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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과 주장

노무현의 잃어버린 꿈과 ‘진보의 미래’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5. 5. 25.

전지윤

 

이 글은 <진보의 미래 - 다음 세대를 위한 민주주의 교과서>(노무현 지음, 동녘, 2009)를 서평하는 형식으로 쓰여졌고, <마르크스21> 2010년 봄호에 처음으로 실렸던 글을 약간 다듬은 것이다. 이 글에 원래 있었던 각주는 모두 생략했다.

 

2009523일 아침, 노무현 전 대통령(이하 존칭 생략)이 고향집 뒷산에서 스스로 몸을 던져 사망했다는 소식은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안겼다. 바로 얼마 전에 최고 권력자의 위치에 있던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비극적 죽음은 곧바로 노무현은 죽은 게 아니라 죽임을 당한 것이고 이명박 정부가 노무현을 죽였다는 반응을 불러 왔다. 실제로 2008년 말부터 본격화된 박연차 게이트 수사가 노무현을 낭떠러지 절벽 끝으로 내몬 셈이었다. ‘노무현 후견인박연차에 대한 수사는 노무현과 그 지지자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이를 통해 노무현 지지자들의 정치적 정당성을 훼손하고 자신감을 떨어뜨리려 했다. 노무현의 지지자들은 반이명박 진영의 핵심적 일부였고, 이명박에 대한 불만과 분노가 노무현에 대한 향수를 조금씩 되살리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촛불항쟁으로 퇴진 위기까지 내몰렸던 이명박 정부는 독기를 품고 필사적 공격에 나섰고, 오랫동안 노무현을 탐탁치 않게 여겼던 주류 지배자들도 냉정한 태도로 그것을 지원했다. 검찰의 피의사실 공개와 조중동의 선정적 보도에 의해 노무현은 파렴치한 잡범으로 내몰렸고, 그의 위신은 만신창이가 됐다. 따갑고 냉랭해진 시선들 속에 괴로워하던 노무현은 수사의 칼날이 자신의 아내와 자식까지 건드리기 시작하는 순간 결국 목숨을 던졌다.


이 비극적인 죽음은 지못미’(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열풍을 일으켰다. 사람들은 인정머리 없는 이명박 정부가 온갖 악독한 정책들로 보통 사람들을 못 살게 굴뿐만 아니라 심지어 전직 대통령까지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분노했다.


그래서 무려 연인원 5백만 명이 노무현을 조문했고 노제 때는 무려 50만여 명이 모여서 눈물을 흘렸다. 이 거대한 추모 물결 속에는 명백히 이명박 정부에 대한 원한과 증오가 담겨 있었다. 사람들은 그동안 너무 힘들었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 없다는 노무현의 유서를 통해 자신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돌아 봤다.


사람들은 노무현의 생명뿐 아니라 무엇보다 이명박 정부 아래서 후퇴하고 있는 민주주의개혁평화사회정의 등을 지켜 주지 못해서 미안해하며 견딜 수 없이 슬퍼했다바로 1년반 전에 수많은 사람들이 노무현에 대한 환멸에 휩싸였고 그 덕분에 이명박이 어부지리를 얻어 대통령이 된 것을 떠올려 보면 이것은 매우 역설적인 일이었다


그때 만해도 많은 사람들은 변화와 개혁의 약속을 어기고 이라크 파병과 한미FTA 추진 등을 일삼은 노무현 정부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서 2007년초 한국 갤럽 여론조사에서는 ‘2002년에 노무현에게 투표한 것을 후회한다는 사람이 61퍼센트였고, ‘2007년 대선에서 노무현이 미는 후보는 지지하지 않겠다는 답이 74퍼센트에 달할 정도였다.


그러나 조문 정국 속에서 노무현에 대한 이런 부정적 기억은 거의 부각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사람들은 노무현에 대한 기억을 재구성하고 있다. 이라크 파병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추진은 그와 분리되고, 그는 인간성, 진보, 정의를 상징하는 표상이 되고 있다고 할만했다. 심지어 진보진영 일부도 그런 기억의 재구성에 함께 했다


박경순 민주노동당 새세상연구소 부소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러한 정경유착, 금권 정치, 부패정치와의 비타협적인 투쟁을 펼쳐왔던 사람이라고 평가했고,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는 역사는 노무현 전대통령을 한국의 민주주의를 한 단계 성숙시킨 주역으로 평가할 것이라고 했다.


