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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세상읽기 – 김건희/영국여왕/칠레/아프간/우크라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2. 9. 15.

전지윤

김건희 씨의 논문 표절이 가능했고 덮어지는 배경

최근 김건희 씨의 논문 표절과 그것을 덮어버리는 과정을 보면서 많은 이들이 분노하며 국민대 교수와 학생 등에 대한 비난을 쏟아냈는데, 사실 이 문제는 단지 국민대 구성원들이 비겁하고 양심이 없다는 시각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점이 많다. 왜 이런 일이 가능한지의 배경과 구조에 대한 접근이 필요한 것이다.

드라마 <안나> 감독판의 장점도 그것을 보여주는 것에 있었다. 쿠팡이 멋대로 편집한 <안나>는 단지 거짓말을 잘하는 허영에 가득 찬 여성의 이야기로 읽히는 점이 있다면, 감독판은 학벌주의 사회가 가하는 압력과 경력 조작을 가능하게 하는 학문, 정치, 경제 영역으로 연결된 카르텔의 존재를 보여 준다.

학문적 탐구의 내용과 질이 아니라 학벌, 학연, 인맥, 로비를 통해서 학위와 경력을 쌓아나갈 수 있는 구조가 존재하는 것이다. 나아가 김건희 씨의 허위 경력과 논문 표절은 검언정 카르텔의 문제와 분리하기 어렵다고 보인다.

국민대의 재단은 쌍용그룹을 기반으로 하는데, 쌍용그룹은 2007년부터 윤석열과 연관을 맺어왔다, 당시 변양균 게이트수사 과정에서 수사 책임자였던 윤석열은 성곡미술관을 압수수색하는데, 그러면서 쌍용양회 명예회장 김석원의 비자금 60억 원이 드러나게 된다.

하지만 김석원은 남부토건 회장 조남욱(윤석열의 후원자이며 윤석열과 김건희를 연결시켜준 것으로 알려져 있는)을 통해 윤석열과 친분을 맺게 되고, 무엇 때문인지 김석원의 60억 비자금은 무혐의 처리된다. 어차피 무엇을 수사하고 기소할 지는 칼자루를 쥔 검찰의 마음이다.

이후 쌍용그룹 쪽은 김건희에게 국민대의 전승규 교수를 소개시켜 주는데, 그가 바로 김건희 박사 논문 지도교수가 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닐 것이다. 더구나 국민대는 당시에 이사회 의결도 없이 도이치모터스 주식 29만주를 매입했다.

도이치모터스는 바로 김건희가 주가조작에 관여했다는 바로 그 회사다. 이 과정에 국민대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홍성걸을 중심으로 한 명문대 출신 교수 그룹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이 모든 과정에 등장한 인물들은 지금도 다시 등장하고 있다.

변양균은 윤석열의 경제고문으로 다시 복귀했고, 잘 나가는 정치평론가로서 오랫동안 윤석열을 편들어 온 홍성걸은 김건희 논문 표절을 덮으며 집단지성의 결과라고 했다. 결국 이것은 한국사회 지배권력 카르텔의 구성과 작동 방식을 보여 준다.

그들은 서울대 등 명문대를 중심으로 한 최고 학벌을 중심으로 구축돼 있고, 거기에 편입하려면 학벌과 경력이 어느 정도 뒷받침이 돼야 한다. 조작과 표절을 통해서라도 말이다. 이런 높은 학벌을 기반으로 이들은 검찰, 기업, 정부, 언론, 정당, 대학, 로펌 등에 포진돼 있다.

그들 사이의 학연과 인맥과 혼맥은 이들이 이 사회에서 가장 막강한 기구들에 자리잡고서 검언정 카르텔(정치검사, 주류언론, 우파정당)로 서로 연결돼서 밀어주고 끌어주는 데 중요한 무기가 된다. 그러면 검찰은 선택적 수사와 기소로, 주류언론은 선택적 취재와 보도로, 대학은 선택적 검증과 판단으로 이들의 범죄와 비리를 덮어준다.

이것이 지금 윤석열 시대에 김건희도, 김학의도, 건진법사도, 접대받은 검사들도, 곽상도와 50억 클럽도, 고발사주 사건도, 비리 재벌도 모두 줄줄이 무죄, 무혐의, 사면, 보석, 불기소로 이어지고 있는 결과를 낳았다. 고 장자연 씨 사건에서 조선일보 방사장의 책임에 대해서도 거꾸로 <PD수첩>에게 손해배상하라는 판결이 나왔다.

반면, 이 지배권력 카르텔에서 비주류이거나 밉보인 사람들은 가차없이 공격당한다. 전임정부와 야당 인사들에 대한 전방위적 압수수색, 수사, 재수사가 진행중이다. 힘없는 연예인인 가수 홍진영 씨의 논문 표절이 문제가 됐을 때 얼마나 언론이 물어뜯고 대학이 신속하게 표절 판정을 내리고 사회가 매장해 버렸는지 기억해보자.

