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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박노자] 소련 망국의 30주년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1. 12. 26.

- 구소련 좌파는 폐허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인가?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bit.ly/3jpYwgJ)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제가 이 글을 쓰는 오늘날은 소련 망국의 30주년입니다. 딱 30년 전에, 1991년 12월 25일 밤에 망치와 낫이 그려전 홍기는 크렘린궁에서 내려지고 제국 시대의 해군기인 러시아 삼색기가 게양됐습니다. 혁명 이후 74년 영욕의 역사는 이렇게 그 막이 내려진 것이었습니다. 저는 솔직히 그 때 소련의 해체가 "완료"됐다는 데에 대해 거의 신경을 쓸 겨를도 없었습니다. 이미 소련이라는 국가는 식물인간처럼 됐으며 거의 그 기능이 마비된 거나 마찬가지이었고, 인민들이 식량이나 구하느라 바쁜 날들을 보냈던 것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제가 사는 사회가 "사회주의"와 거리가 멀었다고, 즉 맑스의 "사회주의" 이상에 한참 미달이었다고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맑스와 레닌이 생각했던 "사회주의"는 직접 생산 담당자들의 자유 연합이 생산과 소비를 통제하는 무국가, 무권력 형태의 사회이었는데, 그건 소련의 강경 관료 권위주의와는 전혀 다른 사회적 모델이었죠.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도 종종 들었습니다.

 

혁명 이후 외부 강적에 맞서 국방 위주의 초고속 공업화를 진행해야 했던 가난하고 후진적인 "한 국가" 안에서는, 인류의 숙몽인 생산자들의 자유 연합의 사회를 건설할 수 있었을 리가 있었겠습니까? 사실 소련은 뭘 "건설"했다기보다는 그냥 국가적 "생존"의 보장을 받느라 정신 없이 살아온 역사이었습니다. 농민들의 잉여를 빼앗아 수입된 기술로 10년 내로 국방 공업화를 이루고, 세계사 최악의 전쟁을 수행하고, 그 생산력이 소련보다 훨씬 좋았던 미국에 맞서서 핵과 우주기술로 국방 경쟁하고, 동유럽 등 영향권을 구축, 사수하고...

 

사실 이런 일들은 그 본질상 맑스의 "사회주의"와 아무 관계도 없는데, 혁명을 거친 국가의 "생존" 차원의 문제이었습니다. 그러나 또 혁명을 거친 사회인만큼, 그 잔혹한 추격형 초고속 국방 위주의 근대화 속에서는 세계 최초의 완결형 복지 국가를 만든 것도 사실입니다. 또, 혁명을 거친 국가인 만큼 옛 지배층을 거의 도태시키고 기층 민중 출신들로 새 지배층을 구축하고, 수천만 명의 노동자, 농민들에게 인테리나 간부로 신분 상승의 길도 역시 "초고속"으로 열어준 게 사실이었습니다. 사회주의가 아니었다 해도, 궁극적으로 러시아와 세계의 민중들에게는 대단히 귀중한 하나의 "사회적 실험"이었죠.

 

1991년 12월 25일에는 그 영욕의 역사가 마감됐습니다. 일각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그 때 소련의 망국을 "환호"한다고, 그 기관지의 기사 제목을 뽑기도 했습니다. 소련이 망한 뒤로는 "계급 투쟁"이 가속화되어 그 폐허에서 새로운 좌파적 실험들이 실시될 것이라는 기대에서 그런 제목을 뽑은 셈이었는데, 이런 빗나간 예측은 소련 사회의 성격과 성질에 대한 실사구시(實事求是)적 연구의 부족에서 비룻되었습니다.

 

계급 투쟁을 벌이자면 대타적인 집단 의식을 지닌 "계급"부터 필요한 것인데, 망할 때의 소련에서는 그 수준까지 성숙된 계급은 딱 하나, 바로 간부, 즉 관료들의 계급이었습니다. 이미 계급으로 성숙된 관료층은 망국의 과정을 주도하기도 했죠. 자본가의 역할을 겸비하려는 본인들의 계급적 이해관계에 따라 말입니다. 이들과 정반대로, 소련 말기의 노동자들은 - 예컨대 폴란드 같은 동류의 동구 사회들과 또 다르게 - 아직도 충분히 대타적인 계급으로 성장되지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농민 출신의 1세대 노동자인 그들은, 또 그 자녀들이 (무료인) 고등 교육을 받아 탈노동자화되어 지식인이나 간부가 될 것을 상당수가 희망했으며, 그들에게 평생 고용과 시골 별장 등을 보장했던 소련 국가와는 계급적 모순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시혜/수혜적인, clientelist관계에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망국 이후의 노동자들의 계급 투쟁은... 망국 이전 페레스트로이카 시기보다 오히려 그 활기를 잃은 셈이었습니다.

