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 윤석열이 기름붓고 원희룡이 불당긴 건설노조 간부 분신
누군가 스스로 자신의 몸에 신나를 붓고 라이타불을 당겨서 온몸을 불태우려 한다면 거기에는 명백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억울하고 세상을 향해 절규하고 싶기 때문이다. 오늘 노동절에 강원도 법원 앞에서 분신을 한 건설노조 지역간부의 소식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을 보였다.
윤석열 정부가 집권하고 나서 1년 내내 이어진 건설노조 죽이기가 낳은 결과라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는 1계급 특진을 내걸고 경찰과 검찰을 동원해 대대적인 압수수색, 영장청구, 구속기소를 추진했다. 13차례의 압수수색, 15명의 구속이 이루어졌고 현재까지 소환장을 받고 수사 대상에 올라있는 사람만 1000여명에 달한다.
건설노조의 간부나 활동가의 거의 전부가 법적 표적이 돼 있다는 말이다. 끝없는 압수수색과 소환조사와 구속영장 청구에 건설노조는 다른 활동과 사업들이 마비될 지경이다. 써도 써도 끝이 없을 정도로 새로운 구속 대상자에 대한 법원 탄원서에 동참해달라는 호소가 계속 올라온다.
표적수사와 탄압을 위해서 윤석열 정부와 친윤 주류언론들이 건설노조에 뒤집어 씌운 낙인들은 고약한 것이다. “협박”, “강요”, “갈취”, “돈 뜯기”, “횡포”, “횡령”, “뒷 돈”, “건폭” … 건설노조와 건설노동자들은 파렴치한 깡패들처럼 그려졌다. 최근에 두드러진 것은 진보당과 연결해 건설노조를 ‘종북 간첩’들의 “숙주”라고 낙인찍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하나도 사실이 아니다. 건설노조는 정치권력과 결탁한 건설자본의 이윤만을 위한 불법 다단계 하도급 속에 저임금 일용직으로 죽고 다치면서 일하던 건설 노동자들의 권리와 목소리를 대변해 왔다. 무엇보다 이것을 통해 건설노동자들은 ‘우리도 건설 현장의 당당한 주역’이라는 자부심을 얻었다.
따라서 건설노조를 ‘건설 현장에서 수많은 불법과 비리, 폭력과 갈취를 저지르고 있는 건폭 ’으로 몰아간 것은 건설노동자들의 자존감을 다시 시궁창에 쳐박아 버리는 것과 다름 없었다. 분신한 간부가 유서에서 “정당하게 노조활동을 했는데 집시법 위반도 아니고 업무방해 및 공갈이랍니다. 제 자존심이 허락 되지가 않네요”라고 쓴 이유다.
200년전의 유럽에서는 노동자들이 단체를 만들어 교섭을 요구하는 것은 ‘사유재산을 침해하는 공갈과 협박’이었는데, 윤석열 정부와 족벌언론들은 순식간에 한국사회의 시계를 과거로 돌려버렸다. 현재 전신화상과 심정지 상태를 넘나드는 건설노조 간부는 유서에서 동료들에게 “함께 해서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사랑합니다. 영원히 동지들 옆에 있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윤석열, 원희룡, 검찰의 용서받을 수 없는 죄는 또 추가됐다.
● 누가 건설노동자를 죽음으로 몰았는지 기억해야 한다
어제 저녁에 서울대병원에 차려져 있는 양회동 열사의 장례식장과 추모제에 갔었다. 고인이 ‘함께여서 행복했고 사랑한다’고 했던 건설노동자들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함께 울고 웃던 동지를 잃은 사람들의 슬픔과 분노가 가득한 공간이었다.
건설노조는 고인을 잊지 않기 위해서, 그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 당장 총파업에 나서겠다고 선언하고 있었다. 당장 건설자본의 농간과 권력의 탄압 속에서 일거리가 사라져가는 노동자들이 그것마저 포기하고 죽기살기로 파업을 하겠다는 결의는 결코 쉽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당장의 일자리와 일당보다 동지에 대한 사랑이, 노동자로서의 자부심이, 인간으로서 존엄이 더 중요하다는 선언이다. 그리고 어제 추모제의 절절한 발언들을 들으면서 두 가지가 특히 인상적으로 귓가에 남았다.
하나는 강원도에서 고인과 함께 활동했던 한 간부의 발언이었다. 그 노동자는 고인이 얼마나 동료들을 사랑하며 자부심을 가지고 활동했었는지를 말해 주었다. 동시에 그 노동자는 자신이 바로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에게 투표했다고 고백하면서 팔을 자르고 싶다고 했다.
또 하나는 경기도에서 활동하는 건설노조 간부의 발언이었다. 그 노동자는 자신도 공갈협박으로 구속됐었던 경험을 말하면서, 이것이 얼마나 정당한 활동에 대한 야비하고 치욕스러운 공격인지를 규탄했다.
