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인용 - 단결한 민중은 패배하지 않았다

전지윤

‘인용되면 아스팔트가 피로 물들 것’이라는 섬뜩한 협박보다 ‘기각되면 혁명적 상황으로 넘어갈 것’이라는 걱정이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의 머리를 더 짓눌렀던 것 같다. ‘탄핵을 해서 헌법을 지키는 이익이 더 크다’고 판단한 판결문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나라를 팔아먹어도 흔들리지 않는다’던 콘크리트 지지층을 기반으로, 종북몰이를 통해 반대파를 억누르고 우파를 결집시키던 박근혜. 그가 87년 개헌 이후 최초로 임기 도중에 쫓겨난, 이 나라 역사상 최초로 탄핵된 대통령이 됐다.

 

누가 이것을 가능하게 만든 주역인지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자그만 손으로 촛불을 쥐고서 추운 날씨를 몇시간이나 견디던 아이와 그 아이를 꼭 껴안고 있던 엄마, 모금함에 돈을 집어넣으며 강원도에서 매주 올라오고 있다며 환하게 웃던 노부부, 비옷을 입은 채 눈비가 내리는 어둠 속에 서로 촛불을 옮겨 붙이던 한 가족. 내가 촛불 광장에서 만났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박근혜의 범죄에 분노했고, 사라진 사회정의를 바로세우고 싶어했다. 앞서서 싸워 온 세월호 가족과 노동자, 농민들의 손을 미안해하며 잡았다. 애타게 세월호의 진실을 원했고, 더 이상 누구도 다치고 죽지 않는 세상을 바랬다.

 

‘전에도 100만이 모였지만 바뀐 게 없었다’는 생각에 이번엔 그 몇 배가 넘게 평화롭게 촛불을 들고서 세상을 바꾸려고 했다. 촛불의 규모와 지속 기간 모두 2008년의 몇 배를 훌쩍 뛰어넘었다.

 

이들의 ‘자발성’만 말한다면 틀린 것이다. 그것은 마치 100년전 러시아에서 ‘2월 혁명은 자발적이었고 10월 혁명은 의식적이었다’는 것처럼 기계적인 것이다. ‘의식성’은 좌파 조직과 활동가만이 가질 수 있는 독점물이 아니다.

 

촛불 시민들은 계속해서 의식적으로 이 투쟁의 방향과 과제에 대해 고민하고 판단했고, 그것이 이 투쟁의 성격을 결정했다고 봐야 한다. 그것이 ‘그런 식으로 싸워선 이기기 어렵다’, ‘총파업만이 승리의 열쇠다’라고 했던 기존 시민사회단체나 좌파들의 생각과 눈높이에 맞았던 맞지 않았던,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시민사회단체와 좌파들이 총력 결집했던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도 촛불이 더 잘 모여서 싸울 수 있도록 뒷받침했다. 따라서 퇴진행동에서 헌신한 활동가들의 노고와 성과는 마땅히 인정·평가받아야 한다.

 

하지만 퇴진행동이 이 투쟁의 동력을 만들어내고 방향을 결정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퇴진행동은 부문과 정파를 뛰어넘은 연대체였기에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었는데, 종북몰이가 낳은 불신과 갈등을 뛰어넘어선 이런 단결을 만들어 낸 것도 촛불의 힘이었다.

 

따라서 탄핵이 인용된 지금, 촛불은 스스로 승리를 선언할 충분한 이유와 자격이 있다. 거의 10년 넘게 얼마나 목말랐던 승리인지 모른다. 싸워서 이길 수 있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과 확신은 너무나 소중하다. 그것은 우리의 힘을 몇 배나 키우고, 새로운 승리도 만들어 낼 수 있다.

 

‘박근혜만 쳐냈지, 바뀐 것은 별로 없다’며 냉소하는 것에 공감하기 어려운 것도 그래서다. 그런 사람들은, 바로 최근까지도 체제의 우두머리를 잘라내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불가능하게 느껴졌는지 잊고 있다. 또 자신만이 앞 날을 내다본다고 오해하고 있다.

