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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

마르크스와 지구: 존 벨라미 포스터 인터뷰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0. 9. 26.

 

자본주의의 자연 파괴, 마르크스 시대부터 현재까지 생태학적 마르크스주의, 계급 문제로서 환경 위기에 대해 존 벨라미 포스터(John Bellamy Foster)를 인터뷰한 글이다. 비록 이 책이 한국에 출판돼있는 것은 아니지만, 기후위기에 대한 급진적 대안에 대한 고민이 많아지는 상황에서 이 글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포스터는 오리건 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서 미국의 사회주의 잡지 <먼슬리 리뷰>의 편집자이다. 그는 여러 권의 정치경제학, 제국주의 이론과 관련한 책의 저자이며 무엇보다 마르크스주의 생태학에 관한 이론적 기여와 저술로 유명하다. 한국에도 <마르크스의 생태학>, <환경주의자가 알아야 할 자본주의의 모든 것>, <생태계의 파괴자 자본주의>, <환경과 경제의 작은 역사>, <생태혁명> 등이 번역돼 있다.(번역: 두견)

 

출처: 

https://climateandcapitalism.com/2016/08/22/marx-and-the-earth-why-we-wrote-an-anti-critique/

 

 

* 당신과 동료 폴 버켓(Paul Burkett)은 책 <마르크스와 지구: 반비판>을 발표했다. 부제는 당신의 신간을 "반비판"으로 분류하고 있다. 당신은 누구에게 답하는 것이고, 가장 중요한 것은 왜 그들에게 답하는 것인가?

 

여기에는 약간의 역사가 관련돼 있다. 1980년대 이후, 처음에는 미국/캐나다 및 유럽에서, 그리고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생태사회주의 운동으로 알려져 있는 것이 등장했다. 1단계의 생태사회주의는 마르크스주의에 녹색 사상을, 또는 때로는 녹색 이론에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접목시키며 복합적인 분석을 만들었다. 테드 벤튼(Ted Benton), 앙드레 고르즈(André Gorz), 제임스 오코너(James O’Connor)같은 선구적인 사상가들은 생태에 무관심한, 또는 심지어 반생태학적 기반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상의 탓으로 돌렸다.

 

일반적으로 1단계 생태사회주의는 비록 중요한 진보를 나타내지만 녹색 이론의 헤게모니 아래 발전했다. 전부는 아니지만 1단계 생태사회주의자들은 생태사회주의가 고전적 사회주의나 마르크스주의를 대체했다고 주장하는데 있어서 매우 완강했다. 그러한 경우에 생태사회주의는 따라서 고전적 사회주의에 대한 일종의 부정으로 나타났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2단계 생태사회주의는 대개 폴 버켓의 <마르크스와 자연>(1999)과 나의 <마르크스의 생태학>(2000)으로 시작되었다고 보여지는데 곧 브렛 클라크, 한나 홀레만, 스테파노 롱고, 사이토 고헤이, 리처드 요크(Brett Clark, Hannah Holleman, Stefano Longo, Kohei Saito, Richard York)같은 인물들을 포함한 수많은 다른 분석가들이 합류했다.

 

엘마르 알트바터(Elmar Altvater)는 중요한 선도자였다. 여기서 사상가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의 깊은 구조에서 생태학적 분석의 구실을 검토하기 위해 고전적 역사유물론의 근간으로 돌아왔다. 지난 10년 반 이상에 걸쳐 일어난 것은 1단계 생태사회주의자와 2단계 생태사회주의자들 사이의 마르크스 생태학의 지위에 대한 오랜 논쟁이었는데, 1단계 생태사회주의자들은 거의 모든 지점에서 점차 지면으로 내려오도록 요구받을 수밖에 없었다. <마르크스와 지구>는 많은 면에서 이 논쟁의 절정이다.

 

그것은 특히 생태 경제학 분야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겨냥한 수많은 반격과 집요한 오해에 대한 대응이다. 조안 마르티네즈-알리에(Joan Martinez-Alier)와 제임스 오코너와 같은 일부 생태 경제학자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열역학을 분석에 포함시키는 데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비슷하게, 엥겔스가 열역학 제2법칙을 거부했다는 것이 고발되었다.

