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이 글은 7월 13일에 필자가 개인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나는 일주일전에 국민투표 결과를 평가하는 글에서 ‘그리스에서 전투는 승리했지만 전쟁은 진행중이며 그 끝은 아직 멀었다’고 쓴 바 있다. 하지만 그렇게 쓰면서도, 다음 전투가 이토록 빨리, 그리고 쉽게 패색이 짙어질 줄은 몰랐다. 국민투표 승리 결과에 고무돼 좀 더 냉정하게 전망하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어제 굴욕적인 그리스 3차 구제금융안이 유로존 정상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그 내용에는 사실상 그리스의 ‘재정주권’을 박탈하는 내용까지 포함돼 있다. 그리스에 대한 트로이카의 ‘신탁통치’와 ‘재정적 물고문’을 오히려 강화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럽연합 지배자들의 제국주의적 복수이며, 폴 크루그먼도 말했듯이 그리스 민중의 민주적 의사를 보란듯이 짓밟은 ‘쿠데타’라 할만하다. 그리스 민중의 ‘NO’가 위대했고 큰 파장을 낳은만큼, 유럽 지배자들은 더 강력한 복수가 절실했던 것 같다.
‘NO'라는 함성과 저항 정신이 유럽 곳곳으로 더 번져가기 전에 희망 바이러스를 격리, 차단, 박멸하는 게 급했던 것이다. ‘긴축과 구조조정을 중단하느니 차라리 그렉시트를 불사하겠다’는 메르켈이 냉혹하고 단호한 자세로 이 ‘7.13 쿠데타’의 총대를 맺다.
충격적이게도 그리스 총리 치프라스가 비굴하게 무릎을 꿇으며 메르켈과 트로이카의 지원병이 됐다. 치프라스는, 그 열악하고 엄혹한 조건에서도 용기있게 NO라고 답하며 자신에게 승리를 안겨 준 그리스 민중의 뒤통수를 쳤다.
‘이럴거면 투표는 왜 한 것인가?’라는 의문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그는 ‘트로이카의 공갈협박에 민주주의의 응답을 보내자’더니, 그리스 민중이 보내 준 그 응답을 일주일만에 휴지통에 던져버렸다.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이긴커녕 '가장 한심한 사람'이 되길 스스로 선택했다.
이미 시리자 다수파는 며칠 전 의회에서 신민주당, 사회당, 포타미 등과 손잡고 트로이카의 긴축안보다 더 심하다는 자체긴축안을 통과시키면서 ‘국민 연합’을 이루었다. 이것은 시리자의 ‘유로존 안에서 개혁을 추구한다’는 전략과 ‘협상 압박용으로서 국민투표’ 전술이 결합돼서 낳은 최악의 결과로 보인다.
국민투표에서 나타난 분노와 용기를 강력한 투쟁으로 발전시키는 게 아니라, 유로존에 남기 위해 긴축을 수용하며 그 열기에 찬물을 끼얹고 있으니 말이다. 노예 신분을 벗어날 생각이 없다면서 조건을 개선해달라는 노예를 두려워하는 노예주는 없는 법이었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유럽연합과 유로존의 본질과 한계를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이 신자유주의적 구조물과 민주주의, 사회정의, 인간다운 삶은 역시 양립하기 어려웠다. 두 가지가 양립 가능하다던 치프라스는 결국 후자를 점점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좋은 유로’라는 신화는 다시 한번 산산조각났다.
일부 사람들은 ‘경제가 파탄나기 직전이었고 대안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시리자 안팎의 좌파가 주장해 온 ‘유로존 이탈을 불사하는 민중적 디폴트’가 가능하고 필요했다. 실제로 채무 불이행, 은행 국유화, 자본 통제, 공공적 투자만이 지금의 고통을 개선할 수 있다. 그럴때만 당장의 유동성 위기와 인도주의적 재난 상황을 벗어날 수 있다. 소수가 독점하고 빼돌려 온 자원과 부를 필요한 곳으로 돌릴 수 있다.
