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의 꿈과 사랑은 해산시킬 수 없다"
전지윤
12월 19일, 헌법재판소는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사회정의를, 그리고 진보당을 해산시켰다. 박근혜는 이것이 “역사적 결정”이라고 했는데, 정말이지 이것은 또 하나의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기록돼야 한다.
‘이석기와 진보당 문제’만은 꼭 직접 보고를 받으며 닦달했다는 박근혜는 눈엣가시를 제거했다며 발 뻗고 잠들고 있을지 모른다. 감히 자신의 눈 앞에서 “다까끼 마사오”를 말했던 이정희 대표의 처지를 고소해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진보당 해산은 좀 더 넓은 눈으로 살펴봐야 할 문제다. 오바마는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기 위한 '아시아 회귀' 속에 북한 악마화를 계속해 왔다. 이런 분위기 속에 헐리우드에서는 최근 김정은 암살에 대한 영화도 만들어졌다. 진보당이 해산된 날, 유엔에서도 북한 인권 결의안이 통과됐다.
이런 지정학적 환경의 뒷받침 속에서 박근혜에게 종북몰이는 ‘절대반지’와 같았다. 박근혜의 등장도, 기반도, 당선도, 통치도, 위기 탈출도 ‘종북’을 빼면 설명되지 않는다. 2013년 대선부정 문제로 코너로 몰리던 박근혜를 구한 것은 국정원이 기획한 ‘내란음모’ 사건이었다. 이번엔 정윤회 게이트로 위기에 빠지던 박근혜에게 헌재가 진보당 해산을 헌납했다.
8:1이라는 수치도 매우 의미심장하다. 헌법재판관들은 이 나라 지배계급의 엘리트들로서 피트니스 센터에서, 골프장에서, 각종 사교모임에서 수시로 어울리는 이 나라 지배자들의 정서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8:1은 이 나라 지배계급의 다수가 어느 방향으로 끌리고 있는지 보여 준다. 이런 무리수가 낳을 역효과를 걱정하기보다, 이런 강력한 조치로라도 체제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압도적이었던 것이다.
지금 세계자본주의는 유가폭락 속에서 러시아발 금융위기가 우려되는 여전한 혼란 속에 있다. 한국자본주의와 지배계급은 ‘지도에 없는 길’을 헤매고 있다. 밑천이 바닥난 초이노믹스는 이제 노동자 공격과 쥐어짜기라는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 연금 개악, 정리해고 요건 완화, 기간제 기간 연장, 파견업종 확대 등이 그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저들에게는 민주주의가 거추장스러울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는 ‘우리가 탄 배는 침몰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살기 위해서는 가만있지 말자’고 소리칠 수 있는 자유이기 때문이다. 지배계급의 답은 언제나 분명하다. ‘가만히 있어라.’
헌법재판관 8명은 이런 지배계급의 고민과 위기의식을 대변했다. 게다가 그들이 마련한 재단 위에는 안성맞춤의 마녀사냥감이 올라가 있었다. 이 사냥감은 이미 ‘부정과 폭력도 서슴지 않는 사람’이라는 멍에를 쓰고 있었다. 많은 이웃들조차 이 ‘마녀’의 친구로 보일까봐 거리를 두고 있었다.
일부 이웃들은 ‘나는 저 마녀와 생각이 다르고 지지하지 않는다’고 고백하고 있었다. ‘저 사람이 마녀와 친했다’는 고발도 있었다. 불쏘시개가 충분한 상황에서 헌법재판관들을 기름을 뒤집어쓴 마녀에게 불을 붙이기만 하면 됐다. 그 ‘마녀’는 바로 이석기 의원, 이정희 대표, 진보당이었다.
경선부정의 진실은 달랐다는 것도, 내란음모는 조작이었다는 것도, 정부가 제출한 증거 17만 쪽을 뒤져도 ‘종북’의 증거가 없다는 것도 무의미했다. 편견과 조작 속에 재판 결과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마녀사냥
헌재는 ‘진보당은 비민주적·패권적으로 활동해 왔으며, 북한식 사회주의를 추구하며, 이런 목적을 위해서는 부정과 폭력도 서슴지 않는 집단’이라고 판정했다. 이 내용은 사실 이미 많은 사람들의 머리 속에 사실로 굳어져 있었다. 자유주의자들과 일부 진보인사들조차 말해왔던 것이기도 하다.(지금도 일부 사람들은 ‘그런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라고 말하고 있다.) 결국 헌재는 “이 위험을 시급히 제거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며 해산 판결을 내렸다.