윤석열의 서울대 법대 후배였던 대법관 후보자 오석준은 800횡령한 버스 노동자는 해고가 정당하고, 85만원 접대받은 검사들은 징계가 부당하다고 판결했던 것이 드러나고 있다. 마침, 노동자 해고 판결 당시에 버스회사측 변호사는 오석준의 사법연수원 동기였다. 이들의 네크워크는 이토록 강고하게 작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검찰공화국과 소통령 한동훈을 비판하고 김건희 수사 등을 주장하면 족벌언론만이 아니라 주류 개혁언론들도 강성 당원들에 의존하는 포퓰리즘이라고 비판한다. 검찰과 주류언론에 맞서고 개혁을 주장하는 것은 민심과 괴리된 소수 민주당 강성 당원들과 개딸들의 목소리라고 딱지 붙여진다. 김건희를 봐주고 검찰을 편드는 게 민심이라는 셈이다.

그리고 검찰과 족벌언론들의 편에서 반대편을 불공정’, ‘내로남불이라고 공격하던 진보지식인김경율같은 이는 이제 윤석열과 김건희 등의 불공정과 내로남불에 침묵하면서, 벼랑 끝에 내몰린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고공농성이라는 돈벌이라고 매도하며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 윤석열 정권의 상식과 공정의 시대는 이렇게 계속 되고 있다.

더불어, 한 가지 중요한 혼동을 지적하고 싶다. 김건희 씨의 표절, 경력 위조, 주가조작 등은 단지 대통령 부인이기에 덮어지고 있는 게 아니다. 이런 특권은 이미 특수부 검사의 부인이던 시절부터 작동해 왔던 것이지, 이번에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다. 있는 죄도 덮을 수 있고, 없는 죄도 만들 수 있는 것이 바로 검찰의 힘이다.

그 힘으로 윤석열은 지금 대통령이 돼 있고, 그의 최측근이던 한동훈은 지금 법무장관이면서 권력의 2인자로서 힘을 만끽하며 가장 힘있는 자들의 죄를 덮어주고 있다. 주류언론들의 용비어천가 속에 자뻑에 취한 한동훈은 얼마전 신임 검사들을 만난 자리에서 검사는 정의와 상식이 기준인 괜찮은 직업이라고 자처했다.

감히 검찰개혁을 추진한 사람의 가족이라는 로 이 집단의 표적이 된 정경심 교수는 지금 3년째 감옥에서 온갖 질환과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다. 하반신 마비의 위기 속에서도 수술을 위한 형집행정지조차 불허된 정경심 교수에 대한 이 사회의 잔인한 침묵에 대해서 어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김영식 신부는 이렇게 지적했다.

“묻고 싶습니다. 왜 아무도 말하지 않습니까? 왜 아무도 묻지 않습니까? 아픈 사람이 있다고, 슬픔 속에 있는 사람이 있다고, 고통 속에 자신과 가족 모두를 밀어 넣고도 말 못하는 사람이 있는데 왜 아무도 말하지 않습니까? 그의 가족이 이런 슬픔 속에 있기에 우리가 대신 묻는 것입니다. 대신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들이 오히려 말해야 하지 않습니까? 언론이 말해야 되지 않습니까?”

명절, 가족, 고향 속에 돌아보는 가족인질극의 잔인함

휴식과 휴가는 좋은 일이다. 그런 시간에 사랑하는 이들을 만나고 서로 이야기와 정을 나눌 수 있다면 더 좋다. 명절은 보통 그 두 가지가 다 담겨 있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좋은 시간일 것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명절이 싫고 싫어진 이유가 있다. 그것은 역설적이지만 명절에 담긴 가족, 고향, 이동, 음식 등의 요소들 때문이다.

명절에 가족을 만나기 어렵거나 가족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명절에 고향에 가기 어렵거나 가족과 고향을 생각하면 고통이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명절만이 아니라 평소에도 이동이 자유롭지 못하고 그것을 가로막는 문턱들이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지겹도록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하고 상을 차리느라 명절에 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난민, 이주민, 장애인, 여성과 소수자, 장기 투쟁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등이 그렇다. 그런 사람들이나, 그런 사람들을 옆에서 지켜보는 가까운 이들은 명절에 고향에 가서 가족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는 사람들의 소식과 사진을 보면 더 서글프고 서러운 마음이 들게 된다.

근래에는 명절 때면 검언카르텔의 표적이 돼서 만신창이가 됐던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을 괴롭힌 이들의 주요 무기가 가족인질극이었기 때문이다. 검찰개혁이나 언론개혁을 주장하고 추진했다는 이유로 미운털이 박힌 그 희생양들은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가족까지도 광장에 끌려나와서 돌팔매질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보다도 오히려 자기가 사랑하는 이의 고통을 더 견디기 어려운 법이다. 검언카르텔은 바로 그 약한 고리를 파고들었다. ‘나 때문에 가족이 당하는 고통을 과연 언제까지 참고 지켜볼 것인가는 누구든 지옥같은 고통을 맛보게 한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조국 교수와 그 가족이고 벌써 4년째이지만 이번 추석도 다르지 않았다.

