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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세상읽기 – 김순호/이준석/정경심/임금격차/안나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2. 8. 26.

전지윤

경찰 프락치였다는 김순호가 윤석열 정권에 필요한 이유

윤석열 정권이 취임 초기부터 가장 역점을 두고 추진했던 것이 바로 검찰을 중심으로 경찰, 국정원 등의 국가억압폭력기구들을 수직계열화하면서 공안, 사정 정국을 위한 전진기지로 재구성하는 일이었다. 그러면서 추진된 것이 바로 경찰국 신설이고, 그 경찰국의 수장으로 등장한 것이 김순호이다.

그리고, 30년간 공안정보 경찰로서 잔뼈가 굵은 김순호가 사실은 민주화 운동에 동참했다가 변절해서 경찰 프락치 노릇을 하며 동료들을 팔아넘기고 출세의 수단으로 삼았던 것이 드러나고 있다. 지금까지 드러난 여러 증거와 증언들로 볼 때 이것은 거의 확실한 사실로 보인다. 처음에 김순호는 군부독재 정권이 진행하던 강제징집, 녹화사업의 피해자였다.

독재정권은 민주화 운동에 동참하던 대학생들을 강제로 군대로 징집하고, 이어서 그들에게 폭력과 회유를 통해서 프락치 노릇을 강요했다. 운동하면서 알게 된 정보를 넘기고, 인간관계를 이용해서 보안기구의 사찰과 탄압에 도움을 주라는 강요였다. 김순호는 그것에 굴복했고, 군 제대 후에도 계속 경찰 프락치 노릇을 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놀라운 것은, 그가 88년에 인천부천민주노동자회가입한 것부터가 공안경찰의 지시에 따른 의도적인 침투였다는 점이다. 그래서 인노회가 극심한 탄압을 받고 조직이 와해되는 과정에서 중심적 구실을 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때 체포되고 구속된 사람이 18명에 이르는데 그 중에 한 명은 나중에 고문 후유증으로 분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김순호가 이처럼 경찰 프락치 노릇을 하는 데에는 김순호의 대학 선배인 홍승상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공안경찰, 고문경찰로 악명높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책임자로도 알려진 홍승상은 최근 <TV조선> 인터뷰에서 당시 김순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대표적인 게 인노회 사건이다. 그래서 내가 그를 경찰 특채로 받아줬다고 했다.(너무 솔직했던 이 인터뷰는 곧 삭제됐다.)

그 외에도 김순호의 당시 행적은 그가 경찰 프락치가 아니었다면 설명이 안 될 정도이다. 그래서인지 김순호는 최근 여러 언론 인터뷰에서 내가 정말 프락치였다면 이처럼 의심스러운 행동을 스스로 했겠는가라면서 변명하고 있다. ‘프락치처럼 행동한 것이 프락치가 아니라는 증거다라는 기발한 논리가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김순호가 의도적으로 동료들을 기만하고 팔아먹은 악질적인 경찰 프락치였다는 증거는, 지금 김순호의 주장들에서 드러난다. 그는 계속해서 나는 활동하면서 주체사상과 대남혁명노선, 공산주의 혁명 이론에 대한 경험과 지식을 쌓아서 주사파와 이적단체들의 실체를 잘 알았고, 그 전문성을 인정받아 경찰로 특채되고 승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 ‘민주화 운동은 사실은 종북 주사파들의 반국가적 이적 행위에 불과했고, 그들을 탄압하는 것은 정당했다는 인식을 숨기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 정도면 확신범이라고 볼 수 있고, 그는 아마도 프락치 활동을 하고 동료들을 속이고 팔아넘기면서도 스스로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금품, 취업, 승진 등만이 동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관점과 세계관은 지금 윤석열 정권 핵심세력들의 그것과도 부합한다. 이들은 문재인 정권은 주사파 출신의 586 운동권들이 주도한 정체가 의심스러운 정부였고, 민주노총같은 종북세력과 손잡고 대한민국을 위험한 방향으로 이끌어 왔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것이 지난 대선 때 멸공 챌린지의 바탕에 있었다.

사실 이런 관점은 결은 좀 다르지만 진중권 등의 주장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통합진보당 강제해산 때부터 주사파의 위선과 실체를 비판하면서 기득권 우파의 종북몰이에 동조해 왔던 진중권은, 문재인 정부 때 ‘586의 내로남불을 비판하면서 문재인 정부가 자유민주주의를 벗어나 전체주의의 경향을 보인다며 족벌언론들에 내부고발하기를 즐겨했다.

