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대한민국 죄의 경중' - 온라인에서 퍼옴
● ‘조국 대전’(검찰대란) 중간 평가
장관 사퇴를 통해서 ‘조국 대전’은 한 고비를 넘겼다. 이 치열한 쟁투의 정세적 의미를 평가하며 누가 승리하고 누가 패배했고 어떤 정치적 성과와 한계를 남겼는지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에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대개 역사와 명분, 이념과 이해관계를 따르는 남성들과 달리 감정을 통해서 사건을 기억하는 여성들의 관점에 자신이 더 끌리게 된 이유를 설명한다.
그리고 “하찮은 이야기 따위는 필요없소. 우리의 위대한 승리에 대해 쓰시오”라는 수많은 압력에도 왜 여성들의 ‘자잘한’ 기억과 감정들로 책을 채우게 됐는지 말한다. “하지만 나에겐 바로 이 ‘하찮은 것들’이 중요하다. 이 하찮은 것들이야말로 삶의 온기이자 빛이므로.”
검찰개혁의 중요성, 고위공직자의 윤리, ‘공정과 정의’의 문제 등보다 이 대전의 한 복판에 끌려나와 전국적 증오와 조롱의 대상이 되고, 마음의 상처가 치명적 질환으로까지 연결됐을 개개인의 영혼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예전에 활동하던 단체에서 정치적 이견을 제시했다가 조사와 징계를 받고 동료들의 집단적 매도에 직면한 적이 있다. 수백명 짜리 조직 내부에서 벌어진 일이었지만, 그것은 내 삶을 통틀어 가장 힘든 기억이다. 소환과 조사, 징계 과정에서 논쟁과 무관한 내가 하지도 않은 말과 행동들이 몇권의 내부자료집에 실려 수백명에게 전달됐고, 기정사실화됐다.
단체의 지도부는 나에게 여러 낙인을 찍었고 그것은 나를 함부로 대하고 비난, 조롱해도 된다는 신호탄이 됐다. 내가 몸이 아프다고 하면 그것도 조롱거리가 됐다. 내가 의견을 바꾸지 않자, 그런 공격은 내 옆의 사람들로 향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공격받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이야말로 도저히 견딜 수 없던 기억으로 남았다.
한번 낙인과 프레임이 만들어지면 더이상 사실은 중요하지 않게 되고 그걸 뒤집기는 정말 어렵다는 것을, 정신적 고통의 신체화 증상이 무엇인지도 가장 생생하게 경험했다. 이런 일이 운동사회에서, 좌파라던 곳에서, 내가 잘 알고 믿었던 사람들 속에서 벌어진 것이 가장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후론 그가 누구든 함부로 집단적 비난과 증오의 표적이 돼선 안 된다고 여기게 됐다. 아무리 인간적 고통을 호소해도 공감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 인간답게 대우할 필요가 없는 사람은 없다고 보게 됐다. 나와 생각이, 입장이, 노선이, 계급이, 진영이 다르다고 해도 말이다. 내가 지금 저런 처지라면 마음이 어떨까 상상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철저한 ‘선택적 공감’과 ‘선택적 정의’의 사회다. 대개 박근혜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세월호에 매정하고, 조국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이석기에 무관심하고, 노무현의 비극을 추모하는 사람들이 소수자들의 고통에 관심이 없다. 자기 편에 대해 커다란 인간적 공감이 다른 편에 대한 지독한 비인간적 외면과 증오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또 차별과 부정의와 부조리를 낳는 사회구조에 대한 진지한 고민보다 개개인을 괴물이나 영웅으로 만들며 실시간검색어에 올린다. 실검에 올라간 사람에 대한 악플, 신상털이, 조리돌림, 문자폭탄이 나날이 벌어지는 게 바로 헬조선이다.
