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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국제 - 영국 총선/ 볼리비아 쿠데타/ 이란과 홍콩 민중투쟁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9. 12. 15.

전지윤

 


 호주의 Nicky Minus가 만든 '2019년 국제 반란의 해' 포스터



영국 총선과 코빈이 남긴 성과와 한계

 

이번 영국 총선은 내년으로 다가온 미국 대선과 함께 매우 중요한 국제적 분기점이었다. 지금 중동와 남미를 휩쓰는 국제적 반란 물결 속에서 더 중요했다. 하지만 인종주의 우익의 성장과 전통적 좌파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쓰디쓴 결과를 낳았다.

 

거짓선동을 일삼는 극우 보리스 존슨의 승리를 트럼프와 억만장자들, 권력자들, 인종주의, 여혐주의자들, 기후파괴자들이 자축하고 있다. 반면 이것은 기층 노동자와 민중, 소수자들, 다인종 시민, 이주민과 난민, 무슬림, 기후정의 운동에 패배감을 안기고 있다.

 

존슨의 브렉시트 쿠데타는 한발씩 전진하고 있다. 그는 ‘2016년 국민투표로 결정된 국민의 뜻을 가로막는 반역자들에 맞선 국민의 지도자로 자신을 내세웠다. 브렉시트에 회의적인 세력을 보수당에서 내쫓고, 군소 인종주의 극우정당들의 지지기반까지 싹 흡수하며 보수당을 극우 초신자유주의 정당으로 재편했다. 지난 봄 유럽의회 선거에서 1등 했던 브렉시트당은 이번 선거에서 소멸해버렸다. 보수당과 구분이 어려워졌으니.

 

영국은 이민자들이 아니라 영국인들의 나라다. 이민자들이 아니라 영국인을 우선하겠다는 존슨의 선동은 경제민족주의와 보호주의, 인종주의에 기반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존슨과 영국의 기득권 세력은 노동당 코빈을 유럽연합에 굴복하려는 반역자, 비애국자, 친무슬림 테러주의자, 스탈린주의자...’ 등으로 몰아 인신공격했다. 특히 이스라엘을 비판하고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코빈의 입장을 반유대주의로 낙인찍은 마녀사냥은 아주 극심했다.

 

물론 이것만으로 이번 결과를 설명할 순 없다. 반세기 동안의 신자유주의 속에서 산업해체와 계급의 파편화, 80년대 패배의 후유증을 극복 못한 노조운동(노동당의 여전한 주요 기반)이라는 조건도 있었다. 쇠퇴한 산업지구에서 계급의식이 침식되면서 우파가 파고들 여지가 커져 왔다. 대처 시절 가장 큰 공격을 받았던 북부산업도시에서 존슨의 지지가 늘어난 역설은 이 때문이다.

 

영국 자본주의의 불안정과 위기 속에 존슨은 기득권 세력, 자본, 언론, 심층국가의 집중된 지원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따라서 브렉시트가 자본가들의 요구가 아니란 주장은 틀렸다) 반면 코빈은 내부의 적에게도 시달렸다. 블레어 향수에 머무는 노동당 주류와 당내 우파, 일부 노조관료들은 선거운동에 비협조적이었고 심지어 일부는 코빈보다 차라리 존슨의 집권이 낫다는 식의 태도였다. 진보적이라는 BBC, 가디언, 옵저버 등도 코빈에게 크게 우호적이진 않았다.

 

그래서 이번 패배에도 코빈을 탓하기 보다는 그의 역사적 공로를 돌아보고 싶다. 노동당을 블레어의 신자유주의 2중대 정당에서 다시 전통적 좌파가치로 되돌리며 젊은층을 파고들어 50만으로 2배나 당원을 늘린 것이 코빈이다. ‘사회주의를 현실의 언어로 되살리며 모멘텀이라는 젊고 활력있고 급진적인 4만여 활동가 그룹을 만들어낸 것도 그의 공이다.

 

따라서 이번 코빈의 패배는 지난번 힐러리가 트럼프에게 패배한 것과는 다르다. 월가의 친구인 힐러리가 신자유주의적 공약으로 패배를 자초했다면, 코빈은 아주 급진적이고 좌파적인 공약을 내놓고 반자본주의적 대의를 선전하다 패배했다. 영국에서 노동당 밖에서 제 3의 좌파정당을 만들자는 목소리가 안들리게 됐을 정도다.

