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 “나는 소년이 아닌 아기로 태어났다”: 성, 젠더, 트랜스젠더 해방

샤니스 맥빈

번역: 박세율

 

[퀴어퍼레이드를 앞두고 우파와 보수 기독교 단체들이 동성애 혐오 선동을 하며 가족 가치와 전통적 성 역할에 대한 옹호의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 자본주의에서 성, 젠더가 어떻게 구성되며 억압과 차별을 낳는지 분석하면서 특히 트랜스젠더의 권리를 방어하는 이 글은 이런 문제를 고민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퀴어퍼레이드에 나서는 성소수자들의 투쟁과 권리를 지지하며 이 글을 싣는다.] 


출처: http://rs21.org.uk/2015/03/27/i-was-born-a-baby-not-a-boy-sex-gender-and-trans-liberation/

 



트랜스젠더(transgender)의 정체성은 사회적 공간 및 운동 안에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적 성 구조와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을 해석하는 방식 사이에서 첨예하게 대립하며 과거 150년간 발전해왔다.


대략적으로 분류해보면, 가장 지배적 관점은 생물학적 성(sex)과 사회적 성, 즉 젠더(gender)가 확고하고 필연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관점이다. 이러한 본질주의적 관점에서는, 여성의 배려심, 감성, 섬세함, 즉 엄마가 되기 위해 필요한 적성들은 생물학적으로 형성된 것이며, 사회환경 속에서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레슬리 페인버그(Leslie Feinberg)<트랜스젠더 투사 Transgender Warrior>에서 썼듯이, 성 역할 변화의 역사는 본질주의자들의 주장을 쉽게 반박한다. 미국의 원주민 집단에서 나타나는 두 영혼을 가진 이’(Two-spirit people)[각주:1]부터 몇몇 크로스드레서(Cross-dresser)[각주:2]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듯, 성 역할에 대한 관례 그리고 사람들이 어떻게 그들의 성을 정의하는가는 본질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질주의적 관점은 여전히 강력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과 젠더 사이의 관계가 매우 확정적이라고 보기에 남성 성기를 가진 사람이 여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역사적으로, 유물론적 페미니스트(Materialist Feminist)[각주:3]들은 성과 젠더 사이의 고정된 연결고리를 끊기위해 격렬하게 싸워왔다. 그들은 한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고, 옷을 입고, 말하고, 그들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며, 세상이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와 같은 것은 사회적 정체성, 관계, 기대 그리고 훈련 들의 복잡한 결과라고 주장한다


배려심이 많고, 육아에 능숙한 여성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지, 생물학적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젠더 구별짓기’(Sex/gender Distinction)로 알려진 이러한 주장은, 시몬느 드 보봐르의 인간은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길러진다는 발언이나, ‘존재(being) vs. 만들어진 것(becoming)’이나 본성(nature) vs. 사회적 존재(society)’ 사이의 논쟁에서 나타났다.


이들 중에 가장 지배적인 이론과 이론가들은 성에 대한 규정을 본성이 아닌, 사회가 규정한 자연스러움의 범주에서 바라보았다. 성별 본질주의자(Gender Essentialist)들은 만약 여성의 사회적 존재가 이미 고정되어 있고, 여성 억압이 그 사회적 존재를 특정한다면, 여성 억압도 반드시 고정되어있다고 주장한다


/젠더 구별짓기는 전혀 다른 결론에 다다른다. 만약 성을 사회적인 것으로 본다면, ‘자연스러움은 억압을 위해 본질주의적 이데올로기로 동원된 장치라는 것이다.유물론적 페미니스트인 모니끄 위티끄(Monique Witting)1980년에 쓴 글인 인간은 여성으로 태어나지 않는다에서 주장했듯,


남성과 여성의 본성이 따로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역사를 해석할 때, 우리는 남성과 여성이 계속 존재해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것이라는 것을 가정한다. 따라서, 역사뿐 아니라 억압적 사회 현상을 해석하면서, 변화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인간성이나 사회적 가치는 사회에 의해 형성되었기 때문에, 변화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공산당 선언>에 따르면: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의 아이디어, 관점, 신념 등은 그의 사회적 관계나 사회생활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한다.


이러한 공간에서는 이분법으로 규정할 수 없는 성적 정체성이 설명되며, 성별 본질주의자들의 사상이 약화된다.

 

본성에 대한 사회의 영향


/젠더 구별짓기는 성과 젠더를 예리하게 구분한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이 사회를 통해 형성되는 점을 설명하며 젠더 이론가와 과학자들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는 데에 가치가 있다.


첫번째로, 생물학적인 잠재력에 대한 자각도 사회 환경을 통해 형성되어진다. 모계 중심의 미국 원주민 사회는 이 주장을 증명해줄 수 있는 예이다. 이 곳에서는 여성에게 물리적 힘을 요구하며, 여성이 사회적으로 육체노동을 더 많이하고, 더 강한 성으로 인식된다.


