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누군가 살이 찢어져서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보면 끔찍할 수밖에 없다. 맞다. 김기종 씨의 행동은 옳지 않았다. 처참한 국가폭력의 희생자가 지옥같은 삶을 살다가 새로운 비극을 일으킨 것은 정말 슬프고 참담한 일이다. 동료들이 폭행과 강간까지 당했던 88년 ‘우리마당’ 피습 사건 이후, 그 정치테러의 후유증이 끝내 김기종 씨의 기구한 삶을 망가뜨린 것 같다.
사건 당일, 피를 흘리며 행사장을 빠져나가는 미국 대사와, 목을 누르는 구둣발 아래 발버둥 치는 김기종 씨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충격과 슬픔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우파와 언론들이 ‘정권의 위기를 벗어나고, 종북몰이할 기회를 얻었다’며 너무 드러내놓고 신나하는 것은 정말이지 보기 괴로운 꼴불견이다. 이 사건이 안타깝고 슬프긴 한건가?
“이번 사건의 최대 수혜자는 누구일 것 같으냐”며 종북몰이를 하는 새누리당 윤상현을 보면서 ‘몰라서 물어. 바로 당신들이잖아’라는 답이 자연스럽게 입 안에 맴도는 것이다. 너무나 속보이는 행태 때문이다.
‘김기종 = 테러리스트 = 반전 평화 주장 = 진보당 = 종북 = 배후는 북한’ 이라는 공식이 순식간에 만들어졌다. 증거는 ‘김기종이 예전에 통합진보당 페이스북에 좋아요를 누른 적이 있다’, ‘7번이나 방북한 적이 있다’(알고보니 금강산과 개성공단 관광이었지만) 등등
국가보안법 적용도 검토하고 있다. 많은 진보 단체들이 ‘혹시라도 김기종 씨가 우리 단체의 책이나 문건을 가지고 있었으면 어쩌지’하는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영락없이 ‘김기종 배후’, ‘종북’으로 몰리게 생겼으니 말이다.
우파와 언론들은 자신들의 태도가 너무나 노골적인 이중잣대라는 점도 별로 신경쓰지 않는 듯 하다. 지금 리퍼트 대사에 대한 극진한 반응을 쏟아내는 그들이 스스로 묻길 바란다. ‘테러 공격을 당했던 신은미·황선 씨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대응했었지?’ 벌써 잊었겠지만 신은미 씨는 강제추방 당했고 황선 씨는 아직도 감옥에 있다.
세월호에 대한 대응과도 비교되지 않을 수 없다. 꽃같은 3백여 명의 아이들의 비극과 진실보다 미국 고위 관리 1명의 안위가 더욱 관심있다는 식의 태도를 이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내야 하는가? 가슴에 피멍이 든 유가족들이 뻔히 보고 있는데?
우파와 언론들은 자신들의 ‘폭력은 안 된다’와 ‘한미동맹을 지키자’는 주장이 서로 모순된다는 것이라도 좀 알았으면 좋겠다. “한미동맹 수호”를 외치는 민주당도 함께.
얄타에서 소련과 한반도 나눠먹기를 합의한 후 미국은 한반도에 폭력과 함께 왔다. 탱크를 앞세워서 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인민항쟁을 살인진압한 게 누구였나? 제주 4.3에서 도민의 1/3을 죽인 게 누구였나?
수백만 명이 죽은 한국전쟁에서 ‘초토화 폭격 전략’을 사용한 게 누구였나?(당시 맥아더는 핵무기 사용까지 제안했다) 5.16 쿠데타 3일만에 지지성명을 발표한 게 누구였나? 80년 광주에서 공수부대 병력이동을 승인했던 게 누구였나?
반제국주의
미국이 지지하고 도와 준 독재자와 군사정권들에 맞서, 노동자와 민중이 투쟁하지 않았다면 지금 수준의 민주주의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미동맹이 멀리 베트남부터 이라크, 아프가니스탄까지 점령과 파병을 통해 저지른 일도 빼놓을 수 없다.
이제 미국과 한국군은 매년 이맘 때 한반도에서 핵 선제공격이 포함된 세계 최대 규모 군사훈련을 한다. 2004년 한미양국군의 워게임 시뮬레이션 결과, 전쟁 발발시 24시간내에 230만 명이 죽을 거라는 결과가 나온 상태에서 말이다. 화약고 옆에서 폭죽놀이를 하는 격이다.
따라서 ‘폭력을 반대한다’는 어떠한 진지한 주장과 논의도 한미군사동맹과 군사훈련에 대한 반대나 축소 주장을 포함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완전한 위선이고 거짓말이다. 이것이 민족주의라고? 민족주의는 진보와 좌파의 가치가 아니라고? 천만에 이것은 ‘반제국주의’이고 진보와 좌파의 핵심 가치이다.
하지만 김기종 씨의 일탈은 제국주의를 조금도 약화시키지 못했다. 지금 한미 양국은 이번 사건을 사드(THAAD: 고고도 요격 미사일) 배치를 기정사실화하는 좋은 기회로 보는 것 같다. 이 정부는 이를 테러방지법이나 각종 종북몰이 관련 법안들 처리 기회로 보고 있다.
김기춘 사퇴 이후 흔들릴까봐 걱정하던 공안·공포통치를 더욱 다잡으려 한다. 반면 우리 편은 이 사건이 진보정당들의 분열 극복과 민주노총 총파업 추진 등에 악영향을 줄까봐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아픔과 비극을 겪은 리퍼트 대사는 과연 ‘오늘 밤이라도 북한과 싸울 수 있다’던 태도를 누그러뜨릴까? 자신이 특전사 장교로 참전했던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민중들의 고통을 이제라도 역지사지로 공감하게 될까? “응당한 징벌”이라는 북한의 비정하고 냉혹한 반응을 보면서, 오바마는 ‘김정은 암살 영화’를 비호했던 자신을 돌아보게 될까? 전혀 그럴 거 같지는 않다.
따라서 더 많은 살이 찢어지고 피가 쏟아지는 크나큰 재앙은 절대 막아야 하며, 그것은 오로지 ‘개인에 대한 개인의 폭력’이 아니라 ‘체제에 대한 대중적 저항’으로만 이룰 수 있다.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 호랑이를 잡아서 우리에 가두는 것이야말로 폭력을 막기 위한 인간들의 의무다. 물론 저들은 그것마저 ‘폭력’, ‘종북’이라고 비난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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