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여성들이 주도하는 파업, 시위, 행진들이 나타나고 있다.(한국에서도 톨게이트 노동자 투쟁 등이 이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활동의 급증은 전 세계적으로 계급투쟁을 활성화시키는 노동하는 여성들의 운동의 일부이다. <99%의 페미니즘을 위한 선언>(이하 선언)의 공동저자인 신시아 아루자, 티티 바타차리야, 낸시 프레이저(Cinzia Arruzza, Tithi Bhattacharya, and Nancy Fraser)에 따르면 이 투쟁들은 사회적 재생산의 이론적 렌즈를 통해 가장 잘 이해된다.
이것은 시간이 지나도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노동의 종류를 기술하고 있다. 그것은 매일같이 일터로 나오도록 하기위해 노동자들을 준비시키고, 병들거나 은퇴한 노동자들을 돌보고, 새로운 노동자들(즉, 아기들)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한 노동은 평가 절하되고 잘 보이지 않고 대부분 여성들에 의해 행해진다.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종종 그것에 대한 임금을 받지 못하며, 미국의 교육이나 의료에서처럼 사회적 재생산 노동이 시장에 도입되거나 민영화될 때, 그것은 종종 인종화되면서 임금 억제는 더욱 심화한다.
그러나 노동계급 여성들이 반격할 수 있는 바로 그 조건을 만들어 내는 것은 여성들에게 무상으로 일하도록 강요하거나, 노동권을 공격하거나, 이민 노동력을 수입하는 등 겉보기에도 분명해 보이는 비용 삭감의 구조적 압박이다. 노동 철수를 위한 행진, 시위, 소기업 폐쇄, 봉쇄, 불매운동을 결합시키면서 이 운동은 한때 거대했지만 수십 년 동안 지속된 신자유주의 공세에 의해 극적으로 위축되었던 파업 행동의 목록을 보강하고 있다. 동시에, 이 새로운 물결은 파업을 민주화하고, 무엇보다도 무엇이 '노동'으로 간주돼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넓혀주면서 그것의 범위를 확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이탈리아 페미니스트이자 '뉴 스쿨'에서 철학을 가르치며 국제 여성 파업의 조직가이기도한 신시아 아루자(Cinzia Arruzza)와 함께 노동, 신자유주의, 그리고 왜 계급투쟁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사회적 재생산을 둘러싼 투쟁을 포함시켜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분량상 일부 내용은 생략해서 번역했다.(번역: 두견)]
출처:
* 당신은 얼마전 한 팟캐스트에 출연해서 페미니즘의 "두 가지 영혼"에 대해 말했다. 하나는 자유주의, 하나는 반자본주의. <선언>이 대응하고 있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실패나 위기를 논의하기 전에, 이 두 가지 영혼이 어떻게 서로 연관되어 있고 이 위기의 시점까지 상호작용을 했는지에 대한 설명을 해 주겠는가?
미국에 관한 한, 안젤라 데이비스의 저서 <여성, 인종, 계급>은 우리가 자유주의 페미니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 예컨대 기본적으로 중산층 여성들이 지배하고 주도했던 참정권 운동과 백인 노동계급 여성과 흑인 여성 모두의 필요, 이익, 요구 사이의 역사적 긴장을 기록하고 있다.
다른 나라에서도 역시 비슷한 역학관계를 볼 수 있다. 19세기 독일에서는 기본적으로 교육에 대한 접근과 직업에 대한 평등한 접근에 대한 요구를 발전시키려는 자유주의적 페미니스트 운동과 클라라 체트킨이 발전시킨 일종의 사회민주주의적 개입 사이에 긴장이 있었다. 특히 노동계급 여성들에 관한 요구들, 그들의 노동조건이나 출산 휴가, 혹은 직장에서의 성적 학대와 관련된 요구들, 이것은 더 주류적인 자유주의적 페미니스트 운동에 의해 고려되지 않았다.
