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론 제프AARON JAFFE
사회적 재생산 이론을 통해서 장애를 분석하려는 이 글의 필자인 애런 제프는 좌파적 이론지인 <스펙터Spectre>의 편집자이자 <사회 재생산 이론과 사회주의적 지평: 노동, 권력, 그리고 정치 전략>(Pluto Press)의 저자이다. 뉴욕의 줄리어드 스쿨에서 철학과 인문학 강의를 하고 있다. 글이 길어서 3번에 나누어 연재한다. 이 글은 세 번째이자 마지막이다.(번역: 두 견)
출처: https://spectrejournal.com/social-reproduction-theory-and-disability/
자신의 능력을 재생산하는 일에 어떤 식으로든 바쁜 삶을 살 수 없는 사람들은 제외된다. 그러나 이 "출구"의 소멸조차도 거주지의 형태와 한계에 기여한다. 그것은 자본에 적합한 노동력의 형태가 제한적이고 좁게 경계된 방식으로 진화하는 폭력적인 사회 질서를 규정한다. 실현되지 않은 힘은 이 구체화된 영역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무것도 아닌' 이 실현되지 않은 힘이 바로 이런 이유로 자본의 구체화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에 의존할 때, SRT는 '장애'를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자원을 갖게 된다.
SRT는 동질화된 상품으로서의 노동력이라는 형태 결정의 중심에 '장애'라는 보이지 않는 본질을 놓음으로써, 능력주의적으로 착취 가능한 노동력의 형태를 재구성하고 물신화하는 것을 넘어 자본의 놀랍도록 깊은 사회적 폭력성을 인식할 수 있다. 따라서 기존 형태가 허용하는 판단을 넘어 가치 있게 여기고자 하는 잠재력과 비판적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이러한 접근법을 현재의 노동력 형태에 적용하는 것은, 보다 자유로운 잠재력의 영역을 생각하고 가리키기 위한 어떤 적절한 시도에도 필요하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그 이름에 걸맞게, 자본의 조건 하에서 마르크스가 그것들을 생각하는데 꽤 정당하게 사용했던 아이러니한 이중적 자유를 넘어설 것이라는, 즉 우리 힘의 새로운 형태를 '자유'라는 사회적 기반을 통해 생각하는 데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자본>으로부터 이끌어낸 이 보다 견고한 이론적 토대를 통해 SRT는 마르크스의 <고타 강령 비판>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자본>이 지금 여기에서와 같은 노동력을 결정하는 장애차별적 착취 가능한 사회 형태가 사회적으로 재생산되는 폭력에 대한 해방적인 정치적 대응을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의 <비판>을 시작할 때, 마르크스는 "사회주의적 강령"은 인간의 노동력이 어떻게 부의 원천인지에 대해 "그 자체로… 의미를 부여하는 상황들을 침묵 속에서 넘길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는 즉시 이러한 상황들에 대한 역사적 관점을 개발하고 노동을 초역사적이고 초자연적인 힘에 의존하는 것으로 개념화하는 관점들을 비판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여기서 유용한 노동으로 간주되는 것은 현재 존재하는 생산의 사회적 조직에 달려 있다.
마르크스가 "유용한 노동은 오직 사회 안에서 그리고 사회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한 라살레를 비판했을 때, 그는 "항상 주어진 시간에 사회의 지배적인 상태의 옹호자들에 의해 이용되어 온" 너무 일반적이고 초역사적인 사회적 재생산의 관점을 비판했다. 최소한, "그런 공허한 문구들은 원하는 대로 뒤틀리고 뒤집을 수 있다"는 것이다. 노동이 사회적이라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며,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핵심적인 질문은 구체적인 사회적 관계가 어떻게 우리의 능력들 자체를 폭력적으로 왜곡하는가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에 적합한 사회적 관계에서 공산주의에 적합한 사회적 관계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노동력에 대한 추상적 결정을 곧바로 초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제안하면서, 마르크스는 노동력을 그들의 변화하는 사회적 기반으로부터 형성되고 흘러나오는 것으로 생각하려는 자신의 의지를 단순히 따르고 있다.
결국 우리의 힘을 그 생산의 상황에 비추어 이해해야 한다면, 주어진 자본주의적 사회적 토대에서 노동력으로 나타나도록 제약된 능력은 진정한 자유의 기초로 평가할 수가 없다. 공산주의적 사회적 토대만이 '개인의 전면적인 발전'과 '협력적 부의 모든 도약'을 지향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이중적 목표는 구체적으로 자본주의적 토대가 청산되고 우리의 능력을 진정으로 키울 수 있는 더 풍요로운 토양이 마련되기 전에는 달성될 수 없다.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마르크스는 "노동 분업에 대한 개인의 종속"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산주의에서 개인이 자신의 능력을 특정한 방식으로 개발하거나 집중하는 것이 금지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는 개인은, 자본이 기초적이고 동질화된 노동력을 착취하는 비율을 최대화하기 위해 점점 더 구체적인 노동을 분할함으로써 그러한 전문화를 강요하는 생산의 사회적 조직에 의해 지배되지, 즉 종속되지 않을 것이다.
공산주의적 개인들은 노동 시장에서 경쟁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발전 욕구에 대한 자유로운 표현으로서 자신의 역량을 원하는 범위 내에서 집중할 것이다. 노동자들에게 "노동의 감소되지 않은 수익"을 돌려주라는 라살레의 요구는 마르크스가 <고타 강령 비판>에서 비판한 주요 대상이었는데, 이는 역량이 더 풍부하고 자유로운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사회적 기반을 변경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종속적 힘으로서 자본의 분업화를 그대로 둔다면, 라살레의 계획은 어떤 사람들을 선택하고, 다른 사람들을 소외시키며, 일반적으로 노동력의 손상된 사회적 재생산을 유도하는 구체화 형태에 도전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자본이 진화하는 분업에 개인을 종속시키는 것을 받아들이고, 노동의 수익을 노동자에게 직접 환원하는 것은 폭력적이고 노동력을 동질화하는 사회 질서를 곧바로 재생산할 수 있다.
