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지금 ‘미투 운동’이 한국 사회 전체를 뒤흔들며 바꾸고 있다. 피해생존자가 직접 기자회견에 나선 다음날 바로 정봉주가 항복하는 걸 보면서, 곳곳의 백래시 속에 비관에 빠졌던 내가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역시 모든 것을 걸고 투쟁에 나선 주체들의 용기와 힘은 쉽게 무너질 수 없었다.
또, 이윤택을 욕하고 미투를 지지한다고 말하다가도, 자기 주변에서 그런 일이 생겼을 때 한계를 드러내기(김어준 씨처럼) 쉽다는 게 다시 드러났다. 그래서, 우리는 저 멀리 몇몇 ‘괴물’들에게 돌을 던지고 비난하고 꼬리 자르기를 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단지 일부 개인의 잘못이나 인간적 결함이 아니라 우리 사회와 공동체의 문화를 돌아보면서, 내 주변에서부터 무엇이 부족했는지 함께 배우고, 더 나은 기준을 세워나가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그럴 수 있다면 지금의 과정은 우리 모두가 함께 배우고 거듭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성폭력에 대한 기준을 어떻게 높이고 바로 세울지 살펴보고자 한다. 그것은 대체로 페미니즘과 반성폭력 운동이 힘겨운 고투 속에서 만들어온 성과들이고, 나 자신부터 부족했고 이번에 미투를 보면서 배울 수 있었던 점들이다.
우선 우리는 “‘상대방의 동의를 확실히 확인했는가’를 핵심으로 성폭력을 판단해야” 한다. 여기서 “동의란, 속임수와 압력이 없는 합의를 뜻한다. 그리고 언제든 철회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정보가 공유된 상황에서, 판단 능력 저하의 상태가 아니고, 정확하고 명확한 동의의 의사 표현”이 있었어야 한다.(http://m.ildaro.com/7429)
기계적 중립이 아니라 어느 정도 ‘피해자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필요하고, 일부 남성들처럼 분명한 동의가 아니라 ‘형식적, 암묵적 동의’나 ‘순응적 태도’를 내세우면서 ‘합의된 관계’를 주장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http://v.media.daum.net/v/20140805172508260) 즉 여기서 의사소통의 오류와 성폭력은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이 문제에서 ‘예스/노를 제대로 말하지 않은 피해자’를 탓하면 안 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이 사회가 여성차별적이고, 성폭력적인 문화와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를 보지 못한다면,
“폭력이 뒤따를지 모른다는 완전히 정당한 공포에서부터, 상대방에게 상냥하고 기분을 맞춰주도록 여성이 사회화되는 것(이 또한 어떤 점에서 생존 전략이다), 당신이 좋아하고 신뢰했던 누군가가 태연하게 그렇게 나오는 것에 대한 혼란으로 얼어버리는 것까지 - 어떤 여성이 그러한 상황에서 ‘당장 떠날’수가 없는 많은 이유들을 무시[하게 된다.]”
http://www.anotherworld.kr/537?category=713458
친밀한 관계 속의
특히 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 것은 ‘친밀하고 사적인 관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친근한 사람 사이의 성폭력”은 “가장 다루기 복잡하고 힘든 유형의 성폭력”(<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 9쪽, 이하 <그것은>)이고, 성폭력에서도 압도 다수를 차지한다. 즉 우리가 주변에서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많이 부딪히게 될 성폭력 사건은 바로 이런 종류의 다루기 힘들고 복잡하며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것들일 가능성이 크다. 이윤택이나 김기덕 같은 경우가 아니라 말이다.
이런 사건에서 여성들은 “친밀한 관계에서 단호한 거절을 어려워하게 한다. 때문에 많은 여성이 ‘오빠가 싫어할까 봐’라는 이유로 불편한 스킨쉽을 참게 된다.” 상대방과 친밀하고 좋았던 관계가 어긋나게 될까봐인데, 상대방을 신뢰하고 큰 호감과 애정을 가지고 있을수록 더욱 더 그럴 것이다.(http://hotline25.tistory.com/555)
낯선 이에게 폭력과 강압을 통해 당하는 성폭력과 크게 다른 것이다. 친밀한 관계에서 심지어 여성은 자발적으로 보이고, 그것을 즐기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특히 서로 모르는 낯선 사이가 아니라 친밀한 관계에서는 같이 어울리고 술을 먹고 대화하고, 데이트를 하다가 사건이 벌어지기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여성이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성희롱일 수 있으며, 난처한 것처럼 보이지 않아도 실은 성희롱”(<부장님, 그건 성희롱입니다> 40쪽, 이하 <부장님>)일 수 있으며 “자발적이어도 원치않는 행위면 성희롱인 것”(<부장님> 50쪽)이다. 1
그래서 이미 1970년대에 미국 연방대법원은 성폭력 문제에서 여성이 ‘자발적’이고 ‘합의’한 것이었냐가 아니라 ‘달갑지 않음’(unwelcomeness)을 초점으로 봐야 한다는 판정을 내린 바 있다.(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37597.html) 이런 관점은 주로 직장에서의 위계를 바탕으로 발전돼 왔지만, 위계는 직장에서만이 아니라 가족, 학교 등 다양한 공동체에서도 나타난다.