내가 두 가지 영혼에 대해 말할 때, 내가 염두에 둔 것은, 역사적으로 말해서, 현존하는 사회관계 내에서 성적 동등이나 성 평등을 위해 싸우는 페미니즘의 영혼이 있다는 사실인데, 그것은 정말로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예를 들어 사회의 계급구조나 사회에 존재하는 다른 종류의 위계들이 있지만, 다양한 계급들이나 다양한 계층들에 속하는 남성과 여성들 사이에서 기본적인 동등함, 평등을 요구한다.
그리고 페미니즘 내의 또 다른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기존 사회관계 내에서의 성평등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사회주의 페미니즘뿐만 아니라 아나키즘 운동 내의 페미니즘, 그리고 급진 페미니즘(적어도 미국에서 처음에 발전했던 급진 페미니즘)과 프랑스의 유물론적 페미니즘을 언급하고 싶다.
이러한 흐름들은 여성 억압에 대한 관점인 젠더의 관점을 전체로서 사회와 전체로서 위계체계에 대한 비판의 한 형태로 사용했다. 그것은 단지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급진 페미니즘에서도 성 불평등과 여성에 대한 억압은 다른 모든 형태의 사회적 위계와 권력 관계의 뿌리라는 생각이 있다. 페미니즘 내부의 이러한 다양한 경향은 여성의 해방을 위한 투쟁과 사회 전체의 변혁을 위한 투쟁의 문제를 분리시키지 않았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다른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참정권 운동도 있었고, 때로는 사회적 권리에 대한 요구를 발전시켰지만, 기본적으로 중간계급 여성을 대표하는 운동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엘리트 여성들에게 훨씬 더 초점을 맞추는 자유주의적 기업가 페미니즘을 가지고 있다. 주요 요구는 "유리천장 깨기", 여성의 기업가 정신 촉진, 여성 관리자 임명 등이다.
* 그것은 왜 지금 위기에 처했는가? 그것은 실패할 운명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60년대와 70년대에 페미니즘의 제2의 물결은 사실 상당히 급진적이었다. 그것은 신좌파의 맥락 안에서 일어났고, 블랙 파워 운동과 그 구호와 분석, 반식민지 투쟁 등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이 모두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아니었지만 페미니스트 운동 내부의 다양한 경향은 사회관계와 자본주의에 도전하는 데 있어서 상당히 급진적이었다.
이 기간이 끝나고 많은 투쟁의 패배로 주류 페미니즘은 신자유주의와 점점 더 가까워지게 됐다. 그것은 점차 신자유주의적 언어와 담론으로 식별되는데, ‘선택’ 담론의 전반적 발전 속에 기본적으로 여성들을 사회적 단일체로, 자신의 몸에 대해 선택권을 가지고 스스로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개인으로 보면서 개인적 선택을 강조한다. 어떤 직업과 어떤 교육을 추구하고 싶은지를 말하는데, 이것을 그러한 선택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사회적 상황에 대한 고려와 분리시켜서 다루는 것이다. 여성의 선택을 제한하는 것은 낙태 등에 관한 법률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계, 즉 계급, 인종 등이 있는데 말이다.
신자유주의가 전개된 30~40년의 이 기간 동안에 분명히 페미니즘안에는 여전히 급진적인 경향(흑인 페미니즘, 교차성, 급진적 퀴어 이론)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국가기관과 주류 정당과 조직들에 의해 공동 채택됐다는 점에서 주류화된 것은 기본적으로 일종의 트링클다운(부가 커지면 아래로도 흐른다) 논리에 의해 형성된 페미니즘이었다.
