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1970~80년대 같으면 '미국 패권의 종말'의 가능성은 주로 지식인들의 '이론적인' 논쟁거리에 불과했습니다. 폴 케네디의 1987년 명작 <강대국들의 흥망사>에서는 미국이 쇠약해지면 다음의 세계적 패권국 후보로 다름이 아닌 일본을 상상해보기도 했는데, 일본이 세계에서는 물론 동아시아 지역에서도 중국에 밀려 '열강'이 아닌 '중견국'이 된 금일에 와서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예측'의 내재적 한계를 다시 실감해봅니다. 1990년대에 접어들어 미국 주도의 일극 체제가 잡혀 '미국 패권 종식 가능성' 이야기도 잠깐 조용해졌는데, 요즘 같아서는 이 이야기는 지식인의 논쟁에서 현실 정치인들의 대화거리로 돌변했습니다.
아직 그렇게까지 간다고 장담하기가 불가능하지만, 미국이 지금 트럼프의 부동 지지기반을 이루는 내륙 소도시 보수적 백인과 동-서부 연안 금융 엘리트 본위의 연방 권력 사이의 내전이나 새로운 역병에의 대응 실패, 아니면 무리한 '양적 완화'로 인한 달러화 가치하락과 디폴트 (채무 지불 정지 사태) 등으로 그 안보 기능을 전체적으로 내지 부분적으로 더 이상 수행할 수 없게 된다면? 현재 미국 정치계급의 분열이나 보다 깊은 차원에서는 격차의 수준, 그리고 경제모델의 내재적 부실함을 직시하는 유럽 정치인들은, 이 질문을 더 이상 던지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현재 유럽의 안보 구조가 거의 전적으로 '미국의 개입'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유럽에서야 예상외의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은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유일한 잠재적인 '현재 질서에의 도전자'는 러시아인데, 러시아의 주요 무역상대국이자 러시아에의 주요 투자국은 바로 유럽의 주도 국가인 독일이니까 결국 무력이 아닌 '협상'으로 새로운 질서를 짜는 게 그리 어렵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레닌이 그런 유의 협상을 '제국주의 야수들의 나누어먹기 향연'이라고 부르곤 했지만, 당장에는 제국주의 전쟁보다는 제국주의 담합은 그나마 낫겠죠?
러시아 요구의 기본선은 아마도 우크라이나, 확장선은 발틱삼국과 일부 구 동구권 국가에 대한 적어도 안보상의 통제일 것입니다. 독일 등이 이 요구를 받아들인다면 이미 독일과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등의 경제 식민지가 다 된 에스토니아 등지에서 러시아 군사 기지들이 생기는, 좀 기묘한 '경제 지배와 안보 지배의 분리' 현상 같은 게 일어날 수 있고 동구의 일부 지역은 독-러의 '공동지배구역'이 되겠는데.... 약소 민족들에게는 눈물이 날 판이지만, 적어도 '유혈'을 피할 가능성은 있습니다. 지구의 다른 지역은 그것마저도 불분명하지요.
미국은 대외 행동이 어렵거나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면 한/조선반도로서는 사실 '블러스'도 만만치 않습니다. '유엔 제재'라고 하지만 사실 대북 제재는 기본적으로 미국 제재입니다. 미국이 마비된다면 그 제재도 마비돼 개성공단 재개부터 시작해서 이북지역에서 '개발 붐'이 막 일어날 수 있겠죠. 그런데 "미국 다음에" 그 기회를 타서 남북/북남 상생 길로 가자면 남북/북남 사이의 신뢰 기반을 일찍부터 쌓아야 하는데, 최근의 파국이 잘 보여준 것처럼 그런 신뢰는 아직 - 아쉽게도 -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태까지 우리 대북 정책은 너무 소심한 것이죠. 그런데 한/조선반도 안팎의 상황부터는 심상치 않을 것입니다.
대만에서 군사예산이 대폭 증액되고 일본에서도 아마도 한국에서도 핵무장론이 상당히 고개를 들 것입니다. '열전'이 일어나지 않아도 한-중-일-대만의 '무기 경쟁'의 격화를 충분히 현실적으로 상상할 수 있습니다. 중국도 일본도 한국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하겠지만, 그 때 한국에서 극우들이 집권할 경우 한일 동맹으로 가려는 움직임들은 충분히 예측 가능합니다. 금일 각종의 '한일 화해론'이나 이영훈 전 교수류의 '식민지근대화론'의 부상은 그 이념적 준비 공작에 해당되겠죠? 그런데 그런 움직임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다수가 존재하고 있기에, 핵무장론이나 한일동맹은 새로운 한국 사회 내부 갈등의 핵심적 의제가 되겠죠?
유럽에서는 열전의 가능성은 매우 적고 동아시아는 열전이 아닌 무기경쟁으로 일관될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니 여태까지 열전들이 잦았고 미국 침략의 대상이 돼온 중동 지역은 다를 것입니다. 사우디와 이란 사이의 전쟁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대단히 높죠. 실제 지금도 예멘에서 대리전을 막 하고 있으니까요 (제주도 '예멘 난민' 사태는 거기에서부터 발생됐습니다). 시리아에서의 터키와 이란의 이해관계가 평화적인 '나누어먹기'로 조절될 수도 안될 수도 있고요.
이스라엘은 미국이라는 보호자를 잃으면 재빨리 러시아-중국과의 '후견국 - 피후견국' 관계를 신청하거나, 적어도 대러, 대중국 외교에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인데.... 오늘날 네타냐후와 푸틴의 '친구 관계' 등은, 이스라엘 통치자들이 이런 가능성들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잘 입증합니다. 이미 사우디나 이란, 이스라엘은 세계에서 가장 군사화된 국가의 대열에 속하는데, '미국 다음의 세계'에서는 이 부분은 더 악화되겠죠?
좌우간, 우리가 한 가지를 똑똑히 기억했으면 합니다. 미국이 최악의, 그리고 최강의 제국주의 국가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일한 제국주의 국가는 아닙니다. 미국의 제국주의가 힘이 빠지면, '제국주의' 자체가 없어진다기보다는, 여태까지 미국에의 종속적 위치에 있거나, 미국에 밀려 있었던 다른 제국주의자들은 그 틈을 타서 미국의 후퇴로 생긴 '공백'을 메꾸려고 이합집산을 하고 힘을 쓸 것입니다. "새로운 판 짜기"의 과정은 한/조선반도로서는 어쩌면 '기회'도 될 수 있겠지만, '기회'가 되자면 예컨대 대북 접근부터 현재보다 훨씬 훨씬 더 적극적이어야 할 것입니다. "새로운 판 짜기"가 가능해지는 순간에는 이미 양쪽 신뢰 관계가 작동돼야 할 터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는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시민사회부터 새로운 '제국들의 경쟁' 시대에 미리 준비하여 한-중-일 사이의 무기경쟁에 맞서서 월경적인, 국제적인 평화 투쟁을 국경 넘어 같이 할 준비부터 미리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또 한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제국주의 없는 자본주의는 존재한 적도 없으며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미제'는 망할 수도 동북아에서 빠져나갈 수도 있지만, 이건 제국주의 시대의 종말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제국주의 시대의 시작일 것입니다. 제국주의를 종식시키자면 자본주의와 국민 국가 레짐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사실 코로나 이후의 세계를 논하자면 '탈자본'의 가능성부터 중점적으로 이야기해야 할 것이지요.
(기사 등록 202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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