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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서평) <좌파 메시아주의라는 이름의 욕망>(진태원)에 대한 비평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4. 5. 4.

핫(hot)한 철학자들에 대한 뛰어난 요약, 빗나간 비판

곽태진  

 

 

 

 이 글은 국내의 대표적인 알튀세주의자 가운데 한 명인 진태원 선생(이하 존칭 생략)이 쓴 「좌파 메시아주의라는 이름의 욕망: 알랭 바디우, 슬라보이 지제크, 조르조 아감벤의 국내 수용에 대하여」[각주:1](이하 「욕망」)에 대한 약평이다.

 물론 진태원의 논문에 대한 이해나 그 논문이 다루고 있는 사상가들에 대한 이해가 사회주의자로 활동하기 위한 전제조건까지 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현 시점에서 ‘핫(hot)한’ 급진적 철학자들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분명 오늘날 급진화하는 대중과 대화하는 데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진태원은 「욕망」에서 알랭 바디우, 슬라보예 지젝, 조르조 아감벤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개괄하고, 이 사상들이 미국화를 거쳐 국내에 수용되었다고 문제 제기하고 있다.

 진태원은 2000년대 들어 국내에도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지젝, 아감벤, 자크 랑시에르, 알랭 바디우 등을 ‘포스트-포스트 담론’의 대표자들로 규정한다. 이들의 사상은 9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그와는 또 다르다. 이들은 분명 “이전의 철학이나 인문학 담론에서 보기 어려운 새로운 주제를 다루고 급진적인 정치적 주장을 제시”(<황해문화>, 173쪽, 이하 쪽수만 숫자로 표기)하고 있다. 물론, 우리가 보기에는 대안적 사상으로는 한계를 지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주장은 주류 철학을 기준으로 보자면, 적어도 사상적으로는 대단히 급진적이며 실천적이라고 할 수 있다.

 

 네그리·하트의 ‘자율주의’는 운동 내의 전략·전술과 관련하여 2000년대 초반 이래 우리에게도 비판적으로 다루어진 바 있는데, ‘다중’에 의해 구축된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운영되는 평등한 사회를 추구한다. 지젝이나 바디우는 그 구체적인 상은 다소 모호하지만, 협력에 기반을 둔 ‘공산주의’를 주장하고 있다. 랑시에르는 통치를 위한 억압적 통제인 ‘치안’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민주주의를 추구한다. 아감벤의 경우, 추구하는 사회의 모습이 명시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권력에서 배제된 자들이 오히려 새로운 사회의 주역이 되는 ‘계급 없는 사회’를 꿈꾼다.

 「욕망」의 장점은 이런 지젝, 바디우, 아감벤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잘 요약하고 있다는 점이다. 진태원은 이들 사상의 공통점으로 1) 자본주의 제도 정치 바깥에서 정치적 대안을 찾고 있다는 점, 2) 좌파 메시아주의적이라는 점을 들고 있다.

 

 바깥의 정치?

 

