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유럽 지배계급의 시리자 길들이기가 본격화하고 있다. 최근 협상에서 독일 정권과 ‘트로이카’는 그리스의 시리자 정부가 제안한 (상당한 양보가 담긴) 타협안마저 거부하며 배짱을 튕겼다. 그러다가 결국 가까스로 합의된 방안은 그리스 새 정부가 ‘트로이카’의 지침을 고분고분따르는지 계속 따져보면서 돈을 빌려주겠다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민영화, 노동시장 유연화, 연금 삭감 등을 예정대로 강행하라는 게 트로이카의 요구다.
트로이카는 ‘고통 속에 죽든 말든 우리는 반드시 너희의 피를 뽑아가겠다’며 덤비고 있다. 총선을 통해 그리스 민중이 보여 준 의견은 저들의 안중에 없다. 사실 순전히 경제적으로만 보면, 시리자의 타협안을 받아들이는 게 저들에게도 합리적이다. 피를 너무 많이 뽑다가 빚을 갚아야 할 사람이 죽어버리면 채권자도 손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로존 지배계급은 시리자에 대한 양보의 정치적 상징성을 우려하고 있다. 긴축의 정당성이 훼손되면서 그것을 중단시킬 수 있다는 신호가 될까봐 걱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유로존의 다른 민중들에게도 자신감을 줄 것이고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등으로 도미노처럼 번져갈 수 있다.
따라서 저들은 설사 일부 양보를 하더라도 시리자를 길들이고 기를 꺽으며 그러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아쉬운 것은 시리자가 보인 타협적 태도다. 시리자는 유로존 탈퇴 불사라는 유로존 지배자들이 가장 두려워할, 따라서 가장 강력한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축구경기에 나가면서 스트라이커를 빼놓고 나간 것이다.
그보다는 계속해서 타협을 원한다는 신호를 보냈다. 시리자는 채무 일부를 탕감받겠다던 태도에서 한발 후퇴해 ‘채무 스와프’ 방안을 제시했다. 경제 성장률에 연동해서 채무를 모두 갚아나가겠다는 소위 “현명한 채무 조정”안을 제시했다. 긴축 정책의 상당 부분을 유지하겠다는 것이 된다.
우파인 독립당과 연정을 꾸린 데 이어서 이것은 또 한번의 불길한 후퇴다. 사실 그리스의 자체적 구조조정으로 국가경쟁력을 높여야 빚을 갚을 수 있다는 게 바로 독립당의 ‘반긴축’이 뜻하는 바였다. 당선 직전에 한 <자코뱅>과 인터뷰에서 시리자 대표 치프라스는 “실현 가능하고 현실적인 정치적 전략들을 가져야 합니다”라고 강조한 바 있다. “부자들이 무엇을 하지 못하도록 그들을 강제할 생각은 없습니다”라고도 했다.
시리자 지도부는 이미 2012년부터 이 방향으로 움직여 왔다. 아래로부터 투쟁의 성과로 급진좌파의 집권 가능성이 높아지자, 이제 그리스 민중들 속에서 ‘좌파 정부를 선출해서 긴축을 막자’는 기대가 높아졌다. 시리자 지도부는 ‘집권을 위해서는 현실적이 돼야 한다’는 논리를 펴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급진적 강령과 요구를 계속 후퇴시켜 왔다. 은행 국유화, 나토 탈퇴, 부채 탕감 등이 이 과정에서 사라졌다.
시리자 지도부는 또한 후퇴에 저항하는 당내 극좌파들의 입을 막기 위해 당내 민주주의를 옥죄고 지도부 권한을 강화했다. 그럼에도 시리자 내 극좌파 의견그룹들의 결집체인 ‘좌파플랫폼’은 지난 당대회 때 만만치 않은 지지를 얻었다. ‘좌파플랫폼’의 대안은 25~40% 가까운 지지를 얻었고, 특히 채무불이행과 유로존 탈퇴안이 40%를 얻은 것은 의미심장했다.