또 실업 상태인 50%의 청년들이 사회적 생산에 참여할 수 있고, 그 결과 생산이 활성화되면서 경제침체를 벗어날 가능성이 생길 수 있다. 이것은 지금 당장 사회주의 혁명을 했어야 한다는 식의 무모한 주장이 아니었고, 심지어 치프라스 자신의 공약에 상당부분 포함돼 있던 것이기도 하다.
시리자를 넘어서야
이런 방향으로 움직이며 토론해 나간다면, 이미 갈수록 커지고 있던 ‘유로존 이탈은 불가피하다’ 그리스 민중의 여론은 더욱 확대됐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자본가, 지배자들의 이윤과 통제권을 크게 위협하는 노선이다.
그리고 아직 2008년 경제위기를 벗어나지 못한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적 유럽연합은 이것을 조금치도 허용할 생각이 없었다. 결국 이런 ‘개혁’을 위해서조차 지배자들의 이윤과 통제권에 도전한다는 전략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서는 기층 대중의 거대한 행동을 고무해야 했다.
하지만 시리자의 주도세력은 이 점에서 명확하지 않았다. 시리자는 단순한 개혁주의는 아니었고 그 내부에 혁명적 좌파도 포함하고 있는 급진좌파이다. 대중투쟁의 성과로 집권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리자 지도부는 전략적 모호함을 유지해 왔다.
시간이 갈수록 시리자 지도부는, 좌파정부를 수립하고 그 정부의 재협상을 통해서 상황을 바꾸는데 주안점을 뒀다. 그리고 이런 방향과 전략은 지금 파산하고 있는 중이다. 세상을 바꿀 진정한 힘은 위로부터 국가기구나 직업정치인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대중의 행동과 민주주의에 있다는 것이 다시 분명해졌다.
이제 중요한 것은 시리자 안팎 좌파의 태도인 것 같다. 시리자 내부의 강경파인 ‘좌파플랫폼’, 시리자 밖의 반자본주의 연합체인 ‘안타르시아’, 공산당 등 각종 극좌파 조직과 활동가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방송에서 YES를 10배나 더 많이 보도하는 속에서도, 힘을 모아 기층에서 선동하며 NO의 승리에 기여한 바 있다.(아쉽게도 그리스 공산당은 지난 국민투표를 회피했다. 그럼에도 그리스 공산당 지지자의 압도다수는 NO에 투표했다고 한다.)
특히 시리자 내부 좌파들은 이제 시리자를 넘어서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이미 지난 10일 의회에서 자체긴축안에 17명의 시리자 좌파 의원이 사실상 반대(결석과 기권을 포함해서)했다. 유로그룹과 합의안에 대한 15일 투표에서는 더 많은 반대표가 나와야 한다.
긴축안에는 반대하지만 시리자 정부를 지키기 위해 찬성표를 던지는 우유부단한 태도는 없어야 한다. 시리자 정부는 긴축 중단을 위한 수단이었지 목적이 아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장관직 등을 사임하며 긴축을 추진하는 시리자 정부와 과감히 단절해야 한다.
공공부문노총(ADEDY)이 주도하는 항의 총파업 건설에서도 시리자 안팎의 좌파와 활동가들이 함께 힘을 모아서 앞장서야 한다. 시리자에 실망하고 이탈하는 과정에서 기층 민중의 분노와 투지가 환멸 속에 가라앉거나 흩어지지 않도록 정치적 대안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치프라스의 긴축안에 반대표를 던지며 다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황금새벽당을 같이 막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극좌파들의 전략적 분화와 재편은 필요할뿐 아니라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 민중은 지난 반세기 동안 나치에 맞서, 군주제에 맞서, 군사독재에 맞서 굴하지 않고 싸워서 결국 승리했다. 이제 그들은 야만과 재앙을 강요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도 결코 쉽게 무릎 꿇지 않을 것이다. NO!의 외침과 투쟁과 연대는 계속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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