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읽기

[박노자] 홍범도, "부관참시"와 뉴라이트 이념의 정치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3. 9. 3.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bit.ly/3jpYwgJ)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지금 육사에서 벌어지고 있는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의 촌극은, 일면으로는 그야말로 "연막 공작"쯤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수출이 부진하여 금년 경제 성장률 전망치 (1,5% 정도)도 세계 전체의 평균보다 2배나 낮고, 일본의 오염수 방류 등 한국 정부가 종범이 된 대형 환경 범죄도 주변에서 감행되고 있는데, 이 총체적인 난국에 대중의 관심을 돌릴 만한 "거리" 하나가 필요했다는 것은 이 분석의 골자입니다.

"홍 장군의 흉상 철거"와 그 철거가 초래한 "이념 시비"는 결국 그런 "대중의 눈을 돌릴 만한 소재"라는 이야기는 꼭 그 자체로서는 틀리지 않을 겁니다. 윤 정권이 실정을 거듭하고 있으며, 이 판국에 "이념 문제"로 관심을 돌릴 필요가 분명히 있었던 것입니다. 한데 이와 동시에 이 정권을 배경으로 한 육사가 홍 장군에 대해 벌이고 있는 "부관참시"는 한국 지배층 이념 지형상의 매우 큰 변화를 과시하기도 합니다. 바로 "우파 민족주의"가 지금 "우파 대한민국주의"로 바뀌어 간다는 것은 이 변화의 핵심입니다.

한국의 주류 엘리트는 대체로 식민지 시대의 협력형 엘리트 ("친일파")를 생물학적으로 내지 제도적으로 계승했지만, 이와 동시에 한국이 탈식민 국가인 이상 그 명목상의 이데올로기는 오랫동안 - 적어도 표면적으로 반식민지 투쟁을 그 주된 명분으로 삼는 - 우파 민족주의이었습니다. 박정희가 - 대부분의 한국 엘리트처럼 - 스스로 일제 시절 () 관료 출신이었지만, 반식민지 우파 민족주의의 상징인 백범 김구의 아들 김신을 주대만 대사, 교통부 장관, 유신 정우회 국회 의원 등으로 극진히 "모신" 것입니다.

백범의 아들이 고위직 관료를 지낸다는 것은 한국의 "민족적" 명분을 그나마 살리는 "알리바이" 같은 것이었죠. 그런데 "반식민""민족" 코드의 이념 정치는 꼭 백범과 같은 반공적 민족주의자에 대한 이념적 "소환"에 머무르지도 않았습니다. 지금 문제가 된 홍범도 장군에게 건국훈장을 처음 1963년에 추서한 것은 바로 박정희이었습니다.

동시에 바로 박정희 시절에 김준엽과 김창순 같은 학자들이 최초로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에 대한 학술적 정리를 시도할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 홍 장군의 행적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공산주의가 "독립 운동"이었다면 "민족""반식민지" 명분 차원에서는 이미 그 당시의 우파 민족주의의 이념의 장에서도 어느 정도 수렴된 것이죠.

황군의 "마지막 장교"라고 스스로를 생각한 듯한 다까끼 마사오가 이처럼 김구나 홍범도를 "모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제일 큰 이유는 물론 북한과의 "명분 경쟁"이었습니다. 김일성이나 그 휘하 부대원들의 무장 독립 운동과 비교될 만한 "민족적 공훈"을 지닌 이들이 박정희 주변에 당연 없었기에 이미 죽은 전투적 민족주의자들에게 사후의 예우라도 해주어야 했던 것입니다.

사실 한국 정부의 "보훈 정책"들은 꽤나 오랫동안 대북 "정통성 경쟁" 차원에서 실행돼 나갔습니다. 단적인 사례로,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한국으로 모신 것은, 그 유해를 홍 장군의 고향인 평양에서 묻게 해달라고, 카자흐스탄 정부에 오랫동안 요청해온 북한 정부의 "유해 봉환 계획"을 좌절시킨 것이었습니다.

"민족 영웅의 유해"는 북에서도 남에서도 해당 국가의 "민족 정통성"을 보강시켜주는 것으로 간주돼 왔습니다. 그러면 그렇다면 왜 윤 정권과 육사는 바로 그 민족 영웅을 지금 이처럼 계획적으로 모독하고 있는 것이죠? 대답은 간단합니다. 남한에서 이제 국가의 이념이 사실상 바뀌어 "민족"이 대체로 폐기처분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탯줄" 차원에서 "민족"보다 차라리 일제 시절의 관료, 부르주아 엘리트와 더 연결성이 강하고, 대부분이 생활상 미국과 어떤 연결 (가족의 미국 시민권 등)을 가진 남한 지배층이 그래도 오랫동안 "민족"을 이념적으로 붙잡아 온 이유는 북한과 디아스포라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김대중, 노무현 시절에는 북한에 "좋게" 접근하여 북한을 남한의 경제권역에 궁극적으로 포함시키려는 "햇볕 정책"이 실시됐을 때에는 "민족"은 거기에서 필수불가결한 명분이었습니다.

