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렌 라크너(Helen Lackner)
번역: 권순욱
제주도 난민 문제가 이슈가 되면서 예멘에서 왜 전쟁이 벌어지고 난민이 생겨나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이 글은 아랍과 이슬람에 대한 막연한 편견과 낙인이 아니라 구체적 분석을 통해서 그것을 설명해주고 있다. 지배계급의 암투, 기층 대중의 불만, 서방과 주변 국가들의 개입, 신자유주의 국제금융기구 등이 여기에 작용했고 최악의 인도주의적 위기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피해 온 난민들을 거부하거나 비난하는 것은 도저히 정당화될 수 없다. 이 글의 필자인 헬렌 라크너(Helen Lackner)는 영국 런던대학 SOAS(동양아프리카연구학원)의 런던 중동연구소 연구원이며, <위기 속의 예멘: 독재체제, 신자유주의, 국가 붕괴>의 저자이다. 길고 쉽지 않은 글을 정성껏 번역해준 권순욱 동지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출처:
예멘은 지금껏 가장 심각한 위기에 사로잡혀 있다. 한편에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현직 대통령 압두 라부 만수르 하디(Abdu Rabbuh Mansur Hadi)의 정부와 사우디 아라비아가 주도하는 연합군에 충성하는 세력이, 다른 한편에 후티(Huthi)반군 운동과 전직 대통령 알리 압둘라 살레(Ali Abdullah Saleh)의 동맹세력이 내전을 벌이고 있고, 이 내전으로 인해 나라가 황폐해졌다.
이 세계에서 요동치는 한 지역의 현재 상황을 묘사하기에는 혼란이라는 표현이 적합하다. 2011년 봉기 동안 수십만 명의 시위자들이 안정되고 평화로운 민주국가를 요청했지만, 그 요청이 즉시 실현될 가망은 없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어째서 평화는 고사하고 적대행위라도 끝내자는 국가간 중재안조차 가망이 없는가?
갈등이 일어나는 이유는 엘리트층 내부의 적대, 점점 빈곤해지는 대중들의 요구상승, 걸프협력회의(Gulf Cooperation Council, 이하 GCC)와 서방 국가만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금융업자들이 벌인 국제개입이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2017년 7월 12일 UN 예멘특사는 안전보장이사회에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예멘의 상황은 극도로 심각합니다. 갈등은 날마다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인도주의적 상황은 처참합니다… 이 나라가 겪는 긴급상황은 단순히 한 가지만이 아니라 많고 복잡하며, 20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 그 규모와 효과는 전쟁종식 이후에도 오래 남아있을 것입니다.”
또한 UN은 예멘에서 콜레라 창궐이 전세계적으로 가장 최악으로 기록되었다고 선언했다. 이제 콜레라 의심 사례는 30만 건이 넘었고, 이 풍토병의 결과로 1700명이 넘는 이들이 사망했다. 4000만 명이 식량불안정 상태에 있고, 그 중 거의 700만 명이 아사 위험에 처해있다.
이 논문은 1990년 수립된 예멘 국가의 해체 이면에 있는 주요 원인들을 탐사한다. 시위 초기에 있던 약속들은 2011년 봉기, 2012~14년 과도정부의 실패, 후티 반군의 사나(Sana’a) 장악과 살레와의 동맹, 사우디 연합군의 개입을 거치며 정점에 이르렀던 잇따른 문제들에 의해 내동댕이쳐졌다. 또한 이 문제들은 이 사건들을 벌인 근원을 해체하며 예멘 국가의 붕괴로 이어졌다. 그것이 2015년에 시작된 국제적 군사개입이 전쟁의 장기지속과, 전쟁이 대중들에게 미친 재앙적인 결과를 확실하게 만든 이유이다.
예멘공화국의 기원
1990년, 예멘아랍공화국(Yemen Arab Republic, 이하 북예멘)과 예멘인민민주주의공화국(People’s Democratic Republic of Yemen, 이하 남예멘)이 통합하면서 예멘공화국(Republic of Yemen)이 수립되었다. 북예멘은 1962년 한 공화파 장교 무리가 이맘령(領)을 전복하면서 생겨났고 남예멘은 영국이 관할하는 아덴(Aden) 시와 영국 보호령에서 발생했다.
양국은 상이한 정치적 지향을 갖고 있었다. 북예멘은 자본주의 노선을 따랐던 반면, 남예멘은 아랍 세계에서 유일한 사회주의 국가였다. 두 나라는 이러한 차이가 있었지만 공통된 특징들을 공유했고, 이 특징들이 예멘인들을 하나의 민족으로 만들었다.