'폐족'으로 몰렸던 노무현의 후계자들은 이런 분위기를 이용해서 정치적 부활을 추진했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한명숙(서울시장), 유시민(경기도지사), 이광재(강원도지사), 안희정(충남도지사) 등 친노 정치인들이 민주당 또는 국민참여당 후보로 대거 출마했다


<노무현 재단>도 전시회, 추모 심포지움, 콘서트, 서적 발간 등을 통해 노무현 추모 열기를 불러일으켰다. 노무현의 후계자들이 주도하는 이런 추모 분위기 속에서 노무현은 대체로 민주주의와 개혁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순교자로 그려졌다.

 

노무현 당선 직전에 있었던 여중생 미군 탱크 압사 항의 시위 



쓰라린 기억과 진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시류에 편승할 수 없고 망각에 맞서 쓰라린 기억과 진실을 말해야 한다. 임종인 전 열우당 의원은 2008년 이명박 정부에 대한 반감 속에 일부에서 노무현에 대한 환상을 되살리려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노 대통령에 대해 이야기할 때 대통령 재임기간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후보 때와 퇴임 후 애 데리고 자전거 타고 다니는 것, 농사짓는 것. 진보에 대해 생각했다는 이야기만 나온다. 그러나 [노무현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그가] 재임중에 어떻게 했나를 봐야 한다.”


그렇다면 노무현은 재임중에 무엇을 어떻게 했는가? 일부 개혁도 추진했지만 주되게는 잘못된 신자유주의친제국주의 정책을 추진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노무현은 우파와도 손을 잡았다. 이라크 파병과 한미FTA의 가장 적극적인 지지자는 조중동과 한나라당 등 우파들이었다


예컨대 한미FTA 협상이 타결됐을 때 극우익 조갑제는 노 대통령과 같은 저항과 도전 정신의 소유자는 기득권자와 싸울 때 사명감이 생겨서 용감해지고 때로는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한다며 노무현을 찬양했다.


노무현 정부는 이런 정책 추진에 맞서는 노동계급과 피억압 민중의 저항을 탄압으로 억눌렀다. 경찰력과 특공대를 투입한 파업 파괴도 서슴지 않았고 5년 동안 구속된 노동자 숫자는 김영삼, 김대중 정부때보다 훨씬 늘어나 1천여 명에 달했다


집시법 개악과 인터넷과 휴대전화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강화하는 통신질서보호법, 정보통신망법 등을 추진했고 국가보안법을 이용해 이른바 일심회에 대한 마녀사냥까지 했다결국 노무현이 재임중에 한 일은 이후 우파 정권이 하고 있는 일들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박노자 교수는 이렇게 지적했다


이번 [이명박] 정권의 대부분의 행동은 이미 김대중, 노무현 정권 시절에 다 그 '기초'를 닦아놓은 것이었습니다. 파병이나 각종의 무리한 재개발부터 말씀입니다. 정치적 역학관계에서 이명박이 노무현의 정적이지만, 경제, 사회 정책의 차원에서는 많은 면에서 계승자에 가깝습니다.”


박노자 교수는 노무현 정부의 등장에 큰 기대와 희망을 걸었다가 쓰라린 배신감을 맛 본 사람중의 하나다. 그는 이렇게 토로한다


“2002년 벽두에, 저는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든 대한민국이 무한히 자랑스러웠습니다. 노무현의 한국은 그 당시로서 왠지 희망의 오아시스로까지 느껴진 부분은 있었지요. 그러나 그 뒤로는 가슴 아픈 일이 하도 많아 그 때 그 감동은 결국 여지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라크 파병과 김선일의 죽음 이후에는 제게 노무현이란 더이상 그 어떤 의미 있는존재는 아니었습니다.”


노무현도 사람들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배신감을 느끼는지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노무현은 나중에 확실하게 저한테 속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이라크 파병할 때 그렇게 느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또 한미FTA를 추진할 때도 자신이 지지자를 배신하면서 국가를 위한 결단을 내렸다고 말했다.


그 결과로 노무현의 지지기반은 해체됐다. 수많은 사람들이 노무현에게 환멸과 냉소를 나타냈고, 그런 싸늘한 눈초리를 피하기 위해 노무현이 만든 당과 그 당의 정치인들은 노무현과 애써 거리두기를 했다. 그럼에도 결국 노무현의 후계자들은 권력 연장에 실패했고, 부패한 우파가 노무현의 자리를 되찾아 갔다. 노무현은 실패한 정치인이 됐다.