 ‘포스트-포스트 담론’의 공통된 입장은 “나름대로 급진적인 해방의 정치를 추구하고 있으며, 이러한 정체를 제도 정치 바깥에서 찾고 있다는 점이다.”(179) 즉 이들은 자유민주주의의 억압적 속성을 인식하고 자유민주주의를 넘어선―바깥의―새로운 정치를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실제로 이들은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간에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계승하고 있”(180)는데, 첫째, 마르크스주의와 마찬가지로 자유민주주의의 허구성을 지적하고 있으며, 둘째, 경제적 착취의 계급투쟁을 진정한 정치 쟁점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진태원의 이러한 요약은 이 사상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가 자유민주주의를 넘어선 대안적 사회를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점에서는 타당하다. 그러나 그 대안적 사회를 ‘바깥의’ 것이라고 한 것에는 다소 문제가 있을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대안은 현실 사회의 변증법적 지양에서 나온다. 또 (우리 같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보기에는 일부 이론 상 초월적인 속성이 있다고 해도) 초월적인 것에 대한 거부를 내세우는 포스트-포스트 담론 역시 그저 현실 정치 외부에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한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어쨌든, 현실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의 요소를 계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태원에 따르면 이들은 오히려 푸코(와 알튀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진태원이 이들에게 푸코가 영향력을 미쳤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푸코는 마르크스와는 달리 경제적인 토대가 아니라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권력관계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통해 예속화 · 주체화를 정치의 핵심적 문제로 제기했다. 그리고 ‘바깥의 정치’와 이를 추구하는 포스트-포스트 담론은 이런 비역사적인 사회구조 해석 방식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포스트-포스트 담론은 불평등과 억압의 기원을 정치경제적 차원에서 분석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태원의 이러한 주장은 일면적이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푸코의 권력 기구와 주체는 구조주의적 접근을 바탕에 둔 것이다. 푸코는 억압적인 근대적 권력과 여기에 예속된 주체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잘 보여주기는 하지만, 푸코의 주체는 변혁의 주체가 되기 어렵다. 지배의 매커니즘을 강조해 설명하다보니, 대체 그 예속성이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지는 잘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포스트-포스트 담론’들은 주체가 예속화되어 있는 현상을 기술하기보다 사회 변화의 주체와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예속적일 수밖에 없는 푸코의 주체론과는 큰 차이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만약 ‘포스트-포스트 담론’의 사상가들이 푸코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이들은 (아감벤을 제외하고는) 푸코의 영향을 직접 받았다기보다는, 알튀세를 경유한 푸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새로운 담론을 주도하는 사상가들 가운데 바디우와 랑시에르는 한때 알튀세의 직접적인 제자였다. 이 사상가들에 대한 푸코의 영향이라면 근대적 체제 안에서 자율적 저항 주체 구성의 난점을 일깨웠다는 점일 텐데, 이것은 사실 알튀세의 ‘호명’을 통해 구성되는 주체에서도 나타나는 바이다.

 

좌파 메시아주의

 

진태원이 보기에 지젝, 바디우, 아감벤은 공통적으로 메시아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 진태원이 이들의 관점을 메시아주의적이라고 하는 이유는, “이들이 자본주의 및 자유민주주의 체제와의 급진적이고 전면적인 단절을 주장할 뿐만 아니라, 이를 기독교 전통, 특히 바울의 정치신학 전통에 대한 재독해에 기반하여 혁명적 사건성의 관점에서 해명하려고 하기 때문이다”(183).

 

진태원은 메시아주의적 성격의 사상이 등장하고 유행한 이유로, 자유민주주의가 정치적 위기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지 못했으며 신자유주의 위기 이후 새로운 대안 모색이 필요해진 상황을 들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종말’, ‘단절’, ‘사건’, ‘예외’ 같은 범주에 대해 다시 성찰할 필요가 있었고, 메시아주의가 이를 수행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확증되기 어려운 주장이지만, 일말의 진실이 담겨있는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천년에 맞이한 세기말적 상황에 대한 설명이 필요해진 상황에서, 분석 스펙트럼의 왼쪽을 채운 것은 (현실 운동의 지침이나 대안 사회 이론이라기보다 경제 위기 분석 차원에서의) 마르크스주의와 모종의 급진적 정치신학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고전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의 노동계급 혁명보다, ‘포스트-포스트 담론’의 메시아주의적 입장이 대중에게는 더 매력적인 정치적 대안이 될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메시아주의적 입장에 따르면, 자본주의 파국 속에서도 그 힘을 잃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항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무엇보다, 그들의 사상은 노동자 혁명에 대비한 조직 건설이라는 지난한 과정이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필요한 것은, 예상되는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혁명적 행위를 감행한다는, ‘주체적 결단’이다.

 

진태원이 지적하듯이, 이러한 메시아주의적 정치 철학은 대단히 사변적인 특성을 지니는데, 주로 사변적 역사철학, 정치신학, 문화이론에 집중한다. 이들은 현실의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이나 운동과 조직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들이 수행하는 것은 철학에서, 신학에서, 이론 내에서의 작업이다”(185). 이 문제에 대한 진태원의 세 사상가들에 대한 요약은 다음과 같다.

