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 패리스(SARA FARRIS)
번역: 강길모
[사회적 재생산이 어떻게 국제적 노동력 이주와 재배치 속에서 이뤄지고 젠더와 인종의 교차적 분석을 필요로 하는지 분석하는 글이다. 최근 이주여성에 대한 편견을 부추기는 혐오발언과 가정폭력 사건 등이 이슈가 된 상황에서 이런 현상의 더 깊은 토대를 보기 위해 도움이 될 것이다. 이글의 필자인 사라 패리스는 런던대학교 골드스미스 칼리지의 사회학과 교수로 페미니즘, 이주, 사회적 재생산에 대해서 연구해 왔다.]
출처: http://newsocialist.org/social-reproduction-surplus-populations-and-the-role-of-migrant-women/
이 논문에서 나는 그들의 중요한 상호연관에도 불구하고, 종종 분리되어 다루어진 두 가닥의 문헌들을 함께 연결시키고 싶다. 이주민들이 도착한 국가 안에서 그들의 상태에 대한 구체적 문제를 다루는 과잉인구에 관한 문헌과 사회적 재생산에 관한 페미니스트 문헌을.
나는 사회적 재생산과 과잉인구의 이론이 인종적 억압과 계급 착취의 교차점을 분석하는 의미있는 장소가 되는 것은, 이 논의들이 서로 연계되어 있을 때라고 제안하고 싶다. 그러나 이 점을 주장하는 다른 많은 사람들과 달리, 나는 과잉인구 범주의 지나친 확대는 반대할 것이다.
우리가 사회적 재생산에 대한 페미니스트 문헌의 관점에서 과잉인구의 문제를 볼 때, 우리는 이주여성들이 유럽에서 과잉인구이거나 ‘예비군’이 아니라, 자본주의 생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정규군"이라는 것을 보게 된다.
과잉인구에 대한 광범위한 논쟁은 당연히 실업을 이주의 원인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대부분의 이주여성들이 다른 사람들의 일을 가져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호하게 하는 분석적이고 정치적인 위험을 가지고 있다. 또한 세계 북반부의 많은 사회적 재생산 활동이 상품화되었기 때문에 이주여성들은 자신들이 도착한 국가에서 "과잉"이기보다는 임금을 받고 일하고 있다.
내 주장을 펼치기 위해, 우선 내가 사회적 재생산과 과잉인구라는 개념을 어떤 방식으로 사용하는지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사회적 재생산의 페미니즘
특히 지난 10년 동안 우리는 칼 마르크스와 다양한 마르크스주의의 노선을 따라 계속 생각하는 새로운 세대의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이주와 돌봄을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사회적 재생산 이론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리고 여기서 나는 단지 가장 두드러진 예들 중 하나를 언급하기 위해서 엘레노어 코프만(Eleonore Kofman)을 떠올린다.
명백히 자명한 것은, 결국 사회적 재생산은 바바라 레슬렛(Barbara Leslett)과 조안나 브레너(Johanna Brenner)의 널리 사용되는 정의처럼 "활동과 태도, 행동과 감정, 책임과 관계는 매일, 그리고 세대를 걸친 삶의 유지에 직접적으로 관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적 재생산이라는 통념 아래 함께 모여 있는 접근법들은 사실 다양하다. 예를 들어,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 캠페인에 참여한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일반적으로 사회적 재생산을 잉여가치의 생산으로 정의한다.
또 다른 한편, 크리스틴 델피(Christine Delphy)와 같은 유물론적 페미니스트들은 사회적 재생산을 근본적으로 가사 노동과 연계된 일련의 활동으로 간주하고 별도의 생산양식으로 간주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리즈 보겔(Lise Vogel)과 그녀의 저작에서 영감을 받은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사회적 재생산을 잉여가치가 아닌 사용가치만을 생산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무엇보다도 노동력과 계급사회의 재생산을 사회적 재생산으로 이해한다.
나는 이 글에서 나의 의견을 보겔의 이러한 접근방식으로 제한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접근방식은 나에게 자본주의에 대한 노동계급 가정의 역할과 성 억압을 설명할 때 가장 분명하게 발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겔은 그저 지나가면서 불충분한 태도로 말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재생산과 과잉인구 사이의 연관성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는 이론가이기 때문이다.