 

실패 이야기

 

진보의 미래 - 다음 세대를 위한 민주주의 교과서는 이처럼 실패한 정치인 노무현이 쓰거나 말한 것들을 묶어 낸 책이다. 이 책의 구상은 노무현에게 권력을 넘겨받은 이명박이 촛불항쟁에 부딪혀 휘청거리다가 겨우 균형을 잡아나가던 시기에 시작됐다.


지난해[2008] 10월 어느 날. 노무현 대통령이 몇 명의 참모를 부릅니다. 좋은 책을 내보자고 말합니다.”


아마 노무현은 촛불항쟁이 보여 준 가능성을 보며 자신이 입지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노무현에게는 곧 박연차 게이트 수사라는 시련이 닥친다. 박연차 게이트 수사는 실패한 정치인 노무현에게 부패한 정치인이라는 이미지까지 덧씌웠다. 이 상황에서 노무현이 느낀 낭패감과 자괴감은 컷을 것이다실제로 노무현은 당시 이렇게 한탄했다


정치, 하지마라 얻을 수 있는 것에 비하여 잃어야 하는 것이 너무 크기 때문 또렷하게 남아 있는 것은 실패의 기록 뿐, 우리가 추구하던 목표는 그냥 저 멀리 있을 뿐 감당하기 어려운 난관과 부담이 기다리고 있다. 바로 거짓말의 수렁, 정치자금의 수렁, 사생활 검증의 수렁, 이전투구의 수렁, 이런 수렁들을 지나가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수렁[돈의 수렁]에 빠져서 정치 생명을 마감한다.”


나아가 노무현은 목숨을 던지기 사흘 전에 쓴 한 글에서 지금은 할 수 있는 일이 실패 이야기를 쓰는 것이 맞는 것 같다고 했다진보의 미래는 그 실패 이야기중의 하나다


지난해[2008] 12, 대통령의 연구에 시련이 닥쳤습니다. 그해 겨울, 방문객들과의 만남을 끊었습니다. 사저로 찾아오려는 사람들의 접견도 끊었습니다. 대신 연구에 더 몰두했습니다. 이 책의 많은 분량은 그 시기에 집필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한 개혁주의 정치인이 털어놓는 실패의 기록이며, 또한 변명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노무현이 내세운 개혁이 왜 실패했는지, 그는 왜 지지자들을 배신할 수밖에 없었는지 해명할 수 있는 단초를 찾아 볼 수 있다이 책에서 노무현은 자신이 지지자들의 기대를 져버리고 정당성없는 정책들을 추진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


나는 분배는 제대로 해 보지도 못하고 분배 정부라고 몰매만 맞았던 불행한 대통령이다. 그러다 언론과 대중적 분위기 같은 거 눈치 살피려고 [기업들] 세금이나 깎아주고


신자유주의 패키지 안에 있는 절반, 상당히 많은 패키지를 김대중과 노무현이 채택을 해버렸다 이 말입니다. 우리를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은 신자유주의 하면 이를 가는데, 김대중·노무현이는 수용해 버렸다 이겁니다.”


우리가 진짜 무너진 건, 그 핵심은 노동이에요. 핵심적으로 아주 중요한 벽이 무너진 것은 노동의 유연성을, 우리가 정리해고를 받아들인 것이에요.”


근데 이라크에 파병했죠. 그죠? 그것 말고도 국가적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말하는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을 한 게 있을 거에요.”


이런 정책들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도 노무현은 잘 알았을 것이다. “빈부 격차의 원인을 우리나라에서 얘기하면 노동의 유연화라는 게 굉장히 크게 작용하고 있거든요. 정규직 일자리 점점 줄이고 해고하고, 그렇게 해서 임시직으로 일용직으로 점차 비정규직으로 떨어지니까 빈부 격차가 생기는 거죠.”


실제로 노무현 정부 5년 동안 빈부격차와 양극화는 크게 늘어났다. 결국 분배는 하지도 못한 채 기업주들 세금이나 깍아주고,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이고 이라크에 파병하면서 빈부격차를 확대해 온 것이 노무현 정부가 5년 동안 한 일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가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기준으로 적합한 것은 아니라며 애써 자신을 진보로 구분하려는 노무현의 시도는 설득력이 없다. 기업의 이윤만을 위해 모든 소중한 가치들을 파괴하는 신자유주의를 수용하면서 진보를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배신의 이유

 

그러면 왜 노무현은 지지자들을 배신한 것일까? 노무현은 김대중·노무현이 진보주의를 배신했다면 배신할 수밖에 없었던 환경이 있었던 것 아니냐고 변명한다. 그리고 그 배신할 수 밖에 없었던 환경을 만든 책임을 평범한 사람들에게 떠넘긴다.