양국은 공통된 문화를 갖고 있었다. 두 정권이 각기 상이한 방향으로 변화시키려 노력했지만 두나라의 근본적인 사회구조는 비슷하였다. 석유가 발견되길 바라며 농업과 어업이라는 경제적 기반을 공유했다. 여러 예멘인 가족만이 아니라 실은 양 국가조차 아라비아 반도와 그 너머에서 해외 이주노동자들이 보내는 송금에 대단히 의존했다.
통일은 국경의 양쪽에서 가장 대중적인 정치 슬로건이었고, 온 나라의 대중들이 이를 받아들였다. 통일은 민주적인 과정을 통하기보다는 인위적으로 이루어졌다. 북예멘의 알리 압둘라 살레 대통령[재임 1978-2017년]은 당시 남예멘의 지도자였던 알리 살렘 알 바이드[남예멘 집권당인 예멘사회당의 총서기. 1986~1994년 재임―역자]를 설득하였고, 남예멘의 집권당 예멘사회주의당(Yemeni Socialist Party, YSP)이 연방국 협정에 대한 약속을 확인하면서 단 몇시간 만에 완전한 통일에 동의하였다.
이 협정은 기존의 각 국가에 상당한 자율성을 남겨두었다. 이것이 긴장으로 이어질 기반을 놓았고, 1994년에 내전으로 이어졌다. 이 내전에서 살레는 여러 분파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 결정적인 승리를 얻어냈다. 이 분파들은 1986년 남예멘 내부갈등에서 패배한 이들로, 그 중에는 현재의 ‘적법한’ 하디 대통령만이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에서 돌아온 살라피스트[세속에 물들고 변질된 교리를 7세기 이전의 순수한 이슬람으로 되돌려야 한다는 근본주의자―역자]들도 있었다.
2017년 12월 5일 예멘의 내전상황. 붉은색은 하디 대통령과 사우디 연합군 등이 장악한 지역이며, 녹색은 후티 반군이 통제하거나 그 영향 하에 있는 지역이다. 파란색은 알 카에다나 ISIS의 점령지이다.[출처: 알자지라]
커져가는 위기와 2011년 봉기
예멘공화국이 생기고 20년 동안을 특징짓는 것은 일련의 경제 위기였다. 예멘은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이 일어난 뒤, 이라크에 대한 군사행동을 승인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678호에 반대표를 던졌고, 그로 인해 80만 명이 넘는 예멘인들이 GCC 회원국에서 추방당했다. 이로 인해 예멘으로 가는 해외 경제원조가 0에 가까울 정도로 줄었고, 동시에 실업률이 높던 당시에 백만 명에 가까운 구직자들이 늘어났다.
1995년에 이 위기가 약해지면서 원조가 재개되긴 했지만, 기억할 만한 점은 대부분 GCC 회원국에 가있는 해외 노동자의 송금이, 예멘 경제에 원조보다도 더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더군다나 송금은 대부분 농촌에 위치한 가구들에 직접 도달하는 반면, 원조는 초기 몇 년 동안은 국가기구로 향했다.
1990년대 말에 이러한 추세가 변화했다. 당시 여러 국제금융기구는 “효율적인” 사적부문 원리에 따라 작동하는 예멘개발사회기금(Social Fund for Development)과 공공사업프로젝트(Public Works Project) 등의 기구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여 적극적으로 국가를 약화시켰다. 사실상 이 기구들은 준국가기관으로, 봉급을 통해 각 부처의 우수한 관료들을 가로채고 부처의 기술적 역량을 약화시켰다.
기후변화, 급속한 인구성장, “엘리트층” 부패와 같은 여타 요소들이 빈곤을 증가시키고, 다수의 대중과 살레 정권의 수혜를 입은 소수집단 간의 격차를 악화시키는 데에 기여했다. 이주의 제약과 국내 일자리 정책의 부실함 속에서 예멘 내외에서 얻을 수 있는 잠재소득은 부정적 영향을 받았다.
세 가지 사건을 겪으면서 정치적 긴장이 자라났다.