 

지금 기뻐하는 사람들도 이제 시작이고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뒤집을 기회만 노리는 박근혜 세력에 부대끼고, 제대로 싸울 줄 모르는 야당에 마음 졸이며 그 길고 힘든 겨울을 통과한 장본인들이기 때문이다. 세월호에 대한 헌재의 입장에 절규하는 세월호 가족들과 함께 눈물흘렸기 때문이다.

얼마전 민주당 최고위원 양향자가 반올림을 비난하는 발언을 곧바로 주워 담은 것도 이런 촛불 민심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반올림의 황상기 아버님은 ‘양향자가 말하는 걸 보니 정권이 바뀌어도 3~4년 후에 또 수백만이 촛불들고 모이게 될 것 같다’고 했다.

 

실제로 민주당이 정권을 잡아도 이재용의 보석, 집행유예, 사면 등이 없을 거라고 확신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특검법 개정과 직권상정도 하지 못한 민주당에게 박근혜 구속·처벌을 맡겨두면 될 거라고 안심하기도 어렵다.

 

문재인 후보가 차별금지법을 ‘나중에’라고 내치는 걸 보면서, 무엇이 또 '나중'이 될지 불안감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지금도 사드에 대한 입장이 불분명한 문재인이 당선 후에 저 망나니같은 트럼프에 맞서리라 기대하기도 힘들다.

 

‘왼쪽 깜박이켜고 우회전’하다가 실패했던, 노무현 정부의 기억을 사람들이 모두 까맣게 잊었을 리도 없다. 그것은 2004년 탄핵 반대 투쟁의 승리로 커다란 승리감과 기대에 부풀어 있던 사람들에게 쓰디쓴 배신감과 환멸을 안겼었다.

 

현재, 민주당의 후보들은 왼쪽 깜박이(이재명)와 우회전(안희정), 두 가지의 절충(문재인) 모두를 보여 주고 있다. 우리가 여기서 불안함을 느낀다면, 우파는 거기서 기회를 찾고 있을 것이다. 새정권의 실패를 기반삼아 우파를 재결집하고 권력을 되찾을 기회 말이다.

 

최근 탄기국의 행태를 보면, 더 극단적인 우파가 주도권을 쥘 가능성을 떠올리게 된다. 탄핵 인용 이후 3명의 사망자까지 발생한 너무나 안타깝고 가슴 아픈 상황은, 지지자들의 안전과 생명도 아랑곳 않고 거짓 선동을 일삼는 우파 지도부의 위험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럼에도 촛불들의 열망이 일단 대선으로, 민주당 후보들에 대한 기대와 지지로 흘러가는 것은 다른 대안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촛불의 열망을 담을 더 좋은 그릇과 급진적 대안을 만들지 못한 것에 진보진영과 노동운동은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민주당은 대안이 아니라며 사람들을 탓하고 가르치려 하기 전에 말이다.

 

따라서 퇴진행동에 모인 시민사회단체와 좌파들이 적어도 대선 때까지는 틀을 유지하며 협력을 이어가기로 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누구도 부정하지 않듯이 탄핵 인용이 촛불 혁명의 완성은 아니고, 우리에게는 여전히 많은 공동의 적과 과제들이 있다. 더구나 촛불혁명의 진정한 주역들에게 묻지도 않고 퇴진행동을 해소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번에 우리가 이룬 성과는 촛불의 바다 속에서 시민단체들과 노동·민중단체들이 폭넓게 연대하면서 가능했다. 모두가 알다시피, 여기서 어느 한 요소만 빠져도 그와 같은 힘과 성과는 이어지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의정감시나 정책제안이든, 심지어 정치 총파업이든 폭넓은 지지와 연대 없이는 반쪽 효과에 그칠 것이다.

 

물론 지난 4개월 동안의 연대와 협력이 서로간에 성과와 신뢰만이 아니라 일부 불신과 앙금도 남겼던 것 같다. 그렇다면 지금 필요한 것은 어떻게 더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서로에게 배우면서 함께 길을 찾을 수 있을지여야 한다.

 

촛불혁명이 중요한 승리를 거머쥔 이유도, 앞으로 가야할 길도 ‘단결한 민중은 패배하지 않는다’는 오랜 교훈 속에서 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승리를 함께 기뻐하면서 신발끈을 더 단단히 묶자. 사드 배치가 강행되고 있고, 세월호 3주기도 다가오고 있다.  

(기사 등록 2017.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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