그래서 조국 사퇴의 핵심 이유는 바로 정세적, 정치공학적 판단도 아닌 바로 “가족 곁에 지금 있어주지 못한다면 평생 후회할 것”이란 말이라고 본다. 사퇴 직전에 언론에서 본 것은 부인과 딸에서, 어머니로 표적이 변하던 상황이었고, 사퇴 다음날 드러난 것은 부인의 뇌종양 진단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파할 땐 누구도 버틸 수 없다.
더 ‘하찮은’ 정치적 분석도 덧붙일 수 있다. 현실을 직시하자면 2016년에 촛불시민은 급진적 사회경제 변혁을 지지했던 게 아니다. 촛불시민은 문재인을 넘어서지 못했었고, 여기에 중도층과 보수의 일부까지 손잡아 주면서 촛불과 정권교체가 가능했다. 그것이 만들어 낸 공간 속에서 몇가지 전진과 함께 여성과 비정규직들을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의 성장도 나타났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촛불의 열기가 가라앉고 문정부의 한계가 드러나고 삶의 고달픔은 계속되면서, 중도층과 청년(남성)들이 이탈했는데 그것은 좌파적 이탈이 아니었다. 예컨대 2017년만해도 문정부에 대한 기대와 지지로 넘쳐나던 한 대형 청년 커뮤니티에서 요즘은 우파 지지자들의 글만 올라오는 상황이다. 문정부 지지자들이 사라진 게 아니라 눈치보며 침묵하게 된 것이다.
그 3년간 우파는 다시 힘을 회복하고 뭉치려 애써 왔다. 매주 주말마다 광화문 주변에서 시위하고 행진하던 우파의 대열은 갈수록 커졌다. 이토록 꾸준한 대규모 집회와 행진은 유례없는 일이었고, 이미 연초부터 광화문 일대를 꽉 채울 정도였다. 즉, 우파가 스스로 ‘10월 항쟁’이라고 부르는 이번 결집은 돌출적 현상이 아니라 꾸준한 노력의 결과다.
여전히 의회와 주요 국가기구에 뿌리내리고 있는 우파는 작은 개혁조차 막아왔고, 문정권도 이런 우파에 거듭 타협하고 양보해 왔다. 총선을 앞두고 몇 가지 부족한 개혁법안을 패스트트랙에 올린 정도가 문정부 노력의 최대치였다.
그리고 조국 임명은 우파 대반격과 총결집의 신호탄이 됐다. 이것은 이 나라에서 구체제와 그 지지자들이 얼마나 깊고 넓게 뿌리내려 있는지 입증한다. 2016 촛불이 여기에 가한 타격은 제한적이었던 것이다. ‘검찰-언론-우파-재벌’ 카르텔만의 문제가 아니다. 반세기 넘게 유지돼온 구체제로 회귀하려는 관성은 훨씬 더 촘촘한 기반을 갖고 있다.
촛불 이전으로 돌아갈 순 없다는 위기의식 속에 서초동 촛불이 갑자기 불붙지 않았다면 우파의 공세는 훨씬 더 크고 강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서초동 촛불도 떠나간 중도층과 청년들을 다시 불러모으진 못했다. 그렇다고 민주당 왼쪽에서 문정부보다 더 철저하고 강력하게 우파와 맞서며 적폐청산과 정치개혁을 추진할 믿을만한 대안이 등장한 것도 아니다. 더 급진적 사회경제 개혁이 필요하다는 공감도 커지지 못하고 있다.
조국 사퇴 이후 지금 우파들은 승리의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이들은 다음으로 문재인을 끌어내리고, 나아가 촛불 이전으로 가고 싶어 한다. 그러나 아직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 광화문에 결집한 우파의 힘과 규모는 놀라웠지만, 새로운 확장보다는 단합의 힘이었다.
박근혜를 넘어선 우파 통합의 전망도 밝지만은 않다. 청년우파는 거리로 나서기 시작했지만, 그들의 가능성과 이념적 지향은 여전히 불분명하다. 청년(남성)들 속에서 반페미, 친우파적 논리가 급속히 번지고 있다는 증거는 많지만, ‘문재인은 주사파, 간첩, 공산주의자’라고 외치는 광화문에 청년층이 대거 결합하며 우파가 재통합될진 의문스럽다.