1) 여러 원내야당이 2003년 야당연립(Joint Meeting Parties)으로 재구성되었다. 이 선거연합은 알 이슬라 당(al-Islah, 예멘 개혁을 위한 연합)[북부의 하쉬드족[전통적으로 북예멘과 살레 대통령을 지지해온 부족―역자]과 예멘 전력의 무슬림형제단 지지자라는 두 가지 주요 집단이 합쳐진 거대야당]과 예멘사회당, 바트주의 세력, 나세르주의 세력, 민중주의 세력과 알 하크 당(al Haq, 진리당)[마지막 두 개는 사다(Sa’ada) 지역을 기반으로 한 정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2) 후티운동이 발생하여 2004년 살레 정권에 반대하는 무장투쟁에 들어갔고, 2010년까지 6번의 소규모 전쟁이 일어났다.
3) 2007년 이후 남부에서 분리주의 운동이 등장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평화적으로 접근하였으나, 정권의 공격적인 대응이 이 운동의 성장과 영향력 증가에 기여했다.
사회경제적 위기와 결합하여 거대한 봉기를 촉발할 방아쇠였던 한가지 요소가 누락되었다. 당시 [아랍의 봄이 일어났을 때―역자] 튀니지와 이집트 정권이 매우 성공적으로 전복되면서 그 요소가 등장했고, 이는 전국의 예멘인들이 근본적 변화가 가능하다고 믿게 만들었다. “살레는 물러나라”라는 슬로건이 상징하듯이, 반정부 운동에 수천명의 청년과 여성이 독립적으로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야당의 당원도 참여했고, 그 뒤에 당 지도부도 합류했다.
2011년 3월에 군부와 치안세력이 분열하면서, 예멘의 상황은 대립하는 군부 분파들 간의 대규모 전쟁에 가까워졌다. 살레 반대파 속에는 평화적인 시민운동이 여전히 있었으나, 점점 여러 정당, 특히 알 이슬라 당과 후티 반군 운동에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발전은 “국제사회”가 예멘 위기의 평화적 해법을 추구한다는 명분으로 개입할 수 있게 되었다.
걸프협력회의 협약과 과도정부
2011년 동안 일어난 여러 사건들은 살레 정부를 점차 약화시켰고, 2011년 말에 걸프협력회의 협약(Gulf Cooperation Council Agreement)으로 이어졌다. 이 조약은 살레가 사임하고 전(前) 부통령 압두 라부 만수르 하디(Abdu Rabbuh Mansour Hadi)가 대통령이 되어 과도정부를 이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걸프협력회의 협약에 따르면, 과도정부는 2년 동안 국제사회로부터 정치적, 경제적 지원을 받기로 되어있었다. 협약의 내용에는 살레 세력과 야당 세력을 한데 모은 민족통일정부, 군사 및 치안부문의 재건, 예멘 과도정부 이후의 구조를 설계할 범국민대화회의(National Dialogue Conference, NDC)도 담겨있었다. 그 뒤에 제헌위원회, 헌법초안의 국민투표, 선거가 이어질 예정이었다.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이 절차 중 대다수가 공식적으로 수행되었다. 그러나 이는 바라던 결과를 달성하는 데에 실패했다. 이 실패는 주로 내재적 설계 오류 때문이었다. 살레가 예멘에 머무를 뿐 아니라 계속 국민회의당(GPC)를 이끌도록 허용한다든지, 정부직의 절반을 국민회의당에 분배하는 등의 오류가 있었다. 이러한 배치는 2011년의 실제 역학관계를 반영하였을 지라도, 민족통합 정부의 잠재력을 위태롭게 했다.
두 주요 집단(국민회의당과 알 이슬라 당)에서 뽑힌 장관들은 권력을 위해 서로 경쟁하며 적극적으로 상대를 약화시켰다. 과도정부는 예멘의 가장 부패했다는 달갑지 않은 평판만 늘렸지만, 생활조건의 악화를 막는 데에 실패했다. 국제사회 역시 사회경제적 발전이 없었던 데에 상당한 책임을 공유했다. 이 기금은 2012년에 미화 80억 달러에 가까운 돈을 약속했지만 그 뒤 여러 핑계를 대며 제공되지 않았다. 그 핑계 중 몇 가지는 타당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요소는 공공 서비스가 계속 악화되는 것을 야기했다.
이 시기에 조용히 성장하던 후티 반군은 사다 주 북부에 대한 통제권을 공고히 할 정도로 전진했다. 그들은 자신의 홍해를 향해 서쪽으로 통제구역을 군사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확장했다. 내륙에 갇히지 않도록 미디(Midi) 구에 위치한 작은 항구를 통제하려했고, 사우디 아라비아와의 서부 접경지 전체를 통제하려 했다.