 

따라서 코빈이 유럽연합 탈퇴를 주장했으면 결과가 달랐을 것이다, 역시 선거보단 투쟁이 우선이고 혁명정당이 필요하다는 등의 일부 좌파들의 공허하고 언제나 반복되는 주장에는 별 공감이 안간다. 오히려 코빈은 유럽연합은 신자유주의 기구고 지지할 수 없다는 과거의 원칙적 입장과 전통적 좌파의 압박에 너무 얽매였다.

 

결국 브렉시트에 대한 입장이 뭔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노동당 수수께끼는 계속됐고, 인종주의 우파에 대한 반감 속에 잔류를 원했던 진보, 청년, 다인종 대중은 정착지를 찾지 못했다. 탈퇴파는 존슨이 다 흡수했지만 반면 잔류파는 흩어지거나 기권했다. 정치와 선거는 정책과 공약만이 아니라 구도와 전선이 중요한데 말이다.

 

사실 2016년 브렉시트 국민투표 때부터 첫단추가 잘못 끼워진 점이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많은 경우 좌파는 운동장과 종목과 도구를 선택하기 어렵고 주어진 조건 속에서 뛰어야 한다. 코빈의 전술적 경직성에 대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브렉시트는 대표적으로 인종주의 우파가 주도해 프레임이 짜여진 불리한 구도의 경기였다.

 

이제 존슨은 이민자를 희생양삼고 영국을 대처 시대로 되돌리면서 심화하는 자본주의 위기를 벗어나려는 방향으로 돌진할 것이다. 노동당의 주류와 우파들은 블레어로 돌아가자며 좌파를 공격할 것이다. 전세계적 반란의 물결 속에 전통적 좌파들이 별다른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있는 현실도 계속되고 있다. 코빈의 노동당은 좌파가 어떻게 혁신하고 재구성되면서 새로운 시대의 과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가능성과 한계 모두를 보여줬다. 여기서 더 나아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볼리비아 쿠데타의 배경과 성격

 

사람들의 관심의 정도 차이를 떠나서 중국의 하수인들이 짓밟고 있는 홍콩과 미국이 후원하는 우파들이 폭력을 휘두르는 볼리비아에 대한 서방언론, 주류언론의 관점과 태도가 다른 것은 분명하다. 여기에는 서구중심적 시각과 반공주의가 모두 섞여있는 것 같다.

 

그 점에서 지난번 서구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어떤 정부가 가만 놔두고, 어떤 언론이 옹호하겠냐던 중국 공산당의 역겨운 항변은 틀렸다고만 보기 어렵다. 실제 프랑스 노란조끼 시위 속에서도 경찰폭력으로 2명이 사망하고 25명이 실명했고, 14천여발의 고무총탄이 발사되고 1만여명이 체포된 바 있다. 하지만, 서방 정부와 언론들이 마크롱 정부를 중국 공산당처럼 시대착오적 야만 집단으로 묘사하진 않았다.

 

똑같이 폭력으로 저항을 짓밟는 억압적 지배권력이고 해도 친서방 친미집단이라면, 일단 관심도 덜 가지고 욕도 덜먹는 불공정이 존재하는 것이다. 자신들도 저지르는 억압, 착취, 폭력을 중국이나 러시아 정부가 하면 편견을 섞어서 공격하는 위선이 존재한다. 그 점에서 요즘 볼리비아에서 진행되고 있는 반동과 폭력은 더 많이 알려질 필요가 있다.

 

원주민 출신 좌파 대통령이 군부와 친미 기독교 우파들에게 쿠데타로 쫓겨나고 나서 곳곳에서 폭력적 만행들이 자행되고 있다. 극우행동대원들이 방망이, 쇠사슬, 총과 수류탄 등으로 무장한 채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노조원, 농민, 원주민, 여성들을 향해 무차별 폭력을 휘둘러 수십 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총상을 입었다고 한다.

 

의회에서는 집권여당이고 얼마전 총선에서도 대승한 사회주의운동당 의원들이 대부분 불참한 가운데 고작 4% 정도의 지지를 얻었던 우파정당 정치인이 군의 후원 속에 스스로 임시 대통령이라고 선포하고 원주민 혐오적 선동들을 쏟아내고 있다. 군부의 통제 아래 사회주의운동당의 출마를 봉쇄한 채, 다시 선거를 해서 정부를 구성한다고 한다. 이게 무슨 민주주의란 말인가?