하지만, 지금 윤석열 정권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이런 주장과 고발을 하며 왼쪽에서 힘을 실어주는 진보적 지식인이 아니라, 실제 조직 사건들을 터트리며 공안정국조성에 기술적, 실무적 도움을 줄 전문가들이다. 그래서 김순호가 발탁된 것으로 보여진다.

과거에 국가보안법으로 탄압받으며 활동할 때 프락치 공작의 실체와 피해를 직접 경험해 본 적이 있다. 프락치 공작으로 하루 아침에 수십 명씩 잡혀가서 구속되는 상황의 충격과 파괴력은 대단했다. 그것은 수년 간의 활동을 모두 원점으로 되돌리고, 그 후로도 몇 년간 조직의 붕괴, 구속, 재판, 수감생활 등의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다.

무엇보다 그것이 남기는 가장 큰 후유증은 동료들이 서로를 불신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가장 가까운 동료를 믿지 못하고 끝없이 의심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서로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김순호를 믿고 매우 친하게 지냈다는 최동 열사의 비극 뒤에도 고문 후유증만이 아니라 그런 상처가 있었을지 모른다. 영화 <무간도>에 나오는 지옥도가 한국에서는 민주화 운동과 좌파, 노동운동 활동가들을 상대로 펼쳐져 왔던 것이 아닐까.

변화 발전하고 있는 '이준석의 난'

보름 전에 아래 글에서 이준석의 난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https://alook.so/posts/70tvedD

어제 이준석의 기자회견은 몇 가지 상황 발전을 보여 준다. 첫째, 이준석은 지금 너무 억울하고 분노해 있다. 윤석열과 주변의 정치검사, 정치경찰들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자신의 성비위와 뇌물 수수 문제를 덮어줄 수 있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냐는 배신감이다. 특히 최근 김학의가 9년만에 무죄로 모든 혐의를 털어버리는 것을 보면서 더욱 더 배신감이 클 것이다. ‘저렇게 해줄 수 있으면서 왜 나한테만? 이것이 과연 공정인가?’

둘째, 그러면서 이준석이 흑화탄을 터트리며, ‘너 죽고 나 죽자는 방식으로 나오는 것은 꽤 큰 카드를 손에 쥐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지금까지 패턴을 보면 윤석열 그룹은 표적을 정하고 부패와 뇌물의 줄기를 한참 파헤치다가, 그 뿌리와 몸통에 자신과 친구들이 있다는 것이 드러나면 황급히 덮어버리는 패턴이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조국 펀드라고 난리치다가 막상 파보니까, MB측근과 전관 검사들이 드러나자 덮어버린 경우가 있다. 그러니 이준석은 아이카이스트를 고리로 한 부패와 뇌물의 커넥션을 윤석열 그룹이 결국 덮어버릴 수 밖에 없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셋째, 이준석의 난은 단지 이준석과 윤석열만의 갈등을 보여주는 게 아니다. 지금 윤석열의 대통령 당선 이후에 기득권 우파의 권력 카르텔은 곳곳에서 서로를 공격하며 균열과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단지 집권여당 내부의 다툼만이 아니다. 예컨대 요즘 극우 유튜버들은 서로를 공격하는 콘텐츠를 더 많이 만들고 있다. 대표적으로 가세연의 김세의와 강용석은 서로 피터지게 싸우고 있고, 신남성연대 배인규와 반동성애지도자 염안섭도 서로를 비난하고 있다. 종북몰이를 혐중몰이로 발전시키는데 협력했던 이준석과 하태경도 갈라서고 있고, ‘반페미니즘 여성혐오에 의기투합했던 이준석과 박민영도 등을 돌렸다. 기득권 우파 카르텔이 다시 결집해 권력을 탈환하기는 했지만, 불신이 여전하고 충분한 화학적 결합이 이뤄지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꼴 좋다고 불구경할 때가 아니다. 정치검사들과 족벌언론이라는 윤석열 정권의 정치적, 조직적 지기기반은 무너지지 않았다. 이들은 방향을 바꾼 적도 없고 권력을 내놓을 생각도 없다. 검찰은 이재명 법인카드는 100군데를 압수수색하면서 김건희 주가조작 등은 덮어주며 검찰개혁을 원위치로 돌리고 있다. ‘검수완박을 비난하는데 진영을 넘어서 한목소리였던 주류언론들은 이제와서 짐짓 한동훈을 탓하고 있다. 어제 기자회견에서 이준석에게마저 성비위와 뇌물에 대해 날카롭게 파헤치며 묻는 언론은 없었다.