후티 반군은 사우디 접경지인 자우프(Jawf) 주를 향해 동쪽으로도 이동했다. 그 지역에 상당한 석유자원이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후티 반군은 남쪽으로도 확장하여 하쉬드 족 고위지도자들이 차지하던 요충지를 장악했다. 그 뒤 그들은 2014년 중반에 사나(Sana’a) 시에서 북쪽으로 불과 50km 떨어진 암란(Amran) 시에 이르렀다.
과도정권의 쇠약과 후티 반군의 성장에는 여러 지점에서 상관관계가 있었다. 과도정부는 부패하고 무능하며, 대중의 사회경제적 문제를 대처하는 데에 무기력하게 행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후티 반군은 (당시에는 비밀이었지만) 살레와 동맹하여 수혜를 얻었다. 후티 반군의 성공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것은 과도정권 내부의 적대였다. 하디는 알 이슬라 당을 약화시키고자 후티 반군이 그들을 물리치게 두도록 모색했고, 후티 반군을 통제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그가 후티 반군과 살레의 협력을 알지 못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2014년 여름에 열린 대규모 반정부시위는 IMF가 제안한 유가인상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후티 반군은 억압받는 소수파라는 이미지를 활용하며 정부의 책임에 대한 대중의 요구와 압력을 지지하였다. 그들은 마침내 2014년 9월 21일에 사나를 점령하였고, 이후 몇 달 동안 자신의 위상을 공고히 하려 했다.
2015년 1월 동안 범국민대화회의 결과 이행위원회에 제출한 신헌법 초안이 최종결전을 벌일 구실이었다. 후티 반군과 살레는 상이한 이유에서 연방국가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디와 신정부는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후티-살레 군이 남쪽으로 더욱 이동하자, 신정부는 3월에 아덴(Aden) 시를 장악했다. 하디는 사나에서 도망친 뒤 예멘의 임시수도를 아덴 시로 지정했다. 하디와 장관들은 [사우디 아라비아의 수도인―역자] 리야드(Riyadh)로 도망쳤고, 걸프협력회의 회원국에 과도정부를 복구하기 위해 군사지원을 요청했다.
예멘 전쟁의 더 넓은 반경
지역적 맥락에서 보자면 2015년 봄에 살레-후티 세력이 승리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새로 지명된 사우디아라비아 국방부 장관 모하메드 빈 살만(Mohammed Bin Salman)은 젊고 야심 넘치는 인물로, 예멘의 침체를 자신이 새로운 지도자임을 증명할 기회라 보았다. 그는 중동지역에서 사우디 아라비아의 역할을 확고히 하는 데에 결단력이 넘치며 결의도 갖고 있었다.
살만은 서방의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자신의 현대적인 공군이 아랍세계 최빈국의 매우 훈련되지 않은 군대를 쉽게 물리칠 것이라 생각했다. 전쟁 첫날, 사우디 연합군은 예멘 공군을 파괴했다. 2015년 여름까지 지상군의 참전이 긴급과제가 되었다. 이 지상군은 대부분의 경우 아랍에미리트연합 이외에도 수단을 비롯한 연합군 소속국에서 왔으며, 그 중에는 여러 라틴아메리카국가 출신의 용병도 있었다. 이 전술 덕에 연합군은 2015년 가을까지 구 남예멘 지역과 일부 북동부 지역을 ‘해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군사적 답보상태는 여전했다.
UN이 후원한 세 번의 협상과정은 모두 예멘에서 서로 전쟁하는 당파들 사이에 협약계획을 촉진하는 데에 실패했다. 2016년 중반부터 UN의 중재는 또다른 회담도 소집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난 2년 동안 두 가지 주요 정치발전이 있었다.
1) 후티 반군이 통제하는 지역에서 후티-살레 동맹 내부의 긴장이 깊어졌고, 급기야 2017년 12월 4일에 후티 반군이 살레를 사나에 있는 자택에서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은 후티 반군에게 북부 고원지대의 완전한 통제권을 주었다. 덕분에 후티 반군의 힘이 정점에 이르렀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이제 살레에 충성하는 세력들을 적대세력 목록에 추가해야 했다. 그 목록에는 고향에 남아 싸우는 이들도 지도자가 암살당한 뒤 떠난 이들도 있었다.
