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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혁신

"위험한 외줄" 위를 걷기 - 1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3. 11. 19.

크리스 마이사노 CHRIS MAISANO

번역: 두견

사회주의적 좌파는 '반대 야당'과 '집권당'이 되어야 한다는 두 가지 주요 전략적 과제 사이에서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균형을 맞출 수 있을까? 구체적 맥락과 상관없이 의회, 선거, 타협 일체를 거부하는 기계적이고 경직된 태도는 사회주의 사상과 실천의 역사와도 전혀 맞지 않다고 지적하면서 독일과 러시아의 경험을 분석하고, 미국의 구체적 정치상황에 대해 이것을 적용하려고 시도하는 이 글의 필자인 크리스 마이사노는 뉴욕시 DSA(미국민주적사회주의자들)의 회원이다. 글이 길어서 두 번에 나누어 연재한다. 이것은 첫번째 글이다. 

출처https://socialistforum.dsausa.org/issues/winter-spring-2023/walking-the-perilous-tightrope/

DSA 창립자인 마이클 해링턴Michael Harrington 은 회고록 <세기의 파편>에서 미국의 민주적 급진주의자들이 직면한 도전에 대해 설명했다:

"미국에서 급진주의자의 소명은... 위험한 외줄타기를 하는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사회에 대한 사회주의 비전에 충실하고 그 내용을 끊임없이 발전시키고 확장해야 하며, 그 비전을 체제 변혁이 아니라 약간의 존엄성이나 빵 한 조각을 얻기 위해 싸우는 실제 운동과 접촉시켜야 한다. 급진주의자가 [자신의] 비전에만 완전히 집착한다면, [그들은] 그 줄타기에서 떨어져 정의로운 무의미함에 빠질 것이고, [그들이] 고무하고자 하는 운동에 너무 잘 적응한다면, [그들은] 실용적인 무의미함에 빠질 것이다. [그들의 임무는 비전과 실용성의 균형을 맞추고, 단순히 다음 단계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만 마일의 항해 속에 다음 단계를 위해 싸우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뿐만 아니라 민중의 즉각적인 필요와 이익이 장기적인 사회 변혁 프로젝트와 어느 정도 긴장 관계에 있는 모든 곳에서 민주적 사회주의자들이 직면하는 기본적인 딜레마이다. 20세기의 대중적 사회주의 정당들이 겪었던 것처럼 이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며, 종종 힘든 길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DSA는 여전히 그러한 정당과는 거리가 멀지만, 비슷한 종류의 문제와 도전에 맞서 나름의 방식으로 고군분투하고 있다.

내가 여기서 다루는 질문은 딜레마를 약간 바꿔서 표현한 것이다. '반대 야당''집권당'이 되어야 한다는 두 가지 주요 전략적 의무를 동시에 충족하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일까? 우리는 두 가지를 모두 할 수밖에 없지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민주사회주의 이론가 랄프 밀리반드(Ralph Miliband)"이 두 가지 역할을 조화시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며, 자칫하면 불가능한 일이 될 수도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 글에서는 세 가지 주요 요점을 설명함으로써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고자 한다. 첫째, 사회주의 목표의 추구는 정치적 또는 사회적 맥락에 관계없이 획일적인 전략을 수반하지 않는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나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용한 정치 전략의 문제에 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견해를 논의할 것이다.

둘째, 사회주의 전략이 실질적인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해당 국가의 정치적 조건에 맞게 조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제2인터내셔널 사회주의자들, 특히 차르 제국의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들과 독일 사회민주당(SPD)의 경험을 논의할 것이다.

이것은 당연한 지적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회주의자들은 특히 좌파가 자체적으로 사회주의 정치 모델을 개발하는 대신 종종 사회주의 정치 모델을 수입하려고 노력해 온 미국에서 실제로 이러한 의무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데 종종 어려움을 겪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러한 역사적 고려 사항을 특히 자유민주주의적 기본 정치적 자유를 훼손하려는 우파의 노력에 비추어서, 오늘날 미국 DSA와 광범위한 좌파가 직면한 전략적 문제에 대한 광범위한 평가에 적용할 것이다.