이번 추석을 앞두고 검찰과 언론은 또 그 가족을 광장에 끌어내서 기둥에 매달고 여기 돌을 던져라고 신호를 보냈다. 이번에 그들이 준비한 메뉴는 이런 것이었다. ‘이 가족의 아들이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며 온라인 쪽지시험을 볼 때 부모가 답안 작성을 도왔다. 이렇게 위선적이고 파렴치한 가족이 어디 있는가?’

그것이 온라인 쪽지시험이고, 오픈북이었기에 주변 도움을 어느 정도 허용한 것이었고, 성적 반영비율이 1~2%밖에 돼지 않았고, 5번의 쪽지시험 중 부모가 도운 것은 2번에 불과했고, 오히려 부모가 도운 쪽지시험에서 성적이 더 낮게 나왔고, 대학도 그것을 문제삼지 않았다는 것 등은 검찰이 이것을 엄청난 비리인 것처럼 터트리고 언론이 대대적으로 받아쓰는데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왕따사건 피해 후유증 때문에 친구들과 스터디그룹도 만들지 못하는 아들이 안쓰러운 부모가 친구 역할을 대신하려 했다는 것도, 권력형 비리를 떠들다가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한 검찰이 10년전의 가족 단톡방까지 다 뒤져서 이런 것까지 찾아냈다는 것도, 검찰과 언론이 신호를 올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돌을 던지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주저함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역시나 효과적이었다. 아마 이번 추석에 고향에 가거나 가족과 친척을 만나서 윤석열 정부를 비판하던 사람들은 할 말이 없어진 보수적 어르신들에게 그러면 이번에 드러난 조국 가족의 범죄적 커닝 사건은 잘했다고 보느냐는 물음을 한번 씩 들어봤을 것이다.

조금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윤석열과 검피아-모피아 연합정권이 보이는 온갖 실정들에 대한 비판이 조국 가족의 혐의와 무슨 상관인지, 윤석열과 그 부인에게 제기되는 온갖 대규모 권력형 비리 의혹들과 과연 조국 가족에게 씌워진 혐의들이 비교 가능한 것인지 판단이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왜 4년이 지나도록 족벌언론들은 당연하거니와 개혁적 언론들과 소위 진보적이라는 지식인들까지 온라인 쪽지시험까지 들쳐내고 기다렸다는 듯이 호응하면서 이 가족을 욕하지 못해서 안달일까? 얼마나 이 가족을 증오하고 혐오하기에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이런 반응들이 나타나는 것일까?

결국, 2019년에 몇 달간 어마어마한 규모로 지속된 그 전사회적 융단폭격의 후폭풍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때 검찰과 언론은 전무후무한 규모의 의혹제기를 쏟아내며 압수수색하고 구속하고 기소했다. 투옥과 재판은 지금까지도 진행되고 있다. 부인은 하지마비의 위기 속에서도 수술 기회도 주지 않고 있다. 이 정도의 증오와 처벌이 정당화되려면 근거가 필요하다.

그러나 권력형 비리와 주가조작, 정경유착과 대선자금 조성 등은 하나도 입증돼지 않았다. 결국 검찰과 언론, 같이 돌을 던졌던 사람들은 끝없이 뭔가를 찾아내게 된 것이다. ‘이것 봐라. 이 가족이 이렇게 위선적이고 파렴치하다. 따라서 우리가 그동안 퍼부은 공격들은 결코 과도한 것이 아니었다라는 그 뭔가를 계속 제시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 있는 것이다.

그 근거가 보잘 것이 없고 설득력이 없을수록 더욱 더 갈증을 느끼며 끝없이 그럴 만 했다는 뭔가를 찾아내기 위해서 이 가족을 탈탈 털면서 괴롭히고, 또다시 광장에 끌고 나와서 돌을 던지면서 자기들의 정당성을 확인하려는 과정이 반복되고 있다. 이제 그만하면 어떨까. 이제 그만 이 가족을 놓아주면 어떨까.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인하고 싶어서 툭하면, 특히 명절을 앞두고서, 어떤 가족을 타겟삼아 잊을만하며 집단적으로 돌을 던지면서, 이미 만신창이가 되도록 파괴된 그 가족들이 모여서 함께 웃을 시간조차 허용하지 않으려는 이런 집착은 정말 보기가 힘들다. 그런 사람들이 자신들은 명절에 주변 사람들과 함께 행복한 사진을 올리는 것을 볼 때면 특히 더욱 그렇다.