 

미국의 후원을 받은 친미우파와 군부의 쿠데타는 크게 3단계로 진행됐다. 1단계) 모랄레스 정부가 부패했고 부정선거까지 저질렀다는 의혹이 언론과 사법부를 통해서 대대적으로 제기됐다. 2단계) 그러자 중산층을 중심으로 한 반정부 시위가 곳곳에서 벌어지며 정권 퇴진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일부 노조도 동조했다. 3단계) 군경이 등장해 국민의 요구라면서 대통령 사임을 최후통첩하고 곧바로 권력을 접수해나갔다. 친미 극우세력이 주도한 이 과정에서 온건한 자유주의자들도 동조했고 모랄레스에게서 등을 돌렸다.

 

여전히 군부, 사법부, 언론을 통제하고 있는 볼리비아의 기득권 우파는 이미 오랫동안 모랄레스 정부의 흠집, 부정 등을 샅샅이 조사하고 캐내서 계속해서 의혹을 제기해 왔다. 실제 부패와 부정은 기득권 우파가 훨씬 심각했지만 그건 중요치 않았다. 장기적으로 반복된 이런 의혹 제기는 모랄레스 지지자들의 사기를 떨어트리고 정부에 대한 불신을 확산시켰다. 하지만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모랄레스 정부 자신의 한계와 문제점이 존재했다. 모랄레스는 많은 진보와 개혁을 이뤘지만 천연자원을 전부 국유화하거나 다국적자본과 대자본들의 소유 자체에 도전하진 않았다. 특히 그는 농업자본가들과 타협해 수출주도형 농업자본을 육성하는 신개발주의로 경제 돌파구를 마련하려 했다.

 

특히 2011년 아마존 원주민 보호구역을 관통하는 고속도로 건설 강행은 결정적 후퇴였다. 이 과정에서 격렬하게 반발하는 원주민들의 희생까지 발생했고, 많은 급진좌파들과 일부 원주민까지 모랄레스와 결별하게 됐다. 2016년 국민투표에서 나타난 다수 여론을 거슬러 이번 대선에 또 재출마한 것도 큰 비판을 받았다.

 

우파라 볼 수 없는 광부노조가 이번 대선 부정 의혹 속에 모랄레스의 사임을 요구한 것도 이런 맥락이 존재한다. 동시에 모랄레스를 여전히 지지하는 운동세력들은 지난 14년 동안 국가기관에 계속 흡수되면서 독립성과 자생적 투쟁력이 약화돼 버렸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 군부와 친미우파가 더 손쉽게 쿠데타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러한 반동이 낳은 폭력과 야만적 결과에 대한 우려 속에서 급속히 다시 반군부, 반극우 공동전선이 복원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결국 모랄레스를 지지하는 것 말고는 대안이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까?(브라질에서도 최근 석방된 룰라가 다시 대안으로 떠오르는 상황이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룰라나 모랄레스에 대한 비판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룰라의 타협노선과 모랄레스의 신개발주의를 원칙적 반자본주의였던 것처럼 낭만화해서 포장하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쿠데타에 맞서 함께 싸우고 우익의 반동으로부터 그들을 방어할 수 있을 것이다. 룰라나 모랄레스를 넘어서 더 급진적 방향으로 나가려는 좌파들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이런 과제를 수행하고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갈 수 있느냐에 많은 게 걸려있을 것이다.

 

이란 민중투쟁에 지지와 연대를

 

전세계적 반란의 물결이 이란에서도 커다란 파도를 일으키고 있다. 이란 정부가 최근 휘발유 가격을 두배나 인상한 것이 저항에 불을 붙였다. 이어서 이란의 31개 주 중 22개 주에서 아래 동영상에서 보듯이 수만 명에 참가하는 시위가 벌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이란 정부는 보안군을 투입해 무지막지한 폭력 진압에 나섰고, 저격수들이 옥상에서 시위대를 쏘고 군헬리콥터에서도 발포하는 상황 속에 100명 이상이 사망하고 1000명 이상이 체포됐다고 한다. 언론을 통제하고 인터넷 접속도 모두 차단해 저항의 확산을 차단하려 한다.