2) 소위 “해방된” 구역이 분열하고 파편화되었다. 하디 정부가 지닌 주된 특징은 정부가 현지에서 통제력이 없다는 점이다. 남부의 여러 주들은 남부분리주의 세력[이 여러 분리주의 조직 중 현재 가장 영향력 있는 조직은 2017년 3월에 성립된 남부과도위원회(Southern Transitional Council)이다], 여러 지방의 지역세력, 지하디스트를 비롯한 여러 세력들이 통제하고 있다.
아랍에미리트연합은 서부 주에서 보안군(Security Belts), 동부에서는 정예군(Elite Forces)로 알려진 군사 및 치안부대를 설치하고 재정적으로 지원하며, 이들을 훈련시키고 배치하였다. 이 모든 부대들은 주로 지방의 살라피스트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통일된 조직체를 이루지 않고 있다.
북부지역은 (2016년 4월에 임기 시작) 알리 모셴 알 아흐마르(Ali Mohsen al Ahmar) 부통령이 통제하고 있다. 그는 알 이슬라 당 안의 스펙트럼에서 가장 극단에 있는 이슬람주의자이다. 국가기구는 상당히 분열되어 있으며, 그 이유 중 일부는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하디 정권이 관리들의 봉급을 지불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러 국가들이 아랍연합군에 참여하지만, 그 의사결정 과정은 사우디 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연합이 통제한다. 그러나 둘 사이에 정책 및 전략의 차이가 늘어나고 있고, 이 점은 특히 남부에서 두드러진다. 겉으로 하는 말과 관계없이, 아랍에미리트연합은 남부과도위원회와 치안부대를 통해 적극적으로 분리주의자들을 지원하고 있다.
아랍에미리트연합은 지하디스트 조직(알 카에다 아라비아반도지부(AQAP)와 다에시) 문제에 대처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아랍에미리트연합은 대부분 알 이슬라 당 때문에 내전에 관여하고 그들을 체포한다. 알 이슬라 당이 무슬림형제단(Muslim Brothers)이라고 보고 병적으로 혐오하기 때문이다.
외부인들은 온건한 이슬람에게 무슬림형제단보다 더 위험한 극단주의 살라피스트 조직에 지원하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랍에미리트연합과 사우디 정권이 갈라지는 지점은 이 측면에 초점을 두고 있다. 사우디 아라비아는 알 이슬라 당의 주요 지도자인 알리 모셴 부통령을 지지하며, 수십년 동안 무슬림형제단과 연관된 기구들에 상이한 접근해왔다.
심각해지는 인도주의적 위기
빈곤과 영양실조가 심각한 가장 가난한 이 아랍국가에서 현재, 전쟁은 세계 최악의 인도주의적 위기를 야기하고 있다. 2900만 명의 인구 중 2200만 명이 인도주의적 지원을 매우 필요로 하고 있으며, 1600만 명의 개인들에게는 여전히 깨끗한 물과 위생시설이 없다. 1800명이 식량불안정 상태이며, 이 중 800만 명은 아사 ‘직전에’ 있고 100만 명 이상이 콜레라에 희생되었다. 이 수치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약 16,000명이 연합군의 공습에 살해당했지만, 가장 효과적인 무기는 예멘의 주요항구인 호데이다(Hodeida)항과 홍해에 위치한 여타 항구들을 봉쇄하고, 사나 공항의 폐쇄를 실행한 것이었다. 수천 명의 예멘인들이 봉쇄로 인해 발생한 굶주림, 질병 등 여타 부작용들로 사망했다. 이것이 인도주의적 위기를 이끄는 원동력이다.
예멘의 전체인구를 100명이라고 한다면, 74명은 인도주의적 원조를 필요로 하며, 57명은 정수와 정수시설 서비스에 대해 어떤 접근권도 없고, 60명은 식량불안정으로 아사 위기에 있고, 10명의 여성과 아동이 심각한 영양실조에 처해있다. 27명은 심각한 수성설사 혹은 콜레라에 걸릴 위기에 있으며, 53명은 보건 서비스에 대해 어떤 접근권도 없다.[출처: 세계보건기구]
열린 결말의 전쟁?
예멘 전쟁이 지속되는 상황은 주로 두 가지 이유에서 비롯된다. 첫번째로, 국제개입은 복잡한 쟁점들이 지닌 또 다른 한 측면을 덧붙였다. 그 측면이란 예멘과 예멘인들에게 무관한 것으로 보인다. 이 주요 쟁점이란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 사이의 적대이다.