그 점에서 광우병 쇠고기 수입같은 큰 사고도 없이 지지율이 20%까지 추락했다는 이야기는 대표적인 혼동이다. 벌써 윤석열 정권은 집권 3개월만에 그 하나하나가 광우병 쇠고기 수입에 버금가는 대형 사고를 줄줄이 쏟아내면서도 지켜주는 검찰과 선을 넘지 않는 주류언론들 덕분에 거대한 저항의 폭발을 막아내고 있다. 심지어 이명박 정권마저 집권초 위기를 넘기며 용산참사와 쌍용차 살인진압을 자행하고 4년 후에 박근혜에게 권력을 넘겨주는 데 성공한 바 있다.

고통을 외면하고, 비명조차 입 막는 세상

우리가 사는 세상이 구조적, 제도적, 문화적, 법적 차별과 불평등으로 뒤덮여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때로 절망스럽다. 계급적, 젠더적, 인종적, 정치적으로 소수의 편에서 고립된 사람들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열심히 뛰어다녀도 결국은 크고 작은 패배가 예정돼 있다. 그것은 마치 꿈쩍하지도 않는 거대한 벽 앞에서 계속 소리치고 발버둥치는 것과 같은 일이다.

가끔은 온 몸에서 모든 에너지가 빠져 나가면서 끝이 보이지 않는 구멍 속으로 계속 빠져들고 있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벼랑 끝에 몰려 고공농성을 하고도 또 어마어마한 손배를 당하며 손발이 묶이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보며 느끼는 심정이고, 검언정 카르텔의 표적이 된 사람들의 끝없는 고통을 보면서도 느끼는 심정이다.

미투(MeToo) 운동 이후 5년이 지났지만 초기와 몇몇 정치적 목적의 주목을 빼놓고 보면, 성폭력 피해자들이 직면한 거대한 벽은 여전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최근 기사들을 보면서도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가부장적 질서가 구조화된 사회에서 젠더적 위계질서에서 더 낮은 위치에 있는 이들이 가장 흔히 직면하는 것은 성폭력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성폭력 피해자들이 직면하는 것은 철저히 다수자와 가해자의 시선으로 구성된 사회라는 거대한 벽이다.

심신상실이나 항거불능인 상황에서의 성폭력에 대한 아래 <한겨레> 기사를 보면 그 아득함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기억이 안 난다고 하면 성폭력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되고, ‘기억이 난다고 하면 거부하지 않았으니 동의한 것이 된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women/1055366.html?_fr=mt2

뭐라고 증언해도 이 덫에서 벗어날 수 없고, 성폭력 가해자들과 그들을 대변하는 변호사들은 이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가부장적 남성의 시각으로 구성된 법리와 사법질서, 보수적 사법부 속에서 문제를 법정 다툼으로 가져가는 성폭력 사건의 법시장화를 가해자들이 선호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결국 가해자들은 법적 정당성을 얻고, 피해자와 연대자들은 절망하고, 성차별적이고 성폭력적인 사회질서와 규범들은 더욱 강화되는 것이다. 최근 몇 가지 탐사보도들을 보면서 이런 흐름이 낳고 있는 우울한 현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셋 다 꼭 볼만한 훌륭한 시사다큐였다.

* 뉴스타파디지털 성폭력 : 사라진 휴대폰, 사라진 정의

https://www.youtube.com/watch?v=Lphy6R5wW-U&t=1431s

* <시사기획 창> 너를 사랑해 악마의 그루밍

https://www.youtube.com/watch?v=Ep2SeG7_0lc

* <PD수첩> 기억의 살인자 GHB https://www.youtube.com/watch?v=CeKriyDoit4

<뉴스타파>는 가해자의 고통에 더 민감하고 피해자의 고통에 무관심한 사법부와 법질서의 문제를 보여준다. <시사기획 창><PD수첩>은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면서 성폭력을 조장하는 사회규범이 특정한 도구나 기술과 접목하면서 어떤 결과를 낳는지 보여 준다. 특히 디지털 자본주의 시대가 만들어내는 성폭력의 새로운 양상은 상당한 공포감을 낳는 게 사실이다.

물론, 이것을 단지 몇몇 악마나 괴물같은 가해자들의 문제로 봐서는 안 된다.(그 점에서 시사기획 창의 상투적 제목은 아쉽다) 우리가 차별과 폭력을 낳는 가부장적 질서와 규범에 타협하지 않고 저항하며 그것을 바꾸어내지 못하면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위험으로 봐야 한다. 그런 투쟁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은 대개 외롭고 상처와 고통 속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얼마 전에 본 박재일 감독의 단편 영화 <조지아>는 그런 외로움, 고통과 상처가 너무 잘 묻어나서 가슴 아팠다.(작품성과 뛰어난 연기로 해외에서 여러 상도 받은 이 영화는 미국의 언론 <뉴요커>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 https://www.newyorker.com/culture/screening-room/the-cost-of-justice-in-the-aftermath-of-tragedy )

밀양 성폭력 사건을 모티브로 한 이 영화의 마지막에 성폭력 피해자의 부모는 가해자들의 손을 들어주는 경찰서 앞에 가해자와 그 대변자들을 규탄하며 재조사를 요구하는 플래카드를 내건다. 그러나 그 플래카드들에는 ㅁㅁㅁ ㅁㅁㅁ ㅁㅁㅁㅁ라는 식으로 깨진 글자들만이 적혀있다.

