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프랑스에서 벌어진 ‘샤를리 에브도’에 대한 테러는 어떻게든 정당화될 수 없다. 테러리스트들은 무고한 사람들까지 희생시키며, 지배자들이 차별과 억압을 강화할 빌미만 줬다.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해 싸워 온 하마스도 “의견과 생각의 차이가 살인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며 이번 테러를 규탄했다.
하지만 1월 11일 파리에서 진행된 ‘반테러 대행진’의 맨 앞에 선 자들을 보면 눈살이 찌푸려질 수밖에 없다. 그동안 전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테러를 자행하고, 가장 심각하게 표현의 자유를 억눌러 온 자들이 맨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테러에 반대하고 언론의 자유를 지키겠다’고 위선적으로 외치면서 말이다.
대표적으로 이스라엘 총리 네타냐후는 바로 지난해, 가자에 군사적 테러를 가해서 수천 명을 학살한 장본인이다. 이 강대국 지배자들은 자신들이 힘을 보탠 전쟁과 테러로 중동 민중 수십, 수백 만 명이 죽어갈 때는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나마 거기서 오바마를 볼 수 없었던 것이 역겨움을 덜었다. 오바마는 ‘드론’을 이용한 중동 민중 테러 지휘에 바빠서 미처 참가 못한 것일까?
주류 언론과 위선적 정치인들이 앞장서 퍼뜨리는 ‘내가 샤를리다’는 구호도 매우 찜찜하다. ‘샤를리 에브도’는 명백히 이슬람포비아를 부추기며 무슬림들을 조롱해 왔다. 유럽에서 이슬람은 가장 빈곤과 차별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믿는 종교인 데 말이다.
서방 제국주의가 지옥으로 만든 땅을 탈출해 온 무슬림 불법이주민들을 기다리는 것은 저임금, 실업이다. 변두리 빈민가에 살고 있는 청년들에게 이슬람은 그야말로 “억압받는 피조물의 한숨이며, 무정한 세계의 감정이고, 영혼없는 세계의 영혼”(마르크스)이다.
그 점에서 슬라보예 지젝이 “[무슬림들] 스스로 마음속으로 자신들이 열등하다고 생각한다는 사실”만 지적한 것은 아쉽다. 그는 “멍청한 만평 때문에 위협감을 느끼는 무슬림이라면 도대체 그의 신앙이란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라고 묻는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열등감과 위협감을 낳는 구조적 차별과 폭력이다.
프랑스는 알제리를 식민지배하며 150만 명을 학살한 바 있고 이라크, 아프간, 차드, 말리, 니제르 등에 군대를 파병해 학살에 동참해 왔다. 이슬람포비아에 기반한 나치 르펜이 차기 대선후보 여론조사 1위를 한 나라이기도 하다.
이런 프랑스에서 ‘샤를리 에브도’는 엉덩이를 내밀고 성기를 흔드는 무함마드를 그릴 ‘자유’가 있었지만, 무슬림 여성이 히잡을 입고다닐 자유는 금지돼 있다. 호랑이가 지배하는 숲 속에서 가장 힘없는 토끼들을 마음대로 해코지할 권리를 ‘자유’라고 한다면, 샤를리 에브도에게는 그런 ‘자유’가 있었다. 이걸 보고 600만에 달하는 그 사회 가장 밑바닥 무슬림들이 ‘샤를리 에브도’가 정의롭다고 느꼈을까?
결국, 유럽에서 가장 힘있는 자들의 편에서 가장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조롱할 ‘자유’가 가장 비극적이고 부적절한 방식으로 공격당한 것이다. 물론 그 공격 방식은 야만적이었지만, 프랑스 국가의 진정한 야만이 그것을 잉태한 것을 봐야 한다.
이슬람포비아
따라서 이슬람 근본주의에 맞서 자유주의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자유주의 세력과 급진 좌파가 힘을 합쳐야 한다는 주장도 부정확한 것이다. 지금 진정한 문제는 제국주의와 프랑스 국가, 이슬람포비아적 인종차별주의다.
프랑스 국가는 이번 테러를 빌미삼아 자신의 제국주의적 행태와 인종차별적 정책을 더욱 강화하려 할 것이다. 시민적 권리를 제한하고 이주규제를 강화할 것이다. 당장 지난해 7월에 의회 제출한 반인권적 대테러 법안부터 통과시킬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르펜같은 나치를 더욱 고무할 것이고, 무슬림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더욱 부추길 수 있다. 이것은 긴축에 맞서는 프랑스 노동운동도 분열시킬 수 있다. 운동의 단결을 위해서도, 테러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은 평범한 무슬림들과 연대해서 이런 정책과 시도를 막아내는 것이다.
얼마 전 미국과 북한 사이에 있었던 영화 ‘인터뷰’를 둘러싼 소동도 ‘표현의 자유’라는 잣대로 해석하기 힘든 문제였다. 미국 외교정책포커스 소장 존 페퍼는 “만약에 쿠바 코미디 작품이 오바마 대통령의 암살을 묘사했다고 상상해보라. 두 나라 관계는 즉각 동결될 것”이라고 했다.
이 소동과 이어진 대북 제재안 발표는 오바마 정부가 대북 압박을 더욱 더 강화하고 있음을 보여 줬다. 박인규 <프레시안> 편집인은 “미국의 대북정책 기조였던 ‘전략적 무시’가 북한에 대한 ‘노골적 적대’로 한 단계 더 악화된 것 아닌가”하고 말한다.