한데 북한의 핵무장, -미 대립 격화, 그리고 미국의 압력으로 "햇볕 정책"은 결국 폐지됐습니다. 북한이 남한 경제권역 대신에 중국 경제권에 편입되고 말았습니다. 동시에 남북 "경쟁"은 가면 갈수록 의미를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생활 수준은 어차피 1990년대 초반 이후로는 이미 경쟁이 안되는 것이었고, 북한의 핵, 미사일 무장 같은 걸 남한이 그 대미 관계상 어차피 그대로 모방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유일하게 한국 지배층들에게 남아 있었던 "민족"의 효율성은 바로 디아스포라 정책, 즉 중국과 구소련 동포의 역이민을 "민족"의 이름으로 받아들여 3D 업종의 저임금 노동력에 대한 수요를 충족시키는 것입니다. 한데 지금 한국으로 역이민할 재중국 조선족과 구소련 고려인 대부분은, 이미 한국에 와 있는 상태입니다.

어차피 앞으로는 남한 업체들의 저임금 노동력 수요의 대부분을, "우리 민족"과 관계 없는 "순수" 외국인 노동자로 충족시켜야 할 것은 남한 지배층의 판단인 셈이죠. 그렇게 해서 남한 지배층이 결국에 "민족"이라는 개념을 해고 (?)하고 우파 민족주의에서 뉴라이트식의 국가주의, 즉 대한민국주의로 집단 개종 (?)한 것입니다.

윤 대통령도 따르는 것으로 봐야 하는 뉴라이트식 대한민국주의는 어떤 면에서 참 "솔직한" 이데올로기입니다. 이 이데올로기는 남한이라는 국가의 식민지적 뿌리나 미국에 대한 태생적 종속성을 부인하긴커녕 아주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일본이 침략한 중국의 영토, "만주국"에서 경성방직의 김연수 같은 조선 부자들이 투자를 해서 공장, 농장 관리한 것도 "국제화된 환경에서의 자본 축적"이라 자랑스러운 거고, 간도 특설대에서 같은 조선인과 중국인을 사냥해 도살한 것도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공산주의와의 투쟁"쯤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미국 침략자의 종범으로 베트남에 간 것도 "경제적 의미"와 함께 "전체주의적 공산주의와의 자랑스러운 투쟁"이 되고, 오늘날 아시아 전역에서 12백만 명 정도의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 등 노동자들을 한국의 현지 기업들이 착취하는 것도 "우리 경제 영토의 확장"입니다. 이 이데올로기의 차원에서는 지금 미국, 일본과 군사 협력하면서 특히 "대일 관계 강화"에 나서는 대한민국은 한국 근현대사의 유일한 합법적인 결과이며 가장 이상적인 결과입니다.

이 이데올로기 차원에서는, 홍 장군보다 홍 장군이 빨치산 전쟁을 수행하면서 처단했던 현지의 친일파 조선인들에게 더 강한 동정이 갈 것입니다. 이들이야말로 뉴라이트가 생각하는 "자본주의적 근대의 전도사"이었기 때문이죠. 홍 장군 흉상의 이전은 바로 뉴라이트식 대한민국주의가 이 나라의 국시로서 그 자리를 확연히 잡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한국 이념 변천사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분수령이죠.

그런데 뉴라이트들이 지금 승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 승리가 얼마나 오래 갈는지 미지수입니다. 저들의 가장 강한 논거는 사실 경제, ""입니다. , 우리 1인당 소득이 북한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 등에 비해서도 높으니까 우리의 제국주의적 틀 안에서의 자본주의적 근대화가 옳았단 이야기는, 저들이 가장 하고 싶어하는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1990년대 초반 이후 30년동안 한국의 경제 성장은 중국과의 지역 분업 구조 속에서 이루어졌단 것입니다. 지금 윤 대통령의 뉴라이트 정권이 중국과의 "디커플링"을 무리하게 강요하면서 이와 동시에 한국 수출 경제의 장기적 생명력을 스스로 죽이는 것입니다. 그것도 미국 본위의 뉴라이트 이데올로기 이름으로 말입니다.

이러다가 한국에서의 장기 침체와 빈곤의 확산 등이 불가피합니다. 과연 뉴라이트 정객들이 과거 민족 해방 투사들에 대한 "부관참시"로 배 고파지고 힘들어지는 대중들의 눈을 계속해서 딴쪽으로 성공적으로 돌릴 수 있을까요?

(기사 등록 2023.9.3)  

* 글이 흥미롭고 유익했다면, 격려와 지지 차원에서 후원해 주십시오. 저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여러분의 지지와 후원밖에 없습니다.

- 후원 계좌: 우리은행 전지윤 1002 - 452 - 402383

* 다른세상을향한연대’와 함께 고민을 나누고 토론하고 행동합시다.

newactorg@gmail.com/ 010 - 8230 - 3097 / http://www.anotherworld.kr/6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