하지만 그 노동자는 자신이 구속됐던 것은 문재인 정부 말기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추모제에 함께 한 촛불시민들에게 호소했다. 윤석열 정부를 퇴진시키고 더 나아가 어떤 정부가 들어서도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말이다.
두 가지 발언은 한국사회에서 노동자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노조의 정당한 요구를 ‘협박’으로, 노조 활동에 대한 정당한 임금 지급을 ‘갈취’로 몰아온 것은 건설자본의 오랜 무기였다. 이 무기는 건설자본의 손발과도 같은 검찰과 법원에 의해서 이미 관철되고 있었다.
민주당 정부는 이런 구조를 건드리지 않았다. 검찰개혁과 사법개혁은 실패했다. 사람들은 실망했고 그것을 이용해 윤석열과 정치검찰과 족벌언론들은 ‘공정과 상식’을 말하면서 사기극을 펼쳤다. 그리고 이제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자, 건설자본들은 천군만마를 얻었다.
이제 정부가 앞장서서 검찰과 경찰을 앞세워 ‘건폭’이라고 낙인 찍으며 건설노동자들의 목을 조이고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 법원은 더욱 더 건설자본의 하수인이 됐다. 건설자본은 이제 ‘건설노조 없는 자본 천국’을 꿈꾸고 있다.
선봉대는 족벌언론들과 주류언론들이었다. 특히 나는 지난 1년간 <조선일보>가 어떻게 집요하고 잔인하게 건설노조를 ‘건폭, 공갈, 갈취, 불법, 폭력, 종북’으로 낙인찍고 공격했는지 똑똑히 기억한다. 그래서 어제 장례식장에서 언론에 대한 강한 경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어디서 온 누구인지를 확인하고 검은 리본을 가슴에 차고 검은 머리띠를 머리에 묶고서야 조문이 가능했다. 그런 경계는 너무나 당연하고 충분히 이해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주말에 또다시 <조선일보>와 인터뷰에 나선 류호정 의원을 보고, ‘생각이 다르다고 축사에 부르지도 못하냐’고 이준석 초청을 변명하는 장혜영 의원을 보고 실망하게 된다.
지금 진보적 정치인이라면 <조선일보>와 이준석같은 이들이 누구에게 어떤 상처와 고통을 주었는지 봐야 한다. 그런 세력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인터뷰하고 초청하고 축사를 듣고 하는 것이 괴롭힘을 당하고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또다른 상처를 줄 것인지를 가장 먼저 봐야 한다.
그리고 노동자들을, 장애인들을,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들을 괴롭히고 공격한 이들의 책임을 묻고 비판하고 그들에 맞서서 함께 싸워야 한다. 어제 장례식장과 추모제에 돌아와서 다시 <조선일보>와 주류언론들을 확인해 보았다.
자신의 목숨을 던지면서까지 억울함을 말하고 싶었던 노동자의 목소리는 이미 거의 사라져 있었다. 특히 <조선일보>의 한 귀퉁이에도 실려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들의 관심과 시선이 집중된 것은 영국 찰스3세의 대관식이었다.
북한정권을 ‘마지막 왕조’라고 비난하던 자들이 식민주의와 노예제에 기반했던 왕조를 기념하는 행사의 성대함을 칭찬하고 있었다. 영국의 민중은 이미 400년전에 찰스1세를 무너뜨리는 혁명을 성공시킨 적이 있었다. 영국 민중이 다시 그 전통을 되살리고, 한국의 우리는 윤석열 ‘검찰독재정치’를 무너트리면서 <조선일보>가 절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 ‘큰 돈’에는 ‘더 큰 돈’과 검찰과 언론의 도움이 따라온다
지난 4월말에 SG증권에서 시작해 8개 종목 주가들이 대폭락하면서 며칠만에 8조 2천억원이 사라져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주가조작으로 의심하는 분위기 속에서 지난 일주일간 주류언론들은 연예인 임창정 씨에 대한 각종 의혹 보도들을 쏟아내고 있다.
그런 보도를 보면 마치 임창정 씨가 이 사태의 주범인 것처럼 보인다. 아주 예전에 영화 <비트> 정도는 기억나지만 그후로 특별히 임창정 씨에 대한 기억은 없다. 간간히 본 티비에서 부인, 결혼, 가족에 대한 태도는 별로라고 느낀 기억은 있다.
하지만, 지금 임창정 씨에 대한 주류언론(특히 족벌언론)들의 태도는 전형적인 만만한 연예인 때리기이고, 밑도 끝도 없는 ‘아니면 말고’로 보인다. 힘없는 연예인이니 부담도 없고, 호기심을 자극해 클릭수도 높이고, 이 사태의 본질을 파헤칠 필요도 없을테니.
물론, 아직 이 사태의 진상이 충분히 드러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것만 봐도, 이 사태의 최대 피해자들은 개미 투자자들이고, 책임자로 의심되는 것은 투자자문사 대표같은 이들이다. 그 중간에 몫돈을 부었다가 큰 손해를 본 임창정같은 이들이 있다.
