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bit.ly/3jpYwgJ)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전개되는 러시아 침략은 그 근원에 있어서는 전형적인 "열강 각축"의 유에 속합니다. 경쟁 열강, 즉 미국에 가까워지려는 주변부 지대인 우크라이나에서는 탱크와 미사일로 경쟁 열강 친화적 정권을 밀어내고 자국 친화적 정권을 세우려는 것이죠. 전형적인 "제국주의 정치"임에 틀림없습니다.
미달러가 아닌 유로화 등을 석유 거래 화폐로 채택하고, 자국 산유 산업에 미국 업체들의 진입을 막아 국유 형태를 유지했던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를 (대한민국의 파병까지 얻어내) 침공한 미국과는 별 차이는 없습니다. 한데 그 본질 (제국주의 침략)은 동일해도, 그 침략에 동원되는 이데올로기들이 또 상이하다는 점을 우리가 유의해야 합니다.
미국의 침략에 동원된 이데올로기는 미국의 공식 이념인 자유주의이었습니다. "폭군 사담 제거"가 모토이었죠. 물론 침략이라는 상황에서는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이용은 기만적이었습니다. 나중에 이라크인들의 저항으로 인해서 총선 등이 이루어졌지만, 애당초에는 미국은 이라크에서의 제도적 민주주의 실시를 계획하지 않았습니다.
참, 폭군 사람을 1980년대에 혁명적 이란과의 전쟁에서 지원한 것도 같은 미국이었습니다...러시아의 공식 이데올로기는 - 미국과 달리 - 국가 본위의 민족주의, 즉 일종의 국가주의입니다. 지금 침략의 명분으로 이용되는 이데올로기도 결국 그 국가주의로부터 파생된 것이죠.
개전 직전의 푸틴의 연설을 듣다 보면, 그로서는 별도의 우크라이나라는 국가, 별도의 우크라이나 언어나 민족은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우크라이나를 "레닌이 만들었다"고 불평할 정도이었습니다. 완전히 틀린 말도 사실 아닙니다. 포용적이고, 소수자에 대한 존중을 본위로 하는 레닌과 초기 소련의 언어, 문화 정책이 우크라이나 문학이나 우크라이나어 출판, 우크라이나어 교육체계를 키우고 우크라이나 민족 의식의 발전에 기여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 만큼 10월 혁명과 초기의 소련은 포괄적인 '인류 해방'의 차원에서는 여성, 노동, 청년 등의 해방과 함께 과거 피억압 민족의 해방에 노력을 경주한 것이죠. 스탈린주의적 보수화가 이루어지고 나서도, 그 말기에도 소련은 우크라이나 각급 학교에서의 민족어 교육이나 우크라이나어 출판 등을 지원, 장려했습니다. 스탈린 대숙청 시절의 "민족주의 분자" 탄압 등도 있었지만, 대체로는 소련 공산당으로서는 우크라이나 민족의 별도의 정체성 그 자체는 '문제' 되지 않습니다.
푸틴과 그 주변의 안보꾼 출신들은 다릅니다. 그들에게는 동슬라브 민족 정체성으로서는 오로지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한 러시아적 정체성은 유효합니다. 우크라이나가 모스크바 중심의 러시아적 정체성과 다른, 어떤 별도의 동슬라브적 정체성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은 그들에게 불안을 자아냅니다.
엄연히 일개의 언어인 우크라이나어도 그들에게는 그저 "표준어"인 러시아어로 궁극적으로 대체돼야 할, "순화" 대상인 "지방 방언", "시골 방언" 정도입니다. 그들이 지니고 있는 모스크바 중심의 헤계모니적 세계관에서는 키예브나 하리코브 등은 오로지 모스크바를 따라야 하는 "지방"에 불과합니다. 사실 이는 광동어 중심의 향항(홍콩)의 별도의 아이덴티티에 대해 중국의 북경 관료들이 지니고 있는 생각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푸틴 전쟁의 이데올로기는 바로 위와 같은 자국 중심의 헤게모니적 민족주의죠. 이 전쟁을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의 대다수는 절대 반대합니다. 이웃 대국에 밟히고 있는 약소국 우크라이나에 대한 자연스러운 동병상린의 동점이 가는 것이죠. 그런데....과연 우리 대한민국에서는 같은 종류의 헤게모니적인, 대한민국 중심의 민족주의를 발견할 수 없는가요?
우리는 가령, 평양 중심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판의 "조선적 아이덴티티"를 대한민국 아이덴티티와 동격의 정체성으로 존중해주고 인정해줄 준비가 돼 있나요? 평양의 문화어, 김일성 부대에 의한 항일 투쟁 중심의 "또 하나의 코리아"의 아이덴티티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고, 그 아이덴티티를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국적 아이덴티티로의 "개종"을 강요하는 헤게모니적 태도를 자성해서 포기할 수 있나요?
아니면 중국의 56개 구성 민족 중의 하나로서 중국 국가 행사의 장에서 조선옷/한복을 입게 되는 연변 재중국 동포들을 보고 "대한민국의 한복 문화를 도둑질했다!"고 발광했던 몇 주 전의 대한민국 중심의 헤게모니적 민족주의 광극에 대해 반성을 할 수 있을까요? 문화어나 연변어, 고려말을 "비표준어"나 "방언"으로 치부하고, 서울의 표준어와 동등한 언어로 대접하지 못하는 속 좁은 태도를 반성할 수 있을까요?
제발 오해 마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연구자이며 저의 태도는 근본적으로 "중립"입니다. 저는 평양 교과서들에 실린 그 정권의 공식 신화들이나, 대한민국 역사 교과서에서 발견되는 대한민국 중심의 역사 내러티브 등등이나 두루 신뢰하지 않는 편이고 "분석"의 재료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제가 원하는 세상이란, 다양한 정체성들이 공평하게, 동등하게 존중을 받는 평등한 세상이고, 힘센 나라가 헤게모니적 민족주의로 비교적 취약한 집단들을 억누르는, 그런 세상은 아닙니다. 제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대한민국 사람들이 대한민국이 이미 타자들에게 헤게모니적 민족주의를 강요할 수 있는 "미니 강국"으로 성장을 하고, 이미 - 특히 연변 재중국 동포 등 비한국적 조선인 디아스포라 집단에 대해 - 인식론적 폭력을 가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가 이해했으면 하는 겁니다.
(기사 등록 20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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