엘리자베스 2세에 대한 조선일보 등의 대대적 추모를 보며

아무리 상층 지배권력자이고 역사적인 죄과가 많은 사람이더라도 누군가가 죽었을 때 기뻐하면서 축하하고 그러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해 왔다. 그 누군가도 결국은 나와 다르지 않은 나약한 인간일 뿐이고 누군가의 사랑을 받았을 사람이고, 따라서 누군가는 그 죽음을 슬퍼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본으로 죽음은 기뻐하고 축하할 일이기 보다는 안쓰럽게 돌아볼 일이다.

하지만, 오늘 아침부터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죽음에 대해서 조선일보를 중심으로 한 족벌언론들의 쏟아내는 찬양과 애도, 추모가 넘치는 수많은 특집 기사들(그리고 윤석열의 조문글)을 보자니 그냥 보고 넘기기 어렵다. 사망한 영국 여왕이 친절한”, “소탈한”, “겸손한”, “온화한”, “인간적인사람으로서 사랑과 존경을 받았고 위대한 유산을 남긴 소중한 군주였다는 등의 기사들이 흘러 넘치고 있다.

진실은 영국의 군주제와 왕실은 아직도 남아있는 봉건시대의 낡은 유물이고, 영국 제국주의와 식민지배의 어두운 역사에 큰 책임이 있고, 오늘날에도 인종주의와 권위주의 등 보수적 이데올로기의 중심이자 특권적인 사치와 낭비와 수직적 위계질서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물론, 왕실을 구성하는 개별 구성원들이 모두 나쁜 인간성을 가진 악당이거나 타고난 괴물들일 리는 없다. 좋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인성이 부족한 구성원이더라도 가끔은 선행도 하고 사회에 기여도 할 것이다. 인간적인 갈등과 모습도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현대적 적응과 변화21세기까지 몇몇 나라에서 아직도 군주제가 유지될 수 있는 비결이기도 하다.

따라서 아주 아주 너그러운 관점에서 그런 기여와 공로들을 굳이 찾아내서 부각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고, 군주제와 왕실이라는 구조와 제도의 본질을 가리고 그 정반대로 포장하는 것은 정말이지 너무하는 것이다.

조선일보 등 족벌언론들은 재벌총수나 등 상층 지배권력자들이 사망했을 때 항상 이런 식으로 찬양과 애도, 추모가 넘치는 기사들을 쏟아내 왔다. 그들의 잘못과 책임은 가리고 기여와 공로를 아주 작은 것까지 찾아서 기억해냈다.

하지만 그렇게 너그럽고 공감과 사랑이 넘치는 태도와 관점이 왜 전광판 위에서, 고공농성장에서 추석을 보내야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나, 수백억 손배가압류로 지옥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절규하는 노동자들에게는 전혀 적용되지 않는 것일까.

반면에 민주당이 추진하는 노란봉투법은 하반기 국회에서 받으시 막아야 할 고지라며 특별 사설까지 쓰면서 나서는 것일까. 이들이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를 증오하는지 너무 잘 알겠다. 영국의 식민지배에 맞서 싸웠던 아일랜드의 사회주의자이자 혁명가였던 제임스 코널리의 말은 엘리자베스 2세가 사망한 오늘 아침에 우리가 기억할 가치가 있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지상에서 인류애보다 더 신성한 것은 없다고 믿으면서 우리는 이 왕족 제도에 대한 모든 충성을 거부한다... 군주제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디에서 그 승인을 얻는가? 인류에게 주어진 선물은 무엇인가? 군주제는 우리 역사상 가장 어둡고 무지한 시대에 인류에 대한 탐욕과 배신의 손에 의해 부과된 폭정의 산물이다. 그것은 약탈자의 검에서 유일한 승인을 얻었으며 인류에 대한 그것의 선물은 의기양양하고 파렴치한 부정행위의 해악적 사례 말고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들이 혈통으로 인해 그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한, 그들은 혈통으로 인한 그들의 범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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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질서에 대한 전복적 태도로 유명했던 무정부주의적 펑크록 그룹 섹스 피스톨즈<신이여 여왕을 구하소서>라는 반어적 제목의 노래를 발표해 너에게 미래는 없어라고 노래했던 게 1977년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죽은 마당에 어느 정도 슬픔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나 할머니의 죽음은 누구에게든 슬픈 일이라는 노동당 전대표 제레미 코빈 정도의 입장이 적당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수많은 추모 인파가 모이고, 온갖 애도 기사와 광고들이 쏟아지고, 축구 경기까지 취소하고, 노동당이 행사를 연기하고, 주요노조까지 파업을 철회했다니 좀 놀라웠다. 이것을 보고 있으면, 군주제는 단지 봉건적 잔재가 아니라 영국자본주의와 분리불가능한 제도가 됐고, 가장 성공적인 자본주의적 기구로 진화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윤석열도 직접 장례식에 참석하러 영국으로 간다니, 이건 또 뭔가 싶다. 자녀 입시비리 문제의 뒤처리를 위해 미국출장 기회를 이용했다는 소문이 도는 한동훈에 이어서, 이 정부의 외교 정책과 방향은 여러 가지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어제밤 MBC 뉴스의 보도를 보면서 역시 권력자들과 주류언론들의 호들갑만 쳐다봐서는 세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보도에 따르면 영국의 청년 4명중 3명은 군주제를 지지하지 않았고 40대 이하에서도 지지자는 절반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역시 역사는 침묵할 수 없다, 그리고 지금 기억해야할 역사를 다룬 좋은 글을 윤미래 동지가 번역해 주었다

