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 이화여대 투쟁의 전진과 ‘외부세력’ 논란
‘평생교육단과대학’ 사업을 막아낸 이화여대 학생들의 투쟁과 전진은 고무적이다. 곳곳에서 비민주적으로 추진돼 온 신자유주의 대학 구조조정에 일부 브레이크를 건 이 투쟁은 이제 총장 퇴진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 투쟁은 지금 성주 사드 반대 투쟁, 갑을오토텍 민주노조 사수 투쟁과 함께 박근혜 정부와 기득권 세력을 위협하는 3가지 주요 투쟁 중의 하나로 보이기도 한다.
이화여대 투쟁 과정에서 나타난 모습들은 유럽 등에서 나타난 청년들의 광장점거 운동도 떠올리게 한다. SNS를 활용한 소통, 수평적이고 직접민주적 방식에 대한 추구 등이 그렇다. 학번과 위계를 거부하고 모두가 ‘벗’이라 부르며 모든 것을 토론과 투표로 결정했다고 한다. 혼란된 이데올로기 속에 보이는 기존 좌파에 대한 거부감과 불신까지도 비슷한 점이 있다.
따라서 이 투쟁의 한계와 약점만 보면서 ‘자본주의 가치관 속에서 자신들의 학벌과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며 그래서 운동권을 배제한 것’이었다며 냉소하는 것은 동의하기 어렵다. 먼저 ‘자본주의 가치관’으로 보자면, 처음부터 확고한 진보좌파적 세계관을 가지고 투쟁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현실에서 얼마나 되겠는가.
예컨대 지금 성주에서 가열차게 싸우는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보통의 ‘자본주의 가치관’을 넘어서 아예 ‘보수우파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던 분들이고, 지금도 여전히 그럴 것이다. 성주는 지난 대선 때 박근혜 지지율이 86%였던 곳이다.
따라서 ‘개그맨 김제동의 그런 국수주의적이고 애국주의적 관점이 녹아있는 연설에 성주 주민들이 박수치고 환호하다니’하고 한심하게 생각할 일은 아니다. 오히려 ‘김제동과 민주당도 종북’이라는 논리가 먹혔을 이 곳에서 나타난 커다란 변화를 봐야 한다.
한 러시아 혁명가는 이렇게 말한 바가 있다. ‘나는 자본주의를 지지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한쪽에 쭉 서 있고, 나는 사회변혁을 지지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한편에 쭉 서있는 것을 계급투쟁이라고 보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평생을 가도 그것을 보지 못할 것이다.’
기성언론만이 아니라 일부 좌파까지도 이화여대 투쟁을 ‘이대라는 학벌과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싸움일뿐’이라고 하는 것도 과해 보인다. 이 말이 사실이면 박근혜 정부와 이화여대 당국이 이번에 학벌주의를 타파하거나 완화하려 했다는 말이 되는데, 이건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이들은 학벌주의의 만들어 온 장본인들이며, 이번에 이화여대 일부 학생들이 보인 학벌주의적 혼란도 바로 저들이 만들고 부추긴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평단 사업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봐도 이것이 학벌주의 논리 속에서 그것을 더 강화할 뿐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아무리 관련분야에서 실제적 경험과 능력이 많은 사람도, 비싼 돈을 들여 명문대 졸업장을 따야 대우받을 수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극히 소수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지며 경쟁은 더 심해질 것이다.
더구나 일부 사람들처럼 이화여대 학생들 대부분을 그들의 일부 부유층 부모나 이화여대 출신 고위층과 동일시하며 기득권세력이나 지배계급의 일부라 보는 것은 커다란 비약일 것이다. 그것은 학생이라는 사회적 집단의 성격에 대한 오해이다. 그동안 ‘여혐세력’들이 이화여대 학생들을 ‘된장녀, 김치녀’의 상징처럼 몰아세워 온 맥락 때문에 이런 오해는 더 부적절하다.
혼란스러운 이데올로기와 껍데기들을 거둬내고 충돌하는 양쪽에 어떤 사회적 세력과 이해관계가 있는지, 신자유주의 대학 구조조정이 어떤 효과를 낳아왔는지 살펴야 한다. 그렇게 보면 한쪽에는 일방적이고 비민주적으로 경쟁, 학벌 교육을 추진해 온 정부와 교육장사꾼들이 있고, 그 반대편에 그것에 소외된 채 피해를 겪어 온 학생들이 보이는 게 사실이다.
투쟁가로 ‘소녀시대’ 노래를 택한 이 학생들이 이 체제와 지배세력, 언론 등이 부추겨 온 학벌주의, 반운동권 정서 등에서 자유롭지 않았던 것은 크게 놀라운 일이 아니다. 놀라운 것은 그런 혼란을 가지고도 굴종이 아니라 저항을 하고 전진했다는 점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보인 약점들은 매우 안타깝다.
