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우
얼마전 우연히 SNS를 통해 어느 활동가분께서 체력 고갈로 입원하셨다는 글을 보았다. 내가 알던 분은 아니었는데, 아주 오랫동안 휴가 한번 안 가고 열심히 운동에 투신해오셨다고 소개되어 있었다.
일은 항상 많고 사람은 늘 모자라니 열정이 있는 사람은 에너지가 소진될 때까지 과로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쪽 진영의 경제적 상황이야 뻔한데, '존경하는 동지'라는 칭호가 그 노고와 헌신을 보상하기에 충분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진보진영의 활동가들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 처해있고, 과로와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있는지는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보상이 적으면서, 늘 일손이 모자란 곳에서 장기간 근무하다보니, 그로 인해 건강마저 악화되고 가정을 지키기 어렵게되는 일마저 있다는 것은 여러번 기사화되었다.
그런 기사를 읽을 때면 마음이 굉장히 안 좋다. 다만 안타깝다가 아니라 좀 더 복잡한 심경인데, 말하자면 어떤 '정의'나 '진보'와 같은 추상적인 가치가 만드는 부조리를 관찰하는 것 같아 불편하다.
한국 진보진영은 분단과 제국주의라는 요소로 인해 언제나 정치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처해있었고, 이런 한국에서 진보 활동가로 살기위해서는 사회적 고립, 평범하지 않은 삶을 각오해야했다. 그래서 한국의 진보 운동 조직과 좌파 모임들은 대체로 매우 진지하고 결연한 성격을 띄는 경향이 있으며, 이런 성격은 단체가 급진적일수록 더 강화되는 듯하다.
소수의 선진적이고 전투적인 조직원들로 단체를 구성하여, 비타협적이고 근본적인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강도높은 훈련을 불사하는 조직도 있고, 뜻은 높지만 여건이 따라주지 못해 결국 몇 사람의 희생으로 운영되는 모임도 있다.
현실 사회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더 평등하고 나은 세상을 위해 활동한다는 것은 드물게 훌륭한 일이고, 나는 그런 노력들의 가치를 조금도 폄하할 생각이 없다. 그러나 만일 어느 조직이 그것이 정의건, 진보건, 사회주의건 간에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이상향을 위해 싸우는 과정에서, 개인이 경험할 수 있는 현실의 불편함과 어려움은 참아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건 인정머리없는 논리라고 말하겠다.
더구나 만일 이런 생각이 외부로부터 요구되면서, 과정 중에 개인이 경험하는 빈곤이나 심리적 상처 등을 부수적 피해로 간주하는 환경이라면, 그런 곳에서 정치적 희망과 긍정적인 발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하나의 전인격체로 존중받기보다 조직의 한 부품으로 역할하길 기대받는 곳에 가고싶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일사분란한 실천과 역량의 집중을 위해 토론이 제한되고 다른 의견이 환영받지 못하는 모임에서 해방을 경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주로 지도부에서 중요한 결정들이 이루어지고, 그런 지도부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려고 실수와 실망스러운 결과 등을 소통하지 못하는 곳에서 자유를 경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구체적인 원인은 열거할 수 없으나, 나는 무언가 부자연스럽고 인위적인 느낌을 여러 좌파 조직들로부터 받았다.
구성원들이 일치단결해 과감한 정치적 주장을 하고, 자신들과 조금 다를 뿐인 생각에조차 날선 용어를 사용해 기탄없는 비판을 쏟아내지만, 그 주장들이 설득력있고 당당하다는 느낌보다는 화가 나있고 어서 굴복하라고 말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쯤되면, 그 단체에서 어떠한 정의로운 이상향을 제시하더라도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잘 들지 않는 것이다.
내부적으로는 취약한 단체가, 그럴수록 더욱 엄중하고 가혹한 잣대로 다른 사람들을 가차없이 비판하는 경향이 생기는 듯도 하다. 이 모든 것이 내게는 '나는 안 될 거야. 너도 될 리가 없어'라는 무기력과 패배주의가 번져 사람들을 생기를 잃어버린 환자로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무기력과 패배주의는 한번도 자신들의 원래 얼굴을 보인 적이 없다. 오히려 과도한 희망과 근거없는 낙관주의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나는 어쩌다 사회 진보와 변혁을 위한 운동 속에 편협함과 고집불통, 분열의 이미지가 스며들게 되었는지 너무도 안타깝게 생각한다. 이런 석연찮은 냄새들이 얼마나 많은 건전한 양식의 사람들을 진보 운동로부터 멀어지게 했을지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투쟁의 과정 또한 진지하게 되짚어야 한다. 이와 관련해 최근 김정욱 사무국장이 <한겨레>와 가진 인터뷰에서 발언한 몇 가지 내용은 가슴아프게 다가온다.
“고공농성이 별것 아닌 것처럼 얘기되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 철저하게 자기와의 싸움으로, 그리고 관계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싸우게 하니까요. 그런 건 우리 스스로에게 주는 또다른 고문이에요 … 그런데 돌아보면, 결국 창근씨도 지금과 같은 투쟁의 틀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 아닌가 싶어요.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어했거든요. 창근씨는 간절하게 그 일상을 회복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다르게 표현됐지만,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창근씨나 저나 같은 거죠.”
'삶'. ‘평범한 일상’. 착취와 압제와 차별이 없는 곳이건, 인류애가 실현된 곳이건 그 훌륭한 목적지까지 가는 길은 일상이고, 가는 동안 오로지 목적지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의 삶을 살아야한다.
목적지에 다다른 이후에야 진정한 삶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마치 언젠가 만날 운명적인 상대를 생각하여 지금은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는 것과 같다. 지금 나누는 사랑 안에 운명의 싹이 있는 것처럼 현재의 평범한 일상에 사회변혁의 싹이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떤 훌륭한 가치도 '삶'과 바뀌어져서는 안 된다. '삶'을 희생해서 어떤 가치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과정을 거치지 않고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정의나 진보를 위해 삶을 희생하는 일은 없어야한다.
질적인 변화를 위해 양의 축적은 필수이다. 단호해야하지만 아주 오랜 과정이다. 오래도록 가려면, 내 삶을 살아야한다. 생활에 매몰되지 않으면서 목적지를 잊지 않으면서 그리고 무엇보다 가다가 멈추지 않으면서.
나는 많은 진보 활동가분들이 더 자신에게 충실하고, 좀 더 개인적인 행복을 추구하길, 자신의 삶을 다채롭고 풍요롭게 만드는 사소하더라도 의미있는 기회들을 갖기를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 말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좋은 마음과 의지를 가지신 분들이 더 오래 사시고, 행복한 일상을 사셨으면 하는 바램 때문이다. 희생이 아니라 웃음을 권할 정도는 되어야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디더라도 사람과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인류애를 실천하는 법을 배우는 모임이 되는 것이 건강한 진보, 행복한 활동가를 가능하게 하는 첫째 조건이 아닐까.
“만일 당신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바꾸고 싶다면, 당신은 매일매일 그 자리에 서서 따분하고도 단순하기 짝이 없는 다음과 같은 일을 꾸준한 열정으로 계속해야 합니다. 이 문제에 흥미를 가진 사람을 끊임없이 만나고 설득하고, 조금씩 조직을 확장하며, 다음 단계 일을 차근차근 준비하고 실천하며, 때로 화가 나는 것을 억누르고, 결국 어떠한 성과를 얻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세상을 바꾸는 방식입니다.”
– 노엄 촘스키, 2004년 5월 <더 프로그레시브>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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