사우디 아라비아는 후티 반군이 “이란의 대리군”에 불과하다며 혐의를 제기했고, 이러한 혐의제기는 중동지역만이 아니라 미국을 비롯해 중동지역 바깥에서도 공식적인 담론이 되었다. 사실 이란의 개입은 최소한에 불과하지만, 이란은 후티 반군에 아주 제한적인 지원을 하는 대가로 프로파간다에서 엄청난 이점을 얻었다. 이 추가적인 요소가 해법의 추구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두 번째 이유는 예멘의 내부와 외부에 있다. 국내적 맥락에서, 서로 다른 편에 있는 수많은 인물들이 이 전쟁에서 이득을 보고 있다. 그들은 전쟁을 끝내야 하는 동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전쟁을 지속해야 할 동기를 갖고 있다. 검문소를 담당하며 (사람들이 살아있기 위해 필요한 기본재, 식량과 연료, 그리고 의료원조를 찾아온 사람들을 비롯하여) 통행자와 재화에 “세금”을 징수하는 남성과 소년들도 이 수혜자에 포함된다.
후티 반군 역시 자신이 통제하는 영역에서 상인과 다른 이들에게 몸값을 요구하며, 자기 주머니를 채우고 “행정부”에 재정을 지원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 현금으로 의료나 교육, 여타 공무에 봉급을 지불하지 않는다.
소위 “해방”지역에서는, 알 카에다 아라비아반도지부와 다에시에 소속된 지하디스트부터, 여러 남부 분리주의 조직의 장교들, 얼마 남지 않은 하디 정부의 추종세력까지 수많은 집단이 전쟁의 수혜자들에 포함된다. 예멘 바깥에서 하디 정부의 일원들은 막대한 봉급을 받으며 연합군에 과도한 재정을 지출하고 있지만, 나라 안의 관료들에게 봉급을 지불하지 못하고 있다. 이 모습은 전쟁의 정치경제가 낳은 아이러니이다.
국제적인 수준에서 보자면, 서방국가들은 사우디 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연합에 매우 복잡하고 값비싼 무기와 탄약을 판매한다.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tockholm International Peace Research Institute, SIPRI)에 따르면, 2013~17년 동안 사우디 아라비아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무기 수입국이었고, 전체 무기의 10%를 수입했다.
무기 수입량 중 사우디 아라비아가 차지하는 비율은 지난 5년 전보다 225% 상승했다. 그 중 미국에서 61%, 영국에서 23%, 프랑스에서 3.6%를 수입한다. 네 번째로 큰 무기 수입국인 아랍에미리트연합의 경우, 미국이 가장 큰 수출국(58%)이며, 그 뒤를 프랑스(13%)와 이탈리아(6%)가 뒤따랐다. 가장 최근에 우리 대부분은 트럼프 대통령이 모하메드 빈 살만과 함께 앉아 최근에 제안된 무기판매량에 대해 “발표와 전시”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결론
이 논문은 예멘의 분열로 이어진 사건들에 관하여 대략적 정보를 제공하였다. 본질적으로 예멘의 붕괴는, 엘리트층 내부의 적대, 계속 고난을 겪어온 대중들의 요구 상승, 그리고 국제개입의 영향이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뒤의 두 가지는 신자유주의 국제금융기구와, 정치적 동기를 갖고 내부의 적대분파를 지지 혹은 반대하는 행위자들에 비롯됐다.
예멘 내전은, 서로 다른 외부 행위자들이 국제적인 적대를 추구하며 국내의 파벌들을 이용하려 한다는 점에서 레바논 내전과 몇가지 특징을 공유한다. 예멘인들은 그 결과로 인해 악몽과 같을 정도로 고통받고 있다. UN 사무총장이 신임 예멘특사를 지명하고, 전쟁을 끝내기 위해 애쓰겠다는 회원국들이 UN 안전보장이사회에 참석하면서 2018년 초에 작은 희망의 빛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 기회의 창은 현 UN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 대대적 변혁을 요구할 것이다. 그 뿐 아니라 현재 공식 협상과정에서 배제된 많은 행위자들을 포괄하는 새로운 복잡하고 정교한 접근법을 요구할 것이다. 이 협상과정은 쉽지 않을 것이고, 특히 사우디 아라비아와 이란의 적대라는 국제적 측면이 사태를 복잡하게 한다는 점을 보았을 때 그 성공은 결코 보장되지 않는다.
(기사 등록 2018.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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