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완 포춘rowan fortune과 로건 오하라logan o'hara가 높은 곳에서 대중을 통제하는 엘리트를 강조하는 이데올로기와 편견에 대한 모델의 문제를 설명하면서 보다 마르크스주의적인 대안을 제안한다. 로건 오하라는 미국의 사회주의자로서 에세이를 쓰고, 비디오를 만들고, 현재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가 직면한 교착상태에 대한 책을 쓰고 있다. 로완 포춘은 사회주의자이고 유토피아 문학과 상상력에 대해 글을 썼다. <추락하는 체제: 혁명을 위한 활동가 가이드>의 공저자이다.(번역: 두견)
출처: https://anticapitalistresistance.org/false-consciousness-and-ideology/
영지주의Gnosticism와 밈Memes
트위터 좌파들에게 널리 공유된 ‘밈’(문화적 패러디물)에서 신사모자를 쓰고 시가를 피우는 배부른 남자가 어항 위에서 음흉하게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어항 안에는 열띤 논쟁을 벌이는 두 사람이 있다.
한 명은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야구 모자를 쓴 콧수염을 기른 남성으로서 트럼프 정치에 대한 충성을 묘사하고 있고, 다른 한 명은 소위 SJW(사회정의 투사들)에 대한 고정관념을 불러일으키는 보라색 염색 머리를 한 여성이다. 이 이미지 위에는 "그들은 당신이 계급 전쟁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해 문화 전쟁을 하게 만든다"라는 캡션이 있다.
유감스럽게도 이 이미지는 좌파가 문화의 영역에서 정치적 아이디어의 경쟁을 얼마나 많이 생각하고 있는지를 상당히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극우 정치 평론가이자 헤겔에 대한 자칭 비평가인 제임스 린제이James Lindsay는 좌파가 ‘영지주의’(자신들만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비밀스러운 지식을 가졌다는 사상)적 믿음에 빠져 있다고 비난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것은 일찍이 미국의 철학자 에릭 보겔린Eric Voegelin이 대중화한 오래된 비난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비난이 모호하고, 영지주의가 의미하는 바가 명확하지 않으며, 아이디어의 전염이 입증되지 않았고, 유사점을 선별한 것이다. 그러나, 상당히 퇴행적인 좌파의 관점을 표현하는 밈은 상징적으로 특정한 영지주의의 냄새를 풍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지주의'라고 여겨지는 것의 저속한 버전에서, 조물주같은 인물은 가짜 현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만들어내는데, 갇힌 영혼들은 누구든 오직 그노시스(영적 지식)를 통해서만 이 인공적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비현실적인 감옥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다. 이 밈에서 일종의 전능한 남자 조물주는 MAGA와 SJW를 자신의 가짜 어항 현실에 사로잡아서, 그들 존재의 진실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그러나 어떤 생각이 다른 것과 유사하다고 지적하는 것은 그것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왜 그러한 관념과 현실에 대한 개념이 설득력이 없고, 이를 대체할 대안적 개념이 무엇인지에 대해 더 깊이 들어갈 필요가 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보겔린과 린제이가 일관되게 파악하지 못한 지점과 같은 대안을 제공하는 전통에 속해 있다. 더 다행스럽게도, 마르크스주의는 이 점에서 결코 유일하지 않다; 매우 많은 살을 붙이는 대안들이 있고, 그것들 중 많은 것들이 마르크스주의의 가정을 보완하고 확장한다.
인종주의와 선전
아주 최근에 유전학자이자 반인종주의 운동가인 아담 러더퍼드Adam Rutherford 박사는 백인 우월주의자인 더글라스 머레이Douglas Murray가 예의를 중요시하는 독창성, 과학과 문화에 대한 다양한 기여로 "서구" 문명은 우월성이 있고, 비"서구" 사람들은 무례하다고 모호하게 암시하며 평소에 내뱉던 증오를 보여주는 동영상을 공유했다. 러더포드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잘못된 더글라스 머레이는 끔찍하게 쓰여진 무식한 그의 눈송이 책을 팔아먹기 위해 광대극 인종주의자로 치장했다. 그리고 그는 어리석은 거위 역할에 꽤 능숙하다.”
러더포드는 전문가로서 인종주의자들의 과학적 주장이 왜 가치 없는 헛소리인지 말할 수 있지만, 여기서 그의 추정은 옳은가? 특히, 머레이는 정말 그것을 진지하게 잘했는가? 그 예의가 어쩐식으로든 "서구적"이라는 것은 분명히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머레이가 주장하는 다른 모든 것은 명백히 역사적 주장에서 역사적 맥락을 제거하는 데 의존하며 "서구"를 자율적으로 구성하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부분적으로는 "서구" 자체가 의심의 여지가 없는 헛소리이기 때문이다. 머레이는 확실하게 화려하지만, 그 외에는 한 사람으로서 열광하는 백인 민족주의자와 별로 다를 게 없다.