나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나는 경제 문제에 파묻혀 버렸다. 사람들의 관심은 경제에만 쏠렸다. 나의 외람된 시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내가 대통령이 되고나자 민주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오늘날 우리 국민은 정책이 아니라 감정적 판단으로 선택을 한다.”


난 대통령이 혼자서 하는 게 아니란 얘길 해주고 싶어요. 변명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의 보편적인 생각이 정책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얘길 하고 싶은 것이죠.”


이것은 민주주의나 사회 정의 등에는 별 관심이 없고 경제에만 관심이 있는 국민들 때문에 자신이 개혁을 추진하기 힘들었고 경제 논리와 신자유주의에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것은 비겁한 변명이다. 사람들이 민주주의와 사회 정의 등에 관심이 없었다면 2002년에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이 민주주의에 관심이 없었다면 2004년 우파의 노무현 탄핵 시도에 수십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파에 맞서 민주주의와 사회 정의를 지켜야 한다는 열망 속에서 치러진 200417대 총선에서 사람들은 변화와 개혁을 추진하라고 노무현의 열린우리당에게 국회 과반 의석을 선물해 주었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는 이런 기대와 지지에 힘입어 변화와 개혁을 추진하기보다는 오히려 우파와 손 잡고 이라크 파병, 비정규직 악법, 한미FTA 등 반민주적 개악들을 추진했다. 따라서 민주주의와 사회 정의에 관심이 없어졌던 것은 압도적인 전쟁 반대 여론을 무릎쓰고 이라크 파병을 추진한 노무현 정부였지 그것을 반대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노무현에게 등을 돌린 것은 노무현이 잘못된 정책을 통해 민주주의와 사회 정의를 내던졌기 때문이었지, 사람들이 민주주의와 사회 정의에서 멀어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경제 살리기를 내세운 우파가 득세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배신이 낳은 환멸과 냉소의 결과였다.


그러면 노무현은 왜 개혁과 진보를 바라는 사람들의 열망을 져버렸을까? 그것은 그가 자본주의 국가에서 선출되지 않은 진정한 권력자인 재벌, 고위 관료 등의 압력에 굴복했기 때문이다. 노무현도 이 과정을 일부 설명하고 묘사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관료들을 배제하곤 정부가 돌아가지 않아요. 관료들은 하나의 권력이죠.”


국가 고위 관료들은 대개 정권을 뛰어넘어서 권력을 유지한다. ‘직업이 장·차관이라고 할만큼 정권을 뛰어넘어서 주요 요직을 차지하며 주요한 결정권과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가 관료들이 수두룩하다. 예컨대 이명박 정부의 기획재정부 장관인 윤증현은 노무현 정부 때 금감위원장이었고, 김영삼 정부 때는 금융정책실장이었다. 그리고 이런 국가 고위 관료들은 노무현 정부로 하여금 재벌과 기업주들을 위한 정책을 받아들이도록 압박을 가했다.


“‘정리해고? 그게 무슨 소리야. 정리해고 안 돼이러면 그게 어찌 말이 되느냐, 그럼 회사가 부도나는데?’ 이렇게 됩니다. 인수위(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때 처음에 아 우리 자본이 빠져나가면 큰일인데, 외국 자본 빠져나가면 큰일인데이래서 날 암참(주한미국상공회의소)데리고 간 거 아니오? 노동의 유연화, 가서 얘기하라고 써놨더구만요. 거기 가서 한 게 노사분규 없도록 하겠다. 규제를 최대한 줄이겠다. 또 기업하기 좋은 나라 만들겠다. 그런 얘기했죠? 그 뒤에도 이제 법인세 감세했거든요? 관료들이 감세안을 가지고 와서 밀어붙였는데 청와대에서도 국회에서도 아무도 방어해 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이것은 국민들이 선출한 대통령이 선출되지 않은 국가 고위 관료들의 압박을 받아서 그들의 지시에 따라 행동했다는 실토이다. 마르크스주의자인 크리스 하먼은 자본주의에서 지도적 국가 관료 계층은 자본주의적 착취와 축적의 성공 여부에 의존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왜냐하면 국가 관료의 특권과 역할 유지에 필요한 재원들이 착취와 축적의 성공 여부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 관료는 자본 축적의 대행자 노릇을 한다는 것이다. 이들 자본 축적의 대행자들이 노무현에게 한국에 투자한 미국 자본가들 앞에서 그들이 안심할만한 신호를 보내야 한다고 요구했고, 노무현은 이에 순순히 따랐던 것이다.