한 가지 경로는 없다

마르크스주의 정치는 경직되고 교조적이라는 평판이 적지 않다. 자칭 마르크스주의 추종자들 중 상당수가 그랬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 자신도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 전략적, 전술적 문제에 대해 기꺼이 생각을 바꾸기도 했으며, 사회주의자들이 언제 어디서나 따라야 할 융통성 없는 처방전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더 중요한 것은 사회주의자들이 직면한 정치적 상황에 따라 개혁주의 또는 혁명적 전략을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했고, 해방의 도구로서 보통 선거권의 힘에 대한 엄청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사회주의는 기존의 모든 사회적 조건을 강제적으로 전복해야만 목적에 도달할 수 있다"는 주장을 담은 유명한 선언으로 <공산주의 선언>을 마무리한다. 그러나 1848년 혁명의 폭력적 진압과 정치적 황무지를 겪은 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수정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기존 질서에 순응하여 노동자들의 삶을 소폭 개선하는 데 그쳤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노동자들이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고 사회적 관계를 변화시키기 위해 정치적 권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했지만, 그 과정이 모든 곳에서 동일할 수 없고 동일하지도 않다는 것을 인식했다. 1872년 암스테르담에서 행한 제1인터내셔널의 목표에 대한 연설에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강조했다:

“우리는 그 목표를 달성하는 방법이 모든 곳에서 동일하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다양한 국가의 제도, 관습 및 전통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노동자들이 평화적인 방법으로 목표를 달성 할 수있는 미국, 영국과 같은 국가들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리고 제가 그 제도를 더 잘 알고 있다면 네덜란드도 추가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대륙의 대부분의 국가에서 혁명의 지렛대는 물리력이어야 한다는 사실, 즉 노동의 지배를 확립하기 위해 언젠가는 호소해야 하는 힘이라는 사실도 인식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마르크스가 특정 국가의 지배적인 정치적 맥락에 따라 다른 전략적 접근을 분명히 허용했음을 알 수 있다. 맞다, 그는 정치적 자유가 제한적이거나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혁명의 지렛대는 힘이어야 한다"고 여전히 주장했다. 여기에는 명시적으로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러시아와 독일이 이 범주에 포함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반면 마르크스에 따르면 미국을 포함하여 정치적 자유와 의회 주권이 상대적으로 높은 국가의 사회주의자들은 선거 및 의회 정치, 노동조합 조직, 노동계급 언론 등과 같은 "평화적 수단"을 통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뉴욕 월드>와의 인터뷰에서 제1인터내셔널의 활동에 대해 이러한 견해를 더욱 자세히 설명했다:

"전 세계 모든 지역에서 일반적 문제의 특수한 측면이 나타나고, 노동자들은 이를 고려하여 각자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 노동자들의 협회는 뉴캐슬과 바르셀로나, 런던과 베를린에서 마지막 세부 사항들이 동일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는 노동계급이 정치적 힘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지에 대한 선택권이 있다.

평화적 수단을 통해 목표를 더 빠르고 확실하게 달성할 수 있는 나라에서 봉기는 어리석은 짓이다. 프랑스에서는 수많은 억압적인 법과 계급 간의 치명적인 적대로 인해 사회적 분열에 대한 폭력적 해결책이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한 해결책을 선택할지는 그 나라의 노동계급이 결정할 문제이다."

엥겔스는 자신의 정치적 '유언'으로 알려진 1895년판 마르크스의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서문에서 이러한 견해를 더욱 상세히 설명했다. 여기서 그는 "1848년까지는 최종적 해결책을 내렸던 바리케이드 뒤의 거리 투쟁, 즉 구식의 반란은 낡은 것이 되었다"고 단호하게 주장했다.

대신 사회주의자들은 대의기구에서 "참정권의 활용과 가능한 모든 직책의 장악"을 전제로 한 사회민주당의 "독일 사례"를 따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19세기 말, 사회민주당은 포위당한 반합법적 조직에서 독일을 이끄는 주요 세력 중 하나로 꾸준히 성장하여 국가 전체를 이끌 수 있는 잠재적 지도력을 갖추게 되었다:

”이대로 간다면 우리는 금세기 말에는 중간 사회계층과 소부르주아지, 소농의 대부분을 넘어설 것이며, 다른 모든 세력이 좋든 싫든 고개를 숙여야 하는 이 땅에서 결정적인 세력이 될 것이다. 이 성장이 지배적 정부 체제를 뒤덮을 때까지 중단 없이 계속 나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의 주요 임무이다...역사의 아이러니는 모든 것을 뒤집어 놓는다.