최근 보겔의 <마르크스주의와 여성의 억압>에 대한 소개에서 수 퍼거슨(Sue Ferguson)과 데이비드 맥낼리(David McNally)에 따르면, 1980년대 초 리즈 보겔에 의해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 논쟁에 소개된 가장 중요한 혁신 중 하나는 마르크스의 자본 축적 이론의 좌표 내에서 여성 억압에 대한 그녀의 추론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 사이의 불협화음을 주장했거나 혹은 여성 억압에 대한 마르크스의 심각한 누락으로 인해 그의 사상의 효용성이 줄어들었다는 다른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과는 달리, 보겔은 마르크스의 <자본>은 여전히 자본주의 하의 불평등한 젠더 질서의 뿌리를 파악하려는 이론적 나침반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이 문제에 대한 마르크스 서술에는 한계가 있다. 특히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지배 사회에서 노동력이 재생산되는 과정을 설명하기 위한 주장들을 발전시키지 못하거나 생략한 그런 장소들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이러한 한계를 보겔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자본>과 특히 생산과 재생산에 대한 통찰력은 여성 억압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으로 남아 있다.
보겔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하의 여성 억압의 뿌리가 노동력 재생산의 핵심 과정에서 여성에게 할당되는 특수한 역할(생물학적 근거를 포함하는)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해준다. 따라서 여기서 사회적 재생산은 노동자의 노동할 수 있는 능력(그리고 착취당하는 것)의 재생산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노동자 ‘군대’를 재생산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겔의 핵심적 공헌은 노동력의 생산 및 재생산의 현장으로서 노동계급의 가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었다. 그 내부 구조와 동역학이 아니라 자본의 재생산에 대한 구조적 관계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러나 보겔은 역사적으로 결정된 사회-경제적 형태로서의 가족 형태가 자본주의의 재생산에 기능적으로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사실 자본주의는 노동력에 대한 끊임없는 필요를 보충하기 위해 다른 수단들에 의존할 수 있다. 게다가, 보겔은 노동력이라고 불리는 그 특수한 상품의 재생산이 노동계급과 계급사회의 재생산에 해당한다고 이해하고 있다. 여기에서 후자인 계급사회는 비결정론적인 또는 간명한 설명을 도출하기 위해 심층적으로 분석해야 하는 방대한 장치들의 집합(이데올로기적, 제도적, 경제적, 정치적 등)을 수반한다.
보겔이 "전체 사회재생산"을 말하는 것은 그녀가 이 단계에서 문제와 씨름할 때이다. 그리고 그녀가 거의 자신도 모르게 과잉인구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도 바로 여기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전체 사회재생산의 단계에서 사회적 재생산은 개별적인 직접 생산자가 아니라 유지되고 대체되는 노동자들의 전체이다. 그러한 노동력의 재생산이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최소한 현재 노동자들의 집합은 완전히 새로운 집합으로 대체될 수 있다. 더 가능성이 높은 경우는, 기존 노동력이 세대별 그리고 새로운 노동자에 의해 보충되는 것이다. 노동자의 자녀들이 자라서 노동인구에 들어간다. 이전에 참여하지 않았던 여성들이 생산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사회의 경계 밖에서 온 이민자나 노예들도 노동력으로 들어간다.
간단히 말하면 마르크스는 인구법칙에 대해 말하는 일반적인 용어로 이 질문들을 간주했다. "모든 특별한 역사적 생산방식은 역사적으로 그것의 한계 내에서만 유효하게, 그들만의 특별한 인구법칙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현재의 모든 노동자들이 이후의 생산기간 동안에도 일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아프거나, 장애인이 되거나, 너무 늙게 될 것이다. 아동 보호법 또는 여성의 야간노동을 금지하는 보호법이 제정될 때 다른 이들은 제외될 수 있다. 요컨대, 전체 사회재생산의 단계에서 노동력의 재생산 개념은 제한된 인구 단위의 재생산을 뜻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위의 구절에서 보겔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특유의 인구법칙을 논할 때 전체 사회재생산의 문제를 다루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녀는 마르크스의 인구법칙에 대한 설명이 상대적 과잉인구, 즉 산업예비군 생산에 대한 논의의 맥락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언급하는데 실패한다.