두번째로, 여성과 남성의 생물학적 차이에 대한 실질적 분류도 그 자체의 의미보다는 사회적 의미를 가진다. 사회가 성적 특성을 생식기나 호르몬에 따라 분류하고, 이런 생물학적 특징을 남성과 여성의 분류체계에 대입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들은 발이나 손의 크기로 남성과 여성을 분류하지 않으며, 이를 통해 세상을 나누지도 않는다


당신의 손과 발의 크기는 사회적 중요성이 없으며, 그렇기에 인간을 분류하는데 이런 방식은 사용되지 않는 것이다. 반면에, 어떤 성적 특성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노동력) 재생산에서 핵심구실을 한다. 이런 사회적 의미가 세상을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게 하는 촉매제가 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과학계가 인간을 남성과 여성으로 칼같이 나눌 수 없다는 것을 점점 깨닫고 있다는 것이다. XX염색체를 가진 몇몇은 남성 성기를 가지고 있으며, XY염색체를 가진 몇몇은 건강한 아이를 낳기도 한다. 그리고 XYXX염색체를 모두 가진 몇몇 사람들은 모호한 생식기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과학계에서는 간성’(intersexuality)으로 알려져 있는데, 불행하게도 우리들 중 대다수는 이런 성적 다양성을 비정상으로 보곤 한다. 그들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를 자연스러운 인간의 다양성으로 인식해야 한다


과학자들은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나 남성으로 분류할 수 없는 사람들이 지구상에 수만 명이 존재한다는 것을 점차 깨닫고 있다. , 성은 이분법으로 이해할 수 없는 범위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성과 남성을 칼같이 구분할 수 있다는 주장은 생물학적 지식과 관계없이 계속 사실인양 여겨져 왔다.


이것은 성이 단순히 사회적 구성물일뿐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의 생물학적 특성이나 능력에도 기본적인 사회적 해석이나 의미, 가치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물학적 측면에서도 성은 불변의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태어날 때 남성이라는 성을 부여받았더라도, 자넷 모크(Janet Mock: 미국의 트랜스젠더 저술가)나는 소년이 아니라 아기로 태어났다는 발언이 가능한 것이다. 남성성기를 가진 아이에게 남성이라는 성을 부여하는 것은 생물학적 사실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에서 비롯한 것이기 때문이다.


성별 본질주의의 재강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질주의적 이데올로기는 계속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속에서 우리는 이것이 되살아나는 것을 목격했다이것은 부분적으로 여성이나 성 해방에 대한 지지와 성과가 늘어나는 것에 대한 우파적 반발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폴란드 교회는 성 이데올로기라는 상상의 적에 반대하는 십자군 운동을 건설하고 있다. 한 폴란드 주교는 성 이데올로기는 나치와 공산주의가 결합된 것보다 더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진보적인 교황 프란치스코마저 트랜스젠더의 권리는 인류에게 큰 위협이라고 말했다. 프랑스에서는 우파들이 성의 이론이라는 비슷한 상상의 적을 만들고 성 해방을 거부하며, 성적 규범, 가족관계 그리고 이성애를 보호하자는 공감대를 구성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더 치명적인 측면은 정부가 [보육, 돌봄 등] 사회적 재생산의 짐을 정부로부터 가족으로 전가하고 있으며, 그 짐은 결국 여성이 더 많이 짊어져야 하는 몫이 되는 것이다. ‘긴축이라고 칭해지는 이런 정책들은 성 역할이나 가족의 구실을 강조하는 이데올로기의 강화를 동반한다. 영국 수상 캐머런이 2014년에 가족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 것은 이를 정확하게 드러낸다.


성별 본질주의의 효과는 시장과 이윤을 위해 여성의 몸을 이용하는 성적 대상화에도 공헌한다. 그리고 티티 바타차리아(Tithi Bhattacharya)신자유주의 시대의 성폭력에 대한 이해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폭력, 성차별주의, 본질주의적 성 이데올로기의 동원은 개발도상국에 값싼 노동력과 여성 착취를 가능하게 한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는 본질주의적 성 이데올로기에 기반해 이익을 얻으며, 본질주의적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것은 우파적 반발일뿐 아니라 의식적인 신자유주의 전략이기도 하다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성별 본질주의 이데올로기와 성적 다양성 추구 사이의 강화되는 모순이며, 이것은 결국 해방을 위한 정치의 새로운 전쟁터이자 기회이다.

 

트랜스젠더 억압의 현실

 

이러한 분석은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트랜스젠더 억압의 잔혹한 현실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된다. 노동계급 트랜스 여성의 경우 사회에서 대부분이 실업자이다. 또한 북반구에 사는 대부분 사람들의 평균 기대 수명이 60세인 반면, 높은 자살률과 타살률, 적정한 치료에 대한 어려움 때문에 트랜스 여성들은 대부분 30대 중반에 생을 마감한다


감옥에서 그들은 수감자나 관리자들로부터 최악의 물리적 폭행이나 성적 폭행과 마주하게 된다. 미국에서 일반적 성 관념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가장 쉽게 감옥에 가거나 경찰 만행의 대상이 된다는 뜻이다.