우리, '혁명가', '뒤엎는 사람들'은 전복을 강제하는 데 있어 불법적인 수단보다 합법적인 수단을 통해 훨씬 더 잘 성공한다. 스스로 자처하는 질서의 당담자들은 스스로 설정한 법적 조건 때문에 멸망한다... 우리가 그들을 스스로 바라고 있는 거리 전투로 몰아 넣을 정도로 미치지 않는다면, 결국 그들에게 치명적인 합법성을 돌파 할 수있는 것은 그들 자신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엥겔스의 서문은 국가가 반사회주의 탄압의 새로운 물결을 일으킬 구실을 제공할 것을 우려한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에 의해 폭력 혁명에 대한 언급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 편집되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엥겔스가 무력을 공격적인 방식으로 사용해서는 안 되며 반동적 세력의 반혁명으로부터 합법적인 정치적 다수를 방어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은 출판된 구절과 편집된 구절 모두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에이브러햄 링컨과 공화당이 노예 소유주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사적 수단을 사용한 미국 남북전쟁은 엥겔스가 염두에 둔 정치적 역학 관계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일 것이다. 따라서 사회주의 정치는 한가지 행동 방식에 대한 융통성 없는 헌신을 수반하지 않는다. 전략과 전술이 성공하려면 지배적인 조건에 맞게 조정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활동해야 하는 특정 정치적 맥락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이 주제에 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술과 실천을 되돌아보면 오늘날 좌파의 많은 부분에서 '선거주의'로 조롱받는 것에 대해서 그들이 얼마나 큰 믿음을 가졌는지 알 수 있다. 마이클 해링턴이 그의 저서 <사회주의>에서 지적했듯이, 대중 정치와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보수적 적응에 대한 개인적 경험이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보편적 참정권의 잠재력에 대해 너무 순진했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바이에른에서 재생되었는가?

이제 마르크스주의 연구에서 역사, 즉 제2인터내셔널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영향력 있는 두 흐름, 즉 짜르 제국의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들과 독일 사회민주당의 역사로 넘어가자. 후자는 제2인터내셔널의 주도적 정당이었으며, 최근에는 고전적인 사회민주당의 사례, 특히 카우츠키주의 또는 "중앙파"의 사례가 일부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물론 볼셰비키는 전 세계 수많은 혁명가들이 볼셰비키의 전략과 전술을 각자의 나라에 도입하도록 영감을 주었다. 다른 사람들이 왜 그들을 모방하고 싶어하는지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고전적인 사회민주당은 주요 자본주의 국가에서 수백만 명의 추종자를 확보하고 현대 대중 정치의 많은 전술을 개척했으며, 볼셰비키는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켰다.

독일이나 러시아에서 효과가 있었다면 각자의 나라에서 그것을 시도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일까? 우선, 앞서 살펴본 것처럼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특정한 정치적 맥락의 사회주의자들에게는 적합할지 모르지만 여러분의 상황에서는 적합하지 않을 수 있는 행동 방식을 모방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물론 선조들의 경전적 권위에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이 점을 증명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다행히도 차르 제국과 제국 독일에서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역사는 이 주장을 뒷받침한다. 차르 제국의 사회주의자들은 사회민주당이 매우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모방하고 싶었지만, 그들이 살았던 정치적 조건이 이를 극도로 어렵게 만든다는 것을 깨달았다.

게다가 제국은 매우 광범위하고 다양했기 때문에 지역마다, 특히 중앙 러시아와 국경 지대 사이에 서로 다른 정치적 조건이 지배적일 수 있었다. 동시에 사회민주당조차 제국 전체에 걸쳐 통일된 전략적 접근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제국 독일은 권위주의적 군주제였지만, 정치 및 경제 발전에서 지역적 차이가 현저한 연방 국가이기도 했다. 북부 독일 주들은 일반적으로 정치적 자유가 더 높고 선거 제도가 더 자유로운 남부 독일 주들보다 더 억압적이었다.

개혁파와 혁명파 사이의 당내 분열은 이러한 정치-경제의 지리적 패턴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전자는 바이에른과 같은 주에, 후자는 프로이센과 같은 주에 집중되어 있다. 이는 양측의 지도자들이 추상적인 이론적 고민에 기반하여 전략을 선택하기보다는 자신이 경험한 정치적 상황에 따라 대응했음을 시사한다.

사회주의 역사가 에릭 블랑의 저서 <혁명적 사회민주주의: 러시아 제국의 노동계급 정치(1882-1917)>는 마르크스주의 정치에 대한 공통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제국 내 사회민주주의 운동이 현장에서 어떻게 서로 다른 양상을 보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차르는 절대 군주였지만 차르의 통치 방식은 제국의 각 지역마다 달랐다.