그런데, 이 사태 속에서 손해는커녕 엄청난 이익을 누린 자들이 있으니 그게 바로 키움그룹 김익래 회장같은 재벌 오너와 2세들이다. 이들은 ‘로또같은 운명’을 타고났는지, 하필 주가가 5배나 오를 때는 가만히 있다가 폭락 직전에 수백억 어치를 다 팔아치우며 재앙 속에서 홀로 이익을 거두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줬다.
적은 돈으로 큰 차익이 가능해 빚을 지고 투자하도록 유도하지만, 주가 하락 때는 몇 배의 피해를 입도록 만드는 ‘차액결제거래’같은 제도가 이 사태의 밑바탕이 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신자유주의적 금융화와 규제완화의 결과이다. 상식적이라면 이 사태 속에서 이익을 본 이들에게 수사와 보도가 집중되는게 맞다.
그러나 보다시피 주로 임창정만 계속 불려나오고 있다. 주가조작에 함께한 대통령 부인에 대한 녹취록, 엑셀파일, 범죄일람표가 계속 나와도 못본 척하더니 임창정 앞에서는 사정없이 펜을 칼처럼 휘두른다. 검찰, 금융당국도 비슷해 보인다. 기본으로 이 나라 검찰의 금융범죄 수사 의지와 능력을 믿기 어렵다.
<뉴스타파>의 역작 ‘죄수와 검사’ 시리즈를 보면 검찰의 금융범죄조사부의 검사들이 바로 주가조작에 관련했거나 책임이 있는 일들이 나온다. 검찰이 누구를 기소하고 어떤 사건을 누구에게 배당하는가에 따라서 금융범죄의 수사 결과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윤석열, 한동훈이 수사권과 기소권을 결사옹호한 이유다.
그래서 진짜 큰손들은 금융범죄를 수사하다가 퇴직한 검사들을 변호사로 채용하고, 그 변호사들은 자기 후배들을 상대로 자기가 수사하던 범죄자를 변호하는 일이 벌어진다. 그러면 아무리 주가조작을 하고 큰 수익을 얻었어도 별 일없이 살 수 있다.
‘큰 돈’을 가진 자들은 ‘큰 책임’이 아니라 ‘더 큰 돈’을 벌 수 있고, 수사와 보도에도 영향을 줄 수 있기에 김건희는, 50억 클럽은, 주가조작의 주범들은 빠져나가게 된다. 반면, 경제는 갈수록 어려운 상황으로 빠져들고 삶은 더욱 팍팍해지는데, 돈 없는 이들은 전세사기와 주가조작의 피해자가 되기도 너무 쉽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연달아 목숨을 끊어도 정부는 ‘국가가 책임질 수는 없다’고 버티고, 건설 현장에서 열심히 노동하던 이들은 검찰과 족벌언론에게 ‘건폭’으로 몰려서 죽도록 괴롭힘을 당하다가 죽음을 택한다. “검찰 독재 정치”를 “제발 무너뜨려 주십시오. 간곡히 부탁드립니다”라던 건설노동자의 마지막 절규를 절대 잊을 수 없는 이유다.
● 워싱턴 선언 – 도대체 어디서 안도와 기쁨을 느껴야 하는가?
어리석은 상대의 영혼까지 털어가는 바이든의 외교적 사기술, 윤석열의 반공웅변 연설로 끝난 이번 한미정상 회담에서 윤석열과 바이든은 ‘워싱턴 선언’을 내놓았다. 간단히 말하자면 북한이 남한을 핵무기로 공격하면 미국이 핵무기로 보복해 ‘북한 정권을 종말’시킨다는 것이다. 이 ‘외교적 성과’에 우리는 안도와 기쁨을 느껴야 한다는 게 정부와 주류언론의 분위기다.
그런데 도대체 어느 대목에서 안도와 기쁨을 느껴야 한다는 것인가? 먼저 북한이 남한 주요도시를 핵무기로 공격하면 당장 우리 주민 수십만 명이 죽을 것이다. 여기서 안도와 기쁨을 느낄 여지는 하나도 없다. 그 다음으로 미국이 북한을 핵무기로 보복하면 또 당장 북한 주민 수십만명이 죽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도 수십만명 죽지만 북한도 수십만명 죽을테니 ‘안도와 기쁨’을 느껴야 하는가? 그 다음으로 북한은 그 보복으로 미국에 대륙간탄도미사일로 핵공격을 할 수 있다. 그러면 이제 미국 주민 수십만명이 죽을 것이다. 여기서 ‘안도와 기쁨’을 느낄 건덕지라도 있나?
그러면 이제 미국은 다시, 북한도 다시, 남한도 가만 있을 수 없으니, 중국과 러시아도 끼어들면... 이런 식으로 가서 최소한 210만명이 전쟁 초기에 죽을 것이라는 게 올해 초에 나온 시나리오였다. 이 시나리오 전체를 아무리 샅샅이 살펴봐도 ‘안도와 기쁨’을 느낄 순간은 단 하나도 찾을 수 없다.