한편, 진보좌파의 전망도 밝아 보이지 않는다. 광화문과 서초동의 중간에서, 촛불시민들과 선을 그으면서 제3의 대안을 만들 수 있다는 방향은 설득력이 크지 않다. 함께 길을 찾으려면 우호적이고 생산적인 토론이 필요한데 그게 어려워 보인다. 조국 대전 속에서 가장 쓰라린 부분이다.
이견을 존중하지 않는 분위기, 정치적 이견이 감정적 적대로 나가는 풍토, 논리와 근거보다는 가시 돋친 상처주는 언어로 이기려는 태도, 심지어 막말, 욕설, 징계로 토론을 종결시키는 사람들 속에서 생각의 차이는 인간관계의 단절로 나아가고 있다.
양쪽 이야기를 충분히 들으면서 우호적 토론을 하고, 타당한 지적과 비판은 수용하려는, 그 속에서 접점을 찾고 연대해보려는 노력은 잘 보이지 않는다. 대표성이 없는 각장 극단적인 일부의 태도를 근거로 상대편을 단정하며 서로 벽을 세우고 있다.
결국 2016년에 역사의 무대에 등장해 중요한 전환점을 만들어낸 촛불시민은 당분간 문정부를 넘어서 더 급진적 대안 쪽으로 나갈 듯하지 않다. 청년층 속에서 좌파적 급진화의 바람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 문정부의 자유주의적, 타협적 한계와 우파의 재결집과 반동 시도는 계속 위태로운 고비를 낳을 것이다.
그러나 촛불시민은 개혁을 향한 열망과 행동을 포기하진 않을 것이며, 이 힘은 저 폭압적이고 성폭력적인 검찰 내부에서도 굴하지 않고 진실을 말해온 임은정, 서지현 검사같은 사람들을 계속 만들어낼 것이다. 의지의 낙관은 지성의 비관에 무릎꿇을 수 없다.
“시대의 도도한 흐름은 거대한 암초를 만나도 타고 넘어서고, 끝내 암초를 부수어 모래를 만들어버리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배웠습니다... 연한 살이 찢기는 고통을 감내해야 진주조개가 되듯, 우리 모두의 고통이 검찰개혁이라는 영롱한 진주로 거듭날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임은정 검사)
● 검찰대란과 좌파의 혼란
아직도 끝나지 않았고 여파가 이어지고 있는 이번 ‘조국 대전’(검찰 대란)에서 청년들이나 장기투쟁 노동자들, 소수자 운동 쪽 분들이 조국 가족의 ‘강남좌파’적 한계에 대해 실망하고 분노, 비판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그런 분들에게 서초동 검찰개혁 촛불에도 관심과 지지를 보내자거나 하는 것은 무의미할뿐 아니라 부적절할 것이다.
오히려 서초동, 여의도 촛불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그런 청년과 노동자, 소수자들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지지하고 요구를 결합하라고 요구하고 비판하는 게 더 필요한 일일 것이다. 검찰의 무지막지함과 반동 시도에 대한 위기 의식은 이해하면서도 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국가의 성격과 본질, 사회변혁의 전략과 전술에 대해 이야기하던 좌파조직들에 대해서는 같은 잣대를 적용하기 어렵다. 이번에 그런 분들의 혼란스러운 주장과 태도들을 보면서 여러 면에서 이해가 안 갔다.
검찰개혁 이슈를 회피하면서 ‘검찰은 개혁이 아니라 해체 대상’이라는 말로 넘어가는 혼란, 해체해야할 적폐라면서 ‘검찰 수사를 방해하면 안 된다’는 모순, 조국 사퇴도 검찰 개혁도 지지할 수 없다면서 이것이 ‘양비론은 아니’라는 억지, 자한당과 민주당을 싸잡아 비판하는 게 ‘진영논리 극복’이라는 변명...
