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 아동살인자 네타냐후와 바이든, 오늘은 몇 명을 죽였냐?
이스라엘은 지금 전면적 침공에 의한 지상전보다는 장기적 포위작전을 통한 지상전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더욱 잔인하고 피비린내나는 작전이 될 것이다. 네타냐후는 이런 작전을 시작하면서 "이제 가서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완전히 멸하고 남자와 여자와 젖 먹는 아이와 소와 양과 낙타와 나귀를 모두 죽여라"는 성경 구절을 인용했다.
그러면서도 “이스라엘군은 세계에서 가장 도덕적인 군대”라고 했는데, 단 3주만에 우크라이나 침공 2년 동안 러시아가 한 것만큼의 파괴와 민간인 학살을 해놓고도 이렇게 말하다니 그 철면피함에 말문이 막힐 지경이다.
이스라엘의 이런 야만적 만행은 결코 ‘하마스 제거’라는 목표를 이룰 수 없다. 지난 10월 7일의 기습공격이 있기 얼마 전에 하마스 간부는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는 화해의 문을 두드렸지만 들어갈 수 없었다. 이 늪에서 우리를 구출할 모든 방법을 시도했지만 길을 찾지 못했다.”
이스라엘이 강요한 이 절망과 좌절이 비극을 낳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번 이스라엘의 폭격과 학살은 이제 얼마 안가서 제2의 하마스와 제2의 10월 7일을 낳을 것이 명백하다. 진정한 해결책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아직 굴복하지 않고 급진적 희망을 유지하던 시기에 주장하던 대안에 있다.
당시에 PLO는 ‘아랍인, 유대인, 무슬림, 기독교인이 완전한 평등 속에서 자유로운 하나의 세속적인 민주 국가’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지금, 이스라엘의 폭격과 대학살 속에서 이러한 희망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다.
이 비극에 누구보다 큰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미국 바이든 정부다. 바이든 정부는 이스라엘의 대학살을 막을 권한과 책임도 가지고 있지만 오히려 돕고만 있다. 그러면서 바이든은 ‘군비 지출이 경제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미국 무기업체들은 지금의 전쟁을 ‘수요와 추가 주문 증가의 사업 기회’로 보고 있다. 베트남 전쟁 때 반전 시위대는 ‘닉슨, 오늘은 몇 명의 아이들을 죽였냐’고 물었다. 지금, 우리도 물어야 한다. ‘아동살인자 바이든, 오늘은 몇 명을 죽였냐’고.
● 가자지구는 생지옥이 되고 있다
20일 가까운 이스라엘의 폭격과 대학살 속에서 가자지구는 생지옥이 되고 있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가자를 "살 수 없는 곳", "인간이 존재할 수 없는 곳", "파괴만 있는 곳"으로 만들겠다고 협박하더니 그것을 실행에 옮기고 있다.
이제는 기지국과 통신망조차 파괴했다. 가자 주민들은 도와달라고 연락할 수도 구급차나 소방차를 부를 수도 자신들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 세상에 알릴 수도 없다. 이스라엘은 세상의 눈을 피해서 더욱 더 마음 놓고 폭격하고 학살할 수 있다.
지난 20일 동안의 대학살을 보면서, ‘10월 7일에도 우리가 아니라 이스라엘군의 포격으로 더 많은 인질이 죽었는데 우리에게 다 떠넘겼다’는 하마스의 주장에 (그들의 오류와는 별개로) 더 신뢰가 가기 시작했다. 이스라엘 정부가 지금도 200여명 인질의 생명과 안전에 관심도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네타냐후는 인질이 죽든 말든 어떤 전쟁범죄도 주저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미국 바이든은 “가자의 사망자 규모에 대해 팔레스타인 쪽이 진실을 말하는 것 같지 않다”고 했다. 인종청소와 대량학살을 막아서는게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계속 학살 면허증을 주겠다는 말이다.
그래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과 폭격, 그리고 미국의 태도를 보면서 ‘이라크와 아프간의 대실패 이후에 미국이 생각과 태도가 좀 바뀌었나’ 싶던 생각이 산산이 부서지고 있다. 러시아를 비난했던 것은 순전히 ‘우리의 허락도 없이 우리는 못하는 짓을 너희만 하냐’는 시샘이었던 셈이다.