칠레에서 진보적 대전환의 행진은 중단될 것인가

며칠 전 칠레에서 이뤄진 개헌안 찬반투표는, 다가오는 이탈리아 총선에서 극우인종주의 정부가 탄생할 것인가, 브라질 대선에서 룰라가 재선하며 다시 라틴아메리카 좌파 집권 물결이 정점에 오를 것인가와 함께 국제적인 계급세력 균형을 좌우할 중요한 기점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안타깝게도 6:4라는 꽤 큰 차이로 부결이라는 패배였다. 이번에 투표에 붙여진 칠레 개헌안은 반신자유주의, 페미니즘, 생태주의의 급진적 정신이 곳곳에 새겨져 있었다. 복지국가의 획기적 강화, 임신중지 등 재생산권의 보장, 물 사유화 금지, 소수인종과 원주민의 권리 보장, 화석연료에서 탈피와 재생에너지로 전환 등을 담고 있었다.

이러한 세계에서 가장 진보적 헌법이 나온 것은 2019년의 대중반란과 총파업부터 시작된 아래로부터 투쟁과 전진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2020년에 제헌의회 투표에서 압도적 찬성과 승리, 2021년 범좌파가 다수의석을 차지한 제헌의회의 구성, 2021년 연말에 35세 청년좌파 대통령의 선출로 이어졌다.

가브리엘 보리치 대통령이 청년과 여성이 절반을 차지하는 내각 구성을 발표했을 때만 해도 국제적 관심과 환호 속에 미래는 밝아 보였다. 그러나 사실 이미 우파적 반격의 흐름은 갈수록 커져 왔다고 볼 수 있다. 지난해 연말 칠레 대선의 1차 투표에서는 극우 파시스트 성향의 카스트 후보가 급성장하며 1위를 차지했었기 때문이다.

결선 투표에서는 다행히 보리치가 당선했지만, 동시에 진행된 상하원 선거에서 카스트를 중심으로 결집한 범우파는 절반의 의석을 차지할 수 있었다. 칠레의 극우파는 카스트의 고정 지지율 30%를 기반으로 대기업, 주류언론, 국가기구 등을 쥐고 있는 기득권 세력들의 힘을 다시 뭉치게 했다.

그들의 사용한 방법과 무기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것이다. ‘진보좌파 정부의 위선과 무능과 부도덕성이라는 프레임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보리치는 대선 때부터 범죄단체나 마약과 연결돼 있는 부도덕한 정치인이라는 공격에 시달렸고, 제헌의회의 좌파 부의장에게는 입으로 진보와 평등을 말하며 의료 부정수급을 받아온 위선자라는 공격이 집중됐다.

더 중요한 것은 진보좌파의 연합이 흔들리고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사회당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 중도좌파들은 공산당과 확대전선의 연합으로 구성된 보리치 정부가 지나치게 급진적이라고 거리를 두었고, 더 왼쪽의 급진좌파들은 보리치 정부가 투쟁보다 선거와 협상에 의존한다고 진짜 좌파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노동운동의 중심이었던 광산노조들은 탈석탄 친환경 정책에 불안감을 드러내며 반발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계속되는 코로나 상황과 국제적 공급망 교란과 우크라이나 전쟁, 인플레 위기 속에서 물가인상은 두 자리 수를 기록했고, 고질적인 범죄와 치안 문제는 악화되기만 했다. 결국 보리치는 개혁 타령을 하면서 민생을 외면하고 경제를 망친 대통령이라는 프레임 속에 집권 3개월 만에 지지율이 30%대로 추락했다.

자신감을 얻은 기득권 세력과 우파, 거대언론들은 개헌안이 사적 소유를 폐지하는 공산주의로 가면서 원주민들을 나라의 주인으로 만들고 칠레 시민들을 2등 국민으로 전락시킬 것이라는 온갖 가짜뉴스들을 퍼뜨렸다. 결과는 62%가 개헌안에 반대 투표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변두리의 저소득층에서 오히려 반대가 더 높았다는 우울한 역설이 나타났다.

결국 피노체트 독재에 뿌리를 둔 ‘88년 헌정체제와 기득권 세력과 구조는 그렇게 쉽게 무너질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진보좌파가 행정부를 차지하는 것은 시작에 불과하고 곳곳에 포진한 진정한 권력자들과의 더 힘든 투쟁은 그때부터 시작된다는 것이 다시 입증됐다.