예를 들어 중앙 러시아는 핀란드와는 정치 체제, 경제 상황, 노동 운동, 정치적 자유의 정도가 달랐다. 러시아 독재의 맥락에서 차르 통치에 대한 비타협적 반대 전략은 의미가 있었으며, 그와 관련된 위험에도 불구하고 잠재적으로 효과적인 유일한 전략이었다. 블랑이 보여주듯이, 이러한 접근 방식은 적어도 1905년 혁명 이전까지는 혁명적 사회민주주의 운동 내에서 이념적, 조직적 경계를 넘나들었다. 그때까지

"멘셰비키를 포함한 각 흐름은 폭력적인 무장 혁명 투쟁에 참여했고, 서구 사회주의 정당의 조직 모델에서 탈피했으며, 자유주의자들과의 블록을 거부하고 독립적인 노동자 계급 운동만이 민주주의 혁명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고 주장했다. 러시아의 독재적 상황에서 이러한 입장은 정통 사회민주주의에 의해 명시적으로 승인되었으며, 이는 정치적 자유가 있는 국가와 없는 국가에 대한 전략을 뚜렷하게 구분했다."

짜르 제국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매우 억압적인 정치 상황 때문에 사민당의 행동 방식을 그대로 답습할 수 없었지만, 특히 카우츠키가 국가에 대한 비타협적 반대를 강조한 것은 그들에게 매우 매력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와 엥겔스처럼 제2인터내셔널 마르크스주의자들도 정치적 자유가 있는 국가와 없는 국가를 구분하고 정치적 맥락에 따라 서로 다른 전략적 접근법을 주장했다.

블랑은 "시민적 자유와 의회가 있는 나라에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언론을 통해 사회주의 사상을 홍보하고, 강력한 당 조직을 구축하고, 선거에 출마하여 메시지를 더욱 확산하고, 노동조합을 건설하는 등 인내심을 갖고 평화적인 활동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짜르 러시아는 반동적인 경찰 국가였고, 그곳의 모든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가장 시급한 정치적 과제는 정치적 자유를 쟁취하는 것이라는 데 동의"했으며, 이는 파업과 시위와 같은 대중행동 전술을 통해서만 달성할 수 있었다. 이는 상대적으로 더 자유로운 서유럽 국가들과 달리 제국에서 개혁주의적 사회민주주의 흐름이 발전하는 데 장애가 되었다.

따라서 블랑은 "러시아의 절대주의는 프롤레타리아 급진주의의 성장을 비할 데 없이 촉진하여 혁명적 사회주의를 촉진하는 데 매우 유리한 조건을 조성했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듯이 차르 제국의 각 지역마다 정치적 자유의 수준에는 의미 있는 차이가 있었다.

블랑은 "짜르 탄압의 형태와 강도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크게 달랐다. 한 시점에서 효과가 있었던 것이 나중에 효과가 없을 수도 있고, 모스크바에서 실패한 것이 리가에서는 성공할 수도 있다"라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핀란드는 1809년 차르 알렉산더 1세가 스웨덴에게서 강제로 합병한 후에도 헌법과 의회를 유지하고 비교적 높은 수준의 자치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중앙 러시아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사민당의 사례를 직접적으로 모방할 수 없었지만 핀란드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핀란드의 정치적 상황이 독일과 거의 비슷했기 때문에 모방할 수 있었다. 두 곳 모두 사회주의 정당이 참여할 수 있는 의회 제도가 있었지만, 여전히 서유럽이나 아메리카 대륙에 비해 권위주의적인 정권이었다.

핀란드와 독일에 대해서 블랑은 "시민적 자유는 합법적인 노동운동을 허용하기에 충분했지만, 검열의 제한은 강력했다, 그리고 노동자 지도자들에 대한 선택적인 국가 탄압은 노동자들과 특히 노동운동의 지도자들에게 그들의 조직이 정권에 의해 허용된 경계를 넘어서면 언제든지 해체될 것이라는 정당한 두려움을 심어줄 만큼 충분히 일관되었다"고 관찰했다.

사회주의자들은 선거운동을 하고, 의회 토론에 참여하고,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신문을 발행할 수 있었지만 "입법 기관의 정책 결정 권한은 제국 국가에 의해 심각한 제약을 받았다." 이 마지막 점이 중요하다. 핀란드와 독일 모두 의회는 궁극적으로 입법을 발의할 권한이 없었고 군주에 의해 해산될 수 있었다.