언제든지 약소국을 침략하고 폭격하고 싶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본능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는 게 이스라엘에 대한 전폭적 지지와 지원을 통해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따라서 이런 절대절명의 상황에 ‘노동자연대’(노연)가 나에게도 이스라엘의 폭격을 반대하는 집회와 행진에 함께하자는 메일을 보낸 것을 보고 씁쓸하면서도 이해가 갔다.
노연이 성폭력 피해자들을 괴롭히고, 피해자들의 조력자인 나에게 보복 소송을 하고 내 통장을 압류하고, 600만원 뜯어가는 일은 여전히 용납할 수 없지만, 지금은 모든 걸 떠나서 힘을 모아서 이스라엘의 폭격을 막아야 한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아직도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반성하고 사과하지 않는 노동자연대가 더욱 원망스럽다. 지금 노연이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수많은 시민사회단체들의 공동행동에 함께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이름도 내걸지 못하는 집회를 계속 따로 하는 안타까운 상황의 책임은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에게 있다. 제발 이 문제를 스스로 풀었으면 좋겠다.
주최도 명의도 없이 홍보하는 노연의 집회에는 이런 맥락과 상황을 알기 어려운 아랍 이주민들이 많이 참가하고 있던데, 노연이 그 분들에게 지금의 슬픔과 분노를 표출할 공간을 마련해주는 것은 매우 의미있어 보인다. 하지만 몇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게 있다.
하나는 노연의 집회에 갔다온 좌파 동지에게 들으니, 거기서 노연은 ‘왜 주최측 허락도 없이 유인물을 배포하냐’며 그 동지들을 가로막았다고 한다. 이것은 노연이 ‘왜 민주노총 지도부는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다는 핑계로 우리의 신문 판매를 가로막냐’며 비판하던 논리나 ‘지금은 모두 함께할 때’라는 자신들의 주장과도 모순된다.
또 하나는 지금 곳곳에서 나오고 있는 “휴전” 요구에 대한 노연의 태도이다. 노연은 “휴전 요구는 현재 팔레스타인 저항 세력의 염원을 정면으로 거스르게 되는 것”이라며 사실상 반대한다. 너무 이해가 안돼서 읽어보니 ‘지상전은 심각한 피해를 낳으며 이스라엘에 정치적 타격을 가할 것이니 반대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였다.
이것은 정말 동의할 수 없는데, 여기에는 지금 즉각적 휴전을 바라는 사람들에 대한 공감만이 아니라, 지상전으로 희생될 수많은 생명에 대한 고려가 빠져 있다. 단지 냉혹한 ‘전략 전술적 판단’만이 우선이고, 그것은 전략 전술적으로 중대한 오류일 뿐이다. 그 무엇도 생명보다 우선일 수 없다. 즉각적인 폭격 중단과 휴전이 절실하다.
● 팔레스타인 연대가 하마스 지지인가?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팔레스타인에서 인종청소와 인명 살상이 벌어지는 참혹한 상황에서도 피할 수 없는 문제가 10월 7일에 있었던 ‘기습 공격’과 이스라엘 민간인들의 희생, 공격의 주체였던 하마스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것은 단순히 삭제하거나 축소할 수 없는 문제이고, 그렇다고 ‘이스라엘도 문제고 하마스도 문제’라는 단순한 양비론으로 그칠 수도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마스가 보여 준 ‘폭력’의 원인과 책임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폭력적 억압과 지배에 있다는 사실이다. 팔레스타인의 땅을 강제로 빼앗고, 그들을 ‘거대한 열린 감옥’ 같은 좁은 땅에 가둬두고, 수시로 전투기로 폭격한 결과가 오늘의 비극을 낳았다.
질베르 아슈카르도 이렇게 지적했다. “야만성은 결코 ‘정당한 방어’ 수단이 될 수 없다. … 그러나 두 야만성이 충돌할 때 더 강한 야만성, 즉 억압자 쪽이 여전히 더 큰 잘못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 약자의 야만성은 강자의 야만성에 대한 반응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더구나 하마스도 팔레스타인 저항의 일부이기 때문에, 하마스를 악마화하는 것에 동조할 수는 없다. 예컨대 지금 이스라엘 정부와 미국 정부는 하마스를 ‘이슬람국가(ISIS)와 똑같다’, ‘순수하고 완전한 악’, ‘인간이 아닌 짐승들’이라고 매도하고 있다.