즉, 특히 엘리트 또는 상층 중간계급 여성의 "유리 천장" 문제에 초점을 맞추며 개인과 스스로의 권한과 자신감 늘리기를 강조했는데, 그러면 트링클다운 경제가 작동하도록 되어 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것이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자본주의 기업들이 번창하면 이것은 자동적으로 모든 사람들의 이익을 증가시킬 것이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위기의 일부는 일반적으로 신자유주의 헤게모니의 위기와 관련이 있다. 사람들은 실제로 그것을 직접 체험하고 자신의 생활 속에서 시험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가졌고, 그들의 생활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것들은 훨씬 더 나빠졌다! 같은 면에서 보자면, 60년대와 비교하면 분명히 여성 CEO, 권력을 가진 여성, 국가를 이끄는 여성 등이 나타났지만, 이것은 일반적인 여성의 조건의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지배계급의 다양화는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적어도 미국에서는 힐러리 클린턴이 선거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은 신자유주의 페미니즘이라는 정치적 의제의 위기를 징후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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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적 재생산의 이론가들은 무엇이 노동으로 간주되는가에 대한 바로 그 생각을 넓혀야 한다고 주장한다. 계급투쟁은 필연적으로 사회적 재생산을 둘러싼 투쟁을 포함한다. 아무튼 <선언>에서는 무엇이 노동으로 간주되거나 계급투쟁의 자격을 얻는지에 대한 "전통적 이해"로부터의 저항을 암시한다. 그 전통적 이해가 무엇이고 왜 이것에 대한 저항이 있는지 자세히 설명해 주겠는가? 왜냐하면 적어도 이 텍스트에 표현되어 있는 것은 꽤 자명한 것처럼 보이지만, 만약 그것이 자명한 것이라면 당신은 그렇게 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아니 사회주의 내에서는 노동운동, 즉 노조가 주도하는 운동과 계급투쟁을 동일시하려는 경제주의적 경향이 항상 존재해 왔다. 이건 이미 문제였다. 그리고 이것은 오로지 생산 지점에서만 계급투쟁에 집중한다. 오늘날에도 DSA(미국 민주적사회주의자들) 내에서도 여전히 이런 대화를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는 또한 투쟁의 위계질서를 만드는 경향도 있었다. 먼저 생산지점에서 투쟁하는 공장 노동자들이 있고, 그리고 [공장 노동자들의] 뒤를 따르는 2차적인 투쟁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탈리아 공산당은 심지어 다양한 형태의 투쟁과 그들이 어떻게 서로 연관되어 있는지를 서열화시키는 종류의 도표를 만들었다.
자, 이것에 대해 할 말이 있다. 편협함 때문만은 아니다. 실제적인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투쟁의 효과성이다. 분명히 생산지점에서의 파업은 우리가 가진 가장 강력한 도구들 중 하나이다. 하지만 문제는 특히 세계적인 노동과정의 구조조정과 생산이 일어나는 방식에 따라, 여러분은 종종 대규모의 작업장 파업이나 투쟁을 위한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들은 종종 작업장 밖의 정치적 조건에 의존한다. 작업장 밖에서 8년간 사회적 투쟁을 벌여 온 지금, 우리가 파업 물결을 보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점거하라 운동, 블랙 라이브스 매터(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 다코타 파이프 라인반대 투쟁, 버니 샌더스 선거 캠페인도 그 과정의 일부였다.
이것은 정치적 환경을 만들어냈고, 사람들에게 파업 행동을 더 신뢰할 수 있게 만들었다. 파업에는, 판돈이 걸려있다. 적어도 당신은 약간의 돈을 잃을 수 있고 미국과 같은 상황에서 그것은 당신의 일자리를 위협할 수도 있다. 그러니 그 투쟁이 효과가 있다는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다. 강력한 의미에서 블랙 라이브스 매터와 같은 운동은 작업장에서 파업 물결이 가능해질 조건을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의 비판은 이러한 사회운동이 생산을 타격하지 않기 때문에 부차적이라며 우리의 모든 초점이 노조조직화와 작업장 투쟁에 맞춰줘야 한다는 사람들을 겨냥하고 있다.
