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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과 차별

성폭력과 ‘동의’에 관하여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8. 5. 28.

 

션 루딕(Siân Ruddick)

번역: 두견

 

 

적극적이고 명시적인 동의를 성폭력의 기준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커지고 있지만, 사진계 성폭력 논란에서처럼 카톡 대화를 봐도 본인이 합의한 것이고, 웃으면서 사진도 찍어놓고 무슨 성폭력이냐는 식의 백래시도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성폭력과 동의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글을 소개한다


이 글에서 독립적인 성폭력 관련 변호사인 션 루딕(Siân Ruddick)은 우리가 동의의 정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관해 풀어나간다. 여기서 가해자는 대개 남성이고 생존자는 대개 여성이라고 취급한다. 이것은 가장 일반적이지만, 드물게 여성이 성폭력의 가해자가 될 수 있거나 남성이 생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다른 젠더 정체성을 가진 생존자의 경험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출처: https://www.rs21.org.uk/2016/03/08/on-consent/

 

동의가 과연 무엇인지, 어떻게 느껴지는지, 그것의 잠재적 한계 등의 문제는 성폭력에 대해 새롭게 제기된 논쟁의 주요 측면들이 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동의는 성적 경험과 상호작용의 핵심이다. 그것이 없으면 그 행동은 성폭행이거나 강간이다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법률에 따르면, 누군가가 동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럴 수 있는 능력과 자유가 모두 있어야 한다. 능력의 측면에서 배심원들은 그 사람이 술에 취했었는지, 약에 취했었는지, 잠이 들었었는지, 동의를 판단할 정신적 상태였었는지, 16살이 넘었는지를 고려하도록 요구받는다.(이것은 동의를 위한 법적 연령이다.)

 

자유라는 점에서는 누군가의 신체적 힘이 관여되었거나, 통제받고 있거나 어떠한 학대 관계 속에서 폭력이나 보복의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 동의할 수 있었는가를 고려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강간 재판에서 배심원들은 피고인이 여성에게 성관계에 대한 동의를 얻었다고 믿었을 수 있고, 그의 믿음은 증거에 기반한 합리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해자가 그의 합리적 믿음을 설명할 책임이 있는 경우에, 이것은 성폭력에 대한 복합적인 신화의 맥락 속에서 설명된다. - 그것이 어디서 발생했는가, 누가 가해를 했는가, 폭행의 순간에 생존자는 어떻게 반응했는가 등에서 말이다. ‘동의는 강간 재판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피고인의 방어 수단이다.

 

가해자는 성적 접촉을 증명할 수 있는 법의학 테스트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어떤 테스트도 강간을 입증할 수는 없으며, 피해 생존자와 그녀가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대한 매우 많은 편견에 찬 판단들이 있다. 강간에 직면하면 여성이 비명을 지르고, 싸우고, 달아날 것이라는 기대가 있으며, 그럴 경우에만 우리는 그녀가 동의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은 남성들만이 아니다. 이러한 신화는 여성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이 신화는 여성들이 자신의 경험을 성적 폭력으로 인식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왜냐하면 자신은 비명 지르고 싸우고 도망가고 그런 반응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 자신이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다는 것을 자책하는 여성들은, 그렇게 반응하지 않은 다른 여성들도 탓하게 되기 쉽다. 특정한 형태의 성폭력을 경험해보지 않은 여성도 같은 판단을 내릴 수 있다. “나한테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나는 싫어라고 했을거야. 그러지 않는다면 남성이 어떻게 여성이 동의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겠어?”

 

심리학자이자 외상전문가인 조 로드릭(Zoe Lodrick)은 위험에 직면했을 때 생존을 위해서나 그들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서 뇌가 할 수 있는 다양한 반응(투쟁, 탈주, 얼어붙음, 자포자기, 굴종)을 설명하는 짧은 비디오(https://www.youtube.com/watch?v=mlKmfnMONog)를 만들었다.

 

여기서 성폭력과 동의가 성별에 따라서 구분된다는 게 분명하다. 여성과 소녀들이 자신들의 몸과 쾌락에 대해서 생각하도록 교육받는 것은 남성이나 소년과는 완전히 다르다. 소녀들은 섹스에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즐거움을 얻을 것인지, 자신의 몸을 어떻게 탐구할 것인지 등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배우는 것을 거의 권유받지 않는다.

 

만약 학교에서 성교육을 받는다면 삽입 섹스가 중심적 이슈가 된다. 남성의 사정을 토론의 중심으로 두는 프레임은 섹스가 남성에 의해 여성에게 행해지는 것이라는 식으로 개념을 구성하는 방법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여성의] 노는 노를 뜻한다는 슬로건이나 동의에 대한 안내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남성이 섹스를 원하며 접근할 때 여성은 자기 몸을 지키는 문지기가 돼야 한다는 생각을 강화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이런 생각은 성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주도적인 여성을 부정하고 악마화하며, 남성은 스스로 성적 충동을 통제하지 못하며, 그들이 던진 공이 떨어져버렸을 때 다른 방식으로라도 그것을 충족시켜야 하는 뭔가 특별한 게 있다는 생각을 강화한다.

