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 대립과 분란을 넘어 소통과 이해로

대립과 분란을 넘어 소통과 이해로

- DJ DOC <수취인 분명> 논란에 부쳐

 

허승영





DJ DOC의 노래 수취인 분명이라는 노래에 대한 여성 혐오 논쟁이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다. 이 논쟁이 단순히 논쟁이나 논란을 넘어 대립과 분란으로 나가고 있는 것 같아서 우려스럽다. 이런 분란이 깊은 상처를 남기지 않을지 걱정이다.

 

우선 글쓴이는 DJ DOC를 집회에 세우지 않기로 한 결정은 논란의 여지가 있을지언정 당장은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결정에 대해서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고, 토론할 수 있다. 이후 결정이 바뀔 수도 있다. 하지만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을 먼저 배려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소수의 사람들 때문에 의사결정이 바뀌는 것이 정당하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수취인 분명>에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이 소수인지도 따져봐야겠지만, 설령 소수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이런 결정은 다수결의 문제가 아니며 소수자들을 배려하기 위한 것이다. 이 상황은 몇몇 소수가 다수의 결정을 무시한 것이 아니다. 혐오나 차별 표현을 듣지 않은 권리는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보장된 권리다. DJ DOC의 노래가 무대에 중앙 무대에 오르지 않기를 주장한 사람들은 그 권리를 행사한 것이다.

 

모두 일어서 주십시오.”라는 표현이 문제가 된 적이 있다. 글쓴이를 포함해 대부분의 사람은 이 표현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중에는 신체적 장애 등의 이유로 일어설 수 없는 사람이 있다. 그때 그 사람들의 마음을 잠시 상상해보자. 자신이 일어설 수 있다는(없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고통스럽지는 않았을까? 이곳에서 나 자신이 동떨어진 존재라는 소외감을 느끼지는 않았을까? 누군가는 오랜 세월 동안 그 부당한 감정들을 느껴왔는지도 모른다. 모든 장애인이 그런 심정이 아니었을 수는 있지만, 단 한 사람이라도 그런 기분을 느낀다면 우리의 표현을 수정해야 할 것이다.

 

그런 사소한 것들 하나하나 따지는 것이 귀찮고 불편할 수도 있다. ‘뭐 그런 것을 가지고.’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DJ DOC의 공연을 정말 보고 싶었는데 보지 못해서 안타까웠을 수도 있다. 실천적으로 어떤 말을 써도 되고 어떤 말은 쓰면 안 되는지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그 기준은 누가 정하는 거냐고 항변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당장 불편함을 느끼는 어떤 사람을 위해 다른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 소수가 부당한 불편함이나 괴로움을 느끼지 않게 하는 것은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싶은 모든 사람들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누구나 어떤 문제에서는 소수자가 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주최측은 DJ DOC의 출연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정은 정당했다.

 

다만 DJ DOC<수취인 분명>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DJ DOC<수취인 분명>에 대하여

 

수취인 분명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몇 가지 표현들을 보자. 우리는 수취인 분명이라는 노래 중에서 멜로디를 뺀 노랫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밥 딜런에게 노벨문학상을 수여하면서 한림원이 귀를 위한 시라고 했던 것처럼 노랫말은 일종의 시다. 시는 함축적 언어를 씀으로 예술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해석이 다양할 수 있다.

 

“Miss 이라는 표현부터 보자. 결혼하지 않은 여성인 박근혜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 표현에는 여성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의미를 담고 있다.

 

(family name) 앞에 붙는 영어 접두사 “Mr. ,Miss , Mrs.”는 한국어 ‘~와 같은 존중의 의미를 담고 있긴 하다. 하지만 성차별적 의미도 담겨 있다. 남성은 결혼여부에 상관없이 Mr를 쓰지만, 여성은 미혼 여성과 기혼 여성을 구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안으로 모든 여성을 존중하는 의미로 Ms. 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그런 문제 때문에 영어를 쓰는 국가들에서 “Dr. , Professor, captain”등 그 사람이 노력으로 쟁취한 것들을 호칭으로 많이 쓴다.

 

더구나 한국에서 “Miss”의 용법은 그 호칭으로 불리는 여성을 낮추는 의미가 조금 더 강하다. 주로 직장상사나 윗사람이 직급이나 지위가 낮은 사람을 지칭할 때 “Miss”를 써왔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Miss 박은 oo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만, “박양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미쓰라는 표현을 보고 여성 자체를 낮추는 표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미쓰박이라는 표현에는 대통령 박근혜가 아니라 여성인 박근혜를 낮추는 표현으로 읽힐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DJ DOC의 의도가 그것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 말속에는 박근혜에게 공식적으로 붙였던 호칭인 대통령을 거부하고 평범한 사람으로 끌어내리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MISS에는 같은 철자의 동음이의어로 실수 · 실패하다는 의미도 있기 때문에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발표한 가사에는 miss(take)라고 되어 있기도 하다.

