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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세상읽기 – 우크라이나 침공/ 윤석열과 혐오정치/ 닐 포크너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2. 2. 26.

전지윤

'우크라이나-평화, 러시아-자유' 배너와 행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한다! 즉각 철군하라!

러시아 푸틴 정부가 기어코 우크라이나를 침략하며 전쟁을 시작했다. 이 야만적 침략과 전쟁에 절대 반대하며, 푸틴 정부를 강력 규탄하고, 즉각적인 중단과 철군을 요구해야만 한다. 이 전쟁은 전세계 모든 민중에게 고통을 줄 것이다. 우크라이나 민중은 죽어갈 것이고, 러시아 민중에 대한 푸틴의 독재와 억압은 더욱 강화될 것이고, 나머지 모든 나라에서는 경제적 불안정과 고물가 등이 심화되면서 편가르기와 줄세우기가 벌어질 것이다.

푸틴은 군사적 침공을 시작하기 직전의 담화에서 ‘1917년 볼셰비키와 레닌의 실수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의 민족자결권을 인정한 것이 실수였다며, 대러시아 국수주의를 선포한 것이다. 그러나 비록 오래 가진 못했지만, 1917년 혁명 직후에 소비에트 정부가 우크라이나의 자결권을 인정한 것은 오랜 민족적 억압과 저항의 결과였다.

그리고 강대국인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은 명백히 이 자결권을 짓밟은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친서방 우파 정권을 비판할 수는 있지만, 우크라이나의 주권과 민중 스스로의 결정권은 누구도 무시할 수 없다. 다른 나라를 군사적으로 정복하고, 영토를 장악해서 정치적으로 예속하고,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것은 제국주의적 행태이며, 따라서 지금 푸틴의 러시아는 명백히 제국주의적 패권 국가이다.

푸틴은 서방과 우크라이나 정부로부터 공격과 괴롭힘을 당해 온 돈바스 지역의 러시아계 주민과 자치공화국들의 평화유지, 자유, 인권을 위해서 군사적 개입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충돌과 갈등을 만들어낸 것은 바로 러시아 자신이다. 더구나 자유와 인권을 위해서 전쟁과 침략이 필요하다는 것은 기가 막힌 궤변일 뿐이다.

그런데 이런 러시아의 궤변을 듣다보면, 어디서 많이 들어본 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미국과 서방 강대국들이 코소보에, 아프간에, 이라크에 군사적 개입과 침공을 하면서 내세웠던 명분과 논리를 냉소적으로 그대로 베낀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미국과 서방 강대국들의 내로남불과 지금 상황을 가져온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전에도 지적한 바(https://alook.so/posts/xltMon)가 있지만, 지금 상황은 소련 몰락 이후에 약속을 어기고 나토(NATO)를 동쪽으로 확대하며 러시아를 포위하고 우크라이나 등에서 친서방 극우세력들을 육성하며 갈등을 일으켜 온 미국 지배자들에게도 큰 책임이 있다.

이번에도 미국과 영국 등은 푸틴이 일시적으로 병력을 철수할 때마저도, 이 지역의 병력을 증강하며 전쟁이 임박했다며 계속 불안을 부추겼다. 또 어차피, 나토 확대가 어려운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나토를 확대하지 않겠다는 명시적 약속을 한사코 거부했다. 마치 전쟁이 일어나길 바라면서 화약고 옆에서 라이타를 켜는 것 같은 태도였다.

따라서 러시아의 침략과 전쟁을 분명히 반대하는 것이 미국과 나토 확대를 지지하는 것일 수는 없다. ‘내 친구의 적은 내 적이다''내 적의 적은 내 친구다'는 진영논리는 언제나 틀렸다. 양비론은 대체로 부적절할 때가 많지만 이 경우에는 평화를 위협하고 전쟁을 부추기는 러시아와 미국 모두에 반대하는 입장이 타당하다.