그들은 말 그대로 '말하기 장소'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선거와 의회 정치를 주로 선전과 선동에 사용하는 것은 사민당의 슬로건인 "창문을 통해 의회 바깥의 대중에게 말하라"에 따라 당연한 일이었다. 핀란드인들은 볼셰비키가 러시아에서 집권한 직후인 19181월에 사민당 전략을 채택하고 자체적으로 '붉은 혁명'을 시작했다.

차르 제국의 사회민주주의 정치에 대한 블랑의 분석은 제국주의 독일에도 효과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데, 독일에서는 각기 다른 사민당 흐름이 독일 각지에서 다른 전략과 전술을 채택했다. 빌헬름 황제의 국가는 혁명적 전략과 개혁주의 전략 모두를 위한 공간을 제공하는 기묘한 장치였다. 이 국가는 총리와 내각 임명권을 포함한 실질적인 행정 권한을 가진 세습 군주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좌파와 노동자 운동은 공개적인 사회민주주의 모임, 신문, 협회를 금지하는 일련의 반사회주의 법률을 포함하여 광범위한 법적 탄압을 받았다. 독일 제국의회 선거는 남성에게도 선거권을 부여했지만, 선거 제도는 보수적이고 귀족적이며 농경적인 성향을 가진 정당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동시에 독일 의회는 주권이 없고 입법을 도입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무화과나무 잎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다. 독일은 단일 국가가 아니라 연방 국가였으며, 특히 남부의 많은 독일 주(랑데르)는 사회민주주의와 노동계급 권력을 구축하는 데 도움이 되는 보다 자유로운 정치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반사회주의 법조차도 특정 측면에서는 이상하게도 관대했다.

광범위한 규제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사민당을 금지하지는 않았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명목상 무소속으로 제국의회에 출마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는 제국 내에서 전략적 접근 방식이 다양할 수 있고 실제로도 다양하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이는 사민당 내부에서 지속적으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1890년에 반사회주의 법이 만료된 후, 사민당은 제국 전역에서 선거 동원과 의회 선동에 몰두했다.

역사학자 게리 스틴슨이 <단 한 사람도! 단 한 푼도 아니다!>에서 관찰했듯이, 제국 수준에서 개별 주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주마다 각각 달랐고 "사민당의 정치적 강조점은 상황에 따라 달라졌다.” 각 주에서는 재산 소유 및 기타 자격에 따라 다소 제한적인 공천권을 가졌다. 독일 제국의회 선거 제도는 남성의 보편적 참정권을 보장했지만, 대표성이 그다지 공평하지 않았고 대체로 도시 정당인 사민당에 체계적으로 불리했다.

선거구의 규모는 매우 다양했으며, 스틴슨이 지적했듯이 "사민당은 제국의회에서 의석을 차지하기 위해 전국 평균 득표율의 두 배 또는 세 배를 얻어야 했다." 이 때문에 지역 정당 조직, 특히 베를린이 위치한 프로이센과 같은 권위주의적인 북부 주에서는 후보를 의회에 선출하고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보다 선거 캠페인의 선전과 교육적 가치에 더 관심을 갖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당 전체에 걸쳐 균일하지 않았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견해는 특정 주에서 우세한 정치적 자유와 의회의 책임 수준에 따라 달라지는 경향이 있었다. 예를 들어 프로이센 주 선거는 비밀리에 실시되지 않았고, 노동계급 대표를 체계적으로 차별하는 악명 높은 3계급 참정권에 따라 대표성이 할당되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독일 남부 바덴,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 큰 주에서는 1906년에 모두 직접 비밀 선거를 실시했다. 스틴슨은 지역 경제의 형태에 이어 "사민당에 영향을 미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민당이 활동하는 정치적 환경이었다. 이 요소는 특정 지역에서 당이 지지층을 확보할 수 있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데 중요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상황에 따라 급진적이거나 온건한 성격을 띠는 지역 정당의 성격을 형성했다"고 결론지었다.

남부 독일과 북부 독일 사이의 가장 큰 발화점은 주 차원의 예산 투표였는데, 이 질문은 SPD의 정치적 정체성의 핵심으로 다가갔다. 제국의회의 SPD 의원들은 "한 사람도, 단 한 푼도 안 된다!"라는 비타협적인 슬로건 아래 주 예산에 투표해서는 안 된다는 광범위한 합의가 있었다.

