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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과 주장

신은 당신을 용서하지 않는다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9. 3. 4.

윤미래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 그것을 영화화한 이창동 감독의 밀양은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무척 불편한 이야기다. 아이를 죽인 살인범을 용서하기로 결단하고 그를 찾아온 피해자의 유족에게 하느님이 용서하셨으니 피해자의 용서는 따로 필요없다고 말하는 살인범의 모습에는 일말의 정의감이라도 남아 있다면 누구나 분노하지 않을 수 없고,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신이 무슨 자격으로 용서한단 말인가하는 어머니의 절규 앞에서는 일말의 염치라도 남아있다면 누구나 고개를 떨구지 않을 수 없다.



 

교회는 용서를 말해도 되는가? 아무리 큰 죄인이어도 하느님은 사랑하신다고 말해도 되는가? 인간의 교회가 인간의 정의를 초월하는 것을 인간은 용납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이 그토록 통렬한 것은 피해자로부터 마지막 한 조각의 존엄, 마지막으로 남은 유일한 행위성마저 박탈하고 그녀에게 저질러진 부정의로부터 그녀를 내친 것이 교회의 부정이나 비리, 횡포의 문제가 아니라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있고 고통이 있는데, 그 고통에 참여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가해자에게 사랑과 용서를 말하면서 응보와 단죄의 권리마저도 빼앗아가도 좋은가. 그것은 사람을 죄에서 구하기는커녕 죄 있는 사람에게 자기 만족을 주기 위해 죄 없는 사람을 벼랑 끝으로 떠미는 최악의 영적 폭력이 아닌가.

 

그것은 구원이 아니라 도피라고, 얼마 전부터는 생각하게 되었다. 하느님은 죄인을 용서하지 않는다. 그를 미워하고 내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반성하고 참회하지 않은 시간은 물론이고, 그가 유괴와 살인을 저지르는 바로 그 순간에조차도 그의 사랑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그의 온유함은 조금도 가시지 않는다. 더는 미워하지 않겠다는 선언으로서의 용서는 인간의 것이다.

 

하느님은 그저 잃어버린 어린 양을 염려하고 슬퍼하며, 돌아오라고 부를 따름이다. 인간이 죄를 저지르는 까닭은 신이 인간을 버려두었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신을 믿고 의탁하여 성실하게 선을 행하는 대신 눈앞의 결실을 탐하고 눈앞의 원수를 미워하는 어리석은 충동에 몸을 맡겨, 하늘의 천사 같은 존재 대신 가련한 짐승이 되기를 택하여 신을 떠나고 신을 미워하는 것이다.

 

그러니 회개는 우리가 신을 용서하는 것, 고해는 우리가 신과 화해하는 것, 신이 자신이 내쳤던 인간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의 자식으로 돌아가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 길이 너무 멀어 사람의 이성이 다 헤아릴 수 없고, 그 결실이 너무 높고 큰 것이라 사람의 손으로 만질 수 없어도, 그래서 속없고 어리석고 심지어는 안이한 사람으로 보이게 되더라도, 그래도 주의 가르침을 믿고 하느님의 자식으로서 살겠다고.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 되는 길로서 주께서 가르친 것이 무엇인가? 네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너의 주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아끼라는 것이다. 세계의 모든 어리석음과 이기심이 신성 모독과 같이 너를 비참하게 하더라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받는 고통에 매순간 함께 괴로워하게 되더라도. 이 세상에서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 자기만 생각하는 시야 좁음이 차마 감당할 수 없이 끔찍하고 고독한 죄악이 되어버리더라도. 모든 죄와 악이 낳는 상처와 죽음을 낱낱이 제 무게대로 느끼고, 그것을 숨기거나 어쩔 수 없다며 짓밟고 넘어가려는 세상에 맞서 평생 싸워야만 한다고 해도.

 

그래서 어렵고, 그래서 버거운 것이다. 용서는 당신의 몸과 마음을 평화롭게 해주지 않는다. 반대로 하느님께 운명을 완전히 내어 맡겼을 때에만 얻어지는 궁극적인 평화가 아니고서는 견딜 수 없는 고난과 투쟁으로 가득찬 가시밭길로 당신을 인도한다. 세상의 법을 적으로 돌리며 아무도 이해 못할 금기와 의무를 창안하여 없는 싸움을 일부러 벌리지 않아도,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 자체로 전쟁이다. 교회에 적을 올리고 몇 가지의 교리에 맹신을 서약해야 이해할 수 있는 종파적 인습이 아니라, 어린아이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고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보편적인 이야기를 그저 밀고 나가는 것이 신앙의 본령이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임을 알고 돌이킬 수 없이 희구하게 되어 버렸을 때 사람은 그런 미친 짓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교회의 인감이 찍힌 호적 등본을 들고서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다, 이걸 봐라고 저가 죽인 사람에게 들이대는 사람은 죄가 무엇인지도 자녀됨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그저 양심의 비난과 돌아올 업보가 두려워, 세상의 선악을 초극한 사랑을 세상의 차원으로 끌어내려서 그것으로 선인의 지위를 점령하고 타인의 고통으로부터 스스로 차단하는 방벽으로 전용하고 있을 뿐이다. 수많은 교회들이 바로 이런 거짓된 위안을 팔아먹으며 그것을 하느님의 은혜라고 속인다. 그들 자신조차 그 거짓말에 속고 있으니 사기보다는 집단 망상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세상은 가혹하고 인간은 나약하니, 그렇게 도망친다 한들 그것 역시 이해하고 연민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진실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사람을 죄에서 구하려 한다면 그것이 우리의 죄악의 연장이며, 세계도 인간도 조금도 나아지게 못 하는, 구원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속세의 요령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도 없다.

 

복음은 고통을 마취하라고 있지 않다. 오히려 고통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고통을 주신 것은 무언가 아주 크게 잘못되어서 우리가 사망으로 가고 있을 때 우리가 그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우리가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살게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낳은 죽음들을 응시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기사 등록 20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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