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범진
<노예 12년>은 억압과 지배에 대한 영화다. 이 영화의 가치는 노예제의 끔찍한 참상을 단지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왜 노예들은 쉽사리 집단적으로 저항하지 못했을까? 착한 백인 "주인"들은 노예제의 굴레에서 어떤 삶을 살았을까? 왜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비인간적인 노예제가 "문명" 사회, 기독교 사회에서 지속될 수 있었을까? 영화 곳곳에 놓여진 단서들은 하나의 진실로 향해있다.
그것은 바로 노예는 단...지 노예로서 태어나거나 선언 되는 것이 아니라, 노예로서 길러진다는 것이다. 공포와 학대는 그들의 존엄성과 자유에 대한 갈망을 스스로 무너져 내리게 만든다. 그들은 희망 대신 한맺힌 영가의 노랫소리를 위안으로 삼는다. 체념과 적응에 대한 강요는 자유민이었던 주인공의 용기마저 좀먹어간다. "생존이 아니라 삶을 원해"라던 그도, 어느샌가는 "살아남아야지!" 하고 소리를 지르고 있다.
노예제 앞에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은 결국 아무도 없었다. 끔찍한 제도는 흑백과 선악을 불문하고 모든 개별 인간을 지배와 피지배의 틀 속에 각각의 톱니바퀴로 옭아멘다. 처참하게 짓밟힌 노예의 존엄성 위로, 삐뚤어지고 곪아터진 주인의 존엄성이 포개진다.
그조차도 위협받는 시대에 사니, 잘못된 역사를 분명하게 기억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라고 할만하다. 그럼에도 노예제가 사라진 지금에와서, 노예제가 정말로 잔혹했다고 말하는 것은 그래도 쉬운 일일 수밖에 없다. 정말 어려운 일은 지금 우리가 과거의 노예들마냥 체념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묻는 일이다. 우리는 진정 자유민인가? 우리는 살아지고 있는가, 삶을 살고 있는가? 우리는 무엇에 익숙하도록 길러졌는가? 목이 매달려 허우적 거리는 주인공을 외면한 채, 못본 척 자기 할일들에만 열중하는 흑인 노예들의 모습은 정말 우리들과는 다른 것인가?
시퀀스 사이사이로 보이는 미국 남부의 해지는 풍광이 아름다운만큼, 그 환상적인 시간이 오기까지 또 하루를 견뎌낸 노예들은 비루하고도 대견했다. 그 슬픈 대비를 끝내 깨어버린 누군가들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이 시대의 낡은 지배 매커니즘을 몰아낼 용기와 끈기가 여전히 필요하다. <노예 12년>은 역사적 감수성에 대해 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누군가는 거기에서 오늘에 대한 자각 역시 함께 읽어내야 한다. 지배와 억압의 본질은 시대를 불문하고 다르지 않으므로.
‘변혁 재장전’의 글이 흥미있고 유익했다면, 격려와 지지 차원에서 후원해 주십시오. ‘변혁 재장전’이 기댈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의 지지와 후원밖에 없습니다. 후원 계좌: 우리은행 전지윤 1002 - 452 - 402383 |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화) <제보자> ㅡ 진실을 위한 용기 (1) | 2014.10.15 |
---|---|
웹툰) <모두에게 완자가> ㅡ 우리 안의, 우리 옆의 성소수자 (1) | 2014.07.03 |
서평) <트로츠키 사후의 트로츠키> ㅡ 세계를 해석하는 일은 계속되어야 한다 (1) | 2014.06.24 |
영화) <한공주> ㅡ 피해자와 생존자 사이 (0) | 2014.05.15 |
서평) <좌파 메시아주의라는 이름의 욕망>(진태원)에 대한 비평 (0) | 2014.05.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