 

이것은 남성이 스스로 멈출 수 없었고 통제력을 잃었다면서 강간의 핑계로 사용되며, 실제로 그런 경우에 성폭력은 모두 통제력에 관한 문제이다. 그래서 ‘[여성의] 예스만이 예스이다에 앞서 있었던 노는 노를 뜻한다는 충분하지가 않았다.

 

지난 몇 년 동안 미국의 대학 캠퍼스는 성폭력, 동의 및 이것을 어떻게 제도활 것인지에 대한 토론에 초점을 맞춰 왔다. 캠퍼스에서 강간당한 여성이나 동료 학생들이 그들의 학교에서 본 행정에 대해 완전히 실망한 잘 알려진 사례가 여러 번 있었다



미국에서 대학당국에 성폭력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항의 시위  


캘리포니아와 뉴욕에서는 주정부 기금을 받는 대학교가 이제는 명시적 동의표현에 대한 예스만이 예스이다법의 적용을 받는다. 캘리포니아 주법에 따르면 항의나 저항이 없었다고 동의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으며, 침묵 또한 동의를 뜻하지 않는다. 적극적인 동의는 성적 행동 전체를 통해 지속돼야하며, 언제라도 중간에 철회될 수 있다.”

 

일부 사람들은 적극적이거나 철저한 동의를 급진파만의 정의인 것처럼 보고, 남성권리 단체는 이러한 방식으로 동의를 묘사하는 것은 남성혐오적인 페미나치의 승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여성들에게 절대적으로 승리이며, 피해 생존자들과 그들의 지지자들이 성폭력과 동의의 문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이 개념은 동의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이해를 형성할 수 있게 해주는 반면에, 가해자가 회색지대에 숨을 수 있다는 희망은 어렵게 만들 것이다. 동의가 문제가 되면 회색 영역이나 흐린 선이 없다. 이것은 오해나 의사소통 오류에 관한 것이 아니다.

 

생존자들이 엄청난 용기를 내어 폭로를 했을때 아주 드물지만 일부 가해자들이 그녀가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을 당시에는 알지 못했지만, 이제 그렇다고 말을 하니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을 나는 믿지 않는다.

 

강간을 하는 남성들은 (그리고 성폭력을 저지르는 여성들은) 그런 식으로 행동 하겠다는 결정과 일련의 선택을 한 것이다. , 타인의 자기결정권을 빼앗음으로써 스스로가 힘이 세고 또 그래도 된다고 느낀 것이다.

 

남성 가해자들이 자제력을 잃은 것이라는 생각은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강간이나 학대를 저지르지 않는 남성에게 엄청난 피해를 끼치는 일이다. 마치 모든 남성들이 다 경솔한 짐승들인데, 그 중 일부 남성들은 다른 남성들 보다 자제력을 발휘한 듯 묘사하면서 결국 강간범들의 책임을 면하게 해준다.

 

따라서 우리가 동의는 상호적이고 열정적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성관계에서 파트너 모두가 편안하고 통제하고 있는 기분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주목받아야 할 것은 가해자이며 그들은 왜 그것을 동의로 해석했는지 설명해야 한다. 소리를 지르거나 라고 말하거나 밀치지 못하고 얼어붙고 주저앉았던 것에 대해서 생존자가 수치심을 느끼면서 설명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왜 여성이 반응하지 않거나, 잠들어 있거나 의식이 분명치 않을 때 성적인 자극을 느끼는 것인지에 대해 남성들에게는 묻지 않는가? 울고 있거나, 당신을 잘 쳐다보지 못하면서 얼어붙어 있는 누군가와 섹스를 하는 것이 과연 정상적인 것인가?

 

에딘버러 강간 사건에 대해서 나딘(Nadine)은 이렇게 썼다


우리는 사람들이 기대한 것을 충족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무엇이 기분좋은 것인지 발견하기 위해 서로 평등하게 살펴보는 것으로서 섹스를 프레임화하기 시작해야 한다. 동의에 있어서 열정의 구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이 문제로 나아가는 핵심 단계이다.” 


그래서 나는 혁명가들로서 우리는 동의로도 아주 충분치는 않다고 말하기보다는, 무엇이 실질적인 동의였는지를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행위보다는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젊은이들이나, 우리의 파트너들이나, 우리 자신과 그런 대화를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이것은 모든 성적 행위가 충분히 합의된 끝내주게 멋진 것이 돼야만 한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동의의 가능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면 성적 경험에서 우리가 열망하는 것의 지평선을 더 넓힐 수가 있다.

 

동의가 중요하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도울 뿐 아니라, 성폭력 생존자들을 침묵하게 하는 신화에 도전할 수 있게 만들어 주고, 성폭력 생존자들이 인정받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 없이 자신들의 경험을 말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 준다. ‘동의는 정말로 멋진 것이고 결코 있으면 좋고 없어도 되는 선택사항이 아니다.    



(기사 등록 2018.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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