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트 맥마누스MATT MCMANUS
번역: 두 견
자본주의 하에서 법으로 보장되는 형식적 평등은 희극에 불과하다. 민주적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자원 불균형을 해소하면서 언론의 자유와 같은 자유권을 보장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 글의 필자인 맥트 맥마누스는 미시간 대학교의 강사이자 <포스트모더니티의 출현>과 곧 출간될 <정치적 권리와 불평등>의 저자이다.
출처: https://jacobin.com/2023/08/socialism-law-rights-legal-theory
좌파는 법과 법원을 좋아하지 않는다. 미국의 사회주의자에게 대법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면, 예복을 입은 9명의 대법관이 어떻게 ‘자본의 권력을 견제하고 억압을 막아냈는지’에 대해 가운데 손가락을 내밀거나 [폭로하고 비난하는] 장문의 연설을 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법 체계가 없는 세상을 꿈꿔온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국가주의자라는 오명과는 다르게 국가의 "시들어 사라짐"에 대해 썼다. 국가와 국가법은 "부르주아가 자신의 재산과 이익을 상호 보장하기 위해 대내외적 목적을 위해 필연적으로 채택하는 조직 형태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계급 없는 사회가 도래하면 사라질 것"이라는 것이었다. 엥겔스는 "국가는 '폐지'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국가는 시들어 사라져 버린다"라고 썼다.
그러나 엥겔스는 국가가 어떻게 "시들어 사라질" 것인지, 그리고 국가를 대체할 것이 무엇인지는 명확하게 정의하지 않았으며, "사람의 관리가 사물과 생산 과정에 대한 관리의 방향으로 대체될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하지만 계급 없는 사회이든 아니든, 지속될 갈등은 어떻게 받아들이거나 심판해야 할까?
일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회주의 하에서는 경쟁적 자본주의 사회의 이기주의에서 해방된 새로운 유형의 인간이 등장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 법은 필요 없다는 이야기다. 다른 사람들은 사회주의가 엄청난 재화를 생산하여 범죄의 물질적 기반이 증상과 함께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존재하는 사회주의는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았다. 학자들은 소비에트 권위주의가 법의 과잉으로 정의되었는지, 아니면 무법적 강도정치로 정의되었는지에 대해 논쟁을 벌인다. 그러나 근본적인 성격이 무엇이든 소비에트 국가는 확실히 '시들어 사라지지' 않았고, 모두가 아침에는 사냥을 하고 오후에는 낚시를 하며 저녁에는 철학을 하는 형제애적인 사회로 우리를 이끌지도 않았다.
20세기에 집권한 민주적 사회주의자들은 경제 민주화와 부의 재분배를 위해 노력하면서 국가와 법의 필요성을 적당히 강조하는 실용주의적인 경향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단순히 실용적 필요성을 받아들이는 것 이상의 사회주의 법 개념을 정당화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소련이 해체되던 1990년, 크리스틴 시프노이치Christine Sypnowich의 저서 '사회주의 법의 개념'이 출간되자마자 공백이 채워졌다. 현재 캐나다 퀸즈 대학교의 정치 철학자인 시프노이치는 이렇게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이 개인의 차이를 중재하는 틀 또는 진정한 정의의 파편으로 존재한다면,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에서 법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방법을 고려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기존 사회주의'는 법의 '시들어 사라짐'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갈등은 계급보다 오래 지속될 것이며, 부르주아 시장 관계가 사라진 후에도 분쟁은 계속 규제를 필요로 할 것이다.”
사회주의 법의 필요성
사회주의 법이 "부르주아 시장 관계의 종말보다 더 오래 지속될 것"이라면 어떤 지적 원천에 근거해야 할까? 당시 자유주의적 사회주의 철학자 C. B. 맥퍼슨Macpherson의 영향을 받은 후배 학자였던 시프노이치는 분석법학(법해석학)의 자유주의 전통에서 많은 것을 차용했다. 20세기의 분석적 법철학은 "자연법" 법 이론가와 "법 실증주의자"로 나뉘었다.
자연법 이론가들은 법과 도덕 사이에는 필연적인 연관성이 있으며, 따라서 충분히 "사악한" 법 체계는 더 이상 법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나치의 법 체제를 생각해 보면, 자연법 이론가에게 파시즘 법은 법 앞의 평등이나 무죄 추정과 같은 기본적인 법 원칙을 존중하지 않고 규칙이나 일관성 없이 무자비하게 공포를 강요하는 것에 불과했다.
