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재
"직장인 말고 언론인이 되자"
MBC 사측이 경력기자 채용공고를 내자, 5년 만에 이 말이 다시 회자되고 있다. 언뜻 들어보았을 때는 멋진 말 같지만, 나는 이 말이 불편하다. 그간 방송산업에서 조직된 노동자들이 '언론인'이라는 일종의 엘리트의식을 전유할 수 있었던 물질적 배경에는 외주화와 비정규직 착취와 같은 내부 적폐가 있었기 때문이다.
20, 30년 전과는 다르게 방송사 신입사원 공채 합격 인원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처럼 적을 뿐이고, 방송제작참여를 꿈꾸는 젊은 노동자들은 대부분 비정규직으로 업계에 들어오거나, 노동조건이 열악한 중소언론사를 전전하다 경력직으로 메이저언론사를 노크하는 현실. 이는 한국사회 일반적인 채용시장과 전혀 다를 바 없다. 이 속에서도 '언론인'들이 '직장인'과는 다르게 임금 등 노동조건문제를 넘어 정치권력의 언론 개입 저지와 제작자율성 보장을 외칠 수 있었던 배경이 있다.
(비교적) 강력한 노동조합(및 직종별 협회)을 바탕으로 정규직 조합원들의 임금 및 노동조건은 꾸준히 향상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 먹고 살 길도 막막한 고용불안 노동자들이 노동조건이 아니라, 산업의 공공성을 말하는 것은 어느 분야에서든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언제 잘릴 지 모르는 계약직 아나운서, 파견직 작가, 방송이 나가지 않으면 페이도 없는 특수고용 프리랜서들에게 단순히 자기 직업에 대한 사명감을 내세우며 "당신은 왜 동참하지 않느냐?"고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방송사 정규직 조합원들이 비정규직에 비해 5.8배나 되는 임금(2011년, KBS 정규직과 파견직 임금차이)을 받을 수 있게 되는 동안 실제 방송제작의 절반 이상은 아예 외주화되었고, 절반도 안되는 본사제작 프로그램 제작도 상당수는 노동조합에 가입조차 할 수 없는 비정규직이 담당하게 되었다. 노무현 정권 시절 비정규직법 개악 이후 이제는 직접고용 계약직도 잘 없고, 대부분이 간접고용 파견직, 특수고용 프리랜서로 채워져 있다.
외주화, 비정규직에 대한 비용전가 없이 정규직 조합원들의 1억 연봉은 결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즉 예나 지금이나 언론사 노동자들이 종종 기사를 써서 비판하는 현대차노조 사례와 다를 바가 없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현대차노조는 자동차결함이나 가격문제 등 자동차 제조 공공성 문제에 대해 크게 발언하지 않는다는 점 뿐이다.
방송산업이 어렵다고 한다. 그래도 그나마 사정이 가장 낫다는 지상파방송사에서도 막내작가 밑에 '인턴'을 새로 만들어 100만원도 안되는 상품권으로 임금지급을 대신한다고 한다. 독립PD는 정부 프로그램제작지원금조차 방송사가 협찬으로 취급해 일부를 가져가 부족한 제작비 때문에 손수 운전을 하다 죽었다.
이들 역시 정치권력의 언론개입에 대해 소소하게 목소리를 냈으나, 누구도 이들에게 '언론인'이라고 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다. 이들은 '직장인'인가? '언론인'인가? 아니면, 4대보험 떼고 월급 받는 것도 아니니, 방송사 논리대로 '사업자'인가?
MBC와 KBS 노동자들이 곧 파업에 들어간다고 한다. 5년 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아니,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장겸과 고대영을 쫓아내고 부당징계받은 언론노동자들이 돌아왔으면 한다.
하지만 공영방송을 시민의 품에 돌려놓는 건 정치권력의 하수인인 경영진 몇몇을 내쫓는 것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정규직 조합원들만의 제작자율성 회복과 노조 출신 사장 배출, 자사 수익 보전 등으로만 이어진다면, 정말 공영방송을 시민의 품에 돌려놓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첫째, 말뿐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외주,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노동조합으로 조직하고 비용전가를 멈춰야 한다. 이들을 단순히 '제작비용'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당당한 '언론노동자''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민들과 함께 이들 역시 제작자율성의 주체로 세워야 한다.
둘째, 자사 수익 보전에만 급급해서는 안된다. 방송광고시장의 침체는 수신료 인상, 중간광고도입만으로 돌파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이다. 이런 상황에서 콘텐츠저작권 확보, 유료방송 재전송료 인상, 종편 특혜폐지 요구 등에 머물러 지상파방송사, 자사만을 위한 파이 확보에 골몰할 게 아니라, 시민들의 부담을 완화하고 상생하는 재원확보방안을 도출해야 한다. 수신료 인상이나 중간광고도입이 아니라, 재벌 책임 강화를 통한 전 산업에 걸친 공적 기금 마련이 비현실적이라도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분야와는 선을 긋고 방송산업, 특정 방송사만을 위한 제도개선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마지막으로 이채훈 PD연합회 정책위원, 손석춘 전 언론노조 위원장 직무대행의 이야기처럼 의식혁명이 필요하다. 조합원 정서를 이유로 쌍용차노조와의 가두행진을 취소한 5년 전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된다. '언론인'이기 이전에 '(언론)노동자'로서의 의식을 확립할 수 있도록 학습하고, 연대하는 일이 필요하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 시기만큼 제작자율성이 보장된다고 하더라도 그때처럼 노동자, 농민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폭력을 제대로 보도하지 못하는 일이 반복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엘리트의식과 집단이기주의를 넘어 아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아야 한다.
수백명이 넘는 언론노동자들이 제작거부에 공개적으로 나섰고, 곧 MBC와 KBS에서는 파업이 벌어질 것이다. 꼭 승리하고 '언론인'만이 아니라, 고용형태와 관계없는 모든 언론노동자들과 함께 진정 공영방송을 시민들의 품에 돌려놓는 모습을 보고 싶다.
(기사 등록 2017.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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