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미래
이천 년 전쯤에... 어쩌면 그보다 오래 전에, 어쩌면 그보다는 좀 나중에 살다 갔던 ㅡ 아무튼 지금은 2000년 전에 살다 갔다고 전해지는 어떤 사람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그는 아마도 사생아였을 것이다. 로마 군인과 유대 여자 사이의 아이였을지도 모른다. 그의 어머니는 겁탈을 당했을 수도 있다. 율법보다 인간을 아낄 줄 알았던 그의 아버지가 그것을 알고도 그의 어머니를 기꺼이, 사랑과 존중으로 아내로 맞았을 수도 있다.
그는 '태어나지 않았어야 할' 아이였을지도 모른다. 인간 위에 군림하는 법과 권력이 그 스스로를 부정할 아이를 단죄하고 배제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더럽고 역겨운 진창에서, 가축들이 어슬렁대는 가운데 태어나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몇 사람의 축복을 받았을 것이고 그 진심은 어떤 귀한 선물보다도 더 빛났을 것이다.
그는 형제자매가 있었다고 한다. 형제자매들은 조금씩 달랐을 테지만 한결같이 사랑받고 자랐을 것이다. 특별히 아끼는 동생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그가 자랐을 때에도, 아무리 굳고 날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도, 그의 안에는 항상 부모의 품에 안겨 밝게 웃고 어린 동생을 온 힘을 다해 보호하는 여리고 정 많은 소년이 물기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의 가정에서, 그와 같은 혹은 그보다 훨씬 못한 이웃들의 생활에서, 일상에서, 주어진 멍에를 이고 가면서 작은 공동체 안에서 소소한 행복을 찾는 데서 어딘가 충분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지나칠 정도로 영리하고 생각이 깊었을 것이며, 그 때문에 작은 시골 마을 공동체에서 어딘가 겉돌았을 것이다.
그는 식민지의 백성이 겪는 고통을 매일같이 보고 들으며 자랐을 것이다. 메시아를 찾아 흐느끼는 울음과 탄식을 몇 번이고 들었을 것이다. 가장 약하고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이 내쳐지는 것을, 징벌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떵떵거리며 위세를 부리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는 인간의 악과 폭력을 모르고 자라지 않았을 것이다. 어른들은 그에게 '하느님의 뜻을 우리가 헤아릴 수 없다. 몸과 마음을 의롭게 하고 율법을 지켜라'고 가르쳤을 것이다. 그는 아마도 납득하지 않았을 것이고 아마도 많이 아팠을 것이다. 그가 겪고 살아온 세상은 암흑과 말세였을 것이다.
그에게 사람의 마음을 이끌고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 역시 자신의 재능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동족은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만큼 많은 선지자들과, 기적을 행하는 사람들과, 지도자들이 서로 그 자리를 채우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치기가 조금 섞인 열정으로 그 안에 뛰어들었을 것이고 엄청난 잠재성을 드러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그 누구도 그에게 대안을 보여주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자기 운명을 아는 순교자처럼 묵묵히가 아니라, 방황 끝에 지치고 번뇌에 짓눌려 물기 없는 광야로 쫓겨나듯 혼자 휩쓸려갔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당연한 일이듯, 그는 가장 먼저 빼앗긴 이들의 굶주림을 채워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식의 순전히 물질적인 시혜가 인간을 비참에서 구원할 수는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기적을 행하고 백성에게 희망을 주는 교주가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적으로 지탱되는 믿음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단 말인가? 혹은, 그는 권력과 지배력을 자기 손에 넣어, 백성에게 태평성대를 열어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권좌에 오르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타협이 필요했을 것이고 그 길은 종내는 악마에게 절을 하고 거래에 응한 인간처럼 그를 또 하나의 악마로, 또 한 명의 억압자로 탈바꿈시킬 뿐이었을 것이다.
갖가지의 이상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분노와 절망의 기억을 씹고 또 씹으며, 그는 구원의 빛을 필사적으로 찾았을 것이다. 무엇이 인간을 구원하는가? 그리하여 실존의 벼랑 끝에서 그는 '사랑'을 품고 돌아왔을 것이다. 그는 사랑으로 기적을 이루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함께 모인 곳에서, 그는 한 소년이 가져온 소박한 음식에서 시작하여, 그들이 결국 모두 가져온 음식을 내어놓고 나누어먹게 만들었다. 그는 움츠렸던 사람들을 일어나게 했고, 쓰러졌던 사람들을 살아나게 했다. 그는 전혀 다른 삶에 대한, 전혀 다른 세상에 대한 희망을 말했다. 그리고 그 핵심은 신에 대한 외경과 두려움이 아닌 인간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는 '인간은 모두 신의 자녀'이며 '안식일은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라며 신이 내린 율법 앞에 한없이 작아지던 인간을 세상의 중심으로 올려놓았다. 당시에 그것은 거의 신성모독이었을 것이지만 그는 자신이 세계에 신을 구현하고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가 말하는 사랑은 결코 모든 것을 참아넘기는 수동성과 순응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부터가 온유하기만 한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그는 그 당시에 가장 존경받던 사람들에게 섬뜩할 정도의 저주를 퍼부었고, 성전 앞의 매판을 뒤집어엎었고,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그를 따르는 이들에게 단언했다. 그는 물질적으로 인간을 짓누르는 억압보다 인간을 초월한 곳에 서서 인간을 재단하는 권력을 미워했다.
그는 종교적 권력과 투쟁했으나 정치적 저항과는 거리를 두었다. 그는 어떻게 보면 정치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보면 정치를 뛰어넘는 것을 추구했다.
그럼에도 그것은 어떤 사랑보다도 용기 있는 것이었다. 그는 가장 약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가장 많이 손가락질받던 사람들, 위대한 율법이 죽어야 할 죄인으로 선고한 사람들 곁에서 살았다. 그리고 종내 그는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목숨을 내어주었다.
그는 여느 인간이 그렇듯 고통스러워하고 두려워했다. '더 할 일이 많다'며 그를 말리려는 제자를 "사탄"이라 부른 것은 오히려, 그 논리에 자기 자신도 흔들리고 있었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그는 이를 악물고 처절하게 기도하고 또 했고 죽음을 앞둔 기도를 깨어 기다려주지 않은 일행을 원망했다. 그렇지만 그는 그렇게 해서 끝내, 자신에 대한 배신을 담담하게 예고하고 자신의 죽음을 기초로 삼을 것을 평화롭게 권유할 수 있었다. 몇의 고비를 넘기고 그는 마침내 '다 이루었다'며 기쁘게 죽음을 맞았다.
그리하여 그는 전설이 되었다.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그의 부활에 대한 이야기가 떠돌았다. 그것은 절망을 뛰어넘고 의심을 뛰어넘었다. 그는 정말로 부활했다. 육신을 가진 인간에서 사람들을 움직이는 신화로. 그리고 그는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결성한 공동체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 속에, 이상 속에, 실천 속에, 사랑의 왕국을 구현했다.
그는 여전히 내 영혼의 근간이다. 모든 가치는 믿음과 사랑과 소망에서 시작하며, 이 중에서 사랑이 으뜸이자 근원이며, 인간의 모든 고귀함의 바탕이라고 믿는다. 사랑이 사람을 사람으로, 가치의 창조자로, 신의 자녀로 만든다. 사랑은 인간 실존의 부조리에 대한 단 하나의 해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교회 문턱을 넘을 수가 없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그 사람을 신으로 올려놓고 숭배하는 것이 도무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은 그가 파괴하고 재구성했던 거대하고 먼 하느님과 너무 닮아 있다.
(기사 등록 2017.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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