북한이 그런 무모하고 비이성적 선택을 할 리가 없다고? 지금까지 북한과 김정은 정권은 그러고는 남는다면서 킬체인이니, 3축체제니, 전술핵 배치니, 독자 핵무장이니 떠들어온 사람들이 이제와서 그런 말을 한다면 조금도 안심이 될 것 같지가 않다.
더불어 미국이 전략자산(핵폭격기, 핵항공모항, 핵잠수함, 미사일)을 더 자주 더 많이 한반도에 보내준다니 거기서 ‘안도와 기쁨’을 느끼라고? 그러면 평생을 군부대와 군사훈련장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가장 편안하고 즐겁게 살겠네? 북한은 그냥 보면서 놀고 있을까?
세계에서 가장 많은 미군기지와 전략무기가 배치돼 있던 중동에서 지난 반세기 동안 가장 많은 전쟁과 군사적 충돌이 있었다. 요즘 미국이 이 지역에서 물러나면서 사우디와 이란이 화해를 하고 예멘 내전 등이 끝나간다는 소식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더구나 미국이 한반도에 전략자산을 더 자주 더 많이 보내는 진짜 이유는 중국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안다. 중국 압박을 늘리면서 돈은 한국이 내니 꿩먹고 알먹고다. 물론, 윤석열과 냉전우파들이 ‘이제 미국만 믿고 발 닦고 잠이나 자자’일 리는 없다고 본다. 자체 핵무장으로 가는 일진일퇴의 과정이라고 볼 것이다.
이미 조선일보 등에서 불만의 목소리와 결국은 미국도 허락할 것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그리고 북한보다 먼저 선제 핵공격을 하는게 정답이라고 볼 것이다. 그러면 이제 위의 ‘전쟁 초기에만 210만명 사망’의 시나리오는 순서만 바뀌어서 진행될 것이다. 남한의 선제공격-> 중국의 확장억제 -> 남한의 보복공격 -> 미국의 개입... 안도와 기쁨은커녕 무시무시한 공포와 절망만 커진다.
● 한국 교민만이 아니라 수단 민중도 무사하기를
처참한 내전이 발전하고 있는 수단에서 한국 교민들이 무사히 빠져나왔다는 소식은 그나마 다행이다. 윤석열 정부와 언론은 최정예 특수부대와 구축함까지 투입해 한미동맹으로 육해공 합동작전을 벌인 성과라며 호들갑이지만 엄청난 과장과 제 논에 물대기로 보인다.
한국 교민들은 인질이 돼서 납치된 상황이 아니었으니, 가능한 안전하게 공항으로 이동해서 수송기를 타고 돌아오게 된 과정이고 여기서 특수부대나 ‘한미동맹’이 특별히 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공군 수송기 정도가 도움이 됐을 것이다. 옆길로 좀 새자면 일반적으로 그런 군사적 자원 투입과 대응은 부정적 효과를 주는 경우가 더 많다.
올해 초에 개봉했던, 믿고 보는 임순례 감독의 영화 <교섭>을 보면 그런 점이 어느 정도 나온다. 당시 아프간에서 인질로 잡혀있던 한국인들을 구출해내는 과정에서 미국은 탈레반 근거지를 폭격하고, 한국 정부는 특수부대를 투입해 군사작전을 벌이려고 했지만 그것은 인질들의 생명을 더욱 위험하게 만들 뿐이었다. 사실 미국의 침략을 도우며 파병한 것부터 문제였다.
중요한 것은 ‘테러리스트와는 절대 교섭하지 않는다’는 ‘원칙’도, 돈도 아니고 오로지 생명이라는 것을 <교섭>은 보여주고 있다. 영화 중간에 이라크 파병 속에서 죽어간 김선일 씨의 참수를 연상시키는 장면도 나오는데 그 잊을 수 없는 아픈 기억이 떠오른다. 따라서 개봉 당시 이 영화가 ‘샘물교회 선교’라는 뜨거운 쟁점을 피해갔다는 평가들은 동의할 수 없었다. 그것은 결코 문제의 핵심이 아니었고, 진짜 핵심은 생명의 소중함이 우선이라는 문제였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수단에서 한국 교민들이 무사히 돌아왔다고 좋아할 상황만은 아니다. 수단 민중들은 여전히 너무나 불안하고 위험한 폭력적 내전 속에 있기 때문이다. 수단의 지금 상황은 2019년 반독재 민중혁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수단 민중은 알 바시르의 30년 독재를 무너뜨리며 아랍 혁명의 물결이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을 만들어냈다. 특히 여성들이 혁명의 선두에 섰던 장면들이 기억난다.