이것은 중의적인데, 한편으로는 이미 세상을 떠난 피해자가 좋아하던 글씨체를 사용했는데, 인쇄소에 그 폰트가 없어서 글자가 깨진 채 만들어져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그것은 말로 표현되기 어려운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고통과 그들의 입을 가로막는 이 세상을 보여 준다.

피해자의 치유되지 않고 깊어가는 상처, 사랑하는 이의 그런 고통을 지켜보는 이들의 무너지는 심정, 그 상처와 고통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돌아보기는커녕, 무슨 수로든 고통에 대한 비명과 말하기조차 끝내 막아서려는 가해자들과 법과 제도, 이 모든 게 너무 끔찍하고 가슴이 아파서 일렁이는 마음이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ㅁㅁㅁ ㅁㅁㅁ ㅁㅁㅁㅁ

조국포비아속에 가장 고통받아온 정경심 교수

만약 어떤 사람들이 누군가의 집 앞에서 1년 내내 진을 치고 온갖 혐오발화를 하면서 막말과 욕설을 쏟아낸다면, 이것은 심각한 인권침해와 스토킹 범죄로 전사회적인 비판에 직면할 것이다. 더구나 그 내용이 빨갱이, 간첩, 죽어라, 죽이자등만이 아니라 특히 중년여성의 정체성과 외모 등에 대한 심각한 혐오와 심지어 성기 등을 지칭하며 욕설을 하는 것이라면 인권과 반차별을 말하는 모든 사람들이 분개하며 막아나설 것이다.

하지만 그 대상이 문재인 부부라면? 적절한 비판과 질타가 나오긴 하지만, ‘윤석열 집 앞에서 친문그룹의 집회도 문제’, ‘혐오도 문제지만 집회의 자유도 중요라는 물타기 속에서 곧 관심에서 멀어질 것이다. 이러한 온도차는 어디에서 비롯한 것일까. 지난 대선 초기에 벌어진 민주당 공동선대위장에 대한 가세연의 인신공격과 사퇴 과정에서도 이것을 느꼈다.

당시 그 분에 대한 가세연 주도와 언론의 협공 속에 벌어진 극단적으로 저열한 사생활 침해, 인신공격 도중에 SNS에서 본 한 진보적 지식인의 반응이 아직도 기억난다. ‘가세연은 문제이지만, 민주당의 고위인사가 된 그런 사람이 당하는 공격에 별 관심이 없고 그 아픔에 공감하고 싶지도 않다.’ 그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특히 내가 비판적으로 보는 정치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의 고통에는 무관심한 이런 반응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최근에 한 좌파그룹이 혐오에 대해서 토론한 동영상을 보고 더 충격을 받았다. 그 동영상에서 오랜 경험과 지식을 가진 좌파 활동가가 혐오가 무조건 다 잘못인가? 나는 전두환도 혐오하고 문재인도 혐오한다. 아직 행동으로 나가지 않은 혐오를 무조건 막는 것은 비민주적이다. 특히 혐오 표현을 국가가 규제하는 것은 잘못이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것은 너무 노골적으로 그 생각을 드러낸 경우이기는 하겠지만,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태도에서 크게 자유롭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가 만들어진 중요한 계기는 역시 2019년 검언대란(소위 조국사태’)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의 윤석열 정권이 등장하게 된 핵심적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 형성된 조국포비아는 아직도 그 영향력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 상황을 만들어냈던 세력들(검찰, 언론, 우파)은 툭하면 '전임정부의 내로남불과 위선'을 꺼내들고, 이제 다시 이재명 등에 대한 수사와 기소를 윤석열의 취임덕위기에 대한 돌파구로 보고 있다. 그러면 또다시 혐오가 분출하고, 적대가 강화되고, 진영이 나눠지면서 프레임이 전환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이제는 대부분 막을 내렸지만, 영화 <그대가 조국>2019년의 그 대혼돈 상황을 돌아보게 하는 중요한 작품이었다. 그리고 한 달반 전에 한길사에서 <그대가 조국 스토리북>에 내가 SNS에 올렸던 영화평을 실어도 되겠냐는 연락이 왔었다. 나는 조국포비아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의 반응이 신경쓰이긴 했지만, 혼쾌히 영광스럽게 생각하며 동의했다.