하지만 ISIS는 점령한 지역에서 주민들을 고문하고 참수했을뿐 아니라 반동적이고 반혁명적인 성격이 강하다. 또 한 번도 민주적 선거를 통해서 권력을 잡은 적이 없다. 2010년부터 ‘아랍의 봄’으로 민주주의 혁명들이 중동의 여러 나라를 강타했을 때 ISIS는 명백히 반혁명적인 위치에 서 있었다.
반면, 하마스는 이집트 등에서 반독재 저항운동과 민주주의 혁명을 이끌었던 ‘무슬림형제단’과 더 성격이 비슷하다. 또, 보통 사람들의 복지, 교육 등을 위한 노력과 캠페인을 하면서 2006년 팔레스타인 총선에서 팔레스타인 시민들의 지지를 얻어 승리했다.
물론, 하마스가 기반한 이슬람주의의 종교적 보수성은 민주주의나 소수자의 권리와 충돌하는 게 사실이다. 또 하마스는 이란, 카타르 등의 아랍 정부들과 동맹을 맺고 협력하며 팔레스타인의 해방을 추구하고 있다. 문제는 이들 대부분이 권위주의적 독재 정부로서 자국의 아랍 민중들을 억압하고 있다는 데 있다.
나아가, 하마스는 무장 투쟁(‘폭탄 테러’와 카삼 로켓 공격)을 민족해방의 주요 전략으로 삼고 있다. 이런 전략은 비밀스럽게 무장 투쟁을 계획하고 지휘하는 소수의 엘리트 간부들에게 권한을 집중시키며 대다수 팔레스타인인들을 수동적 지지자로 만드는 문제가 있다.
더구나 원시적 무기들에 의존하는 무장 투쟁만으로는 결코 압도적 군사력을 과시하는 이스라엘군을 상대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이런 문제점들과 가자지구의 악화하는 현실에 대한 불만 때문에 지난 여름에 가자에서 하마스 반대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나아가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과 수교하며 팔레스타인의 뒤통수를 치는 일까지 벌어졌다.
아마도 하마스는 10월 7일의 ‘기습 공격’으로 이런 복잡하게 얽힌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기대한 것으로 보인다. 수천 발의 로켓을 쏘고, 장벽을 넘어서 이스라엘군을 공격하고, 행글라이더로 공중 침투하는 동시다발적 군사 작전으로 이런 복잡한 정치적 문제들이 해결될 것이라는 이러한 기대를 질베르 아슈카르는 “마술적 사고”라고 꼬집었다.
물론, 거듭 확인하듯이 10월 7일에 벌어진 것은 이스라엘의 억압과 폭력이 낳은 비극이고, 그 정확한 진상에 대해서는 현재 이스라엘군과 하마스의 주장이 서로 엇갈리고 있기에 단정적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하마스는 ‘장벽이 예상보다 너무 쉽게 무너지고, 당황한 이스라엘 경비대와 교전 중에, 뒤늦게 도착한 이스라엘 군대가 무차별 포격을 하면서 혼돈 속에 희생자가 늘어났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마스가 민간인들도 표적으로 삼아온 것은 부정하기 어렵고, 이번에도 이스라엘 민간인만이 아니라 가난한 태국 이주노동자 등의 안타까운 희생도 있었다.
무엇보다 하마스의 ‘알-아크사 홍수’ 작전은 팔레스타인 저항의 대의와 도덕적 정당성에 훼손을 가하면서, 마치 9.11이 미국 부시 정부와 ‘네오콘’에게 이라크 침략이라는 오랜 숙원 사업을 실현할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듯이 이스라엘의 시온주의 극우강경파에게 ‘제2의 나크바’를 실행에 옮길 기회를 제공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질베르 아슈카르는 이렇게 지적했다.
“하마스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다. 하마스의 전략은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해 봉사하고 더 많은 이스라엘인을 대의에 동참시키는 대신 유대 민족주의적 단결을 촉진하고 시오니스트 국가에 탄압을 강화할 구실을 제공한다. … 오늘날까지 팔레스타인 투쟁에서 가장 효과적인 사례는 1988 인티파다처럼 비무장 투쟁이었다.”