이것은 시리자 정부가 유로존 지배자들의 압력만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유럽 민중의 기대와 압력에도 직면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시리자 당선 직후 스페인에서 10만 명이 모여 반긴축과 시리자 연대 집회를 연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시리자 안팎의 좌파가 이런 기층 유럽 민중의 투쟁과 연대를 강화시키는 데 얼마나 성공할 것이냐가 관건이다.
이번 타협으로 주어진 4개월은 그런 투쟁 건설의 시간이 돼야 한다. 그 힘으로 유로존 지배자들의 압박을 막아내고, 시리자 정부 내에서 독립당 등 우파를 몰아내고, 진정한 개혁을 가능케하는 게 중요하다. 좌파 정부의 후퇴에 실망한 기층 민중이 사기저하된 틈에 우파가 결정적 반동을 꾀하는 ‘칠레 모멘트’(73년 9월에 피노체트 군부가 쿠데타로 좌파 정부를 전복)를 피하기 위해서도 말이다.
이슬람국가(IS)와 코바니 전투
유럽의 우파와 지배자들이 기층 민중의 반긴축 투쟁을 분열·약화시키고 분노를 엉뚱한 방향으로 돌리기 위해 부추기고 있는 것은 이슬람포비아다. 이슬람포비아는 유럽 민중의 불만과 분노를 지배계급이 아니라 무슬림들에게 가도록 만든다. 또 유럽의 평범한 노동자들과 사회 밑바닥의 무슬림들이 서로를 증오하게 함으로써 단결을 어렵게 만든다.
이슬람국가(IS)의 끔찍한 행태는 이런 이슬람포비아와 제국주의 정책을 정당화하는 구실을 하고 있다. IS는 미국의 이라크 점령과 시리아 혁명 납치 시도가 낳은 괴물이라는 점에서 이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언제나처럼 피조물은 창조주의 모습을 닮아갔다.
IS가 보이는 잔인함과 반동성은 제국주의가 보여 온 행태를 더 소규모이긴 하지만 더 엽기적으로 모방하는 것처럼 보인다. 민간인 살해, 강간, 고문, 학살은 바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과 제국주의 점령군이 보여 온 행태다. IS는 제국주의에 맞서겠다는 명분 아래 힘없는 약자들을 상대로 이런 행태를 모방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 1월말 IS로부터 패배 선언을 받아낸 시리아 북부 코바니의 소식은 희망을 보여 줬다. 이 곳에서 IS에 맞서 승리를 이끈 주역은 터키 쿠르드 노동자당(PKK)의 시리아 자매당인 민주연합당(PYD)의 영향 하의 쿠르드인민방위대(YPG)와 여성방위대(YPJ)였다.
제국주의와 그 동맹자들에 의해 온갖 억압과 유린을 당해 온 ‘중동 최대의 소수 민족’이 그들의 힘을 보여 준 것이다. PKK는 오랫동안 미제국주의와 터키 국가가 ‘테러단체’로 지목해서 박해해 온 좌파정당이기도 하다. 특히 이번 승리의 선봉장은 놀랍게도 여성 민병대원들이었다고 한다.(최재훈 ‘코바니 전투, 민주주의와 평등을 위한 싸움’: http://media.jinbo.net/news/view.php?board=renewal_col&nid=98685)
PKK가 또다른 억압과 차별을 낳는 민족국가 건설이라는 대안이 아니라, 반신자유주의적이고 생태적인 ‘민주적 연방제’ 대안을 추진하면서 코바니의 실험이 시작됐다고 한다. 어떤 인종, 종교도 차별하지 않고 여성해방을 지향하는 민주적 자치사회를 추구하던 코바니 지역의 민중들은 IS가 그것을 파괴하려하자 무릎 꿇기를 거부했다.