마르크스의 과잉인구론
노동 예비군의 창출에 대한 논의는 마르크스가 자본의 유기적 구성과 "가변 부분을 줄이면서 불변 부분의" 증가를 부추기는 자본 축적 경향을 분석하는 것과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실업자와 저임금 노동자의 풀(또는 마르크스가 말하는 노동 예비군의 세 가지 형태, 즉 유동적 형태, 정체적 형태, 잠재적 형태)을 만드는 것은, 살아있는 노동력(즉 임금과 노동자)의 크기와 가치가 감소하는 대가를 치르면서 생산수단(즉 기계)의 크기와 가치를 증가시키려는 자본의 필요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분석에서, (a) 개별 자본의 총합인 사회 자본의 규모 증가 (b) 생산 규모의 확대 (3) 자본 축적으로 야기되는 노동자 수의 증가와 생산성 증대는, 더욱 더 "자본에 의한 노동자의 견인이 그들의 더 큰 반발을 동반하는" 상황을 만든다.
마르크스의 경우, 이 세 가지의 상호 관련된 과정들은 노동 인구가 증가하는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 "노동인구를 생산하는 자본의 축적과 함께, 그 자체가 상대적으로 과잉으로 만들어지는 수단에 의해 상대적 과잉인구로 변화한다. 그리고 이것은 항상 그 증가 규모에 따른다." 마르크스는 이것을 인구법칙이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다른 생산방식이 그들 자신의 상응하는 인구법칙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자본주의적 생산방식 특유의 것이다.
자본주의적 생산방식 하에서 과잉 노동인구가 창출되는 역설은 과잉 노동인구가 "축적의 필수 생산물"이면서 동시에, 이러한 과잉인구가 그러한 축적의 지렛대라는 점이다. 즉, “과잉 노동인구는 [마치 자본이 자기의 비용으로 육성해 놓은 것처럼] 절대적으로 자본에 속하며 자본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산업예비군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이미 마르크스 시대에 이주민들은 과잉 노동인구의 자본주의 재생산 안에서 특별한 장소를 차지했다. 이는 자본가들이 임금 규율을 유지하고 분업과 지배 논리를 적용하여 노동계급의 연대를 억제할 수 있게 한 상황으로 인한 것이었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의 서유럽에서 이들은 주로 토지 강탈과 산업화 과정으로 인해 도시나 인근 지역이나 국가로 이주하도록 강요된 농촌 노동자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이러한 강요만큼이나, 성장하는 도시 제조업 산업에 노동력을 공급하기 위한 국가 정책으로 인해 이주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과잉인구 생산에서 노동계급 여성들이 차지하고 있는 특수한 입장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르크스는 자신도 모르게 다음과 같은 유명한 편견을 드러내고 있었다. 여성의 주된 역할은 노동자로서가 아니라 사회적 재생산자의 역할이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의 역할을 노동 예비군으로서 논의한 것은 대부분 1970년대와 1980년대였다. 동시에, 바로 그 같은 시기, 즉 남유럽과 남반구에서 이민자의 추가 유입을 중단하는 정책과 맞물린 시기에, 이주 학자들은 이주민들이 고전적인 노동 예비군으로서 자본주의 경제에서 하는 역할을 논의하고 있었다. 1973년 오일 쇼크가 시작되자, "유럽 노동자들의 임금을 낮춘다"는 고발에 의해, 이주자들은 정말로 그들의 일자리를 잃은 첫 번째 사람이 되었다.