다른 문제는 노조와 노조 관료들 그리고 당신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와 관련이 있다. 노동운동은 자본주의 사회관계 안에서 연금기금을 관리하거나 소유하는 것과 같이 자본주의 경영에 직접 관여하면서 도처에서 크게 관료화되어 왔다. 그래서 충돌을 촉발하기보다는 노동력을 관리하는 경향이 있는, 또는 충돌을 발전시키기 보다는 충돌을 관리하거나 조율하는 노조 관료들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여기에 해야 할 일이 있다.
아르헨티나와 스페인의 페미니스트 운동은 노동조합을 다시 급진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는 작업장 내부뿐만 아니라 밖에서도 평조합원 활동가들에게 개입하면서 노조에게 요구의 급진화, 파업에 대한 호소, 페미니스트 운동 지원 등을 압박하는 운동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역사적으로 이탈리아의 67~77년 사이의 기간을 살펴보면, 노조의 큰 급진화의 순간은 학생들의 운동에 의해 준비되었던 사회적 동원의 상황에서 일어났고, 이는 사회적 재생산에도 영향을 미쳤고, 그 당시 작업장 내에서 노동자들을 급진화시켰다.
* 심지어 조직화된 노동자들은 단지 작업장에서만 외로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재생산을 강조하는 요점은 이처럼 정확하게 노동자들이 인간이라는 것에 있다. 그들은 단지 작업장에서 일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삶을 살고, 가족이 있고, 사람들과 관계를 가지고, 임대료를 지불해야 하고, 욕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계급투쟁은 직업장에서만 조직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없다. 조직화와 동원을 위한 다양한 진입점들이 있는데, 문제는 이것들을 모두 계급투쟁으로 인식하는 것이지 별개의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 노동운동의 관료화 외에도, 특히 미국의 경우, 노조 관료들 중 일부, 심지어 상당수의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무시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개인으로서 성차별주의자 또는 여성혐오주의자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 개인적인 편견보다는 효과성에 대한 전략적인 선택에 더 가까울 것이라는 가장 관대한 해석을 취하더라도, 생산의 지점에서 조직하고 파업하는 게 엄청난 힘이 있듯이, 사회적 재생산의 지점에서 조직하는 것에도 힘이 있기에 그마저도 부정확하다고 당신은 주장하겠는가?
그렇다!
* 그것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노조원들을 반드시 그들의 노동력을 철수하는 노동자로 인정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것이 실제로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일까?
나는 그들이 자신의 노동력을 철수하는지 아닌지 모르겠다; 그것은 그들이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있고,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적어도 점거하라 운동 기간에는 특정 노조로부터 더 많은 투쟁이 시작이 있었지만, 그러나 직접적으로 작업장 내에서만이 아니라, 도시에서 일어나는 점거와 같은 사회운동이 스페인의 인디그나도스, 터키의 탁심 광장 등에서 나타났다. 이것들은 정치적 대화를 바꾸는 운동들이었다.
2010년에 내가 미국에 왔을 때 ‘티파티’[극우 정치집단]는 정치적 담론을 지배했고, 그 후 점거하라 운동도 일어났다. 이것이 정치적 대화를 바꾸었다. 이제, 이것은 작업장 투쟁의 가능성을 만드는 것과 분리되어 있다고 볼 수 없다. 예를 들어, 그것은 실제로 활동가들 사이의 모든 종류의 정치적 관계를 만드는데 기여했다. 즉, 점거하라 운동에는 노동 활동가 그룹이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서로 다른 노조에서 참여하고 있는 일반 활동가들 간의 교류와 동맹을 촉진했다.
국제적인 노동자 운동의 역사를 보라: 우리가 매우 강력한 노동운동을 가질 때 그것은 매우 자주 또한 그 이상의 동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에서조차 시카고 교사 파업은 이런 식의 실험을 보여 줬다. 작업장 파업이었지만, 동시에 그들은 학교에 갈 수 없는 아이들을 위해 모든 형태의 사회적 재생산을 조직하면서 도시를 동원했다.
