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집중제, 핵심을 계승하며 새롭게 발전시키자
- '어떤 공식의 운명'에 대한 논평
윤미래
<어떤 공식의 운명: ‘민주' 집중주의에서 민주 '집중주의’로>에서 라스 리는 ‘민주적 집중주의’라는 단어가 볼셰비키들의 문헌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검토한 후 크게 두 가지 결론을 내놓는다. 첫째, 민주적 집중주의는 1905년 혁명 직후의 짧은 기간 동안만 작동되었다.
둘째, 민주적 집중주의라는 단어는 1906~08년과 1920~21년 동안에만 문건에 등장하며 두 시기에 각각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이에 근거하여 라스 리는 “레닌이 볼셰비즘에 고유하거나 본질적인 ‘민주적 중앙집중주의’라는 특정한 조직 철학을 가졌다는 일반적인 추정이 일종의 신화”라고 주장한다.
라스 리가 어떤 동기에서 민주집중주의라는 개념을 해체하거나 최소한 ‘민주’집중제와 민주‘집중’제라는 동음이의어로 분할하고 싶어하는지는 "모종의 방식으로 영원한 조직적 딜레마인 ‘응집력과 단결 vs 자발적인 열의와 자율성’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마술 같은 공식과 만능키"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의 언술에서 충분히 추론할 수 있다.
라스 리는 아마 민주집중제를 어떤 상황에서도 불변하며, 그 공식에 충실하기만 한다면 조직 운영의 모든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줄 절대적 진리처럼 물신화하는 사고에 반대하고 싶은 것 같다. 그의 이런 의도는 존중할 만하다. 민주집중제의 원리는 상황에 따라 다르게 구체화될 수 있으며, 때로는 채택되지 않을 수도 있다.
민주집중제를 구체화하는 특정한 형태나 제도(예: 자기보충원리, 영구분파 금지)를 만고불변의 원리처럼 박제하거나, 굳이 민주집중제가 필요없는 조직(예: 의식화그룹, 네트워크 조직)에까지 민주집중제를 적용하려고 한다면 그러한 실천은 곧 현실의 필요와 괴리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민주집중제의 물신화를 피하기 위해 민주집중제라는 개념 자체를 해체하는 것은 목욕물과 함께 아기까지 버리는 일이다. 비록 그것이 대부분의 시기에 완전하게 구현되기 어려웠으며 정세에 따라 방점과 구체화 방식이 달랐다고 해도, 민주집중제 개념에는 ‘의사 결정은 민주적으로 하되 결정된 바에 모든 당원과 기구가 책임지고 따른다’는 일관된 핵심이 있다. 이는 위로부터의 의사결정과도 자율주의와도 구분되는 특유한 원리로써, 민주주의와 통일된 행동을 조화시키기 위해 여전히 유효하고 필요한 공식이다.
민주집중제가 어떤 일관된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는 주장은 “네프스키의 논평들은 전혀 논쟁하려고 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그는 민주적 중앙집중주의에 대한 한 해석을 옹호하고 다른 해석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사람이 민주적 집중주의가 무엇인지 다 알고 있을 거라고 당연하게 전제하고 있다.”라는 라스 리 자신의 서술과도 맞지 않는다.
오히려 민주집중제의 핵심 원리가 너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논쟁이나 재해석의 대상이 된 시기 외에는 구태여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경우 민주집중제에서 ‘민주’의 요소는 의사록 공간과 기관지에서의 공개 논쟁을 비롯한 완전한 공개제, 분파를 형성하여 대회에 대표를 파견할 권리나 당 중앙을 비판하는 문건을 발행하고 배포할 권리를 비롯한 소수파의 권리 보장, 당직자의 직접선거와 정책투표 등 모든 당원에 의한 의사결정 등으로 구체화되었다.