물론, 이스라엘에 치명적 타격을 가했던 1988년 1차 인티파다와 같은 대중항쟁과 총파업, 국제적 연대가 다시 쉽게 되풀이되지 않는 이유를 이해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그런 투쟁의 부활을 막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서안과 가자를 갈라놓았고, 모든 저항과 연대의 싹을 잘랐고, 5천여 명의 투사들을 끌고 가 감금했고,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의 집단행동이 이스라엘 산업에 끼칠 경제적 구조와 힘을 제거해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하마스같은 이들이 “마술적 사고”에 의존하게 되는 것은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새롭고 더 효과적인 전략에 대한 고민을 포기해도 된다는 뜻은 될 수 없다. 팔레스타인의 투사들과 민중은 결국 답을 찾아낼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응원하고 연대해야 한다.
● 내로남불과 유체이탈의 각국 지배자들
미국 바이든 대통령이 어제 “지금은 민주주의와 독재 국가간의 전쟁에서 ‘역사적 변곡점’에 있는 순간”이라며 “이스라엘과 우크라이나의 승리가 미국의 국가 안보에 필수적”이라는 연설을 했다. 이처럼 이스라엘과 우크라이나가 마치 같은 ‘독재자가 지배하는 강대국에 의해 침략당하고 있는 약소국’인 것처럼 묶는 것은 정말 황당한 논리이다.
이스라엘은 약소국이기는커녕 중동은 물론 세계 최강 수준의 군사력과 핵무기까지 가진 나라이다. 이스라엘은 침략을 당하고 있는게 아니라 지금 가자지구를 침공하고 있는 당사자이다. 또한 사법 개악으로 자신의 비리를 덮고 초법적 권력을 강화하려는 네타냐후야말로 독재자라고 불릴만 하다.
어느 모로 봐도 ‘강대국에 의해 침략과 학살을 당하고 있는 것’은 팔레스타인이지 이스라엘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래도 하마스가 저지른 테러와 이스라엘인들의 희생이 있지 않냐?’고 할 것이다. 물론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측면은 우크라이나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라시아가 ‘돈바스 지역의 내전에서 죽은 친러시아계 주민들의 희생’을 언급하는 것이 그것이다.
따라서 러시아가 ‘신나치’를 문제삼는 것와 이스라엘이 ‘하마스의 테러’를 문제삼는 것은 모두 자신들의 폭격과 학살과 점령을 정당화하려는 적당한 핑계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하다. 따라서 바이든의 어제 연설은 미국 지배자들이 얼마나 위선적이고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과 패권을 위해서 이중잣대를 적용하고 있는지 보여 줬다.
한편에서는 러시아의 만행에 분노하고 우크라이나의 저항을 지지한다면서, 다른 편에서는 이스라엘의 만행을 지지하며 팔레스타인의 생명들을 짓밟고 있는 것이다. 이런 지독한 위선과 이중잣대를 윤석열과 조선일보도 그대로 따라가며 보여주고 있다.
물론 그것은 그 반대편에 있는 지배자들에게서도 그대로 발견할 수 있는 측면이다. 바로 러시아의 푸틴이 그렇다. 푸틴은 ‘전쟁과 침략과 민간인들의 희생은 안 된다’면서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척하는데, 러시아군이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저지르고 있는 만행을 생각하면 그 유체이탈에 정말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란의 신정통치 지배계급도 위선적이기는 마찬가지인데, 지난 2년 동안 여성들이 주도한 히잡 시위를 무자비하게 짓밟으면서 시민 5백여명을 학살한 장본인들이, 지금 이스라엘을 비판하며 팔레스타인 시민들의 희생을 슬퍼하는 척 하고 있다. 이 점은 사우디아라비아 왕정 등 아랍의 부패한 독재정부들 대부분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이들은 자국에서 시민들과 이주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당사자이며, 예멘 전쟁 등을 후원해 왔을뿐 아니라 팔레스타인에게 말로만 연대하고 사실 별다른 도움을 준 적도 없다. 바로 얼마전까지 이스라엘과 수교를 추진하던 당사자들이다. 하지만, 지금 아랍 민중들의 거대한 분노를 눈치보며 이스라엘을 비판하고 팔레스타인을 진심으로 지지하는 척하고 있다.