이것은 웨스트 버지니아에서도 일어났다. 여러분이 성공적인 파업을 볼 때, 혹은 어떤 경우에든 가까스로 무언가를 얻어낸 투쟁을 볼 때, 여러분은 종종 작업장 밖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여러분이 작업장에서의 경계선 안에만 있다면, 고립된 상태에서 이기기는 훨씬 더 어렵다. 단지 계약상의 요구의 문제라 하더라도 그런 경우에도 더 큰 동원이 없으면 이기기 어렵다.
* 최근의 파업 물결을 교사들이 주도하고 있는 것은 어떤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다. 그것은 이 신자유주의적인 순간을 특징짓는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라고 부르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 과정은 이미 교육과 의료의 민영화가 증가하면서 시작되었지만, 특히 2008년 이후에 공교육 등에 대한 대규모 삭감으로 시작되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공교육 부문이 점점 더 질을 잃어가는 상황을 만들어냈다. 교육의 질이 나빠졌고, 이것은 교사들의 동원에 있어서 한 요소가 됐다.
그들은 자신의 임금으로만 동원되지 않는다. 여기 뉴욕의 간호사들처럼, 그들은 또한 이런 조건에서는 그들이 양질의 교육이나 적절한 건강관리를 제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노동권과 임금에 대한 공격도 있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요소가 합쳐졌는데, 그 두 가지 요소는 노동의 질 저하, 제공되는 서비스의 악화, 그리고 노동조건과 임금의 악화였다. 이것이 우리에게 특히 교사들로부터 시작하는 파업의 이유를 설명해준다.
흥미로운 것은 이것이 미국만의 특징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가장 최근의 작업장 투쟁 중 일부가 사회적 재생산 분야에서 일어났다는 점이다. 그리고 주인공은 여성들이다. 다시 한번 나는 그것이 사회적 재생산 비용을 낮추어야 한다는 압력이 너무 강해서 지속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냈다는 사실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 어떤 유사한 사례가 있는가?
인도의 달릿 청소부, 작년 가을 글래스고 여성 노동자들, 다른 나라에서 교사들의 파업들이 있다. 이것은 또한 노동자가 많은 소수의 일터들 중 하나라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병원은 상당한 양의 종업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사회적 재생산에 대한 위기의 영향과 사람들이 이 상황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 당신은 그것이 확산된다고 보는가 아니면 퇴조한다고 보는가?
이 순간에도 여전히 퍼지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는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뿐만 아니라 경제 위기이며 이 위기에 대한 반작용 중 하나가 바로 우파의 부상이다. 한편, 우리는 강력하고 초국가적인 페미니스트 운동을 보고 있으며, 투쟁과 파업이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라틴아메리카에서 미국, 인도, 유럽까지 모든 곳에서 극우파의 매우 위험한 부상을 보고 있다. 투쟁은 점점 거세지고 있고, 파업의 확대가 아마 나타날 것 같으며, 페미니스트 운동은 여전히 확장적 역동성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맥락은 어려운 상황이다. 우파의 부상은 사실 현재 지배적인 현상이다.
* <선언>에서 당신은 '성적 반동'과 '성적 자유주의'를, 또 '반동적 포퓰리즘'과 '진보적 신자유주의'를 실제로는 대립되지 않는 것으로 연관 짓는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대립되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들은 둘 다 신자유주의적인 사업이다. 극우도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응으로 자신을 내세우고 있다. 트럼프의 보호무역주의 등을 생각해 보라. 하지만 그들이 실제로 하고 있는 것은 어디에서나 똑같다. 그들은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 자신들을 내세우며 권력을 잡았지만 그들은 실제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수행하고 있다. 다른 점은 그들이 그것을 수행하는 방식이다. 그들의 정치적 운영 방식은 다르다. 그래서 이런 의미에서 실제적인 차이점이 있지만 신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그 정치는 똑같다.