이에 반해 법 실증주의자들은 법과 도덕 사이에는 반드시 연관성이 없다고 주장했다("분리"의 테제). 법이 입법자의 윤리적 견해를 반영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법의 개념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혐오감을 느끼는 것을 포함하여 다양한 규범적 입장을 통합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중립적이라는 것이다. 법 실증주의자에 따르면 아이슬란드와 아파르트헤이트적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비록 하나는 찬탄할 만하고 다른 하나는 개탄할 만하지만 모두 '법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비평가들은 때때로 법 실증주의가 법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 즉 "명령만 따르면 된다!"는 식의 맹목적인 복종을 조장한다고 주장한다. - 법 실증주의 지지자들은 법과 정의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정교한 법 실증주의자들은 특정 법 제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 제도에 복종해야 한다는 논거가 될 수 없으며, 어떤 것이 합법적이면서 동시에 부당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시프노이치는 사회주의자들은 실증주의자와 자연법 이론가 모두에게 고유한 할 말이 있다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사회주의자들은 법이 "자본 M"의 도덕률을 반영하지 않고도 다양한 도덕 체계를 구현할 수 있다는 실증주의자의 주장에 공감할 것이다. 이는 (거칠게 말하자면) 한 시대의 법적 "상부 구조"와 이데올로기가 경제적 생산 관계의 "토대"을 반영한다고 강조한 마르크스의 역사주의와도 일치한다.
노예제 사회의 법은 자본주의 사회의 법과 매우 다르게 보인다. 이어서 시프노이치는 가장 집요한 "과학적"인 사회주의자만이 아니라 모든 사회주의자들은 법에 대한 중립적 설명이나 특정 법 체계에 구현된 도덕적 내용에 대한 법 실증주의자의 믿음을 공유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사회주의자들은 역사적으로 노동계급을 위해, 그리고 오늘날에는 다른 피지배 집단을 위해 국가 지배에 대항하는 투쟁의 투사들이다.
법 체계가 억압을 강요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사회주의자들은 목소리를 높여 비판의 목소리를 낼 것이다. 하지만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 하에서 존재하는 것보다 덜 군림하고 공정한 법률 시스템, 즉 사회주의적 정의의 원칙에 부합하면서 갈등에 판결을 내릴 수 있는 법률 시스템을 구상하고 구축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다.
하이에크, 마르크스, 그리고 사회주의적 권리
다행히도 시프노이치는 이러한 점에 대해 우리를 빈손으로 남겨두지 않는다. <사회주의 법의 개념>의 보다 창의적인 부분 중 하나에서 그녀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법 이론에 대한 검토를 통해 자신의 프로젝트의 비판적 차원과 건설적 차원을 결합한다.
20세기 자본주의의 가장 정교한 자유주의적 옹호자인 하이에크는 1960년에 발표한 대작 <자유의 헌법>에서 법치주의는 개인의 평등한 권리와 결정적으로 재산권에 대한 존중으로 조직된 자유주의적 자유 사회의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 시간이 지나면서 진화한 "메타 법적" 사상이라고 주장했다. 하이에크는 이러한 고전적 자유권을 존중하지 않는 국가는 다른 사람들의 권리보다 특정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함으로써 법치주의를 훼손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시프노이치의 말처럼,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하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말이다. 하이에크가 높이 평가한 형식적인 법적 평등은 실제로는 불평등하고 약탈적인 것이 된다. 아담 코헨Adam Cohen, 어윈 체메린스키Irwin Chemerinsky, 사무엘 모인Samuel Moyn 같은 법정의 감시자들이 기록했듯이, 과거와 현재의 대법원은 부자와 권력자에게 유리한 판결을 반복적으로 내려왔다:
1857년 노예제도를 옹호한 드레드 스콧Dred Scott 판결; 1905년 노동시간 단축을 금지한 로크너Lochner 판례: 그리고 최근 재생산 권리를 후퇴시킨 돕스Dobbs 판결은 부끄러운 역사의 일부일 뿐이다. 또는 법원 밖을 살펴보자: 빈곤층과 노동자 계급을 위한 법률 지원은 너무 감당하기 어렵고 자금이 부족하여 무고한 사람들이 재판에서 패소할 위험을 감수하기보다는 유죄를 인정하도록 권장된다;
노동계급 소송 당사자는 (차별적 고용주들을 포함해) 대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때 큰 불이익을 받으며, 종종 대기업의 이익에 유리한 강제 중재에 동의하는 계약에 서명하도록 강요받는다. 이론가로서 시프노이치는 고전적 자유주의 수사와 실천 사이의 이러한 간극에 대한 많은 구체적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사회주의적 법률 시스템은 "개인의 삶에 대한 침입이 일정한 절차적 규칙을 준수"하도록 만들고 "사적인 목적을 위한 공권력의 사용을 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침해로부터 개인을 보호하는 것에 대한 언급에서 알 수 있듯이, 시프노이치는 자유주의적 법률 전통 전체를 폐기하고 싶어하지 않으며, 마르크스도 그러했을 것이라고 도발적으로 주장한다. 잘 알려진 대로 마르크스는 '인권'을 부르주아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규범을 성문화한 것으로 간주했다. 여기서 인류는 서로 법적 보호를 필요로 하는 원자화된 지위에 굶주린 개인들의 집합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시프노이치는 마르크스가 자유권을 그 결함에도 불구하고 봉건주의 하에서는 불가능했던 새로운 종류의 자유를 촉진한 역사적 업적으로 보았다는 최근의 학설에 공감하고 있다. 마르크스에게 자유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는 평생 국가의 억압에 시달리며 표현과 집회의 자유의 가치를 직접 경험했다.