‘자본주의에서 진정한 권력은 검찰같은 폭압적 국가기구에 있다’던, ‘대중투쟁에 대한 태도는 그 지도부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계급적 토대에서 나와야 한다’던 주장은 어디로 간 것인지 싶었다. 아무리 봐도 2016년에 광장에 나왔던 그 시민들이 다시 거리로 나온 것이 분명한데, ‘그때는 우리 좌파가 투쟁을 시작하고 주도했던 것이어서 다르다’는 자아도취적 주장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러다가 미국의 한 사회주의자가 최근 국제적 반란 물결에 대해 논평한 글을 보니 많은 공감이 갔다.
‘전통적 노조나 정당을 우회하거나, 그 틀 밖에서 터져나오는 게 오늘날 세계적 반란들의 특징이다. 오랫동안 주변화돼 온 좌파들은 트럼프에게 청원하는 홍콩 시위대나, 미국 공화당에게 기대하는 니카라과 시위대를 보면서 거부감을 보이고 있다. 프랑스의 많은 좌파들은 꽤 오래동안 노란조끼를 파시스트라 여겼다. 그리고 이런 자생적 투쟁들은 대개 초기에 좌파가 보기엔 부족한 지점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대중투쟁은 정치적 대안에 대한 일종의 대규모 실험실이고, 그 속에서 정치조직들은 시험대에 오른다. 대중투쟁이 가장 적절한 대안을 찾는 과정은 많은 시간과 좌파의 능동적 개입을 필요로 한다.’
100여년 전 러시아 상황도 그랬다. 러시아 대중은 경찰첩자였던 가퐁 신부가 이끄는 시위에 동참하기도 했고, 짜르가 만든 가짜 의회에 환상을 갖기도 했다. 17년에 혁명을 일으키고 나서도 꽤 오래동안 임시정부에 기대를 가졌고, 정치적 온건파들을 지지했다. 급진좌파가 지지를 얻었던 것은 혁명이 막바지에 달했을 때였고, 그것도 부단한 노력과 개입, 타협의 결과였다.
레닌, 트로츠키같은 혁명가들도 이것을 잘 이해했다. 자유주의 세력이나 온건파들에게 기대와 환상을 가진 대중들을 한심하게 여기고 등을 돌리지 않았다. 여러 정치대안을 실험해보는 과정으로 봤고, 대중은 스스로 경험과 투쟁을 통해서만 답을 찾아나간다고 했다. 그런 대중과 함께하기 위한 타협을 받아들이고, 믿지못할 사람들과 손잡기도 했다. 심지어 자신들을 마녀사냥하고 감옥에 가두었던 세력과도 동맹을 맺었다.
‘적들 가운데 한 놈은 매일 소량의 독을 나에게 먹이고 있고, 또 한 놈은 나에게 곧바로 권총을 발사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우선 후자의 손을 쳐서 권총을 떨어뜨려야 한다. 그래야 독을 먹이는 적과 싸울 기회가 오기 때문’이라는 게 트로츠키의 설명이었다.
물론 나는 레닌, 트로츠키 등이 (특히 집권 이후에) 치명적 단점과 오류도 많았다고 보는 편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배울 게 있고, 특히 트로츠키가 이솝우화를 통해서 말하는 이런 부분은 오늘날 우리도 곱씹어 볼게 많은 것 같다. ‘소장수’든 ‘백정’이든 원칙적으로 보면 물론 ‘똑같다’. 그러나 우리에게 원칙만이 아니라 전술도 필요하지 않은가.