이 모든 위선과 이중잣대가 참으로 견디기 어렵다. 아래 그림은 한 중동의 만평가가 그린 그림인데 튀르키예의 독재자 에르도안이 겉으로는 가자지구의 참상을 슬퍼하면서 뒤로는 쿠르드 지역을 폭격하는 위선을 통렬하게 비판하며 풍자하는 내용이다. 여기에 바이든, 푸틴, 윤석열, 조선일보, 빈살만... 누구 각자의 이중적 행동을 집어넣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 가자지구에서 생명이 죽어가고 있다
어제 이스라엘의 병원 폭격과 대량학살에 대해서 이스라엘, 미국 바이든 정부, 서방 주류 언론과 조선일보 등 모두가 ‘진실 공방’으로 몰아가거나 심지어 팔레스타인 테러단체의 소행이라고 하면서 물타기에 나서고 있다.
특히 바이든은 지난번에 ‘하마스가 아기까지 참수했다’는 가짜뉴스를 앞장선 퍼트리다가 망신을 사더니, 또다시 이스라엘 편에서 ‘이스라엘이 아니라 다른 테러단체가 했다는 데이터가 있다’며 쉴드쳐주기 바쁘다.
그러나 모든 정황과 증거들은 이스라엘이 범인이라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먼저 초기에는 이스라엘 담당자들이 스스로 인정했던 사실이고, 나중에 ‘테러단체의 소행’이라고 말을 바꾼 후 올린 증거는 병원 폭발 이후에 찍은 영상이라는 지적이 나오자 곧바로 삭제해 버렸다.
또 ‘테러단체들이 나눈 대화’라는 음성 파일은 많은 전문가들이 조작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하마스의 기습도 알지 못했던 모사드가 갑자기 하마스의 대화를 실시간으로 듣고 있었다는 것도 이상하다. 사실, 전쟁범죄를 저지른 후 발뺌하며 테러단체를 핑계대며 진흙탕을 만드는 것은 이스라엘의 오랜 수법이다. 나중에 대부분 이스라엘이 범인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게다가, 이번에 민간인 밀집지역에 대한 무차별 폭격은 지상군 투입 대신에 자신들이 택한 새로운 전략이라는 것은 이스라엘군 스스로도 부정하지 않아왔다. 전기, 가스, 수도, 식량을 끊고 ‘24시간 내로 대피하라’고 명령을 내린 다음 병원이든 학교든 가리지 않고 폭격했다.
그러면서 이미 1만발의 폭탄으로 3천명을 죽인 이스라엘이 이번 폭격도 했다고 보는 것은 너무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그럴 때마다 서방정부와 언론은 ‘하마스가 병원과 학교에 숨어있기에 이스라엘의 공격은 정당한 자위권’이라고 옹호했다.
이것은 네타냐후 정부의 기조이기도 했다. 이 정부의 극우익 스모트리히 재무장관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세 가지 선택권이 있다. 우리의 규칙을 받아들이거나, 그 땅을 떠나거나, 남아서 싸운다면 우리가 1948년 방식(인종청소)으로 해결할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이번에 하마스의 잘못된 폭력적 대응을 부른 것이다. 남아공에서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서며 수십년간 투옥되기도 했던 넬슨 만델라는 ‘투쟁의 형태를 결정하는 피억압자가 아니다. 억압자가 폭력을 사용하면 피억압자도 폭력으로 대응하기 마련’이라고 했다.
따라서 이번에 하마스의 잘못을 비판했던 사람들은 이제 이스라엘군의 더 끔찍한 더 대규모의 민간인 학살을 더 강하게 비판하고 막아서야 한다. 가자지구에서 지금 이순간 우리와 똑같은 인간들이 생명들이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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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이들이 일시적으로
하늘로 올라갔으면 좋겠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러면 아이들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부모가 물으면
"어디 있었니?"
아이들은 대답한다
"구름을 가지고 놀고 있었어요"
- 가산 카나파니(팔레스타인 작가)
● 잊지 않을 것이고 잊지도 못한다
어제 이태원 참사 1주기 시청광장은 기억하는 사람들로 꽉 찼다. 이 참사와 희생자들을 죽을 때까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아래 글은 올해 초 <황해문화> 2023년 봄호에 기고했던 글이다. 이 글에서 던진 문제의식과 의문들은 1년이 지난 지금도 타당하고 전혀 풀리지 않았다. 여전히 우리는 이태원 해밀톤 호텔 옆 좁은 골목길에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지만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는다는 공감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왜 이번에 윤석열 정부는 아무 대비도 하지 않고, ‘국가는 없었’던 것인가? 첫째, 촛불항쟁으로 이루어진 성과들을 되돌리는 것이 정책 방향의 중심이었던 윤석열 정부에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은 우선이 아니었다. 윤석열은 심지어 “안전을 중시하는 관료적 사고를 버려야 한다”고 했다.