그러한 프로그램은 우리 능력의 동질화된 상품화에 실질적으로 도전하는 데 필요한 자원을 제공하지 않을 것이며 더 나쁜 것은 그것의 명확한 표현을 위해 절실히 필요한 새로운 사회적 기반을 창출하는 데 단 한 걸음도 내딛지 않을 것이다. 마르크스가 라살레에 맞서서 공산주의는 전혀 다른 사회적 기반을 통해 우리 능력의 새로운 결정을 사회적, 역사적으로 생성할 것을 요구한다고 주장한 것도 이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라살레의 "감소되지 않은 수익"에서 "필요의 공동 만족을 위한 것"을 공제하고, "이 부분은 오늘날 사회와 비교하여 상당히 커지며, 새로운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그에 비례하여 성장한다"고 생각했다. 사회적 부는 착취 가능한 노동력의 구매를 통해 할당되는 대신 필요의 공동 만족에 바쳐질 때, 필요 그 자체를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것으로 동시에 변화시키기 시작한다.
비록 마르크스가 특별히 교육과 보건의료를 지적하지만, 그의 주장은 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능력의 더 사회화된 형태는 "새로운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비례하여" 가능하게 만들어지며, 라살레에 대항하여, 마르크스는 이러한 합의를 위해 싸우는 것이 어떤 사회주의 프로그램에서도 중요한 부분이라고 제안했다.
마르크스는 이런 식으로 사회적 부의 일부를 '일할 수 없는 자'를 위해, 그리고 '빈곤 구제'를 위해 유보하는 것만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 대신 마르크스의 설명 논리는 경쟁 시장을 통해 누군가를 선택하고, 다른 사람들은 배제하며, 따라서 애당초 빈곤 구제의 필요성을 만들어내는 분업 체계를 훨씬 넘어서는 노동력의 사회역사적 발전을 위해 싸우도록 몰아간다.
이러한 혁명적인 헌신은 모든 노동력에 의미와 형상을 부여하는 사회적 기반의 지속적인 전환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즉 마르크스는 그의 <비판>에서 자본주의에 적합한 장애차별적이고 착취 가능한 형태의 노동력에 대한 개인의 종속을 초월하고, 역량의 생산과 지속적 재생산이 그들 자신의 권리를 개인적·사회적으로 동시에 가치있게 만드는 사회질서를 달성하는 데 헌신하고 있다.
만일 우리에게 이전에 "사업 이외에는 출입 금지"라는 문구가 있었다면, "사업 이외에는 퇴장 금지"라는 문구를 가진 더 큰 환경의 한 가운데에서 노동력의 공산주의적 결정은 마침내 이 획일화된 상품화에 필수적인 제약들을 넘어선다. 개인과 사회가 공동으로 다방면에 걸쳐 능력을 개발하는 것은 그 자체로 목표가 될 것이다. 사회적 부는 그 공통적인 만족을 위해 할당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산주의 사회의 표지판 위에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각자의 필요에 따라!”라고 쓰여 있는 이유이다.
조화롭고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회적 재생산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전은 자본이 능력을 상품화된 노동력으로 환원하는 방식에서 장애차별적이고 착취 가능한 형태를 초월해야만 달성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자본의 종속을 극복하는 것 이상으로 어떤 종류의 종속도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마르크스에게 공산주의는 사회의 주요 가치를 자유롭게 만드는 생산의 사회적 조직이며, 우리 능력 자체의 다방면적인 사회적 재생산이다.
'장애'라는 용어는 마르크스의 <비판>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텍스트의 정치적 약속은 노동력에 대한 마르크스의 사고에 내재된 능력이라는 개념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는 오늘날 노동력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종속되는 동질화되고 획일화되고 너무 자주 물신화되는 장애차별적 착취 가능한 형태를 넘어서는 훌륭한 공산주의적 포장지이자 급진적인 정치적 지평을 제공한다.
마르크스는 욕구의 공동 충족, 새로운 사회적 부의 형태, 특히 새로운 사회적 생산 조직을 향한 개인의 능력 발전을 강조함으로써 전체 사회적 기반을 재구성하고 이를 통해 우리 역량의 미래 발전을 목표로 하는 정치적 대응을 제시한다. 종합하자면, 노동력의 이중적 자유에 대한 자본의 형태 결정 분석과 우리의 능력을 공산주의적 진정한 자유를 향하게 하는 <고타 강령 비판>의 지향은 SRT가 현재 노동력이 취할 수밖에 없는 장애차별적-착취 가능한 형태를 넘어서서 사고할 수 있는 자원을 제공한다.
능력의 실현과 장애를 통한 외면을 통해서 이러한 형태의 사회적, 역사적 결정을 생각할 때 SRT는 처음에 탐구했던 고민을 넘어설 수 있는 자원을 갖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장애를 통합할 때, SRT는 노동력의 생산과 재생산이 근본적으로 다른 사회적 생산 조직 하에서만 진정으로 가치 있는 구체성을 획득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자본이 지배하는 능력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노동의 구체성이 추상적이면서 동시에 무력화되는 것으로 인식될 때, SRT는 자본의 편에 있는 일부 또는 모든 노동력의 노동을 마치 정당한 규범적 자원인 것처럼 끌어들이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SRT는 자본에 대한 비판을 더욱 날카롭게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적 열망을 더 잘 뒷받침할 수 있다.
(기사 등록 2024.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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