진보적 신자유주의는 공격적인 신자유주의나 긴축 정책을 시민권, 성적 자유, 공식적 젠더 평등 등의 측면에서 진보적 정치들과 연결시키고 있다. 법적 수준이나 상징적 인식의 측면에서 권리를 인정하고 보증하는 것과 동시에, 그들은 실질적 평등 즉 젠더 평등이나 인종 평등이 일어나기 위한 사회적 조건을 잠식한다.
극우파들은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와 진보적 정치 사이의 이러한 연관성을 이용하여 법적 권리, 젠더나 성별이나 정체성의 측면에서, 전적으로 반대되는 것으로 보이는 정치 프로젝트를 분명히 하고 있다: 전통적인 가치로 돌아가기, 가족의 붕괴에 대해 트랜스 여성이나 트랜스 사람들을 비난하기, 우리의 삶의 조건의 악화나 실업 등에 대한 책임을 이민으로 돌리기, 그리고 이것에 대한 책임을 진보 세력에 전가하기.
그러나 그들은 둘 다 민영화를 하고, 둘 다 노동권을 공격하고, 둘 다 서로 다른 방식이지만 제국주의나 신식민주의적인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전쟁을 벌이는데, 하나는 전통에 대한 사람들의 두려움과 열망에 호소하면서, 그들 자신을 이 모든 나쁜 사람들에 맞서는 가족이나 전통적 가치의 옹호자로 내세우고, 다른 하나는 그들을 사회를 "문명화"하는 사람들이자 진보로서 제시한다. ‘파시스트들로부터 이 나라를 구할 사람’을 자처하는 바이든처럼.
* 마치 200년처럼 느껴지는 트럼프 대통령 집권 2년이 지난 지금, 사람들은 그가 집권하지 않았다면 그랬을 것과 별로 지금 상황이 별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고 머리를 싸매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주요 차이점 중 하나는 트럼프가 미국의 사방에서 극우주의자와 모든 가능한 인종주의자와 여성혐오자들을 정당화했다는 것이다. 억압받는 사람들에 대한 폭력이 증가했다. 그러니까 이건 분명한 차이점이다.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는 종류에 따른 결과가 있다. 백인 우월주의자들과 그의 유대는 분명히 결과를 낳았다.
* 하지만 그 조건들은 신자유주의 프로젝트에 의해 만들어졌다.
결국 오바마는 국가 안보를 심화시키며 트럼프에게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했다. 이민자에 대한 국외 추방은 있었다. 물론 그것은 더 증가했지만 구조적인 정치는 다르지 않다.
* <선언>에서 당신은 “모든 것은 우리들 사이의 차이점을 단순히 찬양하거나 난폭하게 지워버리지 않는 지침과 관점을 발전시킬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달려 있다”고 썼다. 나는 그것이 좌파 앞에 놓인 과제의 핵심적 포착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할 것인가? 바늘에 실을 꿰는 것은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곳에서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우리는 이미 일어나고 있는, 이미 이렇게 하고 있는 투쟁들을 살펴봐야 한다. 나로서는, 정확히 이런 종류의 정치를 전개하고 있는 미국에서, 전 세계적 페미니스트 물결의 관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진정으로 살펴보는 것이 정말 중요할 것이다 - 이것은 대중적 차원의 구체적 보편성이다.
스페인에서는 3월 8일 6백만 명이 파업에 돌입했다. 우리는 이미 있는 것을 다시 만들어낼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미 일어나고 있는 투쟁의 과정으로부터 영감을 얻을 수 있다. 그들은 해결책은 아니다. 그들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완전한 답을 주지 않지만, 분명히 우리는 영감을 얻을 수 있다. 우리의 머릿속에서 새로운 모델을 생각하지 말고,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과정에서부터 시작해, 특정한 종류의 운동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동시에 페미니스트, 반인종주의, 반제국주의 등이기도 한 이런 종류의 계급정치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기사 등록 2019.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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