진보좌파적 주장과 선을 그으며 순수성을 강조하고, 특히 한 좌파 활동가를 투표까지해서 농성에서 배제했다는 소식은 매우 서글프다. 정부, 언론, 학교당국이 ‘교수 감금’ 운운하며 ‘외부세력’론과 경찰력 투입으로 압박하고 징계와 법적처벌 협박까지 하며, 얼마나 학생들을 위축시키고 자기검열을 강제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그런 차단과 배제는 민주적 토론을 강조한 학생들 스스로의 대의와도 어긋나고, 더 강력한 투쟁과 더 넓은 연대 건설의 발목을 잡고 해악을 끼칠 가능성이 크다. 억압받는 사람들의 힘은 민주주의와 연대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김동춘 교수도 “저항세력이 방어를 위해 내세운 ‘순수성’론은 당장의 탄압을 피하는 ‘자원’이 될 수 있지만, 결국은 발목을 옥죈 쇠줄을 녹여 철사로 온몸을 감는 일이기도 하다”고 지적했다. 이런 점에서, 보수언론과 학교당국이 좋아하고 있을 ‘운동권과 외부세력 배제’를 ‘새롭게 등장한 창조적 투쟁 방식’이라고 찬양하기만 하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입을 가로막히다가 결국 농성장에서 쫓겨 나와야 했던 그 헌신적 활동가가 받았을 상처를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프다.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서 낙인찍히고, 입을 막히고, 따가운 눈초리와 가시돋친 목소리를 듣다가 결국 배제당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너무나 잘 알고 스스로도 경험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진보좌파 활동가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들이 영향력 밖에 있다는 이유로 이화여대 투쟁을 ‘신포도’ 취급하며 깎아내리는 것은 아닐 것이다. 민중가요가 아니라 대중가요를 부르고, 운동권이 아니라 기성정치인에 기대는 학생들을 한심하다고 취급하며 정답을 가르치려는 것도 아닐 것이다. ‘너희가 도서관에서 스펙 쌓고 취직 준비에 매달리는 동안,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사회진보를 위해 투쟁했는데’하며 발언권을 고집할 일도 아니다.
먼저 국가와 우파의 ‘종북몰이와 외부세력 마녀사냥’이 곳곳에서 이렇게 먹히고 커질 때까지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 돌아봐야 한다. 왜 탄압받는 동지들을 방어하며 단결해서 그 싹을 자르지 못했는지 말이다. ‘종북몰이는 별로 먹히지도 않고 있고, 저 정파에겐 중요하겠지만 우리에겐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라며 소홀하지 않았는지도 말이다.
사실, 이화여대 학생들이 이번에 보인 모습은 이미 ‘이석기 체포동의안’ 때 진보의 일부가 보인 모습이었다. ‘종북’, ‘통진당’이라는 딱지가 붙으면, 알게 모르게 배척하거나 손 잡기를 꺼리고, 심지어 ‘진보 대통합’하자면서도 그런 딱지가 붙은 세력은 배제해 온 게 쓰디쓴 진실이다. 생각이 다르다고 연대체에서 배제하는 일도 있었다.
진보좌파 안에서도 벌어져 온 이런 배제에 눈감다가, 이화여대에서 벌어진 ‘배제’에만 분노해서는 안 된다. 물론 ‘반운동권 정서’가 단지 종북몰이와 특정 정파의 잘못 때문이라고 여겨서도 안 될 것이다. 왜 보통 사람들이 그런 불신과 반감을 드러내는지 우리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평소에 우리와 어울리려 하지 않으며 겉도는 사람들이다/ 뭔가 벌어지면 나타나 숟가락을 얹고 주도권을 쥐려고 한다/ 자신들을 대중과 구분하고, 위에 서서 이래라저래라 가르치려고 한다/ 알아들을 수 없는 용어와 이야기들을 길고 어렵게 늘어놓는다/ 사람을 조직화 대상으로만 보고, 가입할지 아닐지를 기준으로 누군가를 판단한다/ 자기들 내부에서 벌어진 불의는 덮어버리고 잘못도 인정하지 않는다/ 자기들이 속한 정파와 조직의 이익만 우선한다/ 자기들끼리도 맨날 싸우면서 우리에게 단결을 말한다.’