그러나 남부 독일 사회민주당은 1890년대부터 주 예산에 찬성표를 던졌다. 이러한 국가 예산에는 일반적으로 중앙 정부에 대한 군사비 지출이 포함되지 않았으며, 남부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결정권을 쥐고 있을 때 예산 협상에서 양보와 개혁을 얻어낼 수 있는 경우가 있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스틴슨의 관찰처럼 "다양한 좌파적 자유주의 정당들이 사민당과의 협력에 더 개방적이었던 남부 독일의 자유로운 분위기는 어렵게 확보한 예산에 대한 투표를 정치적 주고받기 과정의 일부로 만들었고, 사회주의자들이 이러한 자유주의자들과의 타협에 관한 예산안에 반대 투표하는 것은 향후 모든 종류의 협력을 위태롭게 할 것"이었다.

전국 당 대회는 주 예산에 대한 사회민주당의 지원을 거부하는 결의안을 지속적으로 통과시켰지만, 남부 독일 의회의 사민당 의원들은 이를 계속 강행했고, 1910년 당 대회에서 대규모 충돌이 발생하여 의원들이 제명될 뻔했다.

남부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프로이센이 아닌 독일인들과 마찬가지로 프로이센이 제국에서 가장 크고 강력한 국가라는 지위 때문에 프로이센에 대해 어느 정도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프로이센이 지역 당 조직을 지배하는 것을 우려했는데, 스틴슨의 말을 빌리자면 "프로이센은 독일에서 가장 개방적이지 않고 가장 억압적인 주였으며, 따라서 프로이센의 사회주의자들은 당에서 가장 급진적인 경향이 있었다는 사실때문에 우려는 더 가중되었다.

당 대회 결의안을 통해 프로이센식의 전략적 방향을 의무화하려는 시도는 추상적인 이론적 원칙에 대한 약속보다는 지역적으로 분열된 상태의 지역적 정치 상황에 적응해야 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실패했다. 1914년과 1918~1919년 사민당의 행동 때문에 이 모든 것을 무시하고 싶은 유혹이 있을 수 있다.

자신의 정치적 맥락에 적응하는 것은 국가 및 기존 질서와 운동을 조화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실패와 단점은 이것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

독일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에 대한 견해는 개혁주의와 혁명주의로 명확하게 나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렌쉬-쿠노우-해니쉬'Lensch-Cunow-Haenisch 그룹은 전쟁 반대론자에서 독일의 승리를 열렬히 지지하는 옹호자로 변모했는데, 이는 혁명적 이론가 알렉산더 파르부스Alexander Parvus의 영향을 받은 궤적이기도 하다.

개혁주의적 '수정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에두아르드 베른슈타인은 전쟁 공채에 투표했다가 칼 카우츠키, 칼 리프크네히트,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반전 독립사회민주당(USPD)에 합류했다. 19192월 암살당할 때까지 혁명적인 바이에른 소비에트 공화국을 이끌었던 수정주의자이자 전투적인 반프로이센주의자였던 쿠르트 아이즈너Kurt Eisner도 마찬가지였다.

1918년 민주주의 혁명으로 평의회 운동이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노동자의 대다수는 새로운 바이마르 공화국을 노동자 및 군인 평의회로 대체하는 것을 지지하지 않았다. 정치사회학자 카르멘 시리아니가 지적했듯이, 대부분의 평의회는

"자신들의 손에 권력을 통합하고 기존 조직을 대체하거나 파괴하기 위해 움직이지 않았다. 대부분의 평의회는 스스로를 [새로운 의회 공화국 안에서] 질서를 재확립하고 구 기구를 민주화하기 위한 임시 기관으로 여겼다.”

1918~1919년 사민당 지도부의 문제는 소수 노동자들만 지지하는 평의회 공화국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데 있지 않았다. 국가와 경제를 적극적으로 민주화하겠다는 강령을 지키지 못했고, 대신 좌파를 강압적으로 탄압했다. 이러한 이유로 전쟁 전 사민당의 많은 지도자와 활동가들이 당을 탈당했다.

그리고 사민당의 전통적인 민주사회주의 강령을 구현하기 위해 싸우는 통합사민당(UPSD)을 창당했다. 사회주의자들이 기존 질서에 과도하게 적응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중 정치를 할 때 외줄타기에서 떨어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위험이다. 주변 여건과 상관없이 획일적인 '혁명적' 접근 방식을 고수하는 것은 대안이 될 수 없다.

2편으로 이어짐 

(기사 등록 202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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