이 사례는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우리가 선출하는 대통령이 아니라 선출되지 않은 국가 고위 관료들에게 진정한 결정권이 있고 개혁적인 정부가 들어서도 이들의 압력에 따르기 십상 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한겨레> 곽정수 기자도 이렇게 회고한다.


“2003년 초 참여정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시절 일화다. 한 기자가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고위 관료에게 은근한 말투로 물었다. ‘개혁성향의 노무현 정부가 들어섰으니 이제 (관료들) 좋은 시절도 다 지나간 것 같은데.’ 하지만 다음 순간 돌아온 답변에 기자는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걱정 말어. 우리는 민주노동당이 집권해도 다 적응할 수 있으니. 아마 6개월 뒤에는 우리 세상이 돼 있을걸.’ 실제 그의 말대로 6개월은 아니지만, 2년 정도 지나자 참여정부의 주도권은 다시 관료들에게 넘어갔다.”

 

경제적 강압

 

그런데 앞서의 사례에서 노무현을 압박한 관료들의 논리는 매우 시사적이다. “우리 자본이 빠져나가면 큰일인데, 외국 자본 빠져나가면 큰일인데라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은 관료들과 함께 노무현을 압박한 재벌과 대기업주들의 논리이자 행동이었다.


사회학자 이종보는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 모두 집권 초기에 재벌들의 설비투자가 줄어들었던 사실을 제시하며 재벌들이 재벌개혁을 표방한 정부의 집권 초기에 설비투자를 줄여 놓다가 재벌 정책의 완화를 지켜보면서 설비투자를 늘린 것은 우연이 아니다하고 주장한다. 재벌들이 자본 파업을 통해 개혁을 표방한 정부를 압박하고 길들였다는 말이다.


노무현 정부도 초기부터 재벌들의 집요한 공격을 받았다. 전경련 상무 김석중은 노무현의 인수위원회 시절에 <뉴욕타임즈>와 인터뷰에서 그들[노무현 정부]의 목표는 사회주의적이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고 말하며 새 정부를 공격했다. 한나라당과 조중동은 그런 압박을 거들었다.


재벌과 고위 관료, 우파 들의 이런 압박 속에서 노무현 정부가 원래 내세웠던 변화와 개혁의 약속은 금새 사라졌고 반면에 재벌과 기득권 세력들이 환영할만한 정책들이 전면에 등장했다. 노무현은 외국에 나와 보니 기업이 바로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거나, “머릿 속에 기업을 어떻게 도와줄까 생각하고 있다라며 친기업적 발언들을 쏟아냈다.


이런 변화는 인사 정책에도 반영됐다. 집권 2년차로 들어서면서 노무현 정부의 내각과 청와대에서도 “386 참모진과 측근들은 힘을 잃었[고 그 자리를] 테크노크라트, 중도보수 성향의 사회 주류측 인사들이 차지했다.”


열린우리당의 386 국회의원들은 삼성경제연구소와 함께 세미나와 심포지엄을 하며 과외를 받기 시작했고, 삼성경제연구소가 제안한 기업하기 좋은 나라’, ‘2만 달러 시대’, ‘동북아금융허브등은 바로 노무현 정부의 핵심 국가 정책과 슬로건이 됐다. 그야말로 “2003년 인수위 시절부터 최근 한미 FTA 추진에 이르기까지 노무현 정부 핵심정책의 이면에는 삼성경제연구소의 보고서가 있다고 할 정도였다.


이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혁을 약속하며 선출된 정부가 선출되지 않은 진정한 권력자들의 압박에 굴복해 개혁을 포기하고 오히려 개악을 추진한 사례는 아주 흔하다.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개혁적인 정부가 금융시장에서 일시에 돈이 빠져나가 버리는 것과 같은 경제적 압박에 의해 좌절한다는 얘기는 사회민주주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 된 얘기라고 말한다.