하지만 희망은 오래가지 못했고 2021년 군부쿠데타를 통해서 반혁명이 본격화했다. 수단판 박정희였던 알 바시르가 물러난 자리를 수단판 광주학살인 하르툼 학살을 통해서 등장한 수단판 전두환인 부르한이 차지했다. 이들은 과도정부를 구성하고 2년후에는 민정으로 권력을 이양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처음부터 지킬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2년이 지난후 벌어지고 있는 것은 과도정부 의장인 부르한의 정부군과 과도정부 부의장인 다갈로의 군사조직간의 피비린내나는 권력 다툼이다. 이들은 서로를 제거하고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서 무장헬기와 전투기까지 동원해서 유혈 내전을 시작했다. 그 뒤에는 수단의 막대한 광물자원과 지정학적 위치를 탐내는 러시아, 이집트, 시리아 등의 후원과 무기 지원이 있다.
이 속에서 벌써 400명이 죽고 4천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다. 수단의 역사 속에는 이미 군벌의 충돌과 외세의 개입 속에 30만명이 죽었던 20년전 다르푸르 대학살의 기억이 남아있다. 부디 수단 민중이 하루빨리 이 지옥같은 상황에서 벗어나서 빼앗겼던 혁명의 시간을 되찾을 수 있기를 기원한다.
● 다음에는 또 누가 민주노총 죽이기에 도우미로 나설까
<조선일보>를 꾸준히 열심히 보다보면 몇가지 패턴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운동권이나 진보좌파, 노동운동 출신의 인사들의 입을 빌려서 살던 곳에 침을 뱉고 공격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에 노동운동이나 진보좌파 진영에서 활동했지만, 지금은 그곳을 욕할 준비가 돼 있는 사람들은 높은 몸값을 매겨서 모셔간다.
요즘에는 주로 주말 특집으로 그런 사람의 인터뷰를 싣고 있는 패턴이 발견된다. 그래서 주말이 되면 민경우 씨, 한지원 씨 등에 이어서 이번 주말에는 누가 등장할 것인가가 괜히 궁금해진다. 지난 주말은 이수봉 씨였다. 이수봉 씨는 좀 세월이 지나긴 했지만 민주노총에서 대변인, 정책연구원 원장, 사무부총장까지 했으니 조선일보로서는 꽤 만족스러울 것이다.
이수봉 씨가 어느 순간 안철수당으로 가더니, 민생당을 거쳐서 지난 지방선거에서는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해서 다른 군소 후보들과 티비토론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좀 애잔한 마음이었는데 이제 조선일보에 등장해서 민주노총을 욕하는 것을 보자니 여러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인터뷰 내용은 딱 조선일보가 듣고싶은 이야기들만 고른 것 같았다.
“간첩단 사건은 팩트다. 북한의 구체적 지침을 받았다”, “지금도 주사파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민주당과 결탁했다. 서로 적당히 눈감아 주면서 이해를 채웠다”, “북한의 대남 의식화 사업이 먹힌 것이다”, “[총파업은] 북한의 핵무기와 똑같다”, “민노총이 괴물이 돼 버렸다”, “노동자가 주인이면 기업주는 노예가 된다”,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근거한 노동운동”, “이대로면 기업도, 나라도 망한다.”
고장난 라디오처럼 뻔한 레파토리여서 새롭지는 않았다. 이런 분들이 돌려보는 대본집이 따로 있나 싶을 정도다. 이렇게 지겨울 정도로 식상하지만, 조선일보 등이 이런 기획을 끝없이 울궈먹는 것에는 알다시피 이유가 있다. ‘내부에서 함께 하던 사람들도 진보좌파나 노동운동이 사실은 사회정의와 인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간첩과 위선적 사기꾼들의 모임이라고 말한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이것이 ‘용기있는 양심적 내부고발’이라는 프레임은 어처구니없다. 힘과 권력이 있는 집단에서 박해와 불이익을 무릅쓰고 목소리를 낼 때 ‘양심적 내부고발’이 된다. 예컨대 임은정 검사처럼 말이다. 반면에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가장 힘이 있는 정부, 족벌언론, 공안기관의 표적이 된 사람들에 대한 집중적 공격을 도와서 기회와 자리를 얻는 것은 그것과 거리가 멀다. 그냥 비양심적 강자 동조, 마녀사냥 측면지원, 과거 동료 등에 칼꽂기이다.
힘과 권력을 가진 자들이 진보적 사회운동을 공격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말들을 대신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말을 국정원이나 검찰, 조선일보 기자가 하는 것보다 진보정당이나 민주노총의 간부였던 사람이 하는 것이 훨씬 더 잘 먹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조선일보 등에게 더 반가운 것은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일 것이다.
‘민주노총과 진보정당들이 사실은 주사파와 간첩들의 소굴이고 내부에서 이런 비리와 부패들이 저질러지고 있다’는 인터뷰를 실은 다음에 문제제기가 들어오면, 우리는 저 사람이 한 말을 믿고 그대로 실었을 뿐이라고 빠져나가면 되니 얼마나 편리한가. 이런 식으로 ‘아니면 말고’와 ‘카더라’를 제일 많이 잘 해온 것도 조선일보다.