둘째, 청와대를 용산으로 이전하면서 경찰력이 윤석열 사저와 대통령실 경호, 출퇴근길 경호 등에 더 많이 소요됐다. 또 경찰국을 신설하면서 경찰수뇌부는 더욱 대통령실에 충성했다. 참사 당일 집회와 시위에는 기동대 등 6500여명이 배치돼 있었지만, 이태원에 배치된 경찰력은 137명에 불과했다.
셋째, 당시에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법무장관은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검찰과 경찰을 독려하고 있었다. 참사 당일에 이태원에 배치된 소수의 경찰력 중에서도 절반 이상은 마약 단속 사복경찰이었다. 참사 이후에도 검찰은 희생자 시신에 대한 마약 부검을 하고, 심지어 참사 현장의 유류품까지 수거해 마약 검사를 했다.
넷째, 윤석열 정부의 특징은 검찰총장 출신의 대통령과 검사 출신의 주요 구성원들이었다. 검찰 조직의 특징은 경직된 상명하복의 위계질서, 반성과 사과를 찾기 힘든 문화에 있다.
참사의 진실을 쫓아가면서 우리의 시선은 해밀톤 호텔 옆 골목에서 출발해 계속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확장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날밤 죽어간 사람들의 등을 떠밀고 심장을 옥죄었던 진짜 범인들은 이태원 골목에 있지 않았다. 진짜 범인은 용산 집무실, 서초동 아크로비스타, 총리실, 서울시장실, 장관실에 있었다....밝혀내야 할 의혹들은 너무나 많다.
● 기동대 배치 지원을 요청했는데 상부에서 거절했고, 이제는 요청의 흔적들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는 이임재 용산경찰서장의 증언은 사실인가?
● 참사 몇시간 전부터 112를 통해서 들어온 시민들의 구조 요청 전화 120통에 대해서 경찰이 제대로 대응하지 않은 진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 경찰 무선망 교신 내용을 보면 상부에서는 차도로 쏟아지는 인파를 다시 인도로 올리라는 지시를 계속 내렸다. 위험을 더 가중시킨 이런 지시는 왜 내려진 것인가?
● 참사 당일에 위험을 인지한 박희영 용산구청장은 지휘계통도 아닌 권영세 통일부 장관에게 제일 먼저 알리고 통화도 했다. 왜 그런 것이며 무슨 대화를 한 것인가?
● 윤희근 경찰청장은 참사 당일에 친목모임, 등산, 음주, 취침 때문에 연락을 잘 못받았다고 주장한다. 과연 누구와 어디서 무엇을 했던 것인가?
● 이상민, 오세훈, 윤희근보다도 더 먼저 참사 발생을 보고받았다는 윤석열 대통령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 누구에게 보고받았고 그후 누구에게 무엇을 지시한 것인가?
● 참사 현장에 있던 희생자의 친구나, 소식을 듣고 당장 달려온 가족 등을 경찰이 ‘집에 가서 기다려라’고 강제로 귀가시켰다는 유가족들의 증언은 사실인가?
● 참사 이후에 정부가 희생자들의 시신을 연고도 없고 거리도 먼 40여개가 넘는 병원으로 분산해서 이동시킨 것은 어떤 목적과 의도 때문이었는가?
● 희생자들이 신분증과 휴대폰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정부는 12시간 동안 연락하지도 않았고 연락을 받지도 않았다. 도대체 12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 시신이 훼손됐다, 피묻은 상의가 없어졌다, 나체로 시신을 인도받았다, 몸을 확인하지 못하게 했다, 휴대폰이 사라지거나 내역이 삭제됐다는 유가족들의 증언은 사실인가?“
<10.29 이태원 참사가 우리에게 던지는 일곱 가지 질문>
● 20년 만에 감옥 인터넷 서신 없앤 한동훈 법무부
모든 곳에서 모든 것이 후퇴하는 윤석열 시대에 최근 가장 분노한 것 중 하나가 한동훈 법무부의 감옥 인터넷 서신 제도 폐지다. 감옥에 있는 사람에게 간단하고 편리하게 편지를 보내 하루 만에 전달하는 이 제도는 지난 20년 동안 갈수록 이용자나 늘어나고 있었는데도 당장 올해 10월부터 폐지됐다.