미국과 서방 강대국들은 우크라이나를 나토 확대와 러시아 포위의 전진기지로 만들려고 해 왔다. 반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교두보 삼아서 과거의 패권을 재구축하려고 해 왔다. 그러면서 우크라이나는 양쪽의 대리인들이 대결하고 충돌하는 전쟁터가 돼 왔다. 이미 10년 가까이 내전이 진행돼 왔고 그 과정에서 죽은 우크라이나 민중만 이미 14천명이다. 3백만명의 이주민도 발생해 왔다.

이제 시작된 러시아의 침략과 전쟁에서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죽을지 상상하기도 두렵다. 러시아는 즉각 침략과 전쟁을 중단하고 우크라이나에서 손을 떼야 한다. 미국과 서방 강대국들은 나토 확대를 중단하고 이 지역 나라들에 대한 파병과 병력 증강, 무기 배치들을 중단해야 한다. 우크라이나의 자결권이 인정돼야 하고, 우크라이나 안에서도 정치적 자유와 민주주의, 소수집단들(러시아계 주민 등)의 자치와 권리가 보장돼야 한다.

지금의 사태는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철수에 이어서 다시 한번 미국 제국주의의 약화와 쇠퇴를 보여주고 있다. 미국은 경제 재제 이외에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 제국주의의 약화와 쇠퇴가 낳은 공백 속에서 러시아와 중국이 손을 잡고 새로운 유라시아 패권블록을 만들 수 있다는 관측들이 나오고 있다. 물론, 이러한 과잉 팽창 시도가 오히려 러시아의 쇠락을 가져올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새로운 제국주의 국가들의 등장과 기존 제국주의 국가와의 갈등과 충돌은 세계를 더욱 위험하고 불안정한 곳으로 만들고 있다. 특히 일종의 신냉전상황이 되면서, 서로 상대 진영을 악마화하고 줄서기를 강요하는 모습도 나타나고 있다. 미국에서는 반전평화와 나토 확대 반대를 주장하면 푸틴의 하수인으로 몰리고 있다. 영국에서도 반전 연대체인 전쟁저지연합이 푸틴의 독재를 옹호한다는 비난에 시달리고 있다.

이 나라에서도 뿌리깊은 종북몰이는 이미 혐중몰이로 발전해 있고, 이제 혐러몰이로 발전할 기미가 보이고 있다. 국민의힘 등 친미우파 쪽에서는 그것 봐라. 종전선언이 아니라 전쟁을 대비해 힘을 키우는 게 중요하다. 미국의 군사동맹에 참가하고, 전술핵과 사드를 추가 배치하고, 선제타격도 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친서방 정권이 스스로 자신들의 땅을 강대국들의 대리 전쟁터로 만들어 온 그 길을 그대로 따라가자는 말과 다름이 없다. 이처럼 정반대의 잘못된 교훈을 배우는 것도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공포와 불안을 부추겨서 정치적 이익을 얻으려는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언제나 어디서나 전쟁을 막는 방법이 아니라 전쟁에서 이길 방법을 말하는정치인들은 존재한다.

지금 우크라이나 상황의 배경에는 장기집권을 노리는 푸틴의 야욕, 아프간 철군의 굴욕과 중간선거 패배 위기를 모면하려는 바이든의 의도, ‘파티게이트로 인한 사임 위기에서 벗어나려는 보리스 존슨의 책략 등이 모두 작용하는 것 같다. 유명한 넷플릭스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는 너무 극단적 상황 설정으로 정치적 냉소를 강화하는 문제가 있지만 현실의 이런 측면을 잘 포착한 시리즈였다.

시즌4의 막바지에서 정치적 위기에 직면한 언더우드 부부는 문제를 하나씩 해결할 수 없으면 더 큰 혼란을 만들어야 한다. 국민의 마음을 얻을 수 없으면 공포를 불러와야 한다면서 이슬람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다. 그리고 언더우드는 시청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테러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테러를 만들어내죠.”