이주여성, 사회적 재생산 및 과잉인구
따라서 사회적 재생산 이론과 과잉인구 이론은 전통적으로 세 가지 가정에 근거하여 발전해 왔다. 첫째, 사회적 재생산 활동은 상품화되지 않고 가정에서 여성 구성원에 의해 수행된다. 둘째, 노동 예비군의 대열을 구성하는 이주 노동자들은 주로 생산분야에서 고용된 남성 노동자들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부분 암묵적으로 그리고 종종 이러한 이론적 틀의 언급 없이, 비이주 여성들과 이주 여성들 양자 모두가 이러한 대부분의 사회적 재생산을 담당하고 노동 예비군 대열을 채우는 진영에 함께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1980년대 후반부터 우리가 현재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것이 이 시나리오를 급격하게 변화시켰다. 우선 유럽 여성들이 유급 노동력에 대거 강제로 진입했다. 비록 각 나라마다 각기 다른 상황과 다른 형태지만, 대다수의 취업연령대의 여성들은 현재 어떤 형태로든 가정 바깥에서 고용 상태에 있다. 게다가, 이민자 인구는 더 이상 주로 남성이 아니다. 반대로 일부 유럽 국가에서는 여성들이 이주자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젠더 학자, 이주 학자들이 잘 알고 있듯이, 이 두 과정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전통적으로 그들에게서 기대되는 사회적 재생산 임무를 수행할 시간과 의지가 적은 세계 북반구의 많은 여성들이 있는 한, 그들은 점점 더 이러한 일들을 이주 여성들에게 외주를 준다. 일반적으로 간병인, 청소부, 어린이와 노인, 또는 사회적 재생산자에 대한 수요는 지난 30년 동안 너무 많이 증가하여 이제는 이주의 여성화의 주요 이유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재생산의 세계적 위기에 의해 야기된 현상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 시나리오에서 비이주 여성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생산적 영역에 진입하는 것뿐만이 아니다. 마리아 카라메시니(Maria Karamessini)와 질 루베리(Jill Rubery)의 말을 인용하자면 여성들은 "노동시장에서 자발적으로 철수할 때도, 실업으로부터 남성을 보호하는 완충 역할이나 노동 예비군 구실을 하지 않는다".
다른 한편, 이주 여성들은 상품화된 형태로 사회적 재생산에 종사할 뿐만 아니라, 내가 다른 곳에서 주장했듯이, 그들은 노동 예비군을 편성하는 것으로는 거의 묘사될 수 없다. 이는 단순히 그들이 제조업이나 건설업종보다는 서비스업에 더 자주 종사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 대개 노동 예비군 창설과 함께 진행되는 복잡한 정치·이념적 과정 - 즉, 이주자들을 일자리 도둑으로 비난하는 것 - 이 사회적 재생산에 고용된 이주여성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도 이 여성들이 유럽 여성의 일자리를 훔쳤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들의 일은 유럽 여성들의 가정 바깥의 활동에 대한 참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재생산은 여전히 널리 퍼져있는 여성의 일거리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널리 퍼져있는 인종화된 일거리다. 좋지 않은 일거리로서 사회적 재생산 업무의 지위는,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비생산적이고,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 저숙련의 것으로, 낮은 급여의 원인이 된다. 인종화된 여성으로서, 이주여성들이 현장으로 들어오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사실 사회적 재생산은 젠더주의의 규칙과 가정 내의 "성 계약"을 따를 뿐만 아니라, 여성은 여전히 재생산 및 돌봄을 담당하는 주체라는 것을 확립한다. 그것은 또한 "인종 계약"의 규칙을 따르는데, 이에 따르면, 소수 민족과 유색인종은 여전히 사회에서 가장 바람직하지 않고 가치가 낮은 일을 수행하는 사람들이다.
만약 사회적 재생산 이론의 주요 목적 중 하나가 가정에서의 성적 억압의 뿌리와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계급 가정을 지배하는 노동의 성 분열을 이해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점점 더 상품화되고 이주자들에 의해 수행되는 사회적 재생산의 현대적 지위를 고려하면, 우리는 사회적 재생산을 인종적 억압과 연관지어 연구할 필요가 있다. 사회적 재생산은 정말로 점점 더 젠더와 인종적 억압 사이의 교차점을 이해하는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또 다른 한편, 과잉인구 이론의 주요 목표 중 하나가 어떻게 자본주의 축적이 늘어나는 인구 의 빈곤화와 특히 인구의 특정 영역(여성, 이주민)의 만성적인 실업을 요구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라면, 비이주 여성 및 이주 여성들은 노동력 수요의 예비군과 점점 덜 연결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동의 신자유주의 조직화가 어떻게 젠더 질서와 인종적 위계를 재편성하는지를 연구해야 한다.
(기사 등록 2019.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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