어떤 이들은 ‘나랑은 상관없는 문제’라거나, ‘감옥 범죄자들의 인권까지 챙겨야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크게 착각하는 것이다. 감옥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다 범죄자라는 생각부터 편견이다. 이 나라의 뒤틀린 사법 제도 속에서는 무고한 사람들도 얼마든지 감옥에 갈 수 있다. 게다가 구속된 상태의 피의자라도 무죄 추정의 원칙이 적용돼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옹호해야 하는 것은 ‘나와 친하고 내가 좋아하는 인격이 훌륭한 사람들’만의 차별적이고 선택적인 권리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권리라는 점에 있다. 따라서 나와 친하지 않고 내가 싫어하는 인격적으로 부족한 사람들의 권리일수록 더 옹호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이것을 놓치기에, 검찰과 언론이 누군가를 범죄자나 괴물로 만들고, 따라서 그들의 인권을 짓밟는데도 대부분이 외면하고 침묵하게 되는 것이다.
그 사회에서 가장 밑바닥에 있고 무시당하는 사람들의 권리가 보장될수록, 모든 사람의 권리가 보장되는 법이기도 하다. 그래서 ‘감옥에 있는 사람들의 인권 수준이 그 사회의 인권 수준의 척도’라는 말이 존재한다. 그리고 감옥에 있는 사람들에게 인터넷 서신의 중요성은 정말 크다. 감옥에 있으면 사회와 단절될 수밖에 없고, 모든 정보와 교류가 차단된다.
요즘처럼 휴대폰, 카톡, 메신저 등이 발달해 실시간 소통이 가능한 시대에 자기 의사를 상대에게 전달하고 상대의 반응을 확인하는데 며칠에서 일주일까지 걸리는 상황을 상상해 보자. 편지나 면회에만 의존하면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터넷 서신 덕분에 그나마 이 시간이 많이 단축될 수 있었다.
내가 국가보안법으로 감옥에 갔던 20년 전만 해도 인터넷 서신은 없었다. 당시에는 모든 편지의 봉투를 닫지 않고 교도관에게 건냈다. 그래서 감옥 내부의 문제에 대한 불만을 전달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그 내용을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에 담는 것이었다. 그러면 어차피 감옥 당국이 읽어볼 테니까.
그나마 참여정부 때부터 인터넷 서신이 도입되고 서신 검열도 원칙적으로는 폐지됐다. 그것은 감옥 안에서 힘들고 외로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에게 숨 쉴 수 있는 소중한 틈을 제공했다. 특히 억울한 누명으로 감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더욱더 소중했다.
그런데 이처럼 수십 년 동안 서서히 나아져 온 개선과 변화를 윤석열과 한동훈은 단칼에 없애 버렸다. 대신 인터넷 우체국 'e-그린우편'으로 대체한다지만, 이것은 배달에만 며칠이 걸리고 유료이기에 대체 방안이 될 수 없다.
더구나 이런 후퇴는 면회 와줄 사람도 별로 없어서 줄곧 감방에 앉아서 바깥소식만 기다리는 가난한 수감자들에게는 너무 심각하겠지만, 고액을 써서 대형로펌과 계약한 수감자들에게는 큰 불편도 아닐 수 있다. 그런 사람은 대형로펌에 소속된 면회 전담 변호사가 매일 같이 면회와 접견을 와서 실시간 정보 전달과 소통을 해줄 수 있다.
이 모든 점을 볼 때 법무부의 감옥 인터넷 서신 제도 폐지는 현재 이 나라에서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 6~7만여 명을 대변해서 누군가는 항의할 문제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어디서도 그런 목소리는 잘 들리지도 않고 찾기도 어렵다. 툭하면 상대방을 ‘잡범’, ‘깡패’라고 공격하는 한동훈 장관의 법무부에서 수감자의 인권은 고려 대상도 아닌 것 같다.
‘감옥에 있는 죄지은 사람들’의 문제까지 관심을 가지고 편을 들 이유는 없다는 생각도 이 사람들의 존재와 목소리를 지우고 입을 막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툭하면 압수수색, 소환조사, 구속수감이 펼쳐지는 신검부 정권의 검찰공화국 시대에 어느 순간 바로 내가 겪을 불편일 수 있다는 생각, 구치소와 교도소에 다시 들어갈 상상만으로도 우울해진다.
(기사 등록 2023.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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