이런 지배자들이 부추기는 공포와 불안, 서로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 속에서 끔찍한 비극이 벌어진다. 지난해 본 최고의 영화 중 하나였던 <쿠오바디스, 아이다>는 바로 그런 상황의 비극을 그린 것이었다. 1995년 보스니아 내전을 배경으로 한 그 영화에서 같은 마을에서 서로 흥겨운 파티를 벌이던 이웃들이 적이 돼 버린다. 서로 종교와 인종에 따라서 갈라지고, 상대방을 죽여 마땅한 비인간적 존재로 보도록 혐오하게 된다.

우크라이나에서도 서로 이웃이고 친구였던 사람들이, 종교와 민족에 따라 갈라지고, 친러시아냐 친서방이냐로 나뉘어서 서로 죽고 죽이는 내전이 벌어져 왔다. 이제 러시아의 침공과 전쟁은 그런 비극을 엄청난 수준으로 확대할 것이다. 그럼에도, 희망이 있다면 언제나 그런 혐오와 불신, 불신과 폭력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에서 이번 푸틴의 전쟁에 대한 지지 여론은 과거보다 높지 않다고 한다. 아래 사진처럼 어제 러시아의 모스크바 등 주요 도시에서는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체포된 사람만 1000여명이라고 한다. 푸틴의 독재적 공포통치가 강화돼 온 러시아에서 이것은 매우 놀라운 용기이고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모두 이 용기를 이어서 외치고 행동해야 한다. 전쟁을 반대한다. 평화를 원한다.

투스톤(윤석열, 이준석)의 혐오정치는 어디로

요즘 윤석열과 이준석을 조금만 주의깊게 관찰해 보면 그들이 트럼프의 성공 방정식을 의식적으로 모방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윤석열의 TV토론 자세, 어퍼컷 세리모니 등 최근 유세 방식을 봐도 노골적으로 그것을 흉내내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트럼프가 지지층을 결집하는 방식은 표적을 정해서 두려움, 불안을 자극하고 혐오를 불러일으켜서 지지층을 결집하고, 그러한 감정의 전염을 통해서 결속력과 유대감을 높이는 것이었다. 지금 유세를 다니면서 윤석열이 하는 연설도 다 그런 식이다.

‘문재인 정부는 반미친중의 친북좌파이고 사회주의를 추구했다’, ‘히틀러와 파시스트같은 수법을 쓴다’, ‘강성귀족노조가 법 위에 군림하며 민노총과 전교조만 먼저인 나라가 됐다’, ‘공산당 좌파 혁명이론에 빠져 있는 이 소수’, ‘북한 노동신문과 똑같은 이야기’...

그런데 사실 여기까지만 보면, 윤석열의 혐오정치는 기존 구우파의 혐오정치의 연장이지 새로운 것은 아니다. 많은 이들이 이 나라 우파의 혐오정치를 새로운 현상처럼 설명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종북혐오, 노조혐오, 마녀사냥은 이 나라 기득권 우파의 전통적인 단골 레파토리였다. 지난 정부 때 통합진보당 강제해산은 대표적 사례다.

다만 윤석열과 이준석의 차이점은 혐오정치를 재구성하며 기반을 확장하는 데 있다. 그 중에 하나가 혐중이다. 지난번 대선후보 TV토론 때 윤석열은 코로나를 우한바이러스라고 부르며 중국인 입국금지가 필요했다고 주장했다.(아쉽게도 당시 토론 현장에서 그 발언을 제지하거나 비판하는 상대 후보는 없었다.)

더불어서 중요한 축은 반페미니즘 여성혐오다. 선거 초기에 이수정, 신지예를 영입한 것이 보여주듯이, 이 과정에서는 시행착오가 있었다. 하지만 불협화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국민의힘 당사 앞에서 격렬한 반대시위를 하던 신남성연대는 두 달 만에 윤석열과 우리는 한 몸이라고 선언하게 된다.

윤석열이 이준석과 화해하고 이수정, 신지예를 축출하고 여성가족부 폐지를 선언하면서 벌어진 반전이었다. ‘지난 총선은 부정선거라는 것을 인정하라고 주장하며 국민의힘 당사 앞에서 장기 시위를 하던 황교안 지지자 등이 철저한 무시를 당한 것과 대조적인 일이었다.