 

바디우

 

바디우는 “해방의 정치”와 국가를 대립되는 것으로 보고, ‘대상 없는 주체’를 세워야 함을 이야기한다. 그는 기존의 체계적·과학적 사회·경제 구조 분석에 바탕을 둔 마르크스주의적 주체와는 다른 주체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가령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한 프롤레타리아(또는 그것을 대표하는 공산당)는 국가 권력을 장악하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시행한다. 이러한 독재의 목표는 부르주아 국가장치를 파괴하고 프롤레타리아의 권력을 확고히 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국가 자체의 소멸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국가 소멸은 국가 권력의 강화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원래의 목표와는 달리 새로운 국가 정치를 산출하는 데로 귀결하고 만다. (186) 그는 기존의 사회적 조건에서 자유로운 진정한 의미의 주체적 ‘사건’에 부응하는 주체가 확립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진정한 정치의 주체가 대상성 없는 주체라면, 예측과 판단의 가능성조차 상실되기 때문에 그들 정치의 진정성 역시 판단할 수 없는 것이 된다. 결국 이것은 믿음의 문제가 되며, 바디우의 주체는 그의 표현대로 전미래(前未來) 시제[각주:2]로 오는 주체일 수밖에 없다.

 

지젝

 

지젝의 주된 작업은 초기에는 라클라우나 무페와 같은 급진적 민주주의 입장에서 라캉을 원용하여[각주:3] 이데올로기 이론[각주:4]을 쇄신하는 것이었는데, 이후에는 (자본주의 체제 안의) 민주주의 자체가 가지는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비판하는 데에 이른다. “이제 지젝에게는 ...... 자유민주주의 정치체 또는 더 나아가 민주주의라는 상징계 자체를 넘어서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188).[각주:5] 아울러 그는 혁명을 옹호하기 위해 벤야민의 ‘신적 폭력’ 개념을 동원하지만, 그것을 식별할 수 있는 기준은 없다고 보기 때문에 해방을 위한 정치를 어렵게 한다. 그는 "우리의 반대자들이 투쟁의 기준과 주제를 결정하지 못하게 해야한다"(189)면서도, "어떤 폭력이 [정당한] 신적 폭력인지 식별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은 없다."고 덧붙인다. 그는 자코뱅과 코뮌의 폭력과 리우데자네이루의 빈민 폭동은 지지하지만, 2005년 프랑스 방리유의 이민자 폭동과 중국의 문화 대혁명은 신적 폭력이 아니라고도 말한다.

 

아감벤

 

아감벤은 앞의 두 인물에 비해 마르크스주의와 상당한 거리를 가지고 있지만, 급진적 측면에서 뒤지는 것은 아니다. 그는 대표 저작 『호모 사케르』에서 “희생물로 삼을 수는 없지만, 그를 죽인다고 해서 살인죄가 되는 것이 아닌 사람”(191), 즉 신의 법과 인간의 법 모두의 바깥에 있는 인간인 호모 사케르라는 개념을 통해, “근대의 생명정치”에 대해 논한다.[각주:6] 그에 따르면 근대적 인간은 “벌거벗은 생명”을 의미하며, 이들은 권력 장치 속에서 예속화된다. 아감벤의 메시아적 상황과 시간에서 일어나는(혹은 일어나야 하는) 일은 “모든 정체성을 깨뜨리고 그러한 각각의 [법적] 정체성들이 [기존의 억압받던] 자기 자신과 [스스로를] 불일치하게 만드는 일이다”(193). 아감벤에게 계급 없는 사회라는 것 역시 “[배제를 위한] 차이를 만들어내는 [사회] 장치들을 비활성화해 [우리가 가진] 그 차이 자체를 순수한 수단으로 변형하는 방식을 배운 사회이다”(193). 이러한 발상은 현대 철학의 성과를 계승하면서도 대단히 독창적인 것이지만, 이런 새로운 방식을 통한 장치들의 변형을 누가 어떻게, 언제, 어디에서 이루어낼 것인지 해명되지 않는다.

 

빗나간 비판

 

진태원이 보기에는 이러한 ‘포스트-포스트 담론’에 ‘운동권’ 좌파와 급진적 인문사회과학자들이 이들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오히려 ‘포스트-포스트 담론’은 ‘교양’ 대중과 문학·문화이론가들의 관심의 대상이다. 이것은 일면 타당한 지적이기는 하지만, 대체로 포스트-마르크스주의적 입장을 보이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주요 멤버들이 최근 『다시 쓰는 맑스주의 사상사』를 펴내면서 지젝을 포함시켰다는 점을 상기했을 때, 좀 더 면밀한 고려가 필요해 보인다. 사실 진태원이 말하는 ‘급진적 인문사회과학자’의 범위는 다소 불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운동권’ 좌파들 사이에서 이런 사상들에 대한 평가나 토론이 활발히 제시되지 않고 있다는 점은 상당부분 사실로 보이지만 말이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진태원이 지젝, 바디우, 아감벤 등에 관심을 보이는 대중과 이론가들의 정치적 스펙트럼을 자유주의적인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사실 진태원이 보기에는 ‘특이한’ 이런 현상이 「욕망」이라는 글에서 이들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이들에 대한 수용사적 맥락을 고려하게 한 것이다. 「욕망」의 장점과 진태원의 학문적 성실함과 능력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인식에서부터 출발한 「욕망」은 문제를 내재한 것일 수밖에 없다.