이미 브라질에서 오래 전 룰라에 대한 사법쿠데타가 그것을 보여준 바 있다. 지금 페루에서도 원주민 출신의 교사노동자였던 좌파 대통령이 취임 1년만에 2번이나 탄핵 시도를 겪고 있다. 페루의 경찰과 검찰은 계속된 압수수색으로 대학시절 논문까지 뒤지며 그를 파렴치한으로 만들고 있다고 한다. 이것도 참 우리에게는 낯익은 풍경이다.

결국, 칠레는 2016 촛불항쟁 이후에 5년 만에 다시 윤석열과 검피아-모피아 연합이 권력을 탈환한 한국의 뒷길을 밟을 것인가? 아직 게임이 끝난 것은 아니다. 다시 새로운 개헌안이 만들어질 것이고 투쟁도 시작될 것이다. 2019년 거리에서 단결한 민중은 패배하지 않는다고 노래하며 투쟁하던 칠레 민중들이 결국 다시 길을 찾고 우리에게 보여 줄 것을 기대한다.

아프가니스탄 미군 철수 1년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전쟁에 대해서 논의할 때 러시아도 문제고 나토와 서방 제국주의도 문제다라고 말하는 것은 물타기가 된다. 따라서 강조점은 분명히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행태와 야만적 침략에 대한 폭로와 반대, 비판이어야 했다.

그러나 이것이 다른 사안과 문제들에서도 미국 등 서방 제국주의 강대국들을 지지하거나 그들의 잘못에 대해 침묵하는 것일 수는 없다. 그동안 우크라이나에 대해 러시아 비판에 주력해왔지만, 오늘은 간략하게라도 아프가니스탄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얼마 전 미군 철수 1년이라고 많은 기사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 기사들이 주목한 것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지난 1년간 여성 인권이 후퇴하고 성차별과 억압이 증가했다는 것이었다. 또 탈레반 정권이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있다는 것도 지적했다. 심각한 식량난이 아프가니스탄 민중을 고통에 빠트리고 있다는 경고들도 많았다.

전부 다 사실이고 중요한 지적들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식량난은 세계적인 기후 위기의 결과라는 점도 봐야 한다. 아프가니스탄을 강타한 심각한 가뭄으로 작물 수확량이 과거보다 평균 절반 가까이 낮아진 결과라는 것이다. 지구의 한편에서는 엄청난 대홍수가, 다른 한편에서는 엄청난 가뭄이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 기후 위기의 현실이다.

그런데 서방 정부나 언론들과 그것을 받아쓰는 대부분의 한국 언론들이 외면하고 있는 지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서방 강대국들의 이중잣대이다. 탈레반이 반여성적이고 반민주적인 집단이었다는 것이 미국 등 서방 연합군이 과거에 아프가니스탄을 군사적으로 침공하고 폭격하고 점령한 것을 정당화하는가?

만약 그것이 정당화된다면, 지금 젤렌스키 정부가 이런 저런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폭격하고 있는 러시아 푸틴 정부에 대해서 서방 정부와 언론은 무엇을 근거로 비판하고 있는 것인가?

또 탈레반 정부가 그토록 문제가 많다면, 왜 아프가니스탄 민중은 미점령군과 친미정부와 군벌세력보다 차라리 탈레반이 낫다는 선택을 한 것인가? 심지어 미국 국내에서도 대다수의 시민들이 외국에 보낸 점령군들을 철수해야 한다고 보게 된 것인가? 왜 미국과 점령군은 20년이 지나도록 아프가니스탄 사회의 문제와 시민들의 고통을 전혀 해결하지 못한 것인가?

서방 강대국 정부와 주류언론들은 이 문제들에 대해서 외면하고 침묵하고 있다. 그러면서 미군 철수 1년을 돌아보며, 탈레반이 얼마나 문제많은 집단인지만 계속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자기들이 아프가니스탄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심지어 미국 국내에서도 대다수 여론이 군대 철수를 원했다는 것을 가리려고 하는 것이다.

결국, 자신들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고 전쟁을 벌이고 점령을 했던 것은 옳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침공과 점령을 거부한 아프가니스탄 민중은 어리석었고, 지금의 고통을 자초했다(‘고통을 당할 만 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1년 전의 철수가 세계 최강이라던 미군으로서는 엄청난 망신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국제적 망신에 대한 보복이 단지 말에 그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그리고 서방 강대국들)은 군대 철수 이후에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수십억 달러의 원조와 지원을 끊어버렸다. 그리고 오히려 자금 동결 등 경제 제재를 하고 있다. ‘감히 우리의 통치와 점령을 거부하고 탈레반을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아프가니스탄 민중을 집단 처벌하는 셈이다.