윤석열이 여가부 폐지를 올린 17일은 이렇게 우파 혐오정치 재구성의 상징적 기점으로 남았다. 이제 지금의 방향에 이견이 있는 이수정, 신지예, 금태섭, 김경율, 진중권 등은 간간히 윤석열을 측면지원해주긴 하지만 결코 주도적 목소리가 아니게 됐다.

배인규라는 신우파 리더가 이끄는 신남성연대는 코로나 전에 주요 도심에서 페미니즘은 정신병이라고 외치는 청년남성들로 구성된 무시할 수 없는 규모의 집회와 거리행진을 조직해 왔다. 배인규는, 이런 문제에 관대한 유튜브조차 그의 채널을 영구정지시켰을 정도로 괴롭힘, 폭력, 혐오의 극단을 추구해 왔다.

회원수가 2만 명에 달하고 디스코드(집단채팅 프로그램) 동시 접속자 수만 6천 명이라는 신남성연대는 그때부터 사실상 윤석열 선거운동원과 댓글부대원처럼 변신했다. 에펨코리아, 디씨인사이드나 각종 포털과 SNS에서 욕설, 막말, 조롱, 혐오가 뒤섞인 정치적 내용들을 짤과 밈, 드립을 통해서 효과적으로 확산시키고 있는 것이 바로 이들이다.

이들은 현재 윤석열의 선거운동과 방향을 주도하고 있다는 선거대책위의 청년 보좌역이나 청년 간부들과도 긴밀히 연결돼 있다. 예컨대 인헌고 좌편향 교육의 내부고발자를 자처하며 신남성연대 시위의 단골연설자이던 최인호는 현재 국민의힘 양성평등특위 수석부위원장이다.

또 국민의힘 '살리는 선대위' 청년위원장 이명준은 대표적 반페미니즘 단체인 한국성평화연대' 대표이기도 했다. 이명준은 최근에도 "신남성연대는 성파시즘 세력의 문제점을 낱낱이 파헤쳐 수많은 젊은 친구들이 함께할 수 있는 원동력을 만들어낸 곳"이라고 주장했다. 윤석열 선거 공보물에서 여성혐오적인 표현과 문구들이 자꾸 발견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윤석열, 이준석, 하태경 등은 좀 더 정제된 언어이지만, 내용적으로는 같은 것을 주장하며 혐오정치를 강화하고 있다. 윤석열은 더 이상 구조적인 성차별은 없다”, “차별은 개인적 문제”, “차별금지법은 다수자 역차별이라고 했다. 하태경은 페미니즘 자체가 반헌법적 이념”, “여가부는 헌법을 짓밟는 무도한 이념적 폭력 기구라고 했다.

물론, 기득권 우파만이 아니라 중도개혁 세력인 민주당 쪽에서도 간혹 차별과 혐오에 대한 불철저한 인식과 잘못된 접근, 언행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예컨대 민주당 일부의 신천지에 대한 주장들은 낙인과 혐오의 활용인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일관되게 조직적으로 혐오정치를 추구하는 세력과 단순 동일시하는 것은 기계적 균형일뿐 공정한 평가도 효과적 대응도 아닐 것이다.

혐오정치는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절망에 빠지는 사회적 위기의 시기에 더 극심해진다. 그런 상황에서 일부 세력은 적개심과 혐오를 부추겨서 정치경제적 이익을 얻는다. 예컨대 탄핵 이후 몰락하던 우파가 다시 부활한 힘은 혐오정치의 재구성에서 나왔고, 가세연이 지난 2년간 거둔 슈퍼챗 수익만 18억 원이라고 한다.

그러나 혐오정치는 고통과 절망, 사회적 위기를 해결할 수 없고 더 심각한 피해만을 낳는다. 혐오정치가 유포하는 낙인과 편견의 표적이 된 사람들은 고통과 죽음으로 내몰린다. 미국에서도 트럼프 4년을 거치고, ‘우한바이러스라는 낙인까지 등장하면서, 사회적 소수자들의 고통과 죽음, 소수인종에 대한 증오범죄들이 급증했다.