 

<수취인 분명>을 옹호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DJ DOC는 박근혜를 대통령이 아닌 평범한 사람을 지칭하는 영어 단어를 쓰고 싶었다. 그런데 영어에서는 00씨를 지칭할 때 여성과 남성을 구분하고, 여성은 다시 결혼한 사람과 결혼하지 않는 사람을 구분한다. 박근혜는 결혼하지 않는 여성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쓸 수밖에 없지 않았겠냐고. 그것은 성차별적인 영어의 탓이지, DJ DOC의 문제는 아니지 않느냐고 항변할 수도 있다.

 

언어를 쓰다보면 가끔 곤혹스런 상황이 있다. 언어에는 사회성이 있고, 한 개인이 그 언어를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다. 불어에서 남성명사와 여성명사의 구별이 성차별적이라고 해서 개인이 마음대로 “le monde”“la monde”로 바꿀 수는 없다. flight attendant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 stewardess라는 말을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세계사가 남성중심의 역사였기 때문에 세계의 거의 모든 언어에 성차별적 요소가 있다. 모든 사회는 언어에 담긴 성차별적 요소를 제거해 나가야 한다. 하지만 모든 개인에게 새로운 언어를 바꾸는 노력을 하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대안을 충분히 고려해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창작가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하나의 시어에 최대한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싶었을 것이다. 중의적인 표현으로 문학적 효과를 높이고 싶었을 수도 있다. 또한 운율, 노랫말의 용어로 하면 리듬이나 라임을 고려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의 예술은 그 자체의 의미와 함께 사회적 관계 속에 놓여있다. 그런데 굳이 상처별적 의미가 있는 어휘를 썼어야 했을까? 창작자의 미학적 가치에 대한 생각은 충분히 이해할만 하지만, 그것이 사회 · 윤리적 가치를 훼손할 만큼의 가치였을까? 그게 최선이었을까? 하고 묻지 않을 수 없다.

 

두 번째로 문제가 됐던 표현은 하도 찔러대서 얼굴이 빵빵, 빽차 뽑았다 널 데리러가 빵빵, 이 작당 몽땅 쓸어 담아 깜빵이 대목이다. “얼굴이 빵빵은 보톡스를 맞으며 외모를 가꾸는 여성들을 비하하는 말로 들릴 수 있으면, “빽차 뽑았다 널 데리러가는 남자의 차를 얻어 타는 존재로 여성을 묘사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구체적으로 대통령을 비난하고 있지만, 그 비난의 근거 속에 여성들에 대한 왜곡된 관념이 투영돼 있다고 해석될 수 있다.

 

박근혜의 잘못은 국민의 세금과 권력을 이용해서 돈을 착복하고, 그 대가로 재벌들의 뒤를 봐주고, 노동자 · 민중의 삶을 철저히 유린한 것이다. 그 돈의 일부로 외모관리를 한 것인데, 그 일련의 모든 과정이 문제이지 보톡스를 맞은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다만 얼굴이 빵빵이라는 표현을 그 모든 일련의 과정을 담고 있는 상징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권력을 이용해서 평범한 사람들은 감히 꿈꿔볼 수도 없는 시술을 받은 것에 대한 비판을 함축하고 있는 표현으로 읽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예컨대 북한 지배자 김정은을 돼지라고 부를 때 그것을 외모에 대한 공격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민중들이 기아에 허덕이는데 김정은은 온갖 산해진미를 먹으며 호화롭게 사는 현실에 대한 분노로 읽을 수도 있다. 나는 전자의 이유로 그 표현을 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굶주린 북한의 민중들이 분연히 떨쳐 일어나 돼지는 물러가라고 외친다면 응원하고 싶지 굳이 비판하고 싶지는 않을 것 같다.

 

빽차 뽑았다 널 데리러가에서 빽차는 경찰차를 뜻하는 것으로 뒤에 문장과 호응해 사법적 책임을 묻겠다고도 해석될 수 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시는 산문과 달라서 항상 함축적 의미를 더 많이 지니고자 한다. 이런 특징으로 말미암아 시에는 애매성이 생기며, 다양한 해석이 가능해진다.