 

고전적 역사 유물론을 향한 다른 비판도 다루는데,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자연의 고유한 가치에 대한 어떤 개념도 배제했다는 조엘 코벨(Joel Kovel)의 주장,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질적으로 다른 다양한 형태의 에너지를 무시했다는 다니엘 타누로(Daniel Tanuro)의 주장, 마르크스가 자연과 사회 사이의 유기적 관계를 부정했다는 존 클라크(John Clark)의 주장 등이 그것이다.

 

* 당신이 그것을 사용한다는 의미에서 정확히 어떤 것이 "반비판"을 구성하는가?

 

마르크스주의 이론에서 반비판의 개념은 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가장 직접적으로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자본의 축적: 반비판>과 관련된다. 여기서 그녀는 마르크스주의 비평으로 답했다. 일찍이 엥겔스는 더 유명한 <반듀링Anti-Dühring>에서 또한 반비판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역사유물론에서 반비판은 자신의 관점에 대한 비판에 개입하면서 작업하는 것이다.

 

그리고 둘 다의 관점의 내적 핵심과 역사적 근거를 탐구하면서, 이에 대응하는 반비판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수단으로서 성취해야 할 목표는 이론적 이해에서 중요한 변증법적 진보와 더불어 스스로의 명확성과 어느 정도의 자기 비판이다.

 

이와 같이 마르크스주의는 그 근본적 관점과 새로운 역사적 도전이라는 측면에서 스스로를 새롭게 하면서 그 관점을 지속적으로 심화시키고 혁명적으로 만들어 왔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에, 우리는 주로 우리 자신의 사상에 대한 공격에 대응하지 않고 그보다는 1단계 생태사회주의자들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생태학적 분석을 향하던 비판에 대응하고 있었다.

 

* 당신은 왜 마르크스, 엥겔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특히 생태사회주의적/생태학적 주장에 관한 비판에 반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이렇게 묻는 것과 같다. 진화와 관련하여 다윈에 대한 비판에 맞서는 것이 왜 필요한가? 대답은 명확한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과학의 문제다. 19세기 중반 이후 진화론이 아무리 많이 발전해 왔어도 우리는 새로운 통찰력을 창출하는 다윈과 그의 연구로 계속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은 과학이 발전하는 방법 중 하나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와 엥겔스, 나아가 마르크스주의를 옹호하는 문제만은 아니다. 더욱이 비판에 대응하면서, 그 분석이 충분히 깊어지면 핵심 관점에 관한 새로운 것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아서, 우리 자신의 "진보적 연구 프로그램"[과학의 발전을 추동하는 새로운 이론적 패러다임]을 전진시킬 수 있다.

 

* 이 책의 5개의 주요 장 중의 3장에서 당신들은, "역사유물론의 두 창시자"에 대한 비판을, 특히 19세기 우크라이나 사회주의자인 세르게이 포돌린스키(Sergei Podolinsky)의 작업과 그들의 연구, 열역학과의 관계에 관해서 다루는가? 간단히 말해서, 그들에게 제기된 내용은 무엇이며, 왜 당신은 그것들을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포돌린스키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추종자였던 우크라이나 마르크스주의자였다. 그는 "인간의 노동과 물리력의 통일"에 대한 연구 때문에 생태경제학의 창시자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포돌린스키는 1880년에 그의 원고 초고를 마르크스에게 보냈고 마르크스는 많은 메모를 해서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

 

 

그 후 포돌린스키는 그 직후 프랑스어로 출판한 또 다른 확대된 초안을 제작했고, 이어서 이탈리아어판, 1883년에는 독일어로 만들어 마르크스가 죽은 직후에 출판되었다. 러시아판도 있었다. 우리는 포돌린스키의 원고에 대한 마르크스의 견해를 갖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가 포돌린스키에게 보낸 편지들 중 어느 것도 남아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엥겔스는 1882년 마르크스의 요청에 따라 포돌린스키의 작업에 대해 마르크스에게 두 통의 편지를 썼다.

 

엥겔스는 포돌린스키의 중요한 성취를 지적하면서도 포돌린스키의 작업이 농업에서의 에너지 사용에 대한 조잡한 계산을 하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포돌린스키가 인간의 신진대사(metabolism)뿐 아니라 비료와 화석연료(주로 석탄)를 스스로의 계산에 포함시키지 못한 점을 강조했다.