책을 받고도 여러 바쁜 일들로 한참을 못 보다가 최근 정경심 교수의 소식을 듣게 됐다. 젊은 시절에 겪은 사고로 원래도 뇌종양, 고혈압 등으로 고생해 온 정경심 교수가 3년간의 끝없는 재판과 수감생활 속에 뇌수막종, 뇌경색증을 보이다가 최근 교도소에서 낙상사고까지 당하며 이제 디스크 파열로 하지마비 증상까지 보인다는 것이다.

검찰개혁을 추진한 사람의 가족이라는 죄로, 검찰의 표적이 된 죄로, 한 사람이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것에 분노와 슬픔이 치밀어 올랐다. 그러면서 영화 내용을 그대로 텍스트로 옮긴 <그대가 조국 스토리북>을 뒤늦게 살펴봤다.

조국 가족 펀드/ 조국 대선자금 조성/조국 학위와 논문 표절 논란/ 웅동학원 채무 면탈/ 조국 딸 포르쉐/ 조국 여배우 후원/ 조국 동생 부부의 위장이혼... 이제와 보면 당시 언론이 쏟아낸 어느 것 하나 사실이 아니었다. 결국 정경심 교수는 주로 표창장 위조 문제로 감옥에 있다. 하지만 그것도 검찰이 조작했다는 비판과 증거들이 갈수록 강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다 떠나서 검찰의 수사와 기소를 모두 전적으로 믿어주는 태도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백번양보해 모든 게 사실이라도 이토록 누군가의 고통에 무관심하고 전사회적인 혐오에 동조하고 침묵하는 것이 맞는가? 박근혜와 이명박은 수시로 형집행정지로 병원입원과 치료를 받을 수 있었지만 정경심 교수는 왜 그럴 수 없는가? <그대가 조국 스토리북>에서 조국 교수는 쓰고 있다.

“2019년 법무부장관 지명 이후 나의 온 가족은 무간지옥無地獄)으로 들어갔다.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온 가족의 사생활이 까발려졌다. 사모펀드를 통한 권력형 비리를 운운하는 악의적 허위보도가 난무했다. 배우자와 동생은 감옥에 갇혔다. 이 충격으로 팔순 노모는 멀쩡했던 시신경에 문제가 생겨 한쪽 눈을 실명했다. 배우자는 구속수감 중 수시로 병원 신세를 지며 진료를 받고 있다. 동생은 검찰 수사, 구속, 석방 등을 겪으면서 생이빨 7개가 빠져 임플란트를 해야 했다. 딸은 보수언론과 극우 유튜버의 시도 때도 없는 공세 속에서도 꿋꿋이 의사 생활을 하고 있지만, 대학과 대학원 입학이 취소되어 소송을 치르고 있다. 이를 보는 것은 아비로서 살을 찢는 고통이다.”
“아들과 딸은 개봉 후에도 아직 이 영화를 보지 않고 있다. 가족 구성원 전체가 언론에 의해 공격받았던 시간, 자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이 언론에 의해 추적되고 보도되던 시간, 그리고 자신들이 검찰 특수부에 소환되어 조사받았던 시간 속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끔찍해서일 것이다. '몇 년의 세월이 흐른 후 보겠다'고 하는 말에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그대가 조국> 영화에서도 스토리북에서도 가장 아픈 장면은 이것이었다. 우리가 어제 돌을 던졌고, 오늘 증오하고 있는 누군가도 결국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의 사랑을 받던 상처받기 쉬운 영혼이라는 것을 잊지말자.

사과는 지는 것이 아니고 용서는 이기는 것이 아니다

http://www.kovietpeace.org/b/board15/6951?fbclid=IwAR1N5eH9w-zamggIQds67WnwiL6BGBZrGaufy-h8RyBsbkOG0qd04e8Zr9c

8.15를 전후해서 지난 역사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었던 지난주에 본 가장 인상적이고 감동적인 소식이었다. 사진에서 사과하는 류진성 씨와 그 손을 잡고 위로를 얻었다며 계속 눈물을 흘렸다는 응우옌티탄 씨의 모습을 보고 이야기를 듣고 보면 많은 사람이 같은 감정과 생각이 들 것이다.