‘집중’의 요소는 다수자에 대한 소수자의 복종, 전체에 대한 부분의 복종, 상급기관에 대한 하급기관의 복종, 중앙부 지도 하에서의 분업, 위에서 기록한 원칙들의 귀결 혹은 전제로서 당내에서의 일정한 권력의 창설. 당원의 의무라는 측면에서는 당이라는 조직에 맞는 당적 관점을 가지고 활동할 것, 당원의 의무에 충실할 것, 당 활동은 당내에 형성된 절차와 질서에 따라 행동할 것 1, 당의 최고 의결기관으로서 당대회에 대한 존중과 복종 등이었다.(이상 <민주집중제의 실제 :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민주집중제 형성과정을 중심으로>, 노동해방실천연대(준) 부설 노동자정치학교, 《사회주의 핵심을 학습하자!》, 2014, p.190-202를 참고함.)
이들이 보여준 사례에서는 민주적이고도 효과적인 조직 운영을 위해서 여전히 따라야 할 지점들이 많이 있다. 2 이것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완벽한 모범을 보여주었으며 우리는 이것을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된다는 말과는 다르다. 지금의 시대적 상황에 걸맞게 민주집중제 원리를 구체화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몫으로 남아 있다.
나의 개인적인 견해로는 당 지도부의 독주를 견제할 수단이 보강되고, 소수자들을 보호하고 그 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방식이 확충될 필요가 있다. 20세기 사회주의 운동이 당의 관료화 및 지도부 독재의 문제와 운동 사회 성폭력이나 동성애자 혐오 등 사회적 소수자들의 배제 문제라는 중대한 문제를 남겼으며 이것들을 극복하는 것이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대안이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 꼭 달성해야 할 과제이기 때문이다.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민주적 의사결정 절차가 형식화되는 것을 경험한 만큼, 단순히 절차를 두는 것을 넘어서서 민주적 토론의 원칙을 실질화하기 위한 방법들도 마련해야 한다. ‘긴급한 상황’을 이유로 민주주의를 지나치게 많이 유보하는 것이 영구적 독재로 가는 길을 터준다는 것을 알게 된 만큼, 민주주의를 담보하는 핵심적인 요소들은 상황을 핑계로 정지될 수 없음을 못박아둘 필요도 있다.
또,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의식화 그룹이나 네트워크 조직 등 다양한 형태의 조직이 존재하고 어떤 조직 형태가 효과적인지는 정세와 목표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자율주의, 초민주주의(ultrademocracy), 네트워크 조직론 등 민주집중제 이외의 조직 운영 원리들도 적극적으로 연구하고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대중에게 전체 사회에 대한 이념과 전망을 제시하는 조직으로서 책임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조직이 표방하는 정치적 방향성과 조직원들의 실천이 일치되어야 하고, 무기력한 논평을 넘어서 현실적으로 행동력을 갖추려면 필요할 때에 전술적으로 행동을 통일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실력을 갖춘 정치 조직이 사회 변혁을 ‘전담(全擔)’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겠지만, 사회 변혁에 그러한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또, 민주집중제를 중심 원리로 채택하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의 행동 통일을 목표로 하는 조직이라면 그러한 한도 내에서는 여전히 민주집중제 원리로부터 참고할 부분이 많이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나는 우리가 아직 민주집중제라는 개념을 허구적이거나 낡은 것으로 치부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민주집중제의 역사적 사례들로부터 합리적 핵심을 계승하면서 그것을 지금의 현실에 맞게 어떻게 구체화할지 더 다양하고 새롭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민주집중제를 특정 형태로 박제하거나 물신화하는 경향을 넘어서는 올바른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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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의 결정에 대해 이견을 갖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이견이나 불신이 있다고 해서 당의 결정을 마음대로 무시하는 식으로 대응하지 말고 당내의 절차에 따라 공식적으로 제기하여 해결하라는 뜻이다. [본문으로]
- 개인적으로, 오늘날 일부 좌파들에게 민주집중제의 핵심 요소 중 하나로 받아들여지는 ‘분파 금지’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분파 금지는 내전과 뒤이은 신경제정책이라는 상황을 이유로 1921년에야 도입되었으며, 결과적으로 민주집중제에서 ‘민주’의 요소를 파괴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분파 금지의 역사적 결과와 오늘날의 상황을 고려해볼 때, 분파 금지는 민주집중제를 구체화하는 방식으로서 일반적으로 부적합하다고 생각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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