 보더라도 EU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첫째 현재 EU에서 이민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국가들은 EU 회원국뿐이다. 아프리카나 중동에서 넘어오는 이민자와 난민에 대한 장벽은 오히려 높아지고 있다. 더구나 EU국가 내에서 이민을 규제하려는 움직임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둘째 영국이 EU에 남게 된다고 하더라도 보수당 캐머런 정부는 EU와 협상을 통해 이민 통제를 강화하려고 한다.
신자유주의와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원칙을 고수하면서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이자는 것으로 이 입장을 요약할 수 있다.
두 번째 선택지는 인종주의에 반대해서 잔류 찬성에 표를 던지는 전술이다. 이 선택지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EU가 신자유주의적 기구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선거 결과 브렉시트가 실현되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생각해보자. 극우 인종주의자들과 파시스트들이 더욱 자신을 얻어 준동할 것이고, 영국 내 300만에 달하는 EU 출신 이민자들의 처지는 더욱 곤란해질 것이다. 또한 영국으로 넘어오기를 바라는 이주민들과 난민들은 더욱 절망적 처지에 놓일 것이다.
이 선택지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렉시트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원칙에는 동의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들의 목소리는 너무 작다고 주장한다. 즉 렉시트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신자유주의와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의미에서 영국의 EU 탈퇴를 주장한다 하더라도 전체 판세에서 탈퇴 투표의 의미는 이민 통제를 강화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세 번째 선택지는 투표에 보이콧하는 전술이다. 이 투표 자체가 지배자들의 권력 다툼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우리는 이 투표 자체에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주의자들은 투표에 상관없이 신자유주의과 인종차별에 반대하고, 이민의 자유와 이민자들의 권리를 지지하면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세 가지 선택지 모두 합리적 핵심과 치명적 난점이 동시에 있다.
개인적으로 글쓴이는 렉시트 전술에 조금 더 끌린다. 우선 시야를 유럽과 전 세계로 확장하면 EU의 약화가 신자유주의 속에 고통 받는 노동자 민중에게 나을 것이라는 점이다. 전 세계 거의 대부분의 자본가들이 브렉시트를 반대하는 것은 이를 방증한다. 또한 영국이 EU에 잔류한다고 해도 그것이 이민의 자유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이 되기는 힘들 것 같다.
하지만 한국에서 두 가지 변수를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에 확신이 생기지는 않는다. 다른 입장들의 근거들도 충분히 이해와 납득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내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첫 번째 변수는 렉시트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얼마나 유의미한 지에 대한 것이다. 당장 렉시트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다수는 아닌 듯하다. 하지만 노동자 · 민중 진영에서 소수지만 의미 있는 숫자와 세력이 렉시트 운동을 하고 있다면 거기에 걸어볼만 할 것이다.
두 번째는 영국 내 이민자들의 정서와 생각에 대한 것이다. 그들이 영국에서 쫓겨날지 모른다는 공포가 너무 크거나 인종주의자들의 고조하는 목소리 속에서 반(反)인종주의 운동을 함께 하기 어려울 만큼 위축돼 있다면, 그 사람들을 지키는 것이 다른 그 어떤 가치보다 우선할 수 있다. 특히 조 콕스 의원이 피살된 후 영국 이민자들의 정서는 투표를 함에 있어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변수일 것이다.
비겁한 핑계일지도 모르지만, 영국 이민자들, 활동가들과 직접 대화하지 않고 이러한 변수를 알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내가 만약 영국에 있다면 최대한 많은 사람과 대화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선거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극우 인종주의자들은 더욱 격렬하게 날 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더욱 치열하게 이민자들의 권리를 지키고,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을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선택에 난점이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어떤 선택을 해도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미래는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어디에 표를 던지냐보다, 어떤 결과가 나오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후에 어떻게 싸우냐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투표가 아니라 계급투쟁이라는 진부하지만 당연한 말이 지금은 정말 절실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1970년대 영국이 EEC[유럽경제공동체] 탈퇴를 두고 투표를 할 때 이런 구호가 유행했다. “나가든 남든, 노동자들은 싸워야 한다.” 현재 다른 세상을 꿈꾸며 영국을 주시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구호가 아닐까 한다.
그리고 이런 구호도 있다.
“단결한 민중은 패배하지 않는다.”
* '다른세상을향한연대’와 함께 고민을 나누고 토론해 봅시다. http://anotherworld.kr/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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