최근에 미국 <폭스뉴스>가 허위 보도 때문에 어마어마한 벌금을 지불하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내 머리 속에 떠오른 것도 조선일보였다. 트럼프같은 정치인들을 도우면서 사회적 약자들을 공격하며 각종 선정적이고 무책임한 가짜뉴스를 유포해온 폭스뉴스는 많은 사람들에게 ‘미국판 조선일보’라고 불려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뉴스를 보고 찔려하기는커녕 그것마저도 또 자신의 경쟁자들에 대한 공격을 위해 포장한 다음에 준엄하게 가짜뉴스를 개탄하는 논평을 내놓는 조선일보를 보면서 정말 ‘한수 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운동사회 내부의 어떤 문제점이 이런 분들을 상처주고 등돌려서 선을 넘게 만들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다음 주말에는 또 어떤 내가 알던 지난날의 운동권이 조선일보의 지면에 깜짝 등장할 것인지 그만 걱정하고 싶다.
● 선배 활동가의 앞선 경험과 고민을 발견한 반가움
개인적으로 좋아하고 글을 찾아보는 독립 사회주의자 중에 영국에서 이미 오래 전에 사망한 피터 세즈윅이 있다. 아마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비슷한 사회주의자 중에서 유명한 사람은 조지 오웰이나 빅토르 세르주가 있다. 그러니까 자본주의를 반대하고 스탈린주의에 반대하면서도 그렇다고 레닌주의에도 비판적이면서 사회주의가 어떻게 교조적인 전통에서 벗어나 열린 체제로서 대안이 될 수 있을지 고민했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조지 오웰뿐 아니라 빅토르 세르주의 책도 한국에는 몇권 나와 있다. <빅토르 세르주 평전>이 있고 <한 혁명가의 회고록>이라는 자서전도 번역돼 있다. 이 자서전 책의 부록으로 피터 세즈윅의 글이 실려있는데, 이것이 아마 거의 유일하게 한국에서 출판돼 있는 피터 세즈윅의 글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 말고는 하나 기억하는 것은 아주 예전에 번역된 <마르크스주의와 도덕>이라는 책을 헌책방에서 찾았는데, 맨 앞에 저자가 ‘이 책을 피터 세즈윅의 영전에 바친다’고 써 놓은 것을 보고 뜻밖이고 반가웠던 적이 있다. 물론 빅토르 세르주도 좋아하지만, 피터 세즈윅을 더 특별하게 느끼는 것은 그의 인생과 활동의 궤적이 더 친근하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피터 세즈윅은 지금은 영국의 ‘사회주의노동자당’으로 발전해 있는 ‘국제사회주의자들’(IS)에서 활동하다가 떨어져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양한 견해 차이를 열어놓고 토론하던 개방적인 조직에서 갈수록 경직되고 폐쇄적인 조직으로 변화하는 것에 반발해서 였다. 아마도 국제사회주의자들이 사회주의노동자당으로 조직을 전환하면서 소위 ‘레닌주의 조직 원칙과 중앙집중주의’를 채택하게 된 과정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집단지도 체제, 분파 금지, 협의회 기간 동안만 이견그룹 허용 등이 따라붙는데 여기서 여러 부작용이 파생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런데 마침 피터 세즈윅이 이런 조직 전환 과정에서 지도부에 이견을 제시했던 글을 발견했다. 이 글에서 피터 세즈윅은 ‘이런 조직 구조로 전환하면 우리는 편협한 종파로 전락할 것’이라고 강력 비판하고 있다.
반대와 항의의 의미로 중앙 지도부의 여러 직위에서 사퇴하면서, 그럼에도 조직 전환이 이루어지면 결국에는 회원 자격도 종료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있다. 이 글을 읽으면서 2014년 정도에 했던 힘든 경험과 선택들이 떠올랐다. 그 경험을 통해서 더 근본적인 것들을 고민하게 됐는데, 수십년 전에 피터 세즈윅은 비슷한 경험과 고민과 판단을 훨씬 앞서 했던 것이다.
그 후 피터 세즈윅의 고민은 더욱 깊어졌던 것 같고, 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관심과 활동을 이어간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정신장애나 정신질환에 대한 문제에서도 글을 찾다보면 피터 세즈윅의 분석을 언급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이렇게 놓여진 디딤돌들 위에서 우리가 더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다시 읽어본다.
“전국위원회는 반민주적이고 전체주의적인 경향을 가진 IS의 정치 및 조직 구조를 승인했습니다. 이 구조가 실행되면 IS는 주요 측면에서 가장 종파적인 트로츠키주의 그룹보다 소수파에 대해 더 편협해질 것입니다. '그룹 구성원'에 대한 사상의 선전을 제한하는 것은 종파에나 어울리는 일입니다. 그러한 제한을 징계 규칙으로 만들고 위반하면 추방의 위험을 가하는 것은 혁명적 민주주의의 모든 원칙을 어기는 것이며, 단지 함께 모였다는 이유로 동지를 추방하거나 징계 할 수 있는 규칙을 만드는 것은 IS가 옹호하던 모든 것을 공허하게 조롱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전국위원회와 제가 한동안 맡았던 IS 편집위원회의 위원 자격을 그만둡니다. 이런 분파 금지 규칙이 시행되면 회원 자격을 유지하는 것이 사회주의의 기본 원칙과 양립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추가 결정의 필요성이 강요될 것입니다.”