그러나 시프노이치는 "권리가 보호하고자 하는 인간의 존엄성은 사회 속에서 발전하는 것이고 역사적 변화에 민감하기 때문에 권리는 자연적이거나 사회를 초월한 것이 아니다"라는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즉, 개인의 권리는 본질적으로 사회적 권리이며 개인의 존엄성과 자율성을 우선시하는 사회에서 가장 잘 보호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시프노이치가 말하는 가장 중요한 권리 중 하나는 '정치적 표현의 권리'다. 민주적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는 부유한 사람들의 의견만이 아니라 '모든 관점'이 '고려'될 것이다. 이는 풍요로움이 정치적 영향력을 낳고 빈곤은 침묵을 강요하는 오늘날 특히 중요한 지점이다.
정치적 표현에 대한 권리를 단순히 이해관계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모든 관점'을 고려하는 연대주의적 관점에서 재인식하면 이러한 권리를 모두를 위한 사회적 자유의 개념과 연결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권리에 대한 시프노이치의 성찰에서 나온 결론은 기존의 이분법을 무너뜨린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상당하다.
시프노이치는 모든 권리는 사실상 사회적 권리이기 때문에 소극적 권리와 적극적 권리(소극적 권리는 개인이 자율성을 유지하기 위해 국가를 상대로 주장하는 권리이고 적극적 권리는 국가가 이를 보장하기 위해 조치를 취해야 하는 권리)라는 일반적인 구분이 사실 기껏해야 모호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국가가 공정한 법률 시스템을 구축하고 가난한 소송 당사자에게 법률 지원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공정한 재판을 받을 자유권은 거의 의미가 없다.
소극적/적극적 권리 구분의 모호함을 인정하면, 사회주의자에게는 사회적 존재가 자신의 능력과 존엄성을 극대화하는 데 필요한 것들을 보장하는 것이 인권의 더 나은 토대라고 주장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이는 안전한 식수나 주택과 같은 권리보다 재산에 대한 광범위한 권리를 법적으로 강제할 때 일반인이 더 자유롭고 존엄한 삶을 살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진다. 부와 권력의 막대한 격차를 허용하는 법 제도가 모든 사람의 권리를 '평등하게 존중'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는 말할 것도 없다.
보다 정의로운 법률 시스템
시프노이치의 책은 결코 포괄적이지 않으며, 국내 및 국제 수준에서 사회주의적 법이 실제로 어떤 모습일지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법의 개념>은 도발과 통찰력 있는 탐구로 가득 찬 20세기 후반의 숨겨진 보석으로 다시 한 번 살펴볼 가치가 있다.
시프노이치는 유토피아적 손짓을 넘어 진정한 평등주의적 사법 제도의 원리에 대해 생기를 불어넣고 생각하게 한다. 자유주의 전통의 최고 장점(언론의 자유, 시민적 자유 등)을 유지하면서도 사회주의적 법률 시스템은 자본주의의 자원 불균형을 무너뜨려 더 이상 법적 평등이라는 이상이 법적 불평등이라는 현실에 부딪히지 않도록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권리에 있어서 "모든 사람은 섬과 같다"는 관점은 권리가 필연적으로 사회적이라는 이해로 이어질 수 있다. 시프노이치가 말했듯이, "사회생활은 권리를 통해 자신의 자율성에 대한 존중을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출현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에 인권은 사회생활의 침입에 맞서 개성을 주장하는 도구로 환원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사회주의자들은 전능한 국가를 거부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하지만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로버트 잭슨Robert Jackson 판사가 말한 것처럼, 복수의 손길을 멈추고 피할 수 없는 갈등을 정의로운 법률 시스템의 판단에 맡기는 것은 이성에 대한 권력의 위대한 찬사라는 점도 인정할 수 있다.
(기사 등록 202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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