1964년에 집권한 영국 노동당의 헤롤드 윌슨 수상이 영국은행 총재 크로머의 공공지출 삭감 요구에 굴복한 사례는 유명하다. 해롤드 윌슨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나는 총재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어떠한 정부도 그 당의 이름이야 무엇이고 또 선거전에서 내세었던 당의 강령이나 정책이 무엇이고 관계없이 즉각 보수당의 정책으로 전면 전환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뜻이냐고. 그러자 총재는 결정적인 경제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의 경제적 강압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정적인 경제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의 경제적 강압때문에 설사 노동자 정당이 선거에서 승리해 정권을 잡더라도 자본주의 국가를 통해서는 의미있는 진보와 개혁을 추진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물론 노무현과 그의 당은 노동당이나 사민당처럼 노동자들에 기반한 세력은 아니었다. 노무현의 정부와 당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 참여연대, 민변, 민주노총 등 시민사회단체 출신 인사들이 일부 있었던 것이 보여 주듯이 노무현 정부는 NGO·노동조합 지도자에게도 일부 기반을 두는 포퓰리즘적 성격을 가졌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의 주된 기반은 분명히 재벌과 기업주 등에게 있었다. , 인력, 자원이 여기서 주되게 충원됐다. 노무현은 우리가 정권을 두 번이나 잡으니까 전부 우리가 다수파인 줄 알고 있는데, 그건 택도 없는 소리이고 “[우리는] 소수파 정권이었다고 말하는데 노무현 정부는 소수파이긴 했지만 분명히 지배계급의 일부였다.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 캠프가 재벌들에게 받은 대선자금이 규모는 검찰 수사를 통해 밝혀진 것만 11362백만 원에 달했는데 이것은 노무현 캠프가 희망돼지저금통을 통해 소액후원자들에게 받은 76천만 원의 열배가 넘는 규모였다.


삼성전자 사장 출신인 진대제는 노무현 정부에서 정보통신부 장관을 거쳐 열린우리당의 경기도지사 후보로 출마했고, 현대캐피탈 회장 출신인 이계안은 열린우리당 정책조정위원장이었다. 중앙일보 회장 출신 홍석현은 주미대사로 임명됐고 삼성경제연구소 전무 출신인 이언오는 국가정보원의 국가정보관으로 채용됐다. 2006년 지방선거 때는 삼성, 현대, 엘지 등 3대 재벌의 전현직 CEO들이 열린우리당의 시장 후보로 떠오르기도 했다.


이처럼 비록 다수파가 아닌 소수파이긴 했지만 마찬가지로 지배계급에 기반한 세력이었기 때문에 노무현의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사이에서 주요 정책의 차이는 크지 않았다. 그래서 노무현도 20057월에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하면서 두 당이 실제로는 정책 차이가 그리 크지 않다고 했다


이처럼 지배계급에 기반한 정치세력이었기 때문에 노무현 정부는 그토록 재빠르고 민감하게 지배계급의 압박에 반응해 알량한 개혁 조처들조차 포기해 버리고 신자유주의·친제국주의적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따라서 노무현 정부가 지지자들의 기대와 희망을 거스르는 과정은 곧 사람들의 희망섞인 기대와 우파들의 과장된 비난에 가려 져 있던 노무현 정부의 한계가 드러나는 과정이기도 했다.

 

3의 길

 

하지만 진보의 미래에서는 노무현이 내세운 개혁이 왜 실패했는지, 그가 왜 지지자들을 배신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이와 같은 해답을 찾아 볼 수 없다. 이 책에서 노무현은 나름대로 솔직한 토로를 하고 약간의 후회도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럴 거 없이 색연필 들고 쫙 그어 버렸으면 되는 건데...‘무슨 소리야 이거. 복지비 그냥 올해까지 30프로, 내년까지 40프로, 내후년까지 50프로 올려.’ 그냥 쫙 그어 버렸어야 되는데, 앉아서 이거 몇 프로 올랐어요?’ 했으니 그리 했으면 되는 건지 안 되는 건지, 아직도 잘은 모르겠어요.”


하지만 대체로 그는 사람들의 의식이 낮아서 자신이 개혁을 추진할 수 없었다는 군색한 변명을 거듭 늘어 놓는다. “결국 정권이 바뀌어서 세상이 달라질 것을 기대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각을 먼저 바꾸어서 정권을 바꾸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맞는 길인 것 같다.”


따라서 이런 변명과 후회로 채워진 이 책에서 노무현이 제시하는 진보의 미래는 이미 자신이 5년 동안 집권하면서 실패한 길을 다시 내놓는 것에 그친다. 그는 진보진영도 수용할 것은 수용하고, 수용의 정도를 가지고 타협할 것은 타협하는 것이 현명한 전략이라고 하면서 대체적으로 제 3의 길이 대세인 것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제3의 길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굴복일 뿐이다. 페리 앤더슨도 3의 길은 현 시기 신자유주의의 최선의 이데올로기적 외피라고 지적한다노무현도 유럽의 진보주의 정부들, 이른바 제3의 길이라고 불리는 정권 아래에서도 정부혁신, 구조조정, 아웃소싱, 민영화, 규제 완화, 노동의 유연화, 개방 등을 받아들였다고 인정한다.