 

탈공업화 속에서 노동자층이 분열, 원자화되고, 그 상당부분은 자영업자 등으로 전업됐습니다. 공장에 남은 사람들은.... 대부분의 공장들이 어떤 방식이로든 방산 복합체와 연결돼 있는 만큼 국가 무기 구입 예산을 늘리고 있는 현 정권이나, 그것보다 더 강하게 서방과의 대립을 하여 보다 많은 무기를 사들일 것으로 보이는 연방 공산당에 투표하는 추세입니다. 계급 투쟁이 아닌 국가적 clientelism 정치가 우세를 점하게 된 거죠.

 

그러면 3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우리들의 현주소는 어디쯤인가요? 구소련의 구성 공화국 중에서는 발틱3국은 유럽 연합에 흡수되어 거기에서 주로 저임금 노동력 공급자로서의, 그리고 산업 상품과 금융 상품의 포획 시장 (captive market)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몰도바, 우크라이나, 그루지아에서는 대자본가로 성장한 소련 말기의 일부 간부들이나 지하 사업가 등이 비교적 취약한 국가 기구들을 성공적으로 장악하여, 이상적으로 발틱3국과 같은 유럽 연합에의 흡수를 지향하지만, 그 전망이 그리 순조로운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유럽 연합으로서는 그들에게 나누어줄 자원 (각종 기원금 등)도 부족하지만, 특히 우크라이나의 경우에는 서방과 러시아 사이의 "전장"이 되어서 그 흡수에 따르는 부대 비용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와 백러시아, 아제르바이잔, 그리고 중앙 아시아 국가들은 초강경 관료 권위주의 정권으로 성장했습니다. 러시아의 경우, 와해된 공산당을 보안 기관 출신들이 대체하여 권부 상부층을 이루고 재계까지 장악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당-국가 소련의 폐허에서 성장한 신생 러시아는 세계사 최초의 "보안 기관원들의 국가"가 된 겁니다. 그들이 지향하는 사회-경제 모델은 중국이나 베트남과 상당히 흡사한 국가 관료 자본주의입니다. 외부적으로는 러시아는 같은 종류의 권위주의적인 국가 관료 자본주의 국가인 백러시아나 중앙아시아 국가 등에 대해 그 패권을 확립했으며, 지금 우크라이나를 놓고 서방과 패권 경쟁을 벌이는 과정 속에서 내부의 민족주의적 "국민 결속"을 다지는 셈입니다.

 

말기의 소련보다는 금일 러시아의 권위주의는 비제도적인 탄압의 방식 (정적 제거, 암살 등)에 더 많이 의존하지만, 가면 갈수록 국가가 시민사회를 복속, 복종시키는 구조가 더 제도화돼 나가기도 합니다. 말기의 소련에 비해 오늘날 러시아는 훨씬 더 억압적인 사회임에 틀림 없습니다. ​이 억압을 뚫어 좌파가 소련의 폐허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요? 중장기적으로 "그렇다"고 봐야 합니다. 불평등, 플랫폼 노동의 확산, 복지 삭감 등이 결국 사회적 불만을 축적시킬 것이며, 그 불만은 좌파의 대중화, 조직화로 이어지리라고 봐야죠.

 

그러나 단기적으로는, 좌파적 불만의 에너지가 국가와의 "공생"을 선택한 연방 공산당으로 흡입되는 만큼 좌파의 대부분은 국가에 위협되지 않는, 상당히 국가주의적 스탈린주의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으리라고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 범위를 완전히 벗어난 새로운 좌파가 형성이 되자면 아마도 10-20년이나 소요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이에 국가의 통치술이 더 고도화될 가능성이 크고요... 좌우간, 소련의 망국이 궁극적으로 새로운 계급 투쟁으로 이어진다는 이야기는 장기적으로 맞을 수도 있겠지만, 그 시간적 프레임이 대단히 길다는 것부터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기사 등록 2021.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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