이라크 군대와 미국을 쩔쩔매게 한 IS는 결국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의 용기 앞에 등을 돌리고 달아나야 했다. 이 사례를 보면 IS라는 야만을 물리칠 힘은 ‘드론’도 미해병대도 아니고, 피억압 민중을 진정한 해방에 대한 희망으로 무장시키는 것이란 점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제국주의가 결코 지지할 리가 없고 가장 두려워하는 길일 것이다.
따라서 오바마가 ‘IS를 격퇴하겠다’며 13년만에 다시 의회에 무력사용권 승인을 요청한 것은 결코 반가운 소식이 아니다. 오바마의 특수부대, 지상군은 중동에 평화가 아니라 파괴와 혼란만을 가져 올 것이고, 그 속에서 또 다른 괴물과 비극이 잉태될 것이기 때문이다.
전년도보다 8%나 늘어난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국방 예산을 요구한 오바마는 중동 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불안정을 키우고 있다. 대표적인 곳은 우크라이나이다. 지금 서방 언론들은 모두 푸틴을 ‘새로운 히틀러’로 묘사하느라 바쁘지만, 이 사태의 뿌리에도 미제국주의의 팽창욕이 있다.
우크라이나 정부에 파시스트들이 들어가 있고 이들을 나토와 미국이 후원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반제국주의 언론인 존 필저는 현재 “제2차 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서방 군사력이 코카서스와 동유럽 지역에서 구축되고 있다는 분명한 사실이 철저하게 감춰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미국은 ‘우크라이나의 EU 및 나토 가입은 그들의 자유의사’라는 입장이지만, 이를 러시아가 막는다면 무력대결도 불사하겠다는 식이다. 발트 3국까지 나토로 넘어간 상황에서, 이제는 자신들의 발원지인 우크라이나까지 흔들리는 상황을 러시아가 그냥 지켜볼 리도 없다. 최근 독일이 가까스로 중재한 휴전안이 90분만에 깨진 것은 미국, 러시아 어느 쪽도 물러서지 않으려는 상황을 보여 준다.
러시아는 한반도 문제에서도 미국과 대립하기 시작했다. 오바마가 “북한 붕괴”를 말하는 상황에서 북한 정권도 러시아와 군사협력을 추진하고 있다. 북한 지배관료들은 더 이상 미국과의 관계개선이라는 헛된 꿈을 포기한 듯도 하다. 대규모 핵 선제공격 연습을 중단하긴커녕, 드론을 통한 김정은 암살영화 살포 계획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말이다. 북한 선제공격을 주장하던 애슈턴 카터가 미국의 신임 국방장관이 된 것도 심상치 않은 일이다.
‘이완구라’ 사태와 김기춘 이후
이 상황에서 박근혜가 과연 미국의 심기를 거스르며 5월에 러시아에서 열리는 2차대전 승전 70주년 기념행사에 가서 북한을 만나려할까? 매우 가망성이 없어 보인다. 이뿐 아니라 갈수록 지지율이 추락하는 박근혜가 쓸만한 카드는 계속 줄고 있다. 충청민심과 새누리당 비박 지도부 견제를 겨냥했던 이완구 카드는 역효과만 냈다.
이완구 카드가 잘 먹히면 슬쩍 넘어가려던 김기춘 교체가 불가피해졌다. 물론 박근혜는 ‘리틀 김기춘’이라는 민정수석 우병우 체제를 다지며 김기춘 이후를 대비해 뒀다. 그러나 김기춘이 구축해 온 공포·공작 정치에 균열은 피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진보가 분열과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민주당이 반박근혜의 주도권을 쥐고있는 이상 상황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원래 박근혜의 콘크리트 지지율을 붕괴시켰던 것은 연말정산으로 나타난 꼼수증세에 대한 분노였다. 그것이 건강보험료 개악도 일단 멈추게 했다.
근데 ‘증세는 불가피하다’는 목소리가 보수·진보 모두에서 높아지더니, 결국 건강보험료 개악은 다시 추진되고 있다. 진보언론과 진보인사들도 이걸 ‘환영’하고 나섰다. 심지어 민주당은 이완구같은 쓰레기가 총리 자리에 앉는 것조차 막지 않았다. 문재인의'박근혜와 전면전' 선언은 역시 아무 의미없는 잠꼬대였다.