특히 트럼프 현상은 단지 제도정치의 우경화와 재구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지자들이 스스로 행동에 나서도록 활성화시키며 일종의 사회운동으로 발전했다는 데 그 심각성이 있다. 그래서 트럼프 퇴임 이후에도 그것은 사라지지 않았다. 한국에서도 우파가 제도정치를 벗어나 아스팔트 우파로 발전하는 현상은 이미 이명박근혜 시대부터 발전해 왔다.

문제는, ‘투스톤’(이준석, 윤석열)이 추구하는 새로운 혐오정치는 그것의 의제와 세력을 재구성하면서 더 젊고 더 새로운 세력으로 그것을 확대하고 있다는 데 있다. ‘검찰공화국현상과는 또 별개로, 대선에서 윤석열이 승리하든 패배하든 이 새로운 혐오정치적 사회운동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 진보좌파는 계속 경계해야 한다.

멍청하다고 말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생태사회주의자 조나선 닐Jonathan Neale이 최근 국제적 이슈 중 하나인 하버드대 인류학 교수 성폭력 사건에 대한 장문의 글을 올렸다. 그 글을 보면 성폭력이 왜 사회적이고 구조적 문제이고, 또한 계급적 문제인지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 내게 가장 인상적인 것은 마지막 부분이었다. 닐은 말한다. ‘똑똑하다고 뻐기면서 다른 사람들을 멍청하다고 비웃지 말고, 견해가 다른 사람들에게 존중심을 갖고 다가가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힘을 모으는 지식인이 되라.’

지식인이나 엘리트들이 자신과 다른 견해의 대중을 멍청하다고 비웃는 것은 정말 문제다. 그런 태도는 특히 한국처럼 지독한 능력주의적 경쟁 사회에서 매우 큰 상처다. 내세울만한 학벌도 없고 전문직도 아닌 나도 항상 느끼는 것이다.

당장 이번 대선에서 4자토론에 나온 후보들 중에 3명이 서울대 출신이다. 혐오정치의 선봉에 선 이준석은 하버드 출신이라는 것만으로 먹고 들어간다.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조차 똑똑하다고 인정해 준다.

예컨대, 2019년 검언대란 때 서초동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을 광기어린 우중취급하는 많은 지식인과 엘리트들의 태도에서도 그것을 느꼈었다. 대표적으로 진중권 등은 그들을 돌머리”, “대깨문”, “조빠”, “조국기 부대라고 부르며 비웃었다.

윤석열의 최근 무법천지발언은 그것에 대한 확인사살이다. 지난 3년간 검사가 수사하고, 기자가 취재하고, 판사가 거듭 판결하고, 지금은 주요 정당과 정치인과 심지어 민주당과 진보적 정치인들마저도 모두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을 보면 그게 맞았던 것처럼 보인다.

검사, 기자, 판사 등 공부 잘하고, 학교 성적도 뛰어나고, 명문 학교를 나오고, 어려운 시험도 통과한, 이 사회에서 가장 똑똑하다고 인정받는 엘리트들이 틀렸고, 분위기 휩쓸리고 거짓선동에 속아서 서초동으로 모인 멍청한대중이 옳았을 리는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정말 과연 그런가? 그 수많은 사람들이 느낀 우려와 분노, 그들의 투쟁과 요구는 정말 어리석고 무의미한 것이었는가? 검찰개혁, 언론개혁, 사법개혁의 주장과 공약이 사라지고 잘 보이지 않게 된 대선을 지켜보면서 묻게 된다. 아래에 조나선 닐의 글의 해당 부분을 거칠게 정리해서 덧붙인다.