생물학적 성이 우리의 사회적 존재가치를 결정한다는 생각이 세상을 뒤덮은 속에서, 트랜스젠더들은 오늘날의 자본주의 이념 체계에 치명적 존재가 된다. 만약 성이 사회적 구성물이기 때문에, 어떤 인간도 그들의 신체적 성과 관계없이 어떠한 성도 될 수 있다면, 트랜스젠더는 생물학적 존재와 사회적 존재 사이의 간극을 넓게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트랜스젠더는 우리로 하여금 사회가 성을 규정하는데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를 이해하게 함으로써 생물학적 성과 사회적 성을 더 밀접하게 할 수도 있다.


이러한 두 가지 과정의 융합은 핵가족 사회에서 강요되는 성 역할을 벗겨내며, 자본주의에서 성별 본질주의가 우리에게 부과하는 사회재생산의 부담도 떼어낸다. 그러므로 트랜스젠더들이 가장 견디기 힘든 차별을 겪게 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성적으로 다양한 사람들의 존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차별주의자들의 논리를 거스르는 잠깐의 경험을 제공하기도 한다.

 

트랜스 배제?


트랜스 배제적 급진 페미니스트’(Trans Exclusionary Radical Feminists: TERFs)로 알려진 일부 사람들은, ‘/젠더 구별짓기와 유물론적 페미니즘으로부터 잘못된 결론을 도출하는데, 이는 (유물론적 페미니즘은) 억압에 도전하는 전략을 제공하기보다 결국 억압의 조건을 제공하는 데 그치는 이론이기 때문이다.


TEFR의 전략은, 젠더가 사회에서 하향식의 억압적인 방식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젠더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결론은 젠더가 억압적인 사회적 관계 속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젠더를 폐지하는 것이 억압을 폐지하는 것이라는 가정에서 이미 예견된 것이다. 그들은 트랜스젠더들이 주관적으로 젠더를 택해서 위안이나 행복을 찾으려는 것이, 억압적인 사회 관계를 더 강화한다고 주장한다이러한 생각은 재앙적인 후퇴를 가져온다.


노예제도는 생산의 경제적 모델이었고, 인종과 인종주의를 재생산하는 사회적 관계였다. 그러므로, 인종과 인종주의는 노예제도를 강화했다. 인종차별주의에 대한 저항의 기반을 마련하고 흑인 노예의 삶을 개선시키기 위하여, 폐지되어야 할 것은 바로 인종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건 무기력과 나태함과 노예제의 지속에 기여했을 것이다. 문제는 노예제도였다.


마찬가지로, 여성의 몸에 대한 자본주의의 물질적 관심은 젠더와 여성에 대한 억압을 재생산한다. 문제는 젠더가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젠더가 어떻게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를 위해 구성되어졌는가이다.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에 흑인 운동을 촉발했던 사람들의 비판을 생각해봐라: “문제는 검다는 개념 그 자체이다. 검다는 것을 생각하지 마라. 그러면 당신의 억압은 사라질 것이다.”


사실 사람들은 정말 그렇게 말했다: 흑인 인권운동을 위협으로 보고 무효화시키려 했던 반동적 우파와 자유주의자들은 인종이라는 개념을 없애는 것이 인종에 대한 억압을 없앨 것이라는 공허하고 이상주의적인 전략만을 주장했다. 이것은 TERF들이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사례이다.


해방과 주체성


젠더, 트랜스젠더 그리고 해방에 대한 토론에서 우리는 문제는 젠더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해야한다. 문제는 누가 우리의 젠더를 형성하고, 그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시스템이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이다주디스 버틀러가 <트랜스 옹호: Trans Advocate>와의 인터뷰에서 언급했듯,


어떤 사람들은 젠더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정체성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그 젠더가 정말로 되기 위해 자유롭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세상은 해방의 정치를 통해서 가능하다. 자신의 몸과 존재에 대한 주체적인 표출이 오직 그들 자신에 의해 결정되는 세상에서 말이다. 해방에 대한 이러한 급진적 관점은, 우리의 젠더 표현은 반드시 천부적으로 부여된 것이어야 한다는 성별 본질주의자들이나, 젠더의 해방은 우리의 젠더를 모두 없앤 후에야 가능하다는 TERF의 관점과 반대된다.


억압을 분쇄한다는 것은 시스템을 분쇄한다는 것, 그리고 주체성을 제한하는 게 아니라 해방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 손 안에 망치와 낫을 들고서 우리는 트랜스젠더 동지들과 함께 해야 한다.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이 역사의 잘못된 측면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변혁재장전과 함께 고민을 나누고 토론해 봅시다http://rreload.tistory.com/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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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미국 원주민 사회에서 남성이면서 여성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거나, 여성이면서 남성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등 다양한 성역할을 수행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불렀다. [본문으로]
  2. 여성이지만 남성의 옷을 입거나, 남성이지만 여성의 옷을 입는 사람들. [본문으로]
  3.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를 여성 억압의 주된 원인으로 보는 여성주의자들. [본문으로]
Posted by 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변혁 재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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