 

진태원은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않은 채 지젝, 바디우, 아감벤 등의 지지자들이, 노무현의 열광적 지지자들로, ‘나꼼수’를 들으며 문재인(과 안철수)에게 성원을 보냈다고 주장한다. 이 점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이러한 주장은 대중들의 노무현에 대한 실망과 ‘나꼼수’에 보낸 열광이 보여주는 정치적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욕망」의 말미에서 ‘포스트-포스트 담론’의 문제점이 실천과의 괴리라고 주장하는데, 사실은 「욕망」 자체의 출발점이 현실과 괴리된 것으로 보인다. 진태원에게 문제는, ‘포스트-포스트 담론’의 지지자들이 취하는 모순적 태도의 정치경제적 토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포스트-포스트 담론’의 급진성을 이해하지 못한 데에 있는 것이다.

 

결론에서 성급하게 덧붙여지는 ‘수용사적 맥락’에 대한 고려 역시 이 같은 이데올로기주의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비판적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제시되고 있는 수준에서 “미국을 통해 가공되고 변형되고 수입된 담론”의 문제를 지적하는 데에 그치고 있다. 게다가 이른바 ‘비판적 사유의 미국화’가 인문학의 사회과학과의 단절, 조직적 실천과의 괴리를 낳았다고 하는데,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전혀 드러나지 않고 있다. 마지막에 진태원은 갑작스럽게 ‘포스트-포스트 담론’의 지지자들에게 조언을 던지는데, ‘포스트-포스트 담론’ 사상가들을 급진적 사유 속에 위치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포스트-포스트 담론’과 혁명적 사회주의자

 