좌파와 환경 운동과 페미니스트 활동가들 속에는 공통적 유형의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은 두 가지를 원한다. 첫째, 옳은 생각을 하는 사람으로 보이기를 간절히 원한다. 둘째, 그들은 자신이 똑똑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보다 똑똑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그것은 흔히 소셜미디어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여기에 몇 가지 착오가 있다. 옳은 생각을 갖는 것은 잘못된 생각을 가진 대다수의 사람들과 자신을 구별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우리는 시스템 전체를 바꾸기 위해, 거대한 기득권 세력과 맞서야 한다. 대다수의 지지 없이는 그렇게 할 수 없다. 그 말은 현재 당신이 동의하지 않는 생각을 가진 많은 사람들의 지지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파업과 같은 것이다. 파업에서 이기려면 모든 사람이 함께해야 한다. 급진적 행동이 필요하지만, 그것을 위해서는 단결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다른 노동자들에게 존중하는 마음으로 다가가야 한다. 당신은 어떤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것이 당신의 우월성의 표시라고 결코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파업을 해본 적이 있다면 어떤 문제에서 끔찍한 견해를 가진 사람이 파업에 같이 하고, 반면에 어떤 문제에서 진보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파업에 불참하는 일도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항상, 모든 파업 중에 그런 일이 벌어진다.
스스로 조심해야 할 것은 똑똑하다고 뻐기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 계급적 편견의 코드명은 '멍청하다'이다. 그것은 듣기 싫고 상처를 주는 단어이다. 나는 잘사는 아이들과 함께 교외 학교에 다니는 가난한 어린 소녀를 알고 있다. 그녀는 글을 읽을 수 없었다.
교사는 그녀에게 일종의 장애가 있다고 말했다. 진단은 중요하지 않다. 멋진 소녀들은 그녀를 괴롭혔고, 그녀가 멍청하다고 조롱했다. 그녀는 집에 와서 어머니에게 '나는 내 머리가 싫어요'라고 말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멍청하다는 말을 듣고 과반은 그것을 믿는다. 그들은 멍청하다는 낙인이 찍혀 있기 때문에 인생에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필요한 것을 얻지 못하고, 그들의 아이들이 공평한 몫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그것을 믿은 것은,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큰 상처였다.
그들은 멍청한 것이 아니다. 그러한 계급으로 가는 경로는 여러가지다. 그러나 그들은 멍청하다는 낙인이 찍혔고 사회에서 그것에 대한 처벌을 받는다. 사람들을 '멍청하다'고 부르는 것은 삶, 희망, 가족, 몸을 망가뜨린다. ‘멍청하다’는 계급 혐오의 뜻이 숨겨진 욕설이다. 사람들의 정치에 대해 단정하지 말고, 경멸하지 말라. 만약 당신이 머리와 좋은 교육을 받았다면, 세상을 바꾸기 위해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려는 지식인이 되라.

https://annebonnypirate.org/2022/02/13/harvard-sexual-politics-class-and-resistance/

 

이단아였던 닐 포크너를 추모하며

한때 좌파적 정통노선에 대한 강조와 집착에 매달리던 시기를 거치다가 그것에 크게 데이고 나서는 정통보다는 이단에 더 끌리게 된다. 예컨대 코로나 초기에도 그랬지만 요즘 신천지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을 보면서도, 그들에게 낙인을 찍는 주류개신교의 일부 지도자들보다 신천지가 과연 더 문제인가 라는 의문이 들곤 한다.

아무튼, 고전적 정통을 강조하던 흐름에서 뒤늦게 이탈하고 나서보니, 먼저 거기서 이탈한 이들을 찾아보게 됐다. 그런 이탈자들 중에서도 특히 눈여겨보던 사람 중 하나가 닐 포크너Neil Faulkner였다. 영국의 저명한 고고학자이자 역사학자이며 사회주의자로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분이었는데, 얼마 전부터 글도 올리지 않고 소식이 뜸해서 궁금했다.

그러다가 그가 악성림프종으로 반년 넘게 투병하다가 열흘 전에 사망했다는 슬픈 사실을 알게 됐다. 결코 많다고 볼 수 없는 64세의 나이다. 닐 포크너를 특히 주목하게 된 계기는 6년 전 브렉시트 논쟁 때였다. 그때 대다수의 급진좌파들이 브렉시트를 지지하고 영국의 유럽연합 이탈을 환영하는 입장이었다.