 

애매성을 얘기하는 것은 그 뒤에 숨어서 <수취인 분명>에 담긴 문제를 은폐하거나 평가를 무화하기 위함이 아니다. 다양한 의견에 귀를 기울이며 함께 얘기하자는 뜻이다.

 

어떤 사람은 이 노래가 문제가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문제가 일부 문제가 있지만, 전체 맥락에서 충분히 좋다고 느낄 수도 있다. 이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차별 표현의 양적 차이에 대한 고려가 있었을 수도 있다. 00년 이라는 표현과 미쓰0이라는 표현은 모두 차별 표현이긴 하지만, 전자는 훨씬 더 모욕적이고 심각한 표현이다.

 

무엇보다 DJ DOC의 용기는 정말이지 칭찬할 만 하다. 아무리 박근혜의 권력이 이미 땅에 떨어졌다고 해도, DJ DOC가 눈치 보지 않는 성정을 가졌다고 해도, 연예인이 이렇게까지 권력을 거침없이 공격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당장 대중의 지지를 받을지 몰라도 나중에 권력자들에게 보복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이라고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문제가 됐던 부분을 제외하면 좋은 노래이기도 하다. 시나 노랫말을 한번이라도 써본 사람이라면 저렇게 리듬과 라임을 맞추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것이다. 운율과 각운이 감탄이 나올 만큼 절묘하다.

 

다왔어요 잘들어가요 깜빵./ 이 잔당 몽땅 쓸어담아 깜빵이 부분을 들으면 속이 확 풀리는 통쾌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세월호에 대해 얘기한 부분인 당신의 7시간 /2014416일 진공상태/ 처럼 떠버린 당신의 알리바이와 상대”. 특히 우주의 기운에 나라가 기우네 / 저기 자기 자식을 잃은 엄마가 우네.” 이 부분은 가슴 미어지게 감동적이기도 하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이 노래를 어떻게 들었을까?

 

대상에 대한 함축은 시의 미학적 가치를 평가하는 중요한 척도 중 하나다. 그 기준으로 보면 이 노래는 박근혜의 4년을 단 4분만에 훌륭하게 압축하고 있다. 노래를 듣고 있으면 그 지옥 같았던 4년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여성 혐오적인 노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 사람들이 이 노래를 무대에 세우지 말아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어떤 해석이 더 적실한지는 작가의 의도, 사회적 반영, 수용자의 반응, 텍스트의 내적 의미를 종합적으로 고려하면서 토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시의 특성상 당신은 그렇게 이해하셨군요. 저는 이렇게 이해했습니다.’하며 다양성을 인정해야 하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더 나은 소통을 위하여

 

다만 그 어떤 의견을 이유로 그 사람의 사상이나 인성을 재단하고 비난해서는 안 된다.

 

<수취인 분명>이 좋게 받아들인다고 해서 그 사람이 성차별주의자나 여성혐오론자라고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개인적으로 주변에 많은 여성들에게 <수취인 분명>을 좋고, 이번에 무대에 서지 못한 것이 아쉽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여성들이 없었다면 며칠을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면서, 나의 사고력과 글솜씨에 좌절하면서, 내가 이러려고 글을 썼나 하는 자괴감에 빠지면서 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수취인 분명>이 집회 무대에 서는 것에 문제제기를 했던 사람을 비난해서도 안 된다. 그 노래의 평가를 두고 이견을 제시할 수 있으며 여성혐오인지에 대해서 비판을 개진할 수도 있다. 그것만으로 그 사람이 성차별주의자로 규정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문제제기 했던 사람들의 인성을 공격하거나 상처 주는 말을 퍼붓는 것은 차별이며 혐오다. 진정한 평등은 차이를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어떤 표현이 문제인지 아닌지는 토론해 볼 수 있지만, 왜 쓸데없이 예민하냐고 비난해서는 안된다. 예민함을 느끼는 부분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고, 누군가가 내가 느끼지 못한 것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누군가에게 miss 박은 직장 등에서 성희롱을 당할 때 자신을 지칭하는 말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 사람에게 왜 사소한 것에 예민하냐고 비판하는 것은 너는 왜 성희롱을 당했냐고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예민한 사람을 비난할 것이 아니라 예민하게 만드는 사회를 비판해야 한다. 또한 우리가 어떤 예민함에 익숙하지 않은 까닭은, 그래서 우리의 생각이나 행동을 바꾸는 것이 불편한 까닭은 어쩌면 사회적으로 그 사람들의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우리가 귀 기울일 여유가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익숙하지 않은 예민함을 우리가 알지 못했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기회이며 축복이라고 생각할 수 있길 진심으로 희망한다.