3의 길 정부와 신자유주의 우파 정부 사이의 차이는 별로 없다. 노무현도 진보주의 대안을 얘기하려고 하니까 대안은 결국 보수주의 대안하고 크게 다르지 않게 생각될 수도 있겠네요하고 말한다노무현이 이처럼 보수주의 대안과 크게 다르지 않은것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이유는 신자유주의의 대안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몇몇 부분에 대해서 타협을 하고 들어간 것이 3의 길아니에요. 그죠? 대안이 없지 않냐? 이런 거지


우리 대답은 이거다 하고 나가야 되거든요. 그래야 되는데 신통한 게 없어요.”


왜 대안이 없는가? 그것은 시장의 힘을 이길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간 건 사실이거든요. 한계가 있다. 국가가 가지고 있는 그물이 시장의 고래 힘을 못 이긴다. 지금 내 얘긴 그거거든요.”


따라서 시장을 거부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진보주의에 어디 시장과 경쟁을 딱 반대하는 사람이, 딱 반대하는 논리가 있습니까? 이건 정리된 거거든요.”


그러나 시장의 힘은 거역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시장과 이윤의 논리에 따라 끊임없이 노동계급과 피억압 민중을 공격하지만 노동계급과 파억압 민중의 성공적 저항은 그런 공격을 막아낼 수 있다2004년에 노무현이 우파들의 탄핵 시도에서 살아난 것도 바로 이러한 저항의 힘입은 것이었다. 하지만 자본주의 국가의 수장이자 기성정당의 정치인으로서 노무현은 그러 저항을 고무하거나 그런 저항에 의존해 시장의 힘에 맞서려 하지 않았다.

 

아래로부터 저항

 

노무현은 오히려 이런 저항의 힘이 자신의 신자유주의·친제국주의 정책을 막아설까봐 두려워 했다. 탄핵 반대 촛불시위 때도 난 촛불 시위하는 사람들 보면 한숨이 팍팍 나온다, 저 사람들이 나중에 용산기지 이전 반대 시위도 할 사람들인데 저걸 어떻게 말리나하는 게 노무현의 걱정이었다고 한다


노무현은 퇴임 후에도 2004년 탄핵 때를 회상하면서 한밤 중에 청와대 뒷산에 올라가 그 거대한 촛불의 물결을 봤습니다.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하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노무현은 집권 내내 노동자 파업 등 신자유주의·친제국주의 정책에 맞서는 저항을 탄압했다.


진보의 미래에서도 노무현은 노동자 투쟁을 비난한다. “대책 없는 요구를 하고 대책 없이 싸우니까 결국은 아무것도 들어 줄 수 없고 안 들어 주니까 이제 적대화되고, 결국은 김대중·노무현마저 노동조합하고는 적이 되고 말았으니 노조를 밀어 주겠다는 사람들이 무슨 힘을 쓸 수가 있겠어요?”


아래로부터 저항에 대한 이런 적대적 태도는 퇴임 이후에도 여전했다. 2008년에 이명박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촛불항쟁이라는 저항에 부딪혀 좌초하고 있을 때, 노무현은 아래로부터 저항의 편이 아니라 이명박 정부의 편에 섰다. 수십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서 청와대로 행진하며 이명박 퇴진을 외칠 때 노무현은 그것에 찬물을 끼얹는 발언을 했다.


청와대로 행진하는 그거요. 저도 청와대에 살아봤는데, 그거요 겁은 안 나고 기분은 되게 나쁘고 그리고 별 소득이 없어요. 저는 청와대로 행진하는 그건 안했으면 좋겠어요. 쇠고기 협상, 아무리 잘못됐다 할지라도 그 일로 정권퇴진을 밀어붙이는 것은 우리의 헌정질서의 원칙에서 맞지 않습니다. 대통령은 앞으로 5년간 열심히 국정을 이끌어나가야 될 분입니다. 국민의 뜻을 최대한 헤아려서 일을 할 수 있도록 이렇게 여러분들이 잘 도와주시면 좋겠습니다.”


이런 논리에 영향을 받는 많은 개혁주의 지식인과 지도자들이 브레이크를 걸면서 촛불항쟁은 사그라들었고 이명박은 퇴진 위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노무현의 도움으로 살아난 이명박은 곧바로 박연차 게이트 수사를 통해 노무현의 목을 졸랐다. 그리고 노무현은 결국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 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사는 것이 힘들고 감옥 같다. 나름대로 국정을 위해 열정을 다했는데 국정이 잘못됐다고 비판 받아 정말 괴로웠다.”


