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나오는 가상국가 오세아니아국 진리부는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이라는 구호를 내건다. 요즘 이 나라의 ‘국회 정상화’라는 말은 이런 용어법과 비슷하다. 여야 합의로 국회가 다시 가동되는 것은 어쨌든 좋은 일이라 여겨진다.
그런데 지금 ‘국회 정상화’는 세월호 참사 공범들이 합심해서 진실을 파묻는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게다가 ‘국회 정상화’ 이후 서민증세, 의료민영화뿐 아니라 노동시간 연장 법안까지 추진되기 시작했다. 법정근로 시간을 넘어선 연장근로 한도를 20시간까지 허용하고, 휴일근로에 대한 가산금 지급 조항도 삭제하자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국회가 정지돼 있을 때 가장 아쉬워한 게, 국회가 다시 열렸을 때 가장 반가워 한 게 누구였을지는 명백하다. 국회의 기능이 기업의 돈벌이와 시장확대를 위한 입법 지원이라면 정말 국회는 ‘정상화’된 셈이다. 실제로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의회가 하는 구실이고 본질이다.(따라서 여야 합의 직후 열린 들러리 국회에 진보정당 중에서 진보당이 불참한 것은 잘한 것이고, 정의당이 참석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런 ‘정상화’를 위해 여야, 기레기 언론 모두 ‘눈물겨운’ 안간힘을 썼다. 새민련은 새로운 지도부를 새우자마자 또 뒤통수 분위기 조성에 나섰었다. 마치 세월호 유가족 주저앉히기가 새민련의 존재의 이유처럼 보일 정도였다.
새민련 새지도부가 가족대책위를 만나자마자 언론은 ‘드디어 유가족이 수사권과 기소권을 포기했다’고 기정사실화하며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가족대책위가 그런 취지가 아니라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유경근 대변인은 “다시는 여야의 합의에 딴지를 못 걸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것은 아닌지 … 야당의 작전에 우리가 말린 것 같다”고 했다.
물론 정권과 우파는 대리기사 폭행 시비를 이용해 아예 유가족의 상처를 칼로 찔러댔다. 파렴치한 갑질을 한 박희태가 아니라, 김현 의원이 갑질 대마왕이 됐다. 솔직히 나는 아무리 살펴봐도 김현 의원이 이 정도로 어마어마한 욕을 먹을 잘못을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또 조중동은 난데없이 ‘대리기사의 수호천사’가 됐다. 이들이 도대체 언제부터 대리기사 노동자들의 고통, 애환에 이토록 관심이 있었던 것인지 어안이벙벙할 지경이었다.
반면 세월호 유가족은 갑자기 ‘특권과 갑질’의 상징이 됐다. 공단 지역의 힘없고 가난하다 못해 가장 소중한 자식까지 잃은 분들이 말이다. 자식을 잃은 ‘덕분’에 유가족 대책위를 만들고 간부가 돼서 목에 힘을 주게 된 게 ‘특권’이라고? 기가막힐 일이다.
“세월호 유가족으로 사는 건 아주 더러운 일이다. 길거리 노숙을 밥 먹듯 해야 하고, 자식 떠난 이유를 알려달라고 150일간 서명 받으러 다녀야 하고, 국회 돌바닥에서 자야하고, 청운동 주민센터에서 노숙해야 한다.”(고 최성호 군의 아버지 최경덕 님)
일베와 시비한 유가족에게 구속영장 청구, 유경근 대변인의 사소한 말실수에 고소 협박, 일반인대책위와 단원고 대책위에 대한 이간질 등 그야말로 십자포화였다. 이 상황에서 아쉽게도 진보 쪽의 일부마저 유가족분들에게 타협을 권고했다.
십자포화
당시 <경향신문>에 실린 유가족 어머님들의 카톡방 대화를 보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짐작이 간다. “어떤 엄마가 버스 안에서 ‘살아낼 자신이 없다 사실은 매일 죽을 생각만 한다’고 했습니다.” “저도 … 참 힘드네요”, “차라리 내일을 안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나는 솔직히 이번에는 유가족들이 여야 합의를 거부하기가 어려울 거라 봤다. 누구라도 이런 어마어마한 압력을 거부하긴 힘들 거라고. 그런데 아니었다. 가족대책위는 또다시 “영정 사진 속의 아이들 눈망울을 보면서” 여야합의를 거부했다. 여야가 지난 2차 합의안보다 더 개악된 합의를 한 것도 유가족들이 이런 용기를 내는 데 한 요소가 됐을 것이다. 새민련 지도부는 벌써 4차례나 유가족들의 뒤통수를 친 셈이 됐고, 다음날 새민련의 농성 텐트는 광화문 광장에서 치워졌다고 한다.
새민련은 ‘세월호로 박근혜의 발목을 잡아서 규제완화와 민영화, 구조조정을 통해 한국 자본주의를 살릴 수 있는 골든타임을 놓치려고 하느냐’는 지배계급의 압박에 굴복했다. 물론 다른 이유들도 있을 것이다. 최근 검찰은 세월호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유병언의 광범한 정관계 로비설’에 대해 증거가 없다고 밝혔다. 새누리와 새민련에서 안도의 한숨이 들리는 듯하다. 검찰 수사 결과는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면에서 왜 수사권과 기소권이 포함된 특별법이 중요한지 보여주고 있다.
가족대책위는 지금 대학 등 전국 곳곳을 찾아가면서 기레기 언론이 말하지 않는 진실을 말하고 있다. 특히 2주전 서강대 간담회 소식은 인상적이었다. 서강대에서는 학내 학생회, 학회, 동아리, 진보단체들이 모두 힘을 합쳐서 간담회를 준비했고 정문부터 강의실까지 노란 리본, 노란 배로 수놓았다. 이처럼 진정성을 갖고 정파를 넘은 단결로 가족들의 용기를 뒷받침하는 것에서 배워야 한다.
같은 진보진영의 동지들 속에서 서로 벽을 세우거나, 누구를 배제하거나, 자신들만을 부각하려 하거나, 내 생각만을 고집하거나, 오류와 실수를 절대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사라져야 한다. 진보당을 배제하며 추진된 진보정치 소통과 연대 시도가 민주노총에 이어서 얼마 전 노동당에서도 반대에 부딪혀 사실상 일차 실패로 드러난 것은 시사적이다.
“단원고등학교에 보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먹고 싶다는 거 갖고 싶다는 거 다 해줬어야 했는데, 공부하라고 잔소리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수없는 후회들이 밀려들었지만 가장 후회되는 건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행동했어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46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았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고 박수현 군의 어머님 이영옥 님)
지금은 오로지 이런 마음에 진심으로 공감하며 힘을 모아서 싸우면서, 그 속에서 토론하고 비판해야 한다. 그래야 후회하지 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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