응우옌티탄 씨는 ‘1968년 한국군의 퐁니, 퐁넛 마을 학살 사건의 피해자이며 생존자이다. 당시에 7살밖에 안된 응우옌티탄 씨는 총을 맞고 창자가 쏟아지는 끔찍한 고통을 겪었다고 한다. 그런 경험과 상처를 안고서 지금까지 살아오며 겪은 고통에 대해 우리는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런 고통을 겪고도 응우옌티탄 씨는 류진성 씨의 사과를 받고서 치유와 위로를 얻었다고 한다. 가장 끔찍한 고통을 준 가해자들 중에서 용기있게 반성하고 사과하면서 피해자에게 치유와 위로를 전해주는 사람이 등장한 것이다. 많은 피해자들이 가해자들의 진심어린 사과를 기다리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언제까지 원망하고 증오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며 치유와 위로를 얻고 싶은 것이다. 내가 도와 온 성폭력 피해자도 비슷했다. ‘사과는 부끄러운 것도 지는 것도 아니고 용서는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은가.

이번에 응우옌티탄 씨 등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국회간담회를 함께 한 것은 윤미향 의원이었다. 윤미향 의원이 기득권 카르텔에게 마녀사냥을 당할 때 그동안 윤미향과 정대협의 위안부 운동은 너무 민족주의적이고 편협했다. 국회에 가서도 그런 식의 문제가 계속될 것이 우려된다며 같이 돌을 던지던 진보적지식인과 언론인들에게 다시 묻고 싶다. 누가 진정으로 말뿐 아니라 실천에서 위안부 문제를 반전평화와 인류 보편의 인권 문제로 접근해 왔고, 누가 그럴듯한 말만 하면서 그런 사람들의 발목이나 잡아 온 것인가?

“이번 국가배상소송에서는 유의미한 증언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중 하나는 바로 지난 2021년 11월에 있었던 참전군인 류진성의 법정 증언이다. 그의 용기 있는 증언에 퐁니·퐁녓의 진실은 한층 밝아졌고 원고 응우옌티탄의 승소 가능성은 높아졌다. 지난 2022년 8월 11일(목), ‘시민사회 네트워크’는 당시 목격한 상황을 증언한 참전군인을 만나고 싶다는 응우옌티탄의 요청에 따라 만남의 자리를 마련했다. 이날 류진성은 응우옌티탄의 피해 사실과 고통을 위로하며 “가해자의 한 사람으로서 진심으로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며 자신의 마음을 전했고 응우옌티탄은 대화 내내 눈물을 흘리며 “법정 증언에 감사하며 오늘 만남에 위로를 얻었다”라고 밝혔다. 이어 류진성은 한국 정부가 응우옌티탄에게 사과와 배상을 하길 바라며 차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계속 노력할 것이란 뜻을 전했고 응우옌티탄은 베트남의 수많은 피해자들을 언급하며 “더 많은 참전군인들이 사과를 해줬으면 좋겠다. 그러면 위로가 될 것이다. 내년 제사 때 베트남에 초대하고 싶다”고 밝혔다.”

 

임금 격차 - 기업 규모와 노조 유무가 중요한 변수이다

얼룩소에서 여러 의미있는 기획과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는데, 이번에는 '임금토론 프로젝트'가 나왔군요. 이번에도 여러 유익한 정보와 고민거리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다만 저는 한국 노동시장의 임금 수준과 임금 인상율의 격차를 볼 때 업종보다는 기업의 규모와 노조 유무를 보는 것이 더 효과적이고 의미있는 분석을 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여러 한계와 결함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을 발전시켜 온 마르크스의 통찰에서 찾을 수 있는 아이디어이기도 합니다. 마르크스는 모든 상품이 수요와 공급의 경쟁에 따라서 그 가격이 형성되듯이, 노동력이라는 상품도 수요자와 공급자간의 경쟁에 따라서 그 가격이 형성된다. 여기서 노동력 공급자들이 얼마나 단결하고 조직돼 있는가는 중요하다는 통찰을 제시한 바가 있습니다.

저는 이런 통찰을 이어서 노조의 창과 방패 효과가설로 한국 노동시장 격차 확대의 배경과 결과, 그 효과를 거듭 지적해 온 바가 있습니다. 이러한 분석은 특히 1997년 경제위기와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 이후 한국 경제가 겪은 변화에서 출발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때가 한국 경제가 신자유주의적 방향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분기점이었기 때문입니다.