유럽연합은 긴축정책을 추진한 신자유주의적인 기구이고, 그것에 대한 노동계급의 분노가 분출한 브렉시트 투표 결과는 좌파의 승리라는 게 그들의 논리였다. 인종주의와 반이민을 선동한 극우익들이 브렉시트를 주도한 것이 명백한 상황에서 개인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논리와 입장이었다.

그 상황에서 예외적으로 다른 목소리를 낸 대표적 영국 좌파가 바로 닐 포크너였다. 그는 당시 유럽연합에서의 좌파적 탈퇴’(Left-EXIT)를 주장하던 렉시트’(LEXIT) 좌파들에게 직격탄을 날리며 날카로운 비판을 피하지 않았다.

30년대 초 독일에서 나치가 주도한 사회민주당 주정부에 대한 불신임 투표에 동참하면서 그것을 적색 국민투표라고 포장한 독일 공산당 지도부처럼 번지수가 틀렸다는 것이었다. 오늘날 문재인 정부에 대한 윤석열의 공격과 심판론에 사실상 동조하는 좌파들과도 비슷한 면이 있다.

브렉시트를 전후해서 포크너가 계속 강조해 온 것은 전세계적으로 등장하는 극우정치의 위험이었다. 그는 트럼프의 등장과 브렉시트로 대표되는 현상들을 신자유주의의 변화와 국가 억압의 강화와 결합시켜서 서서히 다가오는(조여오는) 파시즘이라고 설명했다. 우파의 혐오정치가 재구성되는 한국의 우리에게도 유용한 지적이다. 그의 요점은 이런 것이었다.

‘파시즘은 과정이다. 이 조직이나 저 사람이 기술적으로 파시스트인지 여부에 대한 논쟁은 무의미하다. 지난 5년 동안 트럼프 등은 자신의 지지자들을 급격히 오른쪽으로 이동시켰다. 혐오를 조장하고 증오와 폭력을 선동했다. 신자유주의가 국가의 역할을 재구성했고, 조여오는 파시즘과 국가 억압기구의 강화는 결합돼 있다. 인종주의, 여성혐오, 동성애혐오가 뒤섞여 디스토피아로 투사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좌파적 정통이론에 얽매이지 않았고 구체적 현실의 변화를 설명하고자 했다. 그는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를 생산의 남쪽으로 이동/ 주요 착취지점의 소비로 이동/ 금융 자본의 지배/ 영구적 부채 경제라는 네 가지 주요한 발전으로 특징지었다.

따라서 유통, 교환, 소비 과정에서의 기생적 착취디지털화된 축적을 분석하는 새로운 이론적 혁신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그는 이것을 자연과 사회의 신진대사 균열을 넘어선 신진대사의 이중적 파탄으로 연결시켰다.

기후 위기의 시대에 자본주의 체제의 야만성은 전쟁보다는 수천만이나 수억이 생태계 파괴의 직간접적 영향 속에 희생되는 생태적 절멸의 형태를 취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런 이론적 혁신을 한참 시작해 나가던 그의 사망 소식은 더욱 큰 아쉬움을 남긴다.

무엇보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레닌주의정당 모델에 대한 그의 비판이었다. 그는 레닌이 창시한 새로운 유형의 민주집중제 정당 모델에 따라서 간부의 본원적 축적을 하면서 21세기적 볼셰비키의 맹아를 건설하는 혁명적 전위들이라는 관점을 퇴행이라고 못박았다.

이런 민주집중제적 종파에서 혁명정당이 출현한 역사적 사례는 하나도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아래로부터의' 혁명, 즉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은 민주주의의 폭발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철저한 아래로부터의 민주적 사회주의 관점에서 그것을 비판한 것이다.

어떤 성역도 금기도 없이 좌파의 정통을 벗어나 이단적주장을 하던 이런 태도 때문인지, 유럽의 급진좌파들 속에서 그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목소리는 별로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며칠 후에야 그의 사망 소식을 접하게 됐다. 이 나라에도 그의 책 중에 하나가 <좌파 세계사>라는 제목으로 번역돼 있다. 닐 포크너를 추모하며 다시 찬찬히 읽어보고 싶다.

(기사 등록 202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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