그는 또한 미국에 기반을 둔 ‘개척자 펀드’Pioneer Fund에 의해서 그 연결을 통해 도움을 받았다. 이 펀드는 인종에 관한 사이비 과학적 연구의 자금과 분배를 주요 활동으로 하는 역사적 나치당과 관련이 있는 조직이다. 그에 따라서 그것은 정책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미국 정치인들에게 보내지는 문서들의 기초를 형성했다. 즉, 그는 극우 사상의 광범위한 기반 구조의 한 부분이며, 그것을 대변하는 작가 이상이다.
사회학자로서 막스 베버(Max Weber)는 카리스마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맥락적 능력에 관한 것으로 정확하게 규정한다. "능동적이든 수동적이든 간에, 카리스마 넘치는 군주의 힘에 따라는 백성들에 의한 그의 개인적 사명에 대한 순수히 사실적인 '인식'이다.“
즉, 특별히 누군가는 영리한 말을 하거나 설득력 있는 사상가가 아니더라도 왕이나 신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머레이의 사회적 위치는 러더포드의 주장을 넘어서 탐구할 가치가 있는 주제이다. 우리는 팟캐스트 '나는 독일어를 못해요'에서 수행한 것과 같은 극우에 대한 풀뿌리 연구에 따라 그러한 네트워크를 더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종 차별의 확산을 개별 인종주의 선전가의 문제로 몰아가는 것의 문제는 그것이 아이디어가 사회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지배적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이라고 주장했을 때, 그는 미디어 권력의 본질이나 중요성에 대해 촘스키적인 관찰을 하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사회가 지배계급의 이미지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러한 지배사상이 사회에 스며들어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러한 침투는 추상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서 일어난다. 통치 이념은 <폭스 뉴스>[미국판 조선일보]Fox News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의례에 관한 것이다.
<폭스 뉴스> 등은 단지 사람들이 그들이 일하는 방법, 배우는 방법, 물건을 사는 방법, 그들이 키워지고 자녀들을 양육하는 방법, 그들의 관계를 수행하는 방법 등에서 흡수하는 생각을 보강하고 재확인할 뿐이다. 러시아 교육 심리학자 레프 비고츠키(Lev Vygotsky)는 아동이 말하기를 사회적으로 채택한 후에야 언어가 인식에 의해 통제되는 별개의 시스템이 되기보다는 인식 능력과 직접적으로 통합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어릴 때 사회화되는 방식, 부모의 태도와 성향은 사회화가 직접적 인식과 합쳐지기 때문에 아이의 인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것은 편견이 강화되는 이유와 연결된다. 성인으로서 편견을 받아들이고 있는 부모는 편견이 인식 과정에서 "코드화"되는 자녀들을 계속 키운다. 중요한 점은 머레이와 같은 선전가들이 그렇게 영리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의 유기적인 의식에 기대지 않고는 어디에도 설 곳이 없을 것이다. 설득력을 가지는 것은 인종차별적 의견들을 전달하는 것과 별 관련이 없다. 이러한 믿음이 퍼진 것은 그러한 사기꾼들이 궤변에 재능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그러한 믿음을 긍정하는 백인 우월주의 문화에 장악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은 하향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상향 전달된다.
이것은 차례로 인종주의 및 기타 편견에 도전하는 방법에 대해서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머레이와 같은 사람들에 대해서 토론하고 고발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잠재적으로 그 자체로는 괜찮지만 보다 실질적인 문제를 바꾸는 데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머레이는 인종주의의 원인이 아니라 파생물, 악성적이고 곪아 터지는 증상이기 때문이다.
인종주의에 도전하려면 먼저 마르쿠스 비센Markus Wissen과 울리히 브랜드Ulrich Brand가 (그들의 책 제목에서) 제국주의적 삶의 방식이라고 묘사한 것에 내재된 사회적 전염에 도전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삶의 방식은 "모든 공간적 규모에서 수많은 전략, 관행 및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통해 재생산되는 권력과 지배의 전지구적 집합"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더 관습적인 용어는 프락시스(Praxis)일 수 있는데, 프락시스(Praxis)는 끊임없는 자기 형성 상태에서 이론과 실천의 통일체이다. 본질적인 요점은 삶의 방식이 특정한 가정과 생각을 전달한다는 것이다. 이를 받아들여서, 특정 생각에 맞서 싸우고 다른 생각을 홍보하려면 우리는 사회적 재생산(가족과 노동자의 유지)과 경제적 생산(작업장, 사무실, 건축 현장, 주방 등)과 우리가 살아가고 보는 방식의 수준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
사람들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가 그들의 사고 방식의 근본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때 추상적으로 토론하고 비판하고 특정 정보 기구를 장악하거나 학교, 미디어, 인터넷을 형식적으로 민주화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의식과 경험의 이해
‘허위 의식’이라는 용어는, 그것 대신에 ‘이데올로기’를 선호하게 된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잘 쓰이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이해할만한 일인데, 전자의 용어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믿는 것처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어떻게든 속임수에 넘어가고 있다는 생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림들이 속고 있다고 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는 반쯤 자율적인 아이디어의 건조한 추상화에 반대하여 삶의 경험적 측면에 대해 강조하는 것은 사실 사람들을 훨씬 더 진지하게 대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고전적 미국 실용주의자들, 가장 명시적으로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의 저작에서의 통찰과 일치하는 것은, 의식은 외부인의 관점에서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지닌 사람들의 번영에 반대되기 때문에 허위로 이해될 수 있다. 악이 바람직하다는 것은 얇팍한 의미에서 거짓이 아니라, 예를 들어 인종주의가 더 괜찮은 삶에 부적합하다는 두터운 (더 실질적으로 설명적인) 의미에서이다.