이것은 정권과 공안기관에게 ‘종북몰이 면허증’을 준 것과 마찬가지 효과를 낼 수 있다. 이재화 변호사가 지적했듯이 이제 진보당적을 가졌었던 20만여 명은 보안법의 먹잇감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 민주노동당, 진보당 출신 정치인들은 주홍글씨를 달고 다니게 될 것이다. 웬만한 진보단체의 강령에 다 있는 자주·민주·통일 등의 가치는 금기어가 될 것이다.
진보당 주요 간부들은 곧 구속될 위험이 높다. 혐오와 적개심을 법적으로 뒷받침한 이 판결 때문에 황선·신은미 씨에 대한 테러 시도와 같은 일이 더 많아질지 모른다. 황선 씨는 “지금도 불이 타오르는 냄비를 들고 벌떡 일어서던 학생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이석기 의원 등의 ‘내란음모 무죄’ 판결마저 뒤집힐 수 있다. 나아가 진보·좌파 단체들은 자신들의 강령·입장 등을 홈페이지에서 내리거나, 완화시킬 압력을 느낄 것이다. 노동조합들은 진보당쪽과 끈을 유지하는 게 과연 노사관계에 도움이 될 것인지 재보게 될 것이다. 진보당원들은 자신들이 속한 연대체, 심지어 각종 공동체와 직장에서도 불이익을 당하거나 배제될 가능성이 있다. 아니, 이것들은 이미 일어난 일인지도 모른다.
먹구름은 진보당에게만 드리워진 것이 아니다. 진보당과 거리가 가깝고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노동조합과 대중단체들부터 시작해 불길이 번질 수 있다. 이미 정부는 진보당과 주변세력을 4가지로 ‘분류’했었다. “혁명적NL세력, 이념적NL세력, 지지옹호세력, 묵인세력.” 공안탄압 대책위에 속한 44개 단체들은 “지지옹호세력”으로 분류됐었다.
여기서 선을 그어 온 단체들은 과연 자유로울까? 이미 <조선일보>는 “정의당 구성원들도 통진당 세력과 야합하면서 건전한 사회민주주의로의 길을 어렵게 만든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지적하고 나섰다. “정의당이 앞으로 어떤 길을 걸을지도 유심히 지켜볼 것”이란다.
또 “새정치연합 구성원 상당수가 '통진당스러운' 사고와 행동의 소유자들”이라고 말한다. 민주노동당 출신 주대환 씨는 벌써 우파 언론과 인터뷰하며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한 것은 일부 평등파도 마찬가지였다’는 ‘내부고발’을 시작했다.
이것은 안 그래도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던 우리 사회의 정치적 지향을 더 오른쪽으로 옮길 수 있다. ‘진보정당없는 가짜 민주주의’와 ‘노동자 목소리 없는 양당체제’로의 경향은 더욱 강해질 수 있다. 그나마 살아남는 진보정당들은 더욱 오른쪽에서 포지션을 잡으려 할 것이다. 결국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의 목소리는 들리기 쉽지 않아졌다. 진보당 해산 결정에 성소수자 단체들이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자연스러웠다.
이 모든 우려는 우리가 이 나라 지배계급과 헌재의 “진정한 목적” “숨은 목적”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이 ‘시급히 제거’하고 싶어 한 것은 단지 진보당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이 정권과 기득권 체제에 맞서서 저항하고 연대할 권리였다.
이석기 의원 등의 언행은 빌미에 불과했다. 진보당이 박근혜를 강력 비판하며 투쟁에 앞장서지 않았다면 그것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저들은 전국적 조직망과 현장 기반을 가진 진보당을 다른 진보진영과 이간질해 와해시킨다면, 전체 진보·노동운동에 큰 타격을 가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빵과 자유
저들은 자유, 정의, 평화, 평등을 요구하며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위협하는 모든 움직임을 ‘종북’이라고 몰고 싶어 한다. 전교조도, 민주노총도, 강정 해군기지 반대 투쟁도,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도, 세월호의 진실을 위한 투쟁도, 성소수자 인권 요구도 모두 ‘종북’이라는 게 이들의 논리였다.