● <빛의 시네마> - 편견과 벽을 넘어선 사랑과 용기
얼마 전에 본 <빛의 시네마>는 참 좋았다. <1917>도 그랬지만 역시 샘 멘데스 감독은 믿고 볼 수 있는 감독 중 하나다. 영화는 1980년대 영국 대처 집권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권위주의적 우파 정부 아래 억압과 차별이 극심하고 스킨헤드들이 백인 우월주의를 내걸고 거리에서 유색인종을 폭행하던 시기다.(아래 영화에 대한 스포가 있다.)
이 시기에 어느 해변마을에 있는 ‘엠파이어 시네마’라는 극장이 영화의 주요 무대이다. 주인공 중에 하나는 극장에서 일하는 중간 관리자 힐러리이고, 조현병을 앓고 있는 말이 없고 우울한 중년의 백인 여성이다. 극장 사장에게 지속적 성착취를 당하고 있기도 한데, 그 사장 역을 맡은 것은 항상 멋진 역으로 나오던 콜린 퍼스이다.
또 다른 주인공은 이민 노동자의 자녀로서 인종차별 사회에서 기회가 가로막히고 상처받으며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신입직원 흑인 청년 스티븐이다. 영화의 주된 줄거리는 나이와 인종과 사회적 눈초리를 넘어선 이 둘의 사랑 이야기이다. 이 둘이 서로에게 매력을 느끼고 첫 키스를 하고 사랑에 빠지는 장면들은 아름답다.
둘은 서로의 처지와 상처를 보면서 더 가까워 지지만, 물론 이러한 장벽들 속에서 둘의 사랑이 흔들리지 않고 계속되긴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두 번의 계기를 통해서 둘의 사랑은 계속 이어지고 더 단단해 진다. 첫 번째는 ‘엠파이어 시네마’에서 유명한 영화의 개봉 시사회를 하던 날에 벌어진다.
사회 저명인사들이 초대된 성대한 시사회 개막식에서 조현병 증세가 심해지고 있던 힐러리는 난데없이 무대 위로 올라간다. 그리고 ‘누구도 피부색으로 소외되지 말아야 한다’는 연설과 시낭송을 한다. 관객들은 어리둥절하면서도 얼떨결에 박수를 친다. 힐러리의 증세는 더 심해지고 결국 정신병원에 강제입원된다.
감금과 약물치료의 결과이겠지만, 힐러리는 얼마 후 더 우울하고 말이 없어져서 돌아온다. 그리고 그날 밤 자신의 행동을 ‘바보같은 짓’이었다고 후회한다. 하지만 스티븐은 그렇지 않다고 그날밤 당신은 ‘나의 영웅’이었다고 말해준다.
두 번째 계기는 ‘흑인이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인종주의자들의 시위 속에 스티븐이 집단 폭행을 당한 이후다. 힐러리는 스티븐이 걱정돼지만 주변 시선을 의식해 병문안을 가지 못한다. 그러나 극장의 영사기사 노먼은 ‘도망치지 마라’고 조언을 해준다. 결국 힐러리는 용기를 내서 병문안을 가고, 둘의 교제를 싫어할 것 같던 스티븐의 어머니는 힐러리에게 뜻 밖의 말을 한다.
‘스티븐이 당신을 기다렸다. 당신이 힘이 되는 것 같다’ 그날밤 힐러리는 극장으로 돌아와 노먼에게 부탁해 혼자서 텅빈 객석 속에 영화를 보면서 감격의 눈물을 보인다. 영사기에서 흘러나오는 빛과 영화의 화면과 힐러리의 행복한 표정은 고달픈 삶에서 우리에게 진정한 꿈과 행복은 서로에 대한 사랑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용기와 연대라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최근 <바빌론>, <파벨만스> 등 영화를 소재로 다룬 영화들을 몇 편 보았는데, 가장 감동을 준 것은 <빛의 시네마>였다.(물론 나중에 따로 쓰고 싶지만 <바빌론>도 매우 흥미있고 좋았다.) 결국, 스티븐이 대학을 합격해 도시로 떠나면서 둘은 이별하게 된다. 모든 사랑에는 기쁨만이 아니라 아픔과 이별이 함께 하는 법이다. 하지만 둘은 그만큼 더 성장했다.
이 영화의 수많은 장점이 있지만, 특히 정신질환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으면서 정신질환을 뭔가 이상하고 잘못된 것으로 보여주는 시선들을 벗어난게 좋았다. 강제입원과 약물치료에 대한 의존은 부정적으로 그려지고 있고, 힐러리는 오히려 더 눈치보지 않고 용기있고 솔직하게 불의를 거부하고 고발하는 것으로 ‘증상’을 나타낸다.