1997년 이후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노동자들과 노동시장에서 불어닥친 변화였습니다. 특히 정리해고제, 파견근로제 등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들이 중요했죠. 물론 그럼에도 노동조합이라는 방패가 있는 곳에서는 신자유주의 공격이 아주 순조로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신자유주의화는 기업 내부노동시장의 해체보다는 외부노동시장의 확대라는 양상을 통해 이루어졌다. 사용자들은 기업 내부노동시장의 유연화를 욕심대로 할 수 없는 조건에서 외부노동시장 확대라는 전략을 추구했다. 그 결과 한편으로 노동시장에서의 중심이 축소되고 다른 한편 분절이 심화되었다.”(정이환, <한국 고용체제론>)

외주화, 사내하청, 임시직, 파트타임, 이주 노동력의 도입 등이 대대적으로 추진됐습니다. 주요 대기업들은 2000년대 이후 정규직 신규채용을 최소화하고 필요한 인력은 사내하청과 비정규직으로 충원해갔습니다. 그래서 한국 사회에서 비정규직 규모를 연도별로 살펴보면 이 시기부터 매년 꾸준히 증가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김유선, <한국의 노동 2007>)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자동차, 조선, 철강 등 제조업을 중심으로 추진된 외주화와 사내하청의 급속한 확산이었습니다. 기업주들은 안정된 숙련 노동자가 필요한 부분을 최소화하면서 가능한 많은 업무를 외주업체와 하청업체로 넘겼습니다. 기업주들이 노린 것은 단지 인건비 절감만이 아니었습니다.

“대기업들이 외주화 전략을 통해 간접 고용을 확대한 중요한 이유는 보통 ① 인건비 절감, ② 경기변동에 따른 유연한 고용조정, ③ 노조 회피를 통한 노사관계 관리” 세 가지 모두였습니다. (조효래, <노동조합 민주주의>)

이것은 노동시장이 끝없이 분절되고 격차가 벌어지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같은 기업 내 노동시장 분절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사내하청)의 이중구조로 분절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1차 한시하청 및 아르바이트, 2·3차 사내하청까지 이어진다.”(조효래, 같은 책)

이것이 낳은 격차와 결과는 다양한 측면에서 확인됩니다. 예컨대 남성 정규직의 임금을 100이라 할 때 여성 정규직 임금은 그것의 68.2, 남성 비정규직의 임금은 52.7, 여성 비정규직의 임금은 35.9였습니다.(김유선, 비정규직 규모와 실태) 대기업 정규직의 임금이 100일 때, 대기업 비정규직의 임금은 64, 중소기업 정규직의 임금은 52, 중소기업 비정규직의 임금은 35라는 통계도 있습니다.(<머니투데이>, 2015727)

이런 격차에는 무엇보다 사업장의 규모와 노조 유무가 큰 영향을 끼쳐 왔습니다.(김복순, 사업체 규모별 임금 및 근로조건 비교) 이 나라의 노조 조직률이 대규모 사업장(과 공공부문)에서 특히 높다는 점을 볼 때 노조 유무가 더 주된 변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민주노조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경제가 호황이고 회사가 성장할 때 더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었고(‘의 효과), 경제 위기와 신자유주의 공세에서도 덜 뺏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방패의 효과).

그리고 이 속에서 역설적으로 노동자들 사이의 분절과 격차는 더 확대돼 왔습니다. 두 집단의 존재를 가정하고, 한 쪽은 10을 얻을 때 한 쪽은 5를 얻고, 한 쪽은 5를 잃을 때 한 쪽은 10을 잃는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이런 현상이 매년 오랜 동안 계속 반복되고 누적되면 두 집단 사이의 격차가 계속 벌어지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제가 이것을 '역설적'이라고 지적하는 이유는 그것이 노조로 조직된 노동자들이 의도한 결과도 아니고, 따라서 그들의 책임이나 잘못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저의 가설과 주장은 보통 '대기업 정규직 노조의 이기주의'를 비난하고 책임을 떠넘기는 친기업 우파적 주장과는 명백히 다른 관점에 입각해 있습니다.(다만 어떻게 이 상황과 모순을 극복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복잡한 논의가 필요하고 그것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 충분히 다루기 어렵습니다.)

이런 상황이 노동자들의 단결과 투쟁, 그리고 노조 조직화를 더 어렵게 만들고, 결국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낳고 누구에게 이익이 됐는지는 명백합니다. 노조 조직률이 여전히 15%에도 이르지 못하고, 대기업의 일자리가 많지 않고, 비정규직의 비율이 매우 높다는 것을 볼 때, 전체 노동자의 거의 70~80퍼센트가 열악한 임금과 근로조건에 놓였다는 것도 판단할 수 있습니다. 반면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재벌과 대기업들의 수익은 크게 늘어나 왔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윤석열 정부와 보수적 족벌언론들은 한국사회에서 노동조합 조직화의 중심적 토대일 수밖에 없는 민주노총을 불법 폭력 집단', 심지어 종북단체로 몰아가고, 화물연대나 대우조선해양 등에서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고 투쟁에 나서는 것을 경찰 탄압 등으로 한사코 가로막고 거액의 손배가압류까지 하면서 억누르려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누구를 위한 것인지는 충분히 짐작 가능한 일입니다.