미국 평화연구소세계 어느 나라도 원조의 그러한 급격한 중단을 견딜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 결과는 외국의 침략과 점령과 내전으로 수십년간 만신창이가 돼 온 이 가난한 나라에 재앙이 됐다. 지금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인구의 대부분이 식량 부족을 겪고 있고, 수천 만 명이 인도적 위기와 수 백만 명이 아사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한다. 유엔도 이것을 전대미문의 수준이라고 걱정하고 있다.

얼마 전 KBS <세계는 지금>에서는 아프가니스탄의 신장 하나 마을을 소개했다. 그 마을에서 어른들은 대부분 신장이 하나 밖에 없다. 아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신장을 하나씩 떼어서 팔아버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신장을 뗀 어른들은 힘이 없어서 일을 하기 힘들고, 그것은 다시 가난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었다. 미국과 서방 강대국들은 당장 경제 제재를 중단하고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재개해야 한다.

식량난과 인도적 위기의 악화는 탈레반 정권이 서방의 압박을 핑계로 여성 억압이나 폭압 통치를 정당화하는 데만 이용될 것이다. 처음부터 아프가니스탄에 필요한 것은 군사적 침공과 폭격과 폭탄이 아니었고, 지금도 탈레반에 맞서 민주주의와 여성해방을 이룰 힘은 아프가니스탄 민중 스스로의 투쟁과 국제적 연대에서 나오는 것이지, 강대국의 경제 제재와 인도적 지원 중단에서 나올 수 없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과 전쟁, 그리고 반제국주의

마르크스주의연구2022년 가을호에 내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서 쓴 글이 실렸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과 전쟁 - 반제국주의 좌파는 어떤 관점과 태도를 가질 것인가>. 안타깝게도 일부 좌파들이 러시아의 야만적 침공에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않거나, 심지어 러시아를 편드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그러는 분들은 러시아 비판 주장을 흔히 친미국, 친서방 언론에 휘둘리는 것으로 몰아붙인다. 그래서 나는 이번 논문에서 서방 정부나 주류언론, 또는 그 반대로 러시아 정부나 관변언론이 아니라, 철저히 우크라이나나 러시아의 현장에서 활동하는 투사들과, 서방에서도 정부와 주류언론에 맞서는 반제국주의 급진좌파들의 목소리와 근거들을 통해서 글의 논지를 전개하려고 최대한 노력했다.

또한, 러시아의 침공을 비판하면서도 이 전쟁을 단지 두 진영간의 대결로만 보는 지정학적 환원주의시각의 문제도 있다. 원래 글을 쓰면서 너무 많은 각주나 특히 접근성이 높지 않은 영어 자료들을 제시하는 것에 부정적이었지만, 이번 경우는 그것을 많이 찾아서 제시하는 게 불가피하고 필요했다. 하지만 이 글은 이미 두 달 전에 기고한 것이 이번에 나온 것이라서 그 이후의 변화와 정보들을 충분히 반영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 글에서도 인용했던 우크라이나의 좌파 활동가인 타라스 빌로우스(Taras Bilous)는 러시아의 만행에 방관하거나 양비론적 입장을 펴는 일부 서구 좌파들의 입장에 얼마나 큰 배신감을 느끼는지 공개 편지를 쓴 바 있다. 빌로우스는 최근에 발표한 글에서도 그 배신감과 실망감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특히 그는 그러한 좌파들이 우크라이나 민중을 시야에서 삭제하고 있다고 분노하고 있다. 충분히 공감할만한 분노이다.

“지난 몇 달 동안 나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국제 좌파의 토론에 참여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가장 크게 느끼는 것은 피로와 실망이다. 명백한 거짓 러시아 선전을 반박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이, 민족 자결권의 기본적 전제를 주장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다.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우크라이나인들의 의견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인들은 토론에서 동정받아야 할 수동적 희생자나 비난받아야 하는 나치로 종종 등장한다.”(타라스 빌로우스)

요즘 개인적으로도 힘든 시간이지만, 우크라이나나 미얀마 등의 상황을 생각하면 더 우울해질 수밖에 없다. 관심있는 분들은 아래 마르크스주의연구홈페이지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특히 내 글만이 아니라 박노자 선생님의 <마르크스주의적 시각에서 본 러시아 제국주의와 우크라이나>도 아주 유익하고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오랫동안 마르크스주의연구편집위원장으로 고생하시다가 이번에 퇴임하시는 정성진 선생님의 노고에도 감사드린다.

https://marxism21.jams.or.kr/co/main/jmMain.kci

“아직 끝이 보이지 않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참혹한 전쟁 상황은 너무나 참담하다. 이 전쟁은 코로나 팬데믹, 심화하는 기후 위기와 함께 강탈적이고 기생적인 축적 단계에 도달한 오늘날 자본주의 세계의 가장 어두운 얼굴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다.
“이 전쟁은 기본적으로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맞서는 우크라이나 민중의 방어 전쟁이다. 하지만, 동시에 다른 두 가지 요소와 성격이 섞여 있다. 하나는 우크라이나 정부와 친러시아 분리주의자들 사이의 내전적 성격이고, 또 하나는 기성 강대국인 미국이 주도하는 블록과 이것에 도전하는 러시아-중국 블록 간의 경쟁이라는 요소이다.”