 

그래도 시위대는 이란의 최고 종교지도자를 겨냥해 하메네이는 살인자다” “독재자에게 죽음을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싸우고 있다. 또 이란이 지역패권을 위해 예멘, 이라크 등에서 확대해 온 군사적 개입의 중단도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마침 이라크에서도 민중은 '이란 나가라'라고 외치고 있다.)

 

지금의 전세계적 반란 속에서는 그것이 권위주의든, 이슬람근본주의든, 자유민주주의든 사회정의를 무너뜨리고 민중의 고통을 강요하는 모든 권력이 도전받고 있다. 따라서 단순한 이분법적 진영논리로 이것을 평가할 수 없다.

 

홍콩 시위대가 중국공산당에 맞선다고 해서 서방의 사주를 받는게 아니고, 이란 시위대가 신정체제에 맞선다고 해서 미국을 지지하는게 아니다.(검찰개혁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전부 문정부가 지지자들이 아니듯이)

 

오히려 트럼프 정부의 경제제재와 봉쇄가 이란 민중의 고통을 더욱 깊게한 책임이 있으며, 트럼프가 이란 시위를 지지한다고 한 것은 이란 정권이 반정부 시위대를 외세가 배후에 있다며 탄압할 수 있는 빌미만 제공해주고 있다. 이란 민중의 전진을 응원한다.

 

홍콩 민중투쟁은 계속된다 - 위싱턴도 베이징도 아닌 국제적 사회변혁


마지막 격전지라던 홍콩 이공대에 대한 시진핑과 캐리람의 유혈 폭력 진압이 막바지로 치닿고 있다.(이 글은 한달 전에 쓰여졌다) 저들이 물처럼 흐르는투쟁 전술을 펼치던 시위대를 이공대에 몰아넣고 사실상 감금한채 토끼몰이하듯이 인간사냥한 것은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막강한 폭력을 통해 충격과 공포를 선보이며 더 이상 저항은 무의미하다는 신호를 보내려는 것이다. ‘강철주먹이라는 악명을 가진 신임 경찰총수 크리스 탕이 그 행동대장이었다.

 

그러나 하나의 불씨를 가까스로 끄고 있는 것이지 불길은 꺼진 것이 아니다. 이공대 진압 작전이 한참이던 와중에 거리 곳곳에서 수천 명의 홍콩 시민들이 나타나 고립된 이공대의 동지들을 구출하기 위해 달려가던 가슴 벅찬 장면이 그것을 보여 줬다. 또 아직도 이공대의 투사들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이라며 버티고 있다.

 

며칠 전 홍콩 고등법원은 복면금지법이 홍콩 기본법에 위배된다는 위헌 판결을 내렸다. 이제 캐리 람은 긴급법을 이용한 시위 진압의 정당성을 잃게 됐다. 홍콩 민중의 가슴 속에서 불타오르는 저항의 불길은 이번 주말 지방선거에서 친중국파 후보들의 참패로도 나타날 것이 분명히 보인다.

 

전남도청에서 끝까지 남아서 싸웠던 광주의 저항 정신이 결국 87년 민주항쟁으로 부활했듯이, 패배로 끝났다던 우산혁명이 홍콩에서 이번에 5년만에 다시 더 크고 강력하게 부활했듯이, 2019년 홍콩 민중항쟁의 정신은 짓밟는다고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시진핑과 중국 관영언론들은 장갑차와 기관총까지 들고 중무장한 특수경찰의 폭력 진압에 진짜 책임과 원인이 있다는 것을 모르쇠하며 폭력’, ‘폭도라며 이 투쟁을 비난하고 있다. 또 홍콩 민중에 대한 국제 연대를 내정간섭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식이면 20세기초 압제에 맞서던 중국 민중과 연대했던 조선인들도 내정간섭을 했다는 말이 된다.

 

시진핑과 캐리 람은 마오주의를 저항의 사상으로 받아들이며 영국의 식민당국에 맞서 67년 반란까지 일으켰던 홍콩 민중이, 이번에는 왜 정반대로 마오의 후예라는 중국 공산당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게 된 것인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왜 홍콩 민중이 이번에 굴복하면 우리도 신장 위구르나 티벳과 같은 처지가 될 것이라며 결사항전하는지 말이다.