이 과정에서 공개된 ‘랜드 연구소’ 브루스 베넷이 소니영화사 회장에게 보낸 메일을 보면 “나는 김정은의 암살이 북한 정권을 붕괴시킬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믿는다”고 돼 있다. 더 놀라운 것은 소니 영화사 회장 마이클 린턴의 답장이다. “브루스, 내가 국무부의 고위 관료와 얘기해봤는데, 그는 당신이 말한 것을 모두 동의한다고 했다.”
미국은 최근 ‘당신들이 한미군사훈련을 중단하면, 우리도 핵실험을 중단하겠다’는 북한의 공개 제안도 거절했다. ‘두 사안을 연결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이유였다. 북한은 이 제안을 하면서 “합동군사연습이 우리만을 겨냥한 것이라면 제의를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이라고 했는데, 군사훈련은 북한만 겨냥한 것이 아니었던 셈이다.
결국 중국을 겨냥한 미국의 아시아 회귀 속에 올해도 한반도 주변 긴장은 고조될 가능성이 높아 보이고, 박근혜의 대북 정책은 여기에 종속변수일 것이다. 더구나 박근혜는 북한과 대화를 하겠다면서 국내적으로는 종북몰이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프랑스에서 무슬림을 조롱하는 게, 미국에서 김정은 암살 영화를 만드는 게 강자에 맞선 용기가 아니듯이, 이 나라에서 북한 문제도 비슷하다. 백령도 위문가고 천안함 위령탑 참배하며 ‘튼튼한 안보’를 말하는 정의당을 보면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굴욕감’이다.
검찰에 출석해서 ‘북한 3대 세습’에 대한 ‘사상검증’을 받았던 신은미 씨는 결국 강제출국 당했다. 원래 미국 공화당 지지자였던 신은미 씨는 “[북한은] 얼굴이 빨갛고, 호전적이고, 늘 당과 나라만을 위해 사는 이상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북한 관광을 다녀와서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고, 대동강 물은 맑았다’고 했을 뿐이다. 왜 북한의 어두운 면은 그리지 않았냐는 질문에 신은미 씨는 “남한의 여행사는 외국인에게 ‘쪽방촌 투어 상품’을 추천하나?”고 되물었다.
‘사골 보안법’
신은미 씨는 ‘표현의 자유’는 고사하고, 마녀사냥만 당하다가 테러 위험까지 겪고 결국 강제출국당했다. 송두율 마녀사냥 이후 10년이 지났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당시 위르겐 하버마스는 제자인 송두율에게 “그 야만적인 나라에서 빨리 나와라”고 한 바 있다. 신은미 씨도 강제출국 당하면서 이 ‘야만적인 나라’에 남아있는 황선 씨를 걱정했다.
그리고 황선 씨는 결국 구속됐다! 황선 씨는 17년 전 일기장과 16년 전 옥중편지까지 문제가 됐다. “17년 전 일기를 가지고 오늘의 나에게 죄를 묻는 것이 타당한가? … 별 문제가 없으니 ‘숨은 목적’까지 나오고 있다.” 머리 속을 뒤져서 마지막 한 방울까지 우려먹는 ‘사골 보안법’인 것이다. (2002년 내가 구속될 때 한홍구 교수님 수업에 제출했던 ‘이적’리포트가 문제됐던 게 떠오른다. 검찰은 내가 98년 구속 때 최후진술문을 온라인에 올린 것도 문제삼았다. 이런 식이면 ‘이적’ 이메일, ‘이적’ 카톡, ‘이적’ 트윗 등을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
안타까운 것은 진보진영에서 신은미 씨의 ‘표현의 자유’를 방어하는 제대로 된 운동도 건설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진보진영 일부는 황선 씨를 신은미 씨와 구분해 보며 방어에도 더 소극적이다. ‘신은미는 억울하지만 황선은 좀 심했다’는 것이다.
이 틈을 노리고 종편은 “황선은 종북 공장장”이라며 핏대를 높이고 있다. 검찰은 ‘종북 콘서트’에 참가했다며 새민련 임수경 의원도 소환하려 한다. 전 진보당 활동가들은 동네 주민모임이나 친목모임에서도 배제되는 일을 겪고 있다고 한다.
이런 기가막힌 상황을 그대로 놔두면 진보진영과 노동운동이 새로운 대안과 단결, 투쟁을 건설하는 것은 계속 가로막힐 수 있다. 신은미 씨가 당한 것도, 이석기 의원과 진보당이 당한 것도, 황선 씨가 당하고 있는 것도 말도 안 되는 마녀사냥이라는 점에서 아무 차이가 없다.
지금 서방 지배자와 언론들은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이 혐오를 부추기고 약자를 조롱해 온 것을 가리려고 한다. 이 나라에서 주류 언론도 마찬가지다. 언론과 방송에서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와 진실과 정의에 대한 추구는 사라진지 오래다.
그제 박근혜 신년 기자회견에서도 봤듯이 이 나라 주류언론은 결코 ‘세월호 7시간 동안 무엇을 했나?’, ‘장그래 죽이기가 비정규직 대책이란 말인가?’, ‘진보당 해산은 민주주의 해산 아니냐’고 묻는 ‘자유’를 추구하지 않는다. 오로지 마녀사냥과 종북몰이를 할 ‘자유’만 맘껏 누리고 있다.
정말 자유롭게 ‘표현’돼야 하는 것은 이 추운 겨울에 굴뚝에 올라가고 찬바닥에서 ‘오체투지’하며 외치는 노동자들의 목소리여야 한다. 아직도 억울해 눈을 감지 못하는 세월호 희생자들을 위한 진실의 요구여야 한다. 강화되는 제국주의의 위협에 맞서 한반도의 평화를 지키려는 염원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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