정신질환자가 거짓으로 성폭력 피해를 만들어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정신질환을 핑계로 다른 사람에 대한 해꼬지를 면피하는 사람들, 누군가를 욕할 때 정신질환을 끌고오는 사람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영화의 마지막에 힘없이 이별했던 힐러리가 다시 달려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스티븐을 힘차게 포옹하던 장면이 기억에 남았다. 또 열차에서, 힐러리가 선물한 필립 라킨의 시집을 펼쳐서 스티븐이 읽던 시도.
<나무들>
나무들이 잎을 꺼내고 있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이.
새로 난 싹들이 긴장을 풀고 퍼져 나간다.
그 푸르름에 어딘지 모르게 슬픔이 있다.
나무들은 다시 태어나는데
우리는 늙기 때문일까? 아니다, 나무들도 죽는다.
해마다 새로워 보이는 비결은
나무의 나이테에 적혀 있다.
여전히 매년 오월이면 있는 힘껏
무성해진 숲은 끊임없이 살랑거린다.
작년은 죽었다고 나무들은 말하는 듯하다.
새롭게 시작하라고 새롭게, 새롭게.
● 브라네 모제티치의 산문시집을 읽고서
<99% 페미니즘 선언>을 출판했을 때부터 주목해 왔고 개인적 신세와 고마움도 간직하고 있는 ‘움직씨’ 출판사에서 최근에 출판한 브라네 모제티치의 시집을 보내주셨다. 모제티치가 10년의 시간 차이로 낸 산문시집 <시시한 말>과 <끝나지 않는 혁명의 스케치> 두 권을 동전의 양면처럼 엇갈려서 묶어낸 독특한 시집이다.
‘팍팍한 일상에 위안거리’가 될지 모른다면서 보내주셨는데, 정말 감사하게도 큰 위안을 주는 시간이었다. 시집을 읽어본 것 자체가 너무 오랜만이다. 모제티치는 수많은 시집과 소설 등을 발간한 슬로베니아의 성소수자 운동가이자 커밍아웃한 게이라고 한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붕괴, 혁명과 내전 등을 겪어온 그의 삶만큼이나 그의 시도 다채롭고 많은 감정이 담겨있다. 냉소적이면서 섬세하고 위트있고, 분노하면서도 체념하고 도발하는, 특히 성적으로 매우 솔직하고 적나라해 그대로 소개하기 어려운 시들도 많다.
시집의 해제를 행성인 남웅님이 쓰신 것을 보고 반갑기도 했다. 마침 얼마전 4.20집회에 갔다가 남웅님을 보고 최근에 쓴 리뷰가 있는지 물어봤었기 때문이다. 영화 <모어>로 기억에 남은 드래그 아티스트 모지민님의 추천사도 인상적이었다. 한편의 시로 추천사를 썼는데 모제티치의 감성을 그대로 담아낸 또다른 작품이었다. 좋은 시집을 보게 해준 것에 거듭 감사드리며 인상적인 시를 몇 개만 소개한다.
“나는 새로운 메시지가 없나 계속 휴대폰을 확인하는 스스로를 깨닫는다. '네가 보고 싶어.'라는 말을 보려고 읽기 버튼 누르는 걸 나는 어찌나 좋아했던지. 나는 나 자신이 계속해서 과거로 더 깊이 가라앉는 걸 깨닫는다. 과거는 어찌나 나를 뒤로 유혹하는지. 다시 한번 헛간 뒤 건초 속에 누울 수 있도록, 이웃 소년이 처음 그의 손을 내 다리 사이로 가져갔던 그때로... 얼마나 여러 번 우리는 그 위, 밑에서 돼지들이 끽끽대던 그곳에 끌렸던지.”
“2001년 6월, 나는 한 카페에 입장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호모라는 이유로. 개가 된 느낌이었다. 더러운 존재. 그들은 나를 신문으로, 티비들로 끌고 다니며 내가 그럴 만한 존재라는 걸 내게 알려 주었다. 그들은 권력이었다. 게다가 시장은 온갖 곳에다 음란한 호모들에 대한 경고문을 붙였다. 유럽의 한복판에서 하나의 국가라는 환상은 마침내 산산조각이 났다.”
“그가 나를 빤히 보며 이렇게 물었다: 왜 당신은 시에서 당신의 게이 정체성을 그토록 강조하죠, 그걸 빼면 당신은 아름다운 시를 쓰는데 말이죠. 이게 독자로서 저를 짜증나게 하는 점이에요. 나는 대충 이런 식으로 무언가를 웅얼거렸다: 그럼 다른 누군가의 시들을 읽어야죠. 위궤양을 얻지 않으려면. 그러나 나는 속으로 끓었다. 내가 무언가를 강조한다고? 나는 기억할 수 있기에, 내 자신에 대해 써 왔고, 내 이야기를 써 왔다. 나는 30년째 차별에 대해 말해 왔고, 내 인생 전체를 희생해 왔다. 그저 나와 우리 게이들 모두가 더 편해지도록... 이 모든 걸 표현하는 건 부질없다. 대신 나는 신선한 공기를 좀 쐬러 갔다. 축제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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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등록 20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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