그리고 이것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전세계 곳곳에서 보이는 경향이기도 하다. 신자유주의에서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은 더 강력한 ‘국가의 보이는 주먹’을 필요로 한다. 서구에서 이런 경찰국가화는 이슬람주의에 대한 ‘공포’로 뒷받침된다.
도청·고문과 민주적 기본권의 제약이 ‘이슬람 테러리스트에 맞선다’는 이유로 정당화된다. 반면 이 나라에서는 ‘종북’이 그것을 대체하고 있고, 국가보안법이 이미 그런 구실을 해 왔다. 남한 체제와 다를 바 없이 부조리하고, 특히 박정희 시절의 남한 체제를 빼다박은 북한 체제의 존재가 이것의 버팀목이다.
이처럼 ‘자본주의는 갈수록 민주주의와 이혼하고’ 있다. 반면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더욱 더 소중해지고 있다. 눈과 귀와 입을 가리고서는 우리가 처한 현실을 알 수도, 우리가 원하는 것을 말할 수도 없다. 손과 발이 묶인 상태에서는 저항할 수도, 연대할 수도 없다.
따라서 ‘먹고 사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는 말은 반만 맞다. ‘빵과 자유’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연결된 문제이다. 손발이 묶이고 입이 가려진 상태에서는 빵을 움켜쥐기도 먹기도 어렵다. ‘종북몰이는 별로 효과가 없고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안이했다는 것도 이제 명백하다. ‘위축되지 말자’고 다짐한다고 되는 문제도 아니다. 서로 솔직하게 걱정을 털어놓으며, 손을 잡고 공격을 막아낼 때 위축감도 사라질 수 있다.
지금 이것은 단지 진보당과 그 당원들의 문제가 아니게 됐고, 사실 원래부터 그랬다. 12월 19일에 해산당한 것은 바로 우리 모두의 자유와 권리다. 따라서 더 이상 물에 빠진 사람과 거리두기, 불 난 집과 선 긋기, 낙인찍힌 사람 따돌리기는 그만둬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도 왜 저 사람이 물에 빠질만 했는지에 대한 주장이 아니라, 물에서 함께 빠져나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주장과 토론이다. 사실 2심에서 '내란음모 사건'의 조작이 드러나며, '내란음모는 무죄이고 RO는 실체가 없다'는 판결이 나왔을 때가 단결해서 반격할 기회이고 빈틈이었지만, 우리는 그것을 잡아쥐지 못했다.
물론 일부 사람들은 그동안 쌓여 온 감정, 불쾌한 기억 등을 모두 없는 셈 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무리 크더라도 적의 손에 목 졸리는 동지를 못 본 척할 수는 없다. 내가 진보당 다음 차례라면, 그때 다른 단체들이 그동안 내가 잘못하고 실수했던 것, 나에게 서운했던 것을 말하며 주저하는 모습을 상상해 봐야 한다.
그 고통스러운 기억과 경험을 뒤로 하고 다시 굴뚝에 올라 ‘산 자’들에게 손을 내미는 쌍용차 해고자들을 보라. 저 손을 잡아주길 바란다면, “목소리를 함께 내고 발을 맞추는데 머뭇거림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던 아픈 과거에 대해 죄송하다”(이정희 대표)는 손을 못 잡을 이유는 하나도 없다. 저 악랄하고 지긋지긋한 박근혜가 가장 싫어하고 없애고 싶어 한 당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진보당원들은 우리의 지지와 연대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통합진보당 강제해산 반대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원탁회의’로 모든 진보진영의 단체와 개인들이 모여서 행동에 함께 나서야 한다. 더 이상 어느 운동이나 연대체, 쟁점에서도 진보당을 배제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작업장에서든, 공동체에서든 진보당원들을 밀어내거나 불이익을 주려는 움직임이 있다면 모두가 자기 일처럼 나서서 그것을 막아야 한다. 지지금을 모으고 후원해줘야 한다.
진보당을 방어하고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투쟁과 경제 위기 고통전가에 맞서는 운동을 결합시켜야 한다. 나아가 모두 힘을 합쳐서 박근혜 정권의 아킬레스건(부정, 조작, 부패)을 공격하며, 이미 시작된 콘크리트 지지기반의 붕괴를 앞당겨야 한다.
‘종북몰이’의 다음 사냥감이 나는, 우리는 아닐까하며 걱정하고 있는 것보다 힘을 합쳐서 쓰러진 동지를 일으켜 세우고, 그 동지와 함께 손 잡고 종북사냥꾼을 거꾸러뜨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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