 

엥겔스는 포돌린스키의 분석의 일부 극단적 측면에 분명히 불안해 했는데, 여기서 포돌린스키는 인간을 "자신의 불구덩이를 다시 작동"할 수 있는 "완벽한 열역학 기계"로 보았다. 포돌린스키는 지구상에 태양열이 축적되고 지구온도가 상승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인간 진보의 신호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르티네즈-알리에, 제임스 오코너 등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포돌린스키에게 눈감아주면서 그것으로 인해 생태적 세계관과 더불어 생태경제학을 배척했다고 주장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것에 관한 우리 책의 장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정력적인 논의의 전모를 밝혀내면서 이것이 사실이 아님을 보여 준다.

 

* 당신들은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뿌리에 복합적인 유물론적 생태학이 있다고 적는다. 자본주의에서 자연 파괴에 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기본적이고 가장 중요한 통찰은 무엇인가?

 

이것은 답하기 어렵다. 주요한 발견은 마르크스의 신진대사 균열 이론, 그의 생태학적 가치 분석, 생태 제국주의에 대한 분석, 그리고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발전시킨 생태학적 변증법과 관련이 있다. 실천의 견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속가능성에 대한 마르크스의 매우 급진적인 정의인데, 마르크스는 아무도 지구를 소유할 수 없으며, 오히려 인간들은 가정을 이끄는 선한 가장처럼 미래 세대를 위해 지속가능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인류와 자연 사이의 신진대사와 관련된 생산자들에 의한 합리적 규제의 관점에서, 인간 잠재력의 완전한 발전과 함께 <자본> 3권에 정의되었다. 마르크스는 당대의 자연과학에서 신진대사의 개념을 채택하여 오늘날 체제의 생태학을 예견하는 생태학적 체제 분석을 개발하였다.

 

마르크스의 신진대사 논증은 자연과정 전체와 생태적 견지에서 살펴볼 때, 노동과 생산과정 사이의 변증법적 조정의 형태를 취했다. 자본주의의 소외된 "사회적 신진대사"는 자본주의 아래 생산을 통한 인간의 자연과의 관계에서 "회복할 수 없는 균열"로 나타났다.

 

마르크스의 생태적 가치형태 이론은 자본주의 하에서의 가치 생산이 재화의 자연-물질적/사용가치적 요소를 훼손하여 노동뿐만 아니라 자연과도 모순을 일으킨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의 전반적인 생태적 가치 분석은 이것에 내재된, 자연을 '자본의 공짜 선물'로 취급하는 자본주의에 착근돼 있는 모순을 드러낸다.

 

* 당신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엄청난 작업의 렌즈를 통해 생태학적 파괴를 해석하려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세대를 언급했다. 마르크스주의와 생태학 사이의 역사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생태학에 대한 사회주의의 관계의 역사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 주된 이유는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으로서의 생태학이 사회과학이나 심지어 문화이론이기 보다는 자연과학의 산물인 면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960년대 서구에서 부활했을 때 마르크스주의는 자연과학과 자연 그 자체를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배제했다는 점에서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 사상과 구별되었다.

 

우리가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기간만 놓고 보면서 생태사회주의자나 생태학적 마르크스주의자로 불릴 수 있는 사람들에게 집중하면 적어도 영어권에서는 상당히 일관된 그림을 얻을 수 있다. 무엇보다 윌리엄 캅, 배리 커머너, 버지니아 브로딘, 폴 스위지, 찰스 H 앤더슨, 앨런 슈나이버그(K. William Kapp, Barry Commoner, Virginia Brodine, Paul Sweezy, Charles H. Anderson, Alan Schnaiberg) 등 개인들의 엄청난 기여가 있었던 '사전 구상 단계'가 있었다. 이 초기 단계에서는 일반적으로 마르크스주의/사회주의 및 생태학이 자연적으로 어울린다고 가정하였다.

 

이어서 1단계 생태사회주의와 2단계 생태사회주의가 뒤를 이었다. 19세기 후반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를 돌아보면 마르크스주의와 생태학의 역사는 물론 더 복잡해진다. 여기서 우리는 특히 영국에서 마르크스와 다윈 모두에게 깊은 영향을 받은 사회주의적 생태학 이론가 몇 세대를 발견한다. 사회주의가 생태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시기는 바로 이 시기다. 이는 근대 생태주의 운동이 일어나기 전이었고 따라서 당시의 결정적인 지적 발전은 주로 근본적인 생태학적 관계의 발견 그 자체들과 관련되었다.

 

* 그리고 소련에서는 어떠했는가?