 

한때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맞선 저항의 성격이 있었던 중국의 사회주의 사상과 체제는 이제 또다른 억압적 지배 이데올로기와 체제로 탈바꿈한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를 홍콩 독립의 요구와 동일시하는 것 자체가 시진핑과 캐리 람의 본심을 드러낸다. 중국 공산당의 통치 아래에서 민주주의란 있을 수 없다는 고백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아직도 시진핑과 중국 관영언론들의 거짓과 왜곡에 휘둘리며 홍콩 민중항쟁을 매도하거나 지지를 유보하는 사람들은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반갑게도 지금 중국 유학생들 속에서나, 홍콩 투쟁에 부정적이던 일부 좌파들 속에서도 진실을 직시하는 용기있는 다른 목소리들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들을 적극 지지하고 응원한다.

 

보수언론이나 일부 사람들은 서구중심적이고 반공주의적 관점에서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혐오, 경멸에 홍콩을 이용하고 있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틀렸다. 중국 공산당만이 아니라 볼리비아의 친미 우파들도 지금 피를 부르는 폭력으로 저항을 짓밟고 있다. 홍콩 이공대만이 아니라 트럼프가 국경 곳곳에 세우는 장벽 아래서도 민주주의와 인권은 없었다.

 

도전에 직면한 것은 공산당 독재와 신자유주의를 결합시켰던 중국과 홍콩 모델만이 아니다. 미국식 신자유주의(워싱턴 컨센서스) 모델을 가장 먼저 원초적 형태로 받아들였던 칠레에서도 그것은 지금 저항에 직면해 붕괴하고 있다.

 

반스탈린주의 국제 좌파들은 한때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아니다를 모토삼은 바 있다. 이제 그 구호는 위싱턴도 베이징도 아닌 국제적 사회변혁으로 바뀌고 있다. 이제 시대혁명이 필요한 것은 홍콩만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저항의 불길은 광복홍콩을 넘어서 광복중국으로 나갈 것이다.

 

홍콩 투쟁과 보수언론의 위선

 

얼마전 비가 쏟아지는 추운 날씨 속에서 홍대 입구역에서 홍콩 투쟁 연대집회와 행진에 함께 했다. 여러 악조건 속에서 발언들이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홍콩인들의 안전과 민주주의에 대한 참가자들의 걱정과 절박함을 느낄 수 있었다. 같이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면서 행진을 하고 레논벽 앞에서 마무리했다.

 

참가하면서 한 가지 또 느낀 것은 <조선일보><TV조선>의 매우 적극적인 취재였다. 물론 지금의 절박한 상황에서 어디서든 홍콩 상황에 관심을 갖고 보도해주는 것은 필요한 일이고, 가릴 상황이 아니다.

 

그럼에도 조선일보가 민주주의에 대한 순수한 열정 때문에 홍콩에 관심을 갖는 건 아닌 거 같다. 그렇다면 지금 미국의 후원을 받는 군부쿠데타가 일어나 항의하는 원주민들을 유혈진압하기 시작한 볼리비아에 대해서도 그만큼 관심을 갖고 규탄, 보도했을 것이다.

 

또 요즘 캠퍼스에서 일부 중국유학생들의 잘못된 인식과 행동을 가장 열심히 자극적으로 보도하는 것도 조선일보다. 그러나 정말 홍콩에 대한 연대가 커지길 바란다면, 중국 유학생들에게 홍콩의 진실을 알리는데 더 힘써야 할 것이다. 홍콩 문제의 본질은 중국인과 홍콩인의 대립이 아니라 언론을 통제하며 진실을 왜곡하는 중국 공산당의 강압 통치에 있으며 중국 유학생들의 왜곡된 인식도 그 결과이니 말이다.

 

사실, 조선일보는 반성부터 해야 한다. 한국 자본들이 한참 중국에 진출하던 시절에 인건비가 저렴하고 불필요한 규제가 없으면서 강성노조와 떼법이 통하지 않는 중국의 투자 환경을 칭찬하기 바빴기 때문이다. 권위주의와 신자유주의를 결합시킨 그런 제도와 방식이 지금 홍콩의 비극을 낳고 있다.



(기사 등록 2019.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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