이번에 내가 보고 들은 ‘운동권’에 대한 사람들의 이런 반응들 속에는 단지 흘려듣기 어려운 핵심이 있어 보여서, 나 자신부터 돌아보게 된다. 억울한 면이 없을 수 없지만, 이런 반응을 단지 ‘조직과 집중을 거부하는 아나키즘적 경향’이라고 치부하며 대립선을 긋기만 하는 것은 적절치 않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을 일단 잘 들으면서 대화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많은 인내심과 자기성찰, 공감하며 배우려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처음에 성주 시위는 분명 ‘님비’적 성격이 있어 보였고, 해병전우회 할아버지들이 집회장에서 ‘외부세력’을 차단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하지만 지금 성주 주민들은 ‘한반도 어디에도 사드는 안 된다. 우리를 지지하고 연대해달라’며 싸우고 있다. 자신의 선명성을 앞세우고 드러내면서 ‘대중’과 자신을 칼같이 구분하기보다, 대중 속에 하나로 스며들어가 묵묵히 신뢰를 얻어가며 이런 변화에 함께하며 같이 배우고 있을 누군가가 있지 않을까.
● ‘나는 메갈리안이 아니니까’하고 고개 돌리면 안 된다
메갈리아 논란 속에서 ‘왜 이렇게 많은 사람(남성)들이 메갈리아에 대해 분노하고 흥분까지 하는지 궁금하다’는 말이 있다. 왜 700여명이 사망한 옥시 불매보다 더 신속하고 강력한 불매가 벌어졌는지 궁금하다는 것이다.
이걸 보면 메갈리아가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은 분명하지 않냐는 주장도 나온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런 부정적 반응들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토록 낙인찍기와 메갈몰이를 통해,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지지하기 힘든 패륜집단으로 만들었으니 말이다.
페이스북 ‘메갈리아4’도 아니고, ‘메갈리안’ 사이트도 아니고, ‘워마드’ 카페에 올라온 특히 심한 미러링을 보여 주는 글들만 맥락에서 떼어내 주로 퍼나르며 ‘악마화’에 이용했다. 사실 티셔츠를 판매한 메갈리아4는 미러링을 하지도 않아 왔는데도 말이다. 종북몰이가 절정일 때 통합진보당도 비슷한 방식을 통해 전국민적 왕따와 증오의 대상이 됐었다.
실제로 더럽고 냄새나는 것은 일베 등이 싸놓은 현실의 똥인데, 그 똥은 보아 넘기거나 치우려 하지 않던 사람들이 거울에 비추어진 똥을 보고 더럽고 냄새난다고 소리를 질러 댄 것이다. 이렇게 해놓고 ‘메갈리아4 = 메갈리안 = 워마드’라며, 여성차별과 혐오에 반대하면 모조리 ‘메갈리아’라는 식으로 공격했다. 정부와 정책에 비판적이면 모조리 ‘종북’으로 몰았던 것과 아주 비슷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분위기에 휩쓸려 혼란을 겪는 것 같지만, 메갈몰이를 추동하는 핵심에는 분명히 소라넷 폐쇄, 맥심 잡지 회수, 성폭력과 여혐 가해자 지목, 몰카와 염산 판매 금지 등에 물러서고 손해보며 열 받아온 세력과 ‘여혐러’들이 있다.
소라넷 폐쇄 등은 그동안 진보나 여성단체들도 이루지 못한 성과였고 메갈리아 등으로 모여있는 사람들의 행동과 여론이 큰 구실을 했는데, 이 대반격 속에 소라넷 재오픈 예고 트윗이 뜬 것도 우연인가 싶다. 누적 회원수가 1천 만을 훌쩍 넘고 매출이 수백 억대라는 성인웹툰 시장에서 ‘예스컷’ 운동이 벌어진 것도 말이다.
요즘 주요 인터넷 사이트마다 쉽게 눈에 띄는 ‘성폭력 사건 무죄, 무혐의, 기소유예 전문 법무법인’들의 광고들도 시사적이다. 그러면서 성폭력 사건에 대해 폭로하고 고발한 여성들이 오히려 무고죄로 역고소를 당하고 구속, 처벌되는 사례가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무뇌아적 페미니즘이 IS보다 더 위험하다’(칼럼니스트 김태훈) -> ‘페미니즘이 싫어서 IS로 간다’(김군) -> ‘메갈리아와 IS는 똑같다’로 이어진 이런 담론의 변화가 일종의 ‘전진’으로 보일 지경이다. IS보다 더 위험하거나 싫은 존재에서 이제야 ‘같은’ 존재가 된 것이고, ‘페미니즘은 필요한 데 메갈리아는 페미니즘도 아니다’라며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따라서 단순히 ‘메갈리아와 미러링은 실패했다’는 얘기는 사실과 안 맞는 것 같다. 메갈리아가 여성해방의 전략과 강령을 제시했어야 한다는 비판이라면, 그건 인터넷 커뮤니티와 유저들에게 기대할 건 아닌 것 같다. 그런 비판과 선 긋기에 주력하는 좌파가 있다면, 스스로의 부족함과 실패부터 돌아볼 일이다.