우리가 혁명적 사회주의자로 활동하는 데에 있어서, 최근 유행하는 철학자들의 사상을 반드시 하나하나 정확하게 이해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는 서두에서 언급했다. 우리에게 보다 중요한 것은 이 급진적 사상가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왜 그들이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다분히 사변적인 철학에 지지를 보내고 있는가를 파악하는 일이다. 물론, 여기에는 진태원이 지적한 것과 같은 ‘비판적 사유의 미국화’가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그리고 ‘포스트-포스트 담론’의 지지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그들이 지지하는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공산주의’를 공공연히 말하는 ‘포스트-포스트’ 사상가들에 대해서는 열광하는 ‘교양’ 대중들이 고전 마르크스주의에는 그렇게 열광적이지 않을뿐더러, 급진적 정치 실천에는 연루되지 않는 상황은 우리가 주목해야만 하는 사회 현상이다.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자로서, 그 현상의 정치경제적 토대를 탐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토대'는 우리가 변혁적 사회주의자로서 마주하고 극복해야 할 현실의 중요한 측면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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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진태원(2014), 황해문화, 2014 봄, pp. 172-196. [본문으로]
  2. 불어에 존재하는 시제 중 하나로, 미래의 어떤 시점보다 좀 더 앞서 있는 어떤 시점을 가리킨다. 예컨대, “그녀가 돌아올 때쯤이면, 나는 샤워를 끝마쳤을 것이다.”라는 문장에서 그녀가 돌아올 때는 미래 지세이고, 그 미래 이전에 완료될 샤워 행위의 시제는 전(前) 미래 시제이다. 결국 전 미래 시제는 과거와는 전혀 무관한 시제라고 할 수 있다. [본문으로]
  3. 「욕망」에서는 지젝의 사상적 원천으로 라캉과 함께 헤겔을 꼽고 있으나, 지젝의 헤겔에 대한 이해는 표준적인 것에서 대단히 벗어나 있다. 지젝의 헤겔 독해는 해체(구성)적인 것이기 때문에, ‘재독해’라는 단서를 달지 않고 헤겔을 그 사상의 원천으로 꼽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본문으로]
  4. 이데올로기란 무엇이며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떤 구실을 하는가에 대해 다루는 이론 영역이다. 예컨대, 존 몰리뉴는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무엇인가?』, 2장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성에서 그 나름의 이데올로기 이론을 다루고 있다. [본문으로]
  5. 지젝은 라캉의 세계 구성에 대한 철학적 개념들, 곧 상징계(the Symbolic), 상상계(the Imaginary), 실재계(the Real)라는 세 가지 범주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편다. 상징계란, 체스에서 각각의 말이 움직일 수 있는 규칙과 같은 것으로 사람들을 구속한다. 상상계 속에서 사람들은 체스 말 “기사”를 “아줌마”나 “노트북”으로 부를 수도 있고, “기사”가 한 번에 열칸을 움직이는 것으로 가정해볼 수도 있다. 그러나 상상계의 여러 가정은 사회적 차원에서 공유되고 새로운 규칙으로 수용되지 않는 한, 아무 의미가 없다. 실재계는 실제 체스를 두는 현실의 환경이다. 체스의 규칙에 입각해 현실의 게임은 돌아가지만, 각종 우발적 상황에 직면해있다. 예컨대, 갓난 아이의 난입으로 판이 엎어진다거나, 지진이나 게임이 중단된다거나 등. 실제는 상징계가 작동하는 공간이 동시에, 예기치 못한 균열을 내는 곳이다. 9.11 테러라는 실재계의 사건은 자본주의적 상징계에 구멍을 냈다. (이상의 설명은 블로그 <로쟈의 저공비행>(http://blog.aladin.co.kr/mramor/4022350)과 슬라보예 지젝, 박정수 옮김, 『하우 투 리드 라캉』, 웅진지식하우스, 2007의 도움을 받았다.) 그런데, 이런 맥락에서 보면, (자유) 민주주의라는 상징계를 넘어선 새로운 사회 체제 역시 상징계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라캉주의적인 이 개념을 따를 때, 대안적 이념 역시 말로서 표현되고 사회적으로 수용되는 순간 상징계로 편입되는 것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쨌건 지젝은 ‘진정한 행위’를 통해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라는 상징계를 일시적으로 정지시키고, 새로운 사회를 이루어야 함을 주장한다. [본문으로]
  6. 용산 참사의 희생자들은 법적으로 따지면 결코 희생되어서는 안되었던 이들이었다. 언뜻 보기에, 이 사건은 국가권력이 스스로 자신이 만든 법을 어긴 사건이다. 그러나 아감벤에 따르면, 이것은 국가권력의 일시적 일탈이나 도덕적 타락이 아니라 근대 국가권력의 속성 그 자체다. 근대 국가권력의 작동방식은 바로 '법외자(호모 사케르)'를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법외자들에게 법을 초월해 살 수 있는 자유를 준다(신의 법 영역으로 보내준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국가는 법 질서 외부로 이들을 추방하면서도, 법을 집행한다는 미명하에 이들에게 철퇴를 휘두른다. 이주노동자 역시 호모 사케르의 좋은 사례다. 그들은 이미 수십년동안 한국에 살았고 무려 20만이나 되는 숫자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미등록' 노동자들로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이들이 부당 노동행위를 당해 경찰에 신고를 하면, 도리어 법에 의해 이들이 추방될 것이다. 결국 이들은 법외자라는 지위에 있는 탓에, 사장들로부터 온갖 끔찍한 일들을 당하지만 사장들은 이 문제로 처벌받지도 않는다. 근대 국가권력은 이렇게 법 질서의 외부에 있는 방식으로 법질서에 포함되어 있는, 이도저도 아닌 영역을 창출하는 방식으로 작동되어 왔다. 호모 사케르는 모든 권한을 박탈당한 '벌거벗은 생명'이다. 그들은 외부의 존재라는 낙인을 받은 채, 체제 안에서 존재하고 활용 당한다. 국가권력은 이런 생명들을 살리거나 죽도록 내버려 둔다. (“생명의 정치”) 유태인 학살이나 포로 생체 실험 등의 역사적 비극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이상의 요약적 설명은 <수유너머 위클리>에 실린 글, “우리는 정말 호모 사케르인가?”(http://suyunomo.net/?p=4514)의 도움을 받았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