또 위계와 권력 관계는 직위나 계급뿐 아니라 젠더에서도 발견되는 것이다. 이처럼 젠더의 위계와 차별이 구조적인 상황에서는 여성의 ‘적극적이고 명시적인 동의’가 중요할 뿐만 아니라, 그 ‘동의’마저도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존재해 온 것이다.
“서로 동의한 행위가 뒤늦게 폭력과 연결되고 폭력의 일부가 될 수도 있다... 동의는 평등한 관계를 전제한다. 그러나 성관계에 있어서 남자와 여자는 평등하지 않다. 상징적인 질서 속에서 작동하는 현실적인 권력관계를 무시하고 동의에 대해서만 따지는 것은 성폭력의 범위를 심각하게 축소한다.”(문화인류학자 김현경)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33079.html
호감과 신뢰를 가진 사람에게 성폭력을 당할 경우에 여성들은 먼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 사람이 나에게 상처줄 리 없다’는 생각과 감정들이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이 입고 있는 피해를 스스로 부인하게 만들고 ‘NO라고 말할 수 없는’ 상태가 계속”(<부장님> 123쪽)되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여성의 가장 일반적인 반응은 벌어진 일 전체를 무시하려 애쓰면서도 겉으로 보기에는 기뻐하는 것처럼 행동”(<부장님> 117쪽)하는 것이다.
그리고, 피해를 겪고 나서도 여성들의 일반적인 반응은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가해자가 아는 사람일 경우는... 자신이 당한 게 성폭력이었다는 것을 인식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그것은> 58쪽) 그리고 오히려 스스로를 자책하게 된다.
“대부분의 피해 여성들은 ... 오히려 자기 자신을 책망하는 경우가 많고, ‘내가 그 사람을 오해했나봐’, ‘내가 의사 표현을 확실히 못해서 그런거야’,... ‘정말로 나를 좋아하는 거지’ 등의 관점으로 자신을 둘러싼 상황을 해석하곤 한다... 가해자에게 다시 기회를 주기로 결정하기도 한다.”(<그것은> 81쪽)
반면, 남성은 이 모든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가부장적인 남성중심 사회에서 연애와 성에 대해 어긋난 관점을 받아들였고, 서 있는 위치가 달라서 잘 안 보이는 것이다. “피해를 입은 여성 쪽이 매우 불쾌하고 고통을 느낀다 할지라도 피해를 주는 남자 쪽은 그 행위를 그다지 심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성추행을 하는 쪽에는 ‘악의’가 없습니다.”(<부장님> 140쪽)
결국, 원치 않지만 상대방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발전시키기 위해서 마지못한 성관계에 응했던 여성은 남성의 생각이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분노하게 된다. “관계가 종료된 후 결국 남성에게 진심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경험했던 하나하나가 싫은 기억으로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나중에 그렇게 얘기하는 건 비겁하다 생각하는 분도 있겠죠. 하지만 그 여성에게는 그것 역시 명백한 피해 사실입니다.”(<부장님> 165 ~ 166쪽)
아래 글은 이처럼 겉보기에는 이해할 수 없고 모순돼 보이는 피해여성들의 행동이 어떤 맥락에서 나오게 되는지 지적하고 있다.
“강간을 경험한 여성 중 27%만이 자신을 강간 피해자라고 생각했다. 이 피해자의 42%는 가해자와 다시 성관계를 가졌다. 미즈프로젝트는 여성이 자신의 경험을 수용 가능한 것으로 만들려는 것으로 ‘이미 일어난 일을 합리화하기 위한’ 일종의 시도였다고 분석했다.