박근혜에 분노한 사람들이 진보는 고사하고 민주당도 아니라 새누리당 김무성, 유승민 등에게 기대를 거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이명박과 대립하던 박근혜가 결국 이명박 2기 권력 창출에 성공했듯이, 박근혜를 까면서 김무성, 유승민도 박근혜 2기 권력 창출에 성공할지 모른다.
진보정치는 왜 이처럼 박근혜의 위기도 이용하지 못하고 존재감이 보이지 않을까? 왜 이완구 총리 취임을 막는 걸림돌이 되지 못했을까? 왜 ‘증세는 불가피하다’는 목소리에 한 입 보태고 있을까? 왜 ‘민주당 을지로위원회만큼이라도 하라’는 말이 나올까? 왜 부산 김석준 ‘진보’교육감은 학비 노동자 탄압이나 하고 있을까?
진보정당을 탄압하고 해산하고 이간질한 박근혜에게 먼저 책임을 물어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진보정당들이 과연 이것에 잘 대처했는지도 물어야 한다. 어느 순간부터 진보정당들은 박근혜가 그어놓은 선 안에서 움직이려 하는 것 같다.
당장 진보당 강제 해산으로 생겨난 4월 재보선에서 진보정당들이 진보당 배제 선거연합을 추구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반역사적 강제해산으로 생겨난 틈을 왕따 연대로 메운다?(사실 정의당이 ‘원내 유일 진보정당’을 자처하는 것도 보기 좋지 않다. 그 ‘유일’은 박근혜가 진보당 해산으로 만들어 준 것 아닌가?) 이것은 진보의 가치와 단결에 좋아 보이지 않는다.
물론 새누리-민주당 양당체제화에 맞서서 진보의 독립적 대안이 세워져야 한다. 국민모임의 등장과 진보 재결집 추구는 그 점에서 반갑기도 하다. 민주당의 일부가 왼쪽으로 떨어져 나오거나, 민주당이나 안철수 쪽을 기웃거리던 노조 지도자들이 국민모임으로 방향을 튼다는 소식도 나쁜 소식은 아니다. 이것은 민주당이 도저히 채울 수 없는 공백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아직 국민모임을 중심으로 한 진보재편 추진이 진보의 분열을 극복해 내거나 ‘안철수 현상’같은 청년들의 열기를 촉발하는 듯하진 않다. 자주파와 평등파의 광범한 단결에 기초했고, 명망가와 지식인만이 아니라 조직 노동운동에 튼튼히 기반했던 것이 민주노동당의 성공 비결이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리고 진보정당과 세력들이 우선 힘을 모아서 지지하고 연대를 건설해야 할 것은 민주노총의 4월 총파업일 것이다. 박근혜의 공격계획에 끌려다니지 않고 선제적 파업을 하겠다는 한상균 지도부의 계획과 투지는 충분히 지지할만하다. 현재 민주노총 파업은 중집, 중앙위, 대의원대회를 거치며 연속해서 결의와 지지를 모아나가고 있다.
물론 그 밑에 많은 난점들도 잠복해 있다. 금속노조 지도부는 아직 불법파견 인정 합의를 분명히 교정하지 않고 있고, 현대차 지도부는 사측과 해외시찰을 같이하며 ‘경쟁력을 돌아보고’ 있다. 한국지엠에서는 사내하청 해고를 묵인하는 합의가 이뤄졌다.
단지 임단협을 앞당기고 일정을 조정하는 것을 넘어서, 지도부에게 파업 일시와 권한을 위임하는 것을 넘어서, 이런 문제들을 비판하고 함께 극복해가는 노력 속에서 파업이 힘 있게 건설될 수 있을 것이다. 진정성을 가지고 파업의 요구와 의미를 차근차근 설명하고 설득하고, 그것에 기초한 지지와 동참을 조직하는 노력 속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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