* 더 자세한 것은 제가 올해 봄에 출판한 책의 관련 부분을 봐주세요.

<연속성과 교차성 - 다른 세상을 향한 이단적 경계 넘기>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91685718

 

쿠팡이 삭제하려 한 <안나> 감독판의 의도

<안나> 감독판을 봤다. 보고나니까 쿠팡플레이가 이주영 감독에게 왜 모든 장면을 의도를 갖고 찍었느냐”, “독립영화같다. 다 맘에 안 든다고 불평했는지 분명히 이해가 갔다. 분명히 쿠팡플레이는 드라마를 더 압축시키면서 빠른 전개와 감각적 편집과 음악으로 더 흥행성과 상업성을 높였다. 그러면서 희생한 것은 드라마의 개연성과 등장 인물들의 맥락과 서사다.

왜 이주영 감독이 쿠팡이 내 작품을 납작하고 평면적인 이야기로 만들어버렸다고 했는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 무엇보다 쿠팡플레이는 이 작품의 메시지를 흐리거나 지우려고 했다. 감독판을 볼 때 더욱 두드러지는 메시지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학벌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감독판을 보면 안나가 고졸이고 학력이 낮다는 것을 알 때 주변 사람들의 태도와 안나가 명문대를 졸업했다고 위장할 때의 사람들의 태도는 완전히 다르다는 게 더 분명하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 똑같은 사람인데도 말이다.

학력이 낮을 때 안나는 게으르고 멍청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명문대에 외국 유학생으로 포장했을 때 안나는 아름답고 똑똑하고 역시 뭔가 다르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안나의 동료 교수들은 이 사회에서 인간 대접받으려면 교수, 의사, 변호사같은 타이틀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내각과 경제팀의 70%가 서울대 출신이라는 윤석열 시대에 나온 드라마답다.

둘째, 정치와 언론, 그리고 정치와 언론의 유착에 대한 비판이다. 감독판에서 안나의 남편 최지훈은 정치의 본질은 이익 추구이며 가난한 사람과 노동자들이나 정치에 무관심하다’, ‘이 나라에서는 학연으로 장사하고 지연으로 정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부동산 개발하며 정치인에게 로비하고 규제를 풀어서 벼락부자가 된다.

언론사 기자인 안나의 선배는 최지훈의 비리를 검증하려다가, 데스크에게 너는 눈치가 없는거냐 없는 척 하는거냐라는 모독을 당한다. 대신 그들은 최지훈 경쟁자의 가족 문제를 파헤친다. 여기서 등장하는 언론사 <보국일보>는 김건희 주가조작은 덮어주고 이재명 법인카드만 파헤치는 족벌언론사들을 떠올리게 한다.

셋째, 감독판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페미니즘적 관점과 문제의식이다. 낮은 위치의 여성들이 일상에서 겪는 차별, 모멸, 성적 대상화가 계속 나타난다. 잘 나가는 여성도 뒤에서는 가시내, 독한 X, 미친 X’ 소리를 듣는다.

가장 재미있는 장면은 고시원에 살던 안나가 곧 사시 패스할 것이라는 고시원 총무에게 당하는 성희롱이다. 여기서 총무가 안나를 데려가는 동네 뷔페식당의 이름은 부정부페이다. 안나는 그에게 너 이새끼 시발 내가 만만하구나? 너 같은 놈이 법조인이 된다고?”라며 사이다를 날린다. 이걸 보면서 윤석열의 사시 9수 시절이 떠올랐다.

이주영 감독은 나는 광고를 비롯해 타인의 돈으로 영상 찍는 작업을 오랫동안 해왔다. 광고주, 투자사의 말을 무시하면 살아남을 수 없는 일만 했다... 그들은 뭐든 돈을 주고 사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고 인터뷰했다.

이것은 자본주의에서 예술가들이 겪는 딜레마이다. 이 체제에서 창작 활동을 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데, 진정한 예술적 자유와 상상력은 돈의 논리와 권력의 질서에 가두어질 수 없다. 오히려 그것에 도전하고 그것을 전복할 때 더 큰 카타르시스가 나타나곤 한다.

뭐든 돈을 주고 사면 된다고 생각하는쿠팡플레이의 돈으로 뭐든 돈을 주고 사면 된다고 생각하는사회를 성찰하는 작품을 만들다가, ‘돈으로 안 되는 것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큰 상처를 겪은 이 경험이 이주영 감독의 다음 작품에 어떤 흔적으로 나타날 것인지 지켜보고 싶어진다.

* 앞서 쿠팡플레이가 일방적으로 편집한 <안나>를 보고 쓴 글은 여기에 https://alook.so/posts/54twBnw

(기사 등록 2022.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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