유서에서 볼 수 있듯이 죽음을 앞둔 노무현의 심정에는 절망, 체념 등이 짙게 배여 있다. 반면 비슷한 시기에 이명박 정부의 탄압에 항거하며 목숨을 던진 박종태 화물연대 광주지부 1지회장의 유서에서 느껴지는 정서는 이와 다르다.


악착같이 싸워서 사람 대접 받도록 최선을 다합시다. 큰 나라를 반토막내서 배 부르고 등 따신 놈들, 미국과 극우보수 꼴통들이 이번 참에 아예 지네들 세상으로 바꿔 버리려고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안락만을 위해서 투쟁할 것이 아니라 통 큰 목적을 가지고 한발 한발 전진하기 위해 손을 잡고 힘을 모으는 적극적이고 꾸준한 노력과 투자가 있어야 합니다.”


노무현은 누구도 원망하지 말라고 말한다. 반면 박종태는 악착같이 싸워서 사람 대접 받도록 최선을 다하자고 저항을 호소한다. 그래서 두가지 유서에 대한 <미디어충청> 이성우 편집위원장의 다음과 같은 비교 평가는 설득력이 있다.


나는 민주노조운동의 간부들에게 특별한 사람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서와 특별하지 않은 사람박종태가 남긴 유서를 다시 읽어 보라고 감히 권한다. 온 국민이 애도하는 특별한 사람의 유서에는 한 개인의 상처와 고통만이 크게 차지하고 있지만, '특별하지 않은 사람'의 유서에는 이 땅을 힘겹게 살아가는 노동자 민중의 상처와 고통이 오롯이 배어있다. ‘특별한 사람은 국익을 내걸고 이라크 파병을 감행하고, 비정규 악법을 강제하고, 한미FTA를 밀어붙였지만 특별하지 않은 사람의 유서는 국익의 근본이 노동자 민중의 행복한 삶에 있음을 강조하고 그것을 죽음으로 실천했다. 특별하지 않은 사람은 한 개인이 아니라 우리 모두였지만 특별한 사람은 그저 평범한 개인에 불과했다.”


진보의 미래

 

노무현은 1987년 민중 항쟁의 동참했었고 한 때 노동·인권 변호사로서 노동계급과 피억압 민중의 저항에 함께 했다. 그러나 그는 기성 정치권에 편입되고 권력에 다가가면서 점차 저항의 정신과 대의에서 멀어져 갔다. 결국 대통령이 되서는 진보적 가치, 민주주의와 사회 정의에 등을 돌리고 이를 위한 저항을 탄압하는 당사자가 됐다


진보의 미래에서 노무현은 이런 과오를 일부 인정하고 후회도 하지만, 결국 그것에서 벗어나지 않는 생각과 길을 제시한다따라서 한 때 노무현이 추구했던 진보의 희망과 이상은 결코 친노 정치인들을 통해서 이뤄질 수 없다는 김규항의 지적은 옳다.


노무현의 꿈은 오히려 대통령 노무현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배신했음을 지적한 사람들, 끊임없이 노무현을 불편하게 함으로써 그가 잃어버린 제 본디 꿈을 회복하길 소망했던 사람들, [노무현 정부 하에서 죽어간] 23명의 열사의 편에 섰으며 오늘 여전히 그들의 편에서 싸우는 사람들에게서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진보와 희망을 위해 저항하려는 사람들은 노무현과 그의 정치적 후계자들이 제시하는 진보의 미래를 거부해야 한다. 이미 노무현은 스스로 목숨을 던지기 직전에 이렇게 실토했다.


“더 이상 노무현은 여러분이 추구하는 가치의 상징이 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미 민주주의, 진보, 정의, 이런 말을 할 자격을 잃어버렸습니다. 저는 이미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수렁에 함께 빠져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


실제로 노무현 정부가 추진했고, 진보의 미래가 제시하는 길은 우리를 실패의 수렁으로 빠지게 할 뿐이다. 노무현 정부가 추진했고, 이제 우파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친제국주의 정책에 맞서는 노동계급과 피억압 민중의 저항을 통해서만 우리는 민주주의, 진보, 정의에 다가갈 수 있다. 이런 저항에 함께 하면서 시장 논리에 타협하지 않고 근본적으로 도전할 수 있는 정치와 대안을 발전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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