“어느 소장수가 황소 몇 마리를 도살장에 끌고 갔다. 그러자 백정이 날카로운 칼을 들고 가까이 다가왔다. 이때 황소 한 마리가 제안했다: ‘어깨를 맞붙이고 이 백정놈을 뿔로 받아올리자.’ 그러자 마누일스키가 운영한 학원에서 정치교육을 받은 황소들이 이렇게 대답했다: ‘몽둥이를 들고 우리를 여기까지 몰고 온 소장수보다 백정이 어떻게 더 나쁜 놈일 수 있느냐?’ 그러자 제안했던 황소가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소장수는 나중에도 처치할 수 있어.’ 그러자 원칙이 확고한 황소들이 이렇게 대답했다: ‘어림없는 소리. 너는 우리의 적들을 왼쪽에서 막아주려고 하는군. 너 자신이 사회-백정이다.’ 결국 황소들은 어깨를 붙이고 대항하기를 거부했다.”
● 부조리한 이중 잣대의 사회
지난 몇 달간 벌어진 일에 대해서 관점과 판단이 다르더라도 적어도 검찰이 사회정의를 바로잡으려고 저런다고 보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거라 믿는다. 지금 한국 자본주의 국가의 핵심 억압기구인 검찰은 자신을 향하는 개혁 요구를 무산시키고 어떻게든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고 또 다른 권력기구를 만드는 것이라며 공수처에 부정적인 주장엔 별로 공감가지 않는다. 정말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건 이 나라 검찰이 가진 막강한 권력이며, 성역이 돼버린 검찰의 비리와 범죄를 수사하고 기소하기 위한 과도적 수단으로 공수처는 불가피하다는 임은정 검사의 의견이 더 타당하다.
검찰 외에는 어떠한 기구도 수사권, 기소권을 줄 수 없다는 것은 세월호 특조위를 가로막던 지긋지긋한 논리이도 하다. 강제수사권, 수사지휘권, 영장청구권, 압수수색권, 기소권, 형집행권 등을 장악한 검찰이 얼마나 두려운 기구인지는 개인적으로도 경험한 바 있다.
보안법으로 두 번 끌려갔을 때 그들이 나에 대해 가지고 있는 방대한 자료, 정보, 사진에 놀랐다. 보안상 사진찍기를 피하던 내 젊은 시절의 사진은 나보다 검찰에 더 많을 것 같을 정도다. 나같은 하찮은 활동가조차 그럴 정도였으니, 그들은 언제든 맘만 먹으면 파헤치거나 덮을 수 있는 수많은 정보와 자료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런 검찰을 그냥 나두면 큰일 난다는 위기의식이 이번에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섰을 것이다. 하지만 검찰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동료의식 때문인지 검찰의 내로남불과 기막힌 이중잣대는 언론 등의 마땅한 지적과 비판을 받고 있지 않다. 거대한 침묵이 존재한다.
알릴레오 출연자의 성희롱 발언에 유시민도 내가 들은 것만 3번이나 정중히 사과하는데, 검찰은 내부에서 현직 검사들이 자행한 성폭력과 성폭행에 대해 제대로 사과하거나 관련자들을 처벌한 적이 없다. 윤석열이 한겨레 기자를 고소한 문제는 또 어떤가.
누군가의 지적처럼 검찰의 피의사실 공표를 ‘미러링’한 것 같은 이 사안에서, 조국 가족에 대해 아니면말고식 피의사실과 보도를 쏟아내며 그것을 감수하는 게 공인의 의무인양하던 그 많은 사람과 언론들은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인다.
나아가 윤석열은 설사 접대받은 적이 없는지 몰라도, 김학의 수사 과정에서 제기된 전 검찰총장 한상대, 전 대구고검장 윤갑근, 전 춘천지검 차장 박충근에 대해선 무슨 수사와 조치가 있었는지 감감무소식이다.
PD수첩의 취재로 ‘조국펀드’의 진짜 돈줄로 밝혀지고 있는 유준원에 대한 이 거대한 침묵과 무관심도 놀랍다. 이명박근혜 때 급성장한 유준원과 상상인 그룹은 금융투기와 작전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해 왔고 전현직 검사들과의 검은 유착이 결정적 구실을 했다는 것이다.