피해자들은 피해 직후 성폭력인지, 아닌지를 두고 갈등의 시간을 갖는다. 그 기간에 관계를 재정립하기 위해서 만나기도 하고, 다시 섹스도 해보고, 메시지를 주고받아 본다. 그러나 상대의 성적 행동이 ‘호감’이나 ‘사랑’이 아니라 순간의 ‘욕정’ 때문이었다고 인식되는 순간, 불편하고 찝찝했던 성적 행위는 성폭력으로 ‘명명’된다(그러나 이러한 명명 자체도 실로 엄청난 용기다). 그리고 피해자됨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그녀의 행위들은(섹스, 대화, 메시지 등) 훗날 남성경험 중심적인 법적 공간에서 ‘진짜 성폭력이 아니었음’을 증명해주는 증거로 전락한다.”
http://h2.khan.co.kr/201511271044251
당신 잘못이 아니야
결국 이런 피해를 겪은 여성들은 믿었던 사람에 대한 배신감, 자신에 대한 자책, 누구도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 속에서 극단적인 감정과 태도를 오가게 된다. “피해자가 그처럼 양 극단을 오가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할 뿐 아니라, 심지어 정상적인 반응”(<그것은> 296쪽)이지만, 그럴수록 사람들은 그 여성을 더 불신한다. 그러면 믿었던 사람에 대한 배신감과 주변으로부터 불신받고 고립돼 있다는 생각으로 고통은 더욱 커진다.
“여성은 어디도 안전하지 않고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주변의 긍정적인 지지와 공감마저 받지 못하면 자신이 무가치하고 무기력하며 의지할 데가 하나도 없다는 왜곡된 정보에 의지해 이후의 삶을 살아가게 될 수도 있다.”(<그것은> 179쪽)
따라서 우리는 성폭력을 몇몇 악의적인 개인들이 저지르는 나나 주변 사람들과는 거리가 먼 일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마초적인 집단에서만 벌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한국 사회 전체가 여성차별적이고 성폭력적인 문화와 구조 속에 있으며, 심지어 운동사회나 진보적인 공동체도 여기서 크게 자유로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 자신도 이번에 ‘친밀한 관계 속에서의 성폭력’에 대해서 새롭게 고민하면서, 부족함을 깨닫고 많은 것을 배우게 됐다. 그리고 내 자신의 데이트 경험 등을 돌아보면서 과연 얼마나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해 왔는지, 비슷한 상황에서 정말 같은 잘못을 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 되묻게 됐다.
보통 친밀한 관계 속에서 벌어진 성폭력에서는 두 사람이 얼마나 친밀하고 좋은 관계였는지 주변 사람들이 지켜봐 온 경우가 많다. 또 주변 사람들은 두 사람 모두와 친분 관계가 있기에 사태를 객관적으로 보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래서, 피해를 호소한 여성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너무 민감하고 예민한 것이 아닌지, 너무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닌지, 굳이 그것을 이렇게까지 문제시해야 하는지 등의 반응과 불신 등을 접하곤 한다.
하지만, 감정적이지 않고 침착하게 행동하는 피해자와 절차와 제도에 따라서 손쉽고 매끄럽게 해결되는 성폭력 사건이라는 것은 현실보다 이상에 가깝다. 미투 운동 속에서도, 우리는 일단 사건을 고발하고 공론화한 후에 사회나 공동체 속에서 법적·제도적 해결을 기대하는 수많은 여성 주체들을 보게 된다. 기존 사회나 공동체의 법이나 제도가 문제를 잘 해결해줄 것이라는 기대가 적을수록 여성 주체는 그런 방향을 선택할 것이다.
그리고 누구보다 고통스러울 그들은 지금 미투 운동 속의 많은 여성 주체들처럼, 공동체의 신뢰와 지지를 기대할 것이다. ‘당신 잘못이 아니야. 우리는 당신을 믿고 지지해. 당신은 혼자가 아니야’라는 말을 듣고 싶을 것이다.
앞으로도 우리는 주변에서 이런 사건들을 계속 접하게 될 것이다. 처음부터 가-피해가 분명하고 쉽게 판단할 수 있는 사건은 많지 않을 것이다. 공동체 안의 서로 믿고 친밀한 관계들 속에서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복잡한 사건들이 일어날 것이다.
누구도 피해자가 될 수 있기에, 누구도 가해자가 될 수 있다. 나는, 내 옆의 동료는 절대 그럴 리 없다는 확신은 위험하다. 이 간단한 사실을 부정하며 아직도 수렁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누구든 얼마든지 잘못할 수 있고, 문제는 무엇이 잘못인지 인식하고 고칠 수 있냐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더욱 더 차별과 폭력에 민감하고 인권에 대한 감수성이 있는 사회와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기사 등록 20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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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아가 원치 않는 성관계에서도 어떤 여성은 쾌감을 느낄 수 있다. 생물학적이고 물리적인 자극-반응이 완전히 없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성들은 이 때문에 스스로를 자책하고, 사회적 편견 속에 의심받게 된다.(<성폭력에 맞서다 - 사례, 담론, 전망> 36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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