 

중대한 투쟁의 지점에서 사소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은 결코 없다.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그런 사소함에도 소홀히 하지 말자는 건데 그걸 잠시 접고 가자는 말은 소수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는 말로 너무나 무책임한 말이다. 우리는 다수이든 소수이든 사람이 중요하지 않던가?”

 

글쓴이가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서영섭 신부님의 글귀를 이 논쟁에서 깊은 성찰을 하게 한다.

 

앞으로 우호적인 토론 속에서 깊은 논의들이 진행되기를 바란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결정들이 내려질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DJ DOC가 함께 참여해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사실 DJ DOC의 공연이 취소되었음에도 1126일 집회에 참여한 일은 충분히 인정받을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DJ DOC에게 무대에 당연히 서야 할 권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집회 나오는 것이 칭찬 받을 일은 아니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무대에 초대받지 않은 것과 무대 공연이 취소된 것은 의미가 다소 다르다. 후자의 경우 자신들이 이 운동에서 배제되었다고 느낄 법도 하다. 또한 논란의 중심에 서서 공적인 자리에 나오기가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었다. DJ DOC 어쨌든 그 어려움을 이기고 나왔다.

 

이후 논의에 참여하는 일이 DJ DOC입장에서 내키지 않을 수 있다. 노래로 모든 것을 말하는 가수가 그 노래에 대한 논란에 참여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자신의 노랫말을 대중의 영향으로 수정하는 것은 창자자의 올바른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창작자의 신념도 상대적인 법이다. 작가의 글도 편집자와 출판사와 논의해 수정될 수 있다. 뮤지션의 음악도 프로듀서나 음반회사에 의해 수정되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볼 수 없다. 대중의 뜻으로 수정되는 것이 문제될 것이 뭬 있으랴. 찰스 디킨스같은 위대한 작가들도 신문에 글을 연재하면서 대중의 반응에 따라 분량이나 이야기 방향을 바꾸곤 했다.

 

광장의 민주적인 토론을 통해서 DJ DOC가 다른 노래를 부르든, <수취인 분명> 가사를 바꾸든 아니면 어떤 방법으로 새로운 합의를 이룰 수도 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논쟁에서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었다. 어쩌면 이런 과정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전혀 다른 삶을 살았던 사람 2이 만나도 수없이 싸우는데, 수백만 명이 참여하고 수천만 명이 지지하는 운동에서의 갈등은 필연인지도 모른다.

 

아직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이 많다. 이번 토론은 혐오나 차별의 표현을 해서는 안된다는 당위를 지지하면서도 구체적인 실천은 어때야 하는지 고민하게 한다.

 

한국어의 3인칭 대명사 /그녀에도 성차별적 의미가 있다. “그녀라고 했으면 그남이라고 하는 게 평등할 것이다. “그녀라는 말도 우리는 쓰면 안되는 걸까? 그 정도는 허용될 수 있다면 우리가 허용할 수 있는 언어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그 합의는 어떻게 가능한가? 그 합의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무대에 설 수 없는 것인가?

 

다소 확장하면 이런 고민도 해볼 수 있다. 우리는 예민함에 대해서 어디까지 수용할 수 있을까? 글쓴이는 개인적으로 청소년들을 많이 접하다보니 학력이나 학벌 문제에 예민한 편이다. 이런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집회 연단에서 자신의 대학을 소개하는 것이 좋은가?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야 문제될 것이 없겠지만, 한국에서는 누군가의 출신대학을 듣고 소외감이나 박탈감을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시국선언이나 동맹휴업처럼 어떤 대학의 공적 활동을 소개하는 경우는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 경우에도 우리는 언론에서 주목하지 않는 학교를 더 우선해서 발언 기회를 줘야 하지 않을까? 이번 사건을 계기로 많은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차별과 혐오 뿐 아니라 앞으로 우리 운동이 나아가기 위해서 많은 고민과 논쟁들이 있을 것이다. 당장 우리는 탄핵안에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가? 박근혜를 몰아낸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삼성을 비롯한 재벌과 새누리당 같은 공범들을 어떻게 단죄할 것인가처럼 굵직굵직한 질문들이 우리는 기다리고 있다.

 

그 답들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치열한 토론과 비판이 오갈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갈등이 생길 수도 있다. 그 갈등을 멀어지는 과정이 아니라 가까워지는 과정으로, 반목하는 과정이 아니라 이해하는 과정으로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서로의 차이를 존중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갈등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기사 등록 2016.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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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변혁 재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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