 

구소련은 1920년대에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생태과학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대체로 스탈린 휘하의 숙청에서 완전히는 아니지만 상당히 파괴되었다. 그것은 초기에는 자연과학에 기초하여 소련이 그 환경과 파괴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막지 못한 스탈린 시대 이후 수십 년 동안에 부분적으로 부활하였다.

 

가속화되는 기후 변화를 가장 먼저 지적한 것은 소비에트 과학자들임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구소련 내 마르크스주의 생태학에는 지금에야 인정받고 있는 중요한 발전이 있었다. 논리적으로 우리는 비판적인 지적 흐름의 가치와 진정한 과학적 성취의 가치를 인식하기 위해 소련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던 모든 것을 지지하거나 그 실패를 과소평가할 필요가 없다.

 

* 당신은 왜 많은 생태주의 학자들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러한 통찰을 무시하고 얕잡아 보거나 그로부터 스스로 거리를 두려고 그렇게 큰 노력을 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런 분열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이 우리를 놀라게 해서는 안 된다. 생태사회주의는 주로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좌파의 쇠퇴기에 나타났다. 마르크스주의는 소련의 몰락으로 어떤 눈으로 볼때 완전히 신임을 잃었다. 지적으로 우리는 이 시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이 부상하는 것을 보았다. 동시에 냉전 이데올로기는 지속되었고, 지금은 일종의 탈냉전 버전을 취하고 있지만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비판하는 경향은 거의 기울어지지 않았다. 이것들 중 일부는 그 자신의 남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생태학으로 걸러져 왔다.

 

더구나 마르크스주의는 혁명적 철학으로, 노동계급이 스스로 자기 해방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나 기대 또는 희망에 얽혀져 있다. 일부 좌파적 학자들은 이것에 거부감을 보인다. 또 다른 사람들은 노동계급이 본래부터 반환경적이라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사실은 비급진적이고 자본주의에 머물려는 환경론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 사상가뿐 아니라 생태주의 활동가들의 전통적인 약점 중 하나는 생태계 파괴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고 하면서 생태문제를 마치 인류나 종의 문제로 취급하는 것이다. 이런 이데올로기적 오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렇다, 자유주의적 환경보호론 안에는 이 "우리 모두 여기 함께 있다"라는 개념의 다양한 종류가 있다. 하나는 모든 생태학적 문제가 너무 많은 인구가 있기 때문이라는 맬서스주의적 견해다. 또 다른 주장은 앨 고어(Al Gore)가 제기한 주장인데, 우리 모두는 우주선 지구에 같이 살고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같은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이안 앵거스(Ian Angus)는 그의 신간 <인류세를 마주하며>의 주목할만한 장(화석 자본주의와 지구 시스템의 위기)에서 당신의 질문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최상의 전반적인 대답을 했다. 이 장의 제목은 "우리 모두가 여기 함께 있는 것은 아니다"인데 인종, 계급, 국제적 불평등을 다루고 있으며, 인류세의 위기 심화와 관련된 다른 배제들도 다루고 있다.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환경 문제와 증가하는 재앙은 경제적, 환경적 불의와 자본 축적을 사람과 지구보다 우선시하는 사회와 모든 관계가 있다는 게 진실이다.

 

* 얼핏 보면 당신들 책의 글들은 과학계를 향하고 있는 것 같다. 정치 활동가들과 생태 문제 해결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그것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마르크스와 지구>는 이론에 관하여 더 기울어진 청중들을 위해 쓰여진 책이다. 역사적으로 마르크스주의는 이론/과학의 발전을 항상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였는데, 그 없이는 어떤 혁명적 실천(praxis)도 불가능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비판을 정의하기 위한 투쟁에서 마르크스주의 생태학과 생태사회주의로 구현된 이론과 과학을 가능한 한 명확하게 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우리의 실천, 생각의 명확성, 우리의 진보는 그것에 달려있다.

 

우리 작업의 진정한 중요성은 오로지 실천에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우리의 반비판은 마르크스의 신진대사 균열을 신진대사 회복과 지속가능한 사회의 창출에 대한 그의 주장과 연관시키는 매우 구체적인 토대 위에서 끝난다. 우리 시대의 생태학적 투쟁을 주로 규정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신진대사 복원은 사회주의를 향한 더 큰 운동의 일부로서 자본의 논리를 거부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

 

(기사 등록 202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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