이런 취재와 보도가 맞다면 ‘검사펀드’라 할 정도인데, 지난 세달간 수사와 보도에서 이런 내용은 거의 찾아 볼 수 없었다. 조국의 부인, 자녀, 노모, 동생, 친척, 심지어 주변 지인과 다니던 병원까지 샅샅이 수색하고 모조리 소환하고 수만 번 보도한 것과 극단적 대비다.
이중잣대가 가장 경악스러운 것은 계엄령 문건인데, 한국사회와 역사를 수십년은 후퇴시켰을 쿠데타 모의가 한 사립대 표창장 문제보다 더 작게 다뤄지고 있다. 전쟁도 불사하며 북한급변을 빌미로 계엄선포를 구상했던, 촛불을 폭도로 보고 진압하려 했던 내용들은 볼수록 공포스럽고 등골이 서늘하다.
이걸 검찰이 대통령의 특별지시도 무시하며 아무도 처벌않고 덮어버린 것은, 자본주의에서 진짜 권력은 선출되지 않은 폭력기구들에 있고, 이들은 체제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전쟁과 학살도 감수할 것이란 좌파적 분석의 타당성을 보여 준다. 이 쿠데타 모의의 핵심인물들은 버젓이 돌아다니고 있고, 미국으로 도망간 조현천은 잡아올 생각도 없어 보인다.
반면 지금 여권무효화, 체포영장 발부, 인터폴 적색수배 요청으로 최고등급의 수배자가 된 것은 ‘장자연 사건’에서 공익제보자였던 윤지오 씨다. 지금, 윤지오 씨는 파렴치한 대역죄인으로 낙인찍혀 있다. 진보논객이라는 서민 교수는 <윤지오 사기극과 그 공범들>이라는 책까지 냈고 ‘오히려 조선일보가 피해자’라고 하고 있다.
윤지오 씨에 대한 이런 낙인은 진보진영에도 널리 퍼져있다. 예컨대 <한겨레>는 위 책의 서평을 쓰면서 “장자연 사건의 ‘유일한 증언자’를 자처했던 윤지오가 노린 것은 돈이었으며, 그가 했던 말이 대부분 거짓이었음은 이미 사실로 굳어진 상태”라고 쓰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윤지오 씨를 방어하는 것은 참 부담스럽지만 침묵할 순 없는 일이다.
지금까지 나온 온갖 비난과 낙인에도 불구하고 윤지오 씨가 이 사건의 증인으로 나서서 했던 고발들의 핵심 내용과 의미는 훼손되지 않았다. 윤지오 씨가 과거에 장자연 씨와 같은 을의 위치에서 부당한 일들을 직접 경험했고, 폭력의 현장과 관련 증거들을 직접 목격했고, 이런 사실을 고발해 재수사 촉구 여론을 추동하는데 기여한 것 등 말이다. 후원금 사기라는 혐의도 증거로 입증된 바가 없다.(이에 관한 더 자세하고 정교한 분석은 자율주의 정치철학자인 조정환 선생님의 글들을 보라.)
물론 윤지오 씨도 결함이 있는 보통의 인간이었고, 다른 성폭력 피해자들의 고발에서도 흔히 나타나듯 고발 과정에서 일부 착각, 오류, 과장도 있었다. 젊은 여성에 대한 성적대상화가 극단적인 이 사회에서 무명 연예인으로 살아오면서 선정적 방송 등에 출연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그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왜 이토록 엄청난 비난과 매도를 당해야 하는가? '장자연 사건'의 가해자인 정재계 권력자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는가?
이 사회는 ‘피해자다움’에 이어서 이제 ‘증언자다움’까지 요구하며 인격적으로 완벽하며 인생을 통틀어서 어떤 결함이 없었던 사람만이 감히 기득권 체제에 맞서거나 공익제보에 나설 수 있도록 사람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있다. <조선일보>가 앞장서서 윤지오 씨를 사기꾼으로 몰아가는 등 요즘 이 사회에서 벌어지는 부조리극들은 지켜보기가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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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토론) '조국 대전' 이후 - 한국사회, 무엇을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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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등록 2019.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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