재미와 만족을 준 <헌트><외계+>

이번 여름에는 코로나도 사그라드는 추세라서 대작 한국 영화들이 많이 개봉했다고 한다. 그 중에서 <한산>이나 <비상선언>은 흥미가 가지 않거나 못 봤지만, <헌트>는 극장에서 <외계+>은 집에서 봤다. 먼저 <외계+>은 상당히 재미있었다. 시간여행과 외계인과 로봇까지 등장시키며 시공간을 초월하고 뒤섞으며 진행되는 기발한 상상력이 좋았고, 배우들의 연기도 누구 하나 흠잡기 어려웠고, 연출과 특수효과 등도 아주 매끄러웠다.

원래 최동훈 감독을 좋아했고, 대부분의 영화들이 좋았지만, 이번에는 과거의 성공 위에서 눈치보지 않고 마음껏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유롭게 펼쳐가는 것 같아서 더욱 좋았다. 다만, 문제는 이 영화가 흥행에 처참하게 실패했다는 점이다. 이유는 모르겠다. 최동훈 감독에게 대중이 기대한 것이 다른 것에 있었거나, 스토리가 너무 복잡했거나, 영화값이 너무 올라서 선택과 집중이 있었던 것인지, 나쁜 입소문이 있었던 것인지...

사실 나부터도 입장료가 부담스럽고 아까워서 기다리다가 집에서 영화를 본 처지에 흥행 성적을 안타까워하는 것은 모순이지만... 영화를 다 보고나서, 흥행 실패 때문에 최동훈 감독이 너무 상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과 앞으로 2편 개봉이 어려워지거나, 최동훈 감독이 이후에 제작사와 투자자들의 눈치를 보면서 그들의 상업적 계산과 주문에 따라서 영화를 만들게 될 것 같아서 걱정이 됐다.

<헌트>도 상당히 재미있는 영화였다. 솔직히 감독으로서 이정재에 대한 의심이 좀 있었다. 박근혜 시대에 나온 대표적 반공 정치영화인 <인천상륙작전>의 주연이었고 윤석열과 문화예술인의 만남 자리에도 참가하는 것을 보면서 선입견이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정치적으로 엄격히 따지고 들자면, <헌트>의 북한에 대한 묘사는 명백히 전형적이고 냉전적이다.

남한의 적화를 위해 간첩을 보내는 나라고, 북한에서 온 사람들도 피도 눈물도 없는 괴물같은 사람들이다. 또 영화에서 광주 민중항쟁은 단지 학살의 희생자이면서 주인공의 각성을 위한 도구로 나오며, 역사에서 아래로부터 대중의 구실은 삭제돼 있다. 역사의 주인공은 사명감을 가지고 암약하는 정보기관과 군부의 고위 인사들인 것처럼 보인다.

혁명이냐 개혁이냐의 문제도 독재정부의 우두머리를 죽일 것이냐, 협상할 것이냐의 너무 단순화된 방식으로 설정돼 있다. 그럼에도 군사독재 시절에 이 나라의 기득권 우파들에 의해서 얼마나 심각한 인권유린과 고문과 학살과 민주주의 파괴가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 광주의 역사적 의미를 제기하고 있다는 점 등에서 충분한 장점이 있는 영화였다.

무엇보다 치열한 연기, 치밀한 연출, 긴장감 넘치는 액션 등에서 대단한 재미와 만족감을 주는 영화였다. 배우로서 경험과 감각을 감독으로서 장점으로 연결시킨 경우다. 언더커버가 등장하는 첩보 액션으로서 장르적 쾌감도 상당했다. 특히 마지막에 머리가 벗겨진 독재가가 죽을 듯 말 듯 하는 장면을 보면서, 당시 아웅산 테러를 지켜보면서 반독재 민주화 운동가들이 느꼈을 모순적 감정이 어떤 것이었을지 상상하게 됐다.

사실 아무리 잔학한 독재자라 하더라도 그런 폭력적 테러를 통해서 제거한다는 것은 정치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바람직하거나 옳다고 볼 수 없다. 구조와 체제가 바뀌지 않는 이상, 더구나 위에서 궁중 암투속에서 최고 권력자 1명의 제거로는 바뀌는 것이 없다. 김재규가 박정희를 암살한 결과가 전두환과 신군부의 등장이었듯이 말이다.

하지만 광주를 거치면서 사람들 마음 속에 형성된 엄청난 분노를 생각하면 단순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웅산 테러라는 충격을 보면서 느낀 감정과 그 속에서도 살아남은 전두환을 보면서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대통령을 제거하라<헌트>의 포스터를 보고, 또 오늘날의 현실을 생각하면 참 복잡하고 묘한 감정이 든다

(기사 등록 2022.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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