관점 이론Standpoint theory, 지식 이론(또는 인식론)은 생각이 작동하는 방식을 설명하는 데 유용한 의식 개념을 함께 결합한다. 린다 구룽Linda Gurung은 그녀의 에세이 '페미니즘적 관점 이론'에서 그것을 지배적 경험이 남성의 경험인 것처럼 가정되는 속에서 지배적 관점의 객관성이 구성되는 탐구의 구체화와 관련된 방법으로 설명한다. 이와는 반대로 지배적 사상에 반하는 이론은 '집단적 정치투쟁의 경험을 통해 얻은 것'이다.
구룽은 페미니즘적 관점 이론의 4가지 중심 테제를 확인했다. 첫째, 탐구에서 주체와 대상 사이의 관계를 인정한다. 둘째, 지식은 특정한 사회적 지위에 부여된 앎의 특정한 방식이 있는 곳에 위치해 있다. 셋째, 억압받고 소외된 사람들은 그들에게 더 완전하고 다양한 지식을 부여해주는 투쟁을 견뎌야만 하고, 그 덕분에 더 큰 인식적 권위를 갖는다는, 즉 인식론적 이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넷째, 권력 관계는 지식 생산과 확산의 핵심이다.
노동계급의 관점 이론으로서, 마르크스주의는 어떠한 제3자적 관점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마르크스가 부르주아적 가치에 관한 한 도덕주의자가 아니었던 이유이다; 그러한 가치들은 비난받을 수 있지만, 오로지 다른 관점에서만 비난받을 수 있다. 이는 부르주아 계급이 타고난 내재적으로 잘못된 이들이 아니며, 부르주아적 가치를 고수하는 노동계급이 특정한 의미에서만 그릇되게 행동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의 관점 이론으로서 마르크스주의를 나타내는 또 다른 점은 마르크스가 페미니즘적 관점 이론가들과 마찬가지로 관점을 상대주의적으로 동등하다고 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노동계급의 관점은 인간적 관점을 벗어난 어떤 척도에 의해 '더 나은' 것은 아니지만, 인간 잠재력의 보편적 해방에 영향을 미치는 독특한 위치에 있으며, 그 윤리가 그 미래의 열린 가능성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비록 이것이 마르크스의 명시적 논증을 넘어선 것이지만, 우리는 여기서 우리를 위한 윤리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가 주장했듯이 모든 인간 의식을 구성하는 희망에 근거한 미래의 미덕 윤리학virtue ethic이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것은 현대 윤리학이 미덕 윤리학과 달리 윤리적 주장을 검증하기 위한 어떤 근본적이고 초역사적인 외부에 기반한 공리(반박할 수 없는 사상)를 항상 상정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일의 행동에 내재된, 역사적으로 자리잡은 의식에 바탕을 둔 윤리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대조적으로 미덕 윤리는, 실천이 인간의 번영을 형성하는 방식과 윤리적 발전이 관련돼 있다고 본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제안한 인간 번영의 모델은 종교적 또는 철학적 이상향의 목록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 확대에 중점을 둔 모델이다. 노동계급 혁명정치의 표현이 노동계급의 자기 폐지를 포함한 계급 폐지를 통한 계급사회의 지배로부터의 해방이라면, 자본주의와 전근대 계급사회에 공통되는 종류의 인종주의와 일반적인 편견에 어떻게 반대해야 하는지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그러한 윤리 이론과 사상은 마르크스를 넘어 발전할 필요가 있다. 엥겔스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수행한 그의 초기 인본주의 프로젝트는 비참할 정도로 불완전하다. 그러나 그것의 스케치조차도, 인종주의 문제를 개별적 논객들이 생각없는 주체들에게 나쁜 아이디어를 퍼뜨리는 아이디어와 이데올로기로 바라보는 모델에 대해서는 우월성을 보여준다.
슬프게도, 이 모델은 미디어가 위치한 삶의 더 큰 전체성, 그리고 이 전체성이 야기하는 경험, 윤리, 관점 및 의식의 유형에 대한 미디어의 가벼움에 집착하는 좌파들에게서 인기가 있다. 그것은 영지주의라는 혐의에 대해 매우 제한된 진실을 제공하고, 더 심각하게는 좌파에 대한 비판으로 만들어진 이원론의 혐의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사회주의자로서 우리는 더 나은 이해, 즉 계급 사회 안팎에서 인간의 행위와 인간 삶의 결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사회 현상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이해를 추구해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우리 스스로 계급 사회를 넘어설 수 있는 실천과 조직의 형태를 배양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기사 등록 2022.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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