한 성우가 노동자이기에, 비정규직이기에, 여성이기에, 나아가 메갈리아라는 낙인 때문에 단 하루만에 일자리를 잃었다. 우리가 ‘나는 메갈리아가 아니니까’하며 외면하다면, 그 다음은 나일 것이다. 종북몰이 때 ‘나는 종북이 아니니까’했던 결과가 무엇이었던가.
그러므로 정의당에서 메갈리아 마녀사냥에 맞서며 지도부의 후퇴를 막아서려는 사람들에게 적극적인 지지와 연대를 보내고 싶다. 정의당 지도부는 ‘친메갈과 반메갈을 넘어서..’이런 물타기말고 후퇴된 입장을 되돌려야 한다.
팟캐스트 등을 통해 대거 들어온 사람들이 나갈까봐 눈치보여서 굴복하고 눈감는 것인가? 그런 식으로 뜨거운 문제에서 적당히 눈치보고 굴복, 타협하는 정당은 이미 이 나라 국회 안에 2개나 더 있는데, 왜 따로 더 있어야할까?
(관련 기사: ‘미러링’의 정당성과 한계, 그리고 메갈리아는 왜 범죄집단이 아닌가
http://h2.khan.co.kr/201608030948001)
● 갑을오토텍 투쟁이 연대의 물결을 일으키고 있다
8월 5일에 있었던 갑을오토텍 연대 집회는 참 인상적이었다. 휴가 절정의 그 덥고 습한 날씨에 다양한 노조와 단체에서 1천여 명이 달려 와서 날씨보다 더 뜨거운 연대의 힘과 열기를 보여 주었다.
나에게 더 두드러져 보인 것은 가족대책위였다. 그동안 밖에서 볼 때 사측, 용역, 경찰이 뭔가 어리버리하고 머뭇거리는 것처럼 보였었다. 나는 그것이 노조에게 유리하게 나온 최근 법원 판결, 박근혜 정부의 레임덕, 공장점거 농성으로 인한 생산 차질 등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그날 집회 대오의 중간에 자리잡고 가장 큰 소리와 활력을 보여주는 여성들,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진실을 알 것 같았다. 그늘에서 더위를 피하는 우리에게 일일이 다가와 음식물과 아이스크림을 건네고, 사람들이 거쳐 간 자리에 남은 유인물과 쓰레기 등을 묵묵히 치우고, 집회 연사와 가수들에게 가장 열띠게 호응하며 힘을 돋구고...
그 분들은 내가 궁금한 것들을 묻자 술술 이야기하며 이 투쟁의 중요성과 의의를 거듭 강조하셨다. 나이 많은 여성부터 어린 아이까지 모두 단결 투쟁의 붉은 머리띠를 묶고 있었다. 밤이 되자 아이는 엄마 품에 안겨 집회장에서 잠이 들었고, 여성은 세 아이를 챙기면서도 집회장을 떠날 줄을 몰랐다.
이들이 공장 안의 노동자들이 절대 의지를 꺾거나 흩어질 수 없도록 만들고, 이 땡볕에 여기저기 쫓아다니며 지역 사회 여론을 묶어세우고, 관련 기관과 정치권이 그 손을 차마 뿌리칠 수 없게 만들고, 정부와 사측이 용역과 경찰력 투입이라는 무리수를 감히 강행하지 못하게 만든 진정한 힘이었다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얼마 전 폭로된 사측의 'Q-P 전략 시나리오' 문건은 지금 상황이 전방위적인 노조파괴에 맞선 투쟁이라는 점을 더욱 분명히 했다. 8월 4일 경총은 ‘갑을오토텍에 신속히 공권력을 투입하라’고 발표했다. 민주노조로 단결해서 식당, 경비 노동자들까지 모두 정규직인 공장을 더 두고 볼 수 없다는 자본가들의 일치된 관심과 요구인 것이다.
이것이 지난 몇 년 동안 전국적으로 벌어져 온 ‘파업 유도 - 직장폐쇄 - 용역 투입 - 민주노조 파괴 - 복수노조 설립’의 배경이었다. 하지만 갑을오토텍 노동자들은 유성기업 노동자들의 뒤를 이어서 여기에 강력한 브레이크를 걸고 있다. 가족대책위와 노동자들의 투쟁은 여름휴가라는 고비를 넘어서 이제 금속노조의 연대 파업까지 불러일으키고 있다.
* '다른세상을향한연대’와 함께 고민을 나누고 토론해 봅시다. http://anotherworld.kr/164
* '다른세상을향한연대’의 글이 흥미롭고 유익했다면, 격려와 지지 차원에서 후원해 주십시오. 저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의 지지와 후원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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