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역사와 현실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와 통찰력을 보여 온 박노자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서 시작된 전쟁에 대해서 분석하고 전망하는 글들이다.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bit.ly/3jpYwgJ)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대한민국에서는 중-러를 접근할 때에 한 가지 인식론적 장애가 있습니다. 이 두 "변방의 제국"들의 현재보다는, 한국인들이 그 과거를 더 빨리, 더 쉽게 소환합니다. 예컨대 러시아를 접근할 때에는 아무래도 현재 러시아의 이미지와 구소련의 이미지가 오버랩되고, 푸틴의 반서방 수사는 왠지 소련 시대의 "반자본주의적" 표어들을 계승한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중국에 대해서는, 아마도 모택동 시대도 아니고 1980-90년대의 "제3세계"로서의 중국, 즉 단순한 제조업을 위주로 해서 공업화의 첫 단계 (방직업 등)에 머무르는 가난한 나라처럼 자꾸 생각되는 것입니다. 이런 스테레오타이프들은, 대한민국으로서 여러 모로 매우 중요한 두 이웃 나라에 대한 대대적인 '몰이해'에 기여합니다.
예컨대 소련-러시아의 "반서방 수사" 지속성의 문제부터 보죠. 사실, 둘 다 "반서방"이라는 차원에서 비슷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 배경은 자못 다릅니다. 소련 시대의 수사는 정확하게 "서방"도 아닌 "자본주의"를 그 표적으로 삼았습니다. 즉, 적어도 이념적 당위의 차원에서는 소련은 사유재산제를 "극복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죠.
오늘날 러시아는 어떤가요? 오늘날 러시아에서는 백만장자, 즉 미화 100만불 이상 자산의 보유자 수만 해도 "전시 특수" 덕에 2022년에 약 10%나 늘어 지금 약 40만 명에 달한 것입니다. 참고로, 중국에서의 백만장자의 숫자는 지금 6백만 명 정도인데, 총인구 대비로 따지면 러시아와 엿비슷한 수준입니다.
러시아는 많은 면에서 서방에 비해 백만장자로 살아가기가 훨씬 편한, "초자본주의적" 사회입니다. 물론 국가의 정책에 반대하지 않고 "말을 잘 듣는" 순응적 삶을 사는 이상 말이죠. 러시아의 개인 소득세는 지금도 13%, 고소득자래 해도 불과 15%입니다. 최고소득자들이 37%의 세금을 내야 하는 "자본주의의 전형"인 미국보다 두배나 낮은 겁니다. 러시아의 법인세율 (20%) 역시 대부분의 서방 선진국보다 훨씬 낮은 거죠.
오늘날 푸틴의 반서방 수사는, 소련식의 당위론적 "자본주의 반대"와 전혀 무관하며 차라리 "앵글로색손 패권"을 규탄하곤 했던 히틀러나 무솔리니, 아니면 전시 일본제국을 떠올릴 정도입니다. 푸틴의 수사도 맨날 - 러시아의 세계 패권 정치에 있어서의 경쟁국으로 여겨지는 - "앵글로색손 국가"들을 타깃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가난하고 후진적인 중국"은 그저 한국인의 머리에 남아 있는 과거의 스테레오타이프에 불과합니다. 지금 예컨대 중국 대학 교수의 평균 연봉은 한국 돈으로 바꾸면 약 8천만원 정도 될 터인데, 한국의 교수 연봉과 대동소이합니다. 제가 최근에 갔다와서 직접 본 중국은, 호텔에서 로봇들이 배달 주문 받은 음식을 방으로 날라주는, 어쩌면 한국보다 훨씬 더 최첨단의 기술 강국입니다.
지문, 안면, 그리고 심지어 손바닥 등으로 결제가 가능한 중국은, 여전히 현금에 상당히 의존하는 미국이나 독일 등에 비해서 어쩌면 더 "미래지향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미국에서는 지금도 상점에서의 현금 거래의 비율은 거의 20%인데, 중국에서는...저 말고 현금을 내려는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제가 본 중국의 도시 사회는 그 물질적인 "부"나 기술에 있어서는 한국에 전혀 뒤지는 것 같지 않으며, 다수의 생각이나 태도, 행동에 있어서는 훨씬 더 "초자본주의적"입니다. 한국의 아이들이 초면에 부모 아파트의 평수를 서로 비교하듯, 중국 학생들도 예컨대 명품을 보유하지 못하고 그 학부형이 교사에게 촌지를 주지 못해 뒷줄에서 앉아야 하는 가난한 집안 출신의 학생들을 집단 따돌림의 표적으로 삼는다는 이야기를 중국에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중국에서의 사회의 신자유주의화가 한국보다 더 극단적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사회의 신자유주의화 차원에서는 중-러가 공유하는 한 가지 특징이 있는데, 바로 사회의 "동원 해제" (demobilization)입니다. 인민들에게 "사회주의 건설 대오에서의 헌신적인 참여"를 호소했던 소련 시대의 좌파적 개발주의 방식의 동원은, 그저 "기억"만으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지금 러시아만 해도 거의 1년반 동안 끔찍한 침략 전쟁을 수행해 온 것인데, 제가 주로 상트-페테르부르그나 모스크바에서 살고 있는 친지 등으로부터 들을 수 있는 바에 의하면 그 대도시의 철저하게 개인화된 중산층의 일상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전쟁에의 징집, 그리고 직업 군인 모집 등은 주로 대도시 중산층이 아닌 중소도시나 지방, 농촌, 그리고 소수자들의 구역을 타깃하는 것이고, 모스크바나 상트-페테르부르그 사람들이 그 어떤 전쟁도 없는 것처럼 살고 있답니다.
그들이 여전히 서구에 자주 다니고 (2022년에 러시아인들이 687,239 센겐 비자를 받았으며, 전세계적으로 유럽 연합 센겐 비자 발급 건수로는 터키 다음으로 2번째입니다), 여전히 태국이나 두바이, 발리에서 휴가를 보내고, 여전히 - 주로 터키나 카자흐스탄 등을 통해 "간접 수입"되는 - 서방 명품들을 즐깁니다. 개개인의 가용 소득 역시 크게 바뀐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건 저와 연락하는 다수 사람들의 증언입니다.
그 70% 이상이 가족이나 친구, 친지의 사망이나 부상 소식을 들었다는 우크라이나 주민들과 너무나 대조를 이루는 일상이며, 정말 세계에서 정의가 존재하는가를 심각하게 고민케 만드는 부분입니다. 이런 "동원 해제"의 신자유주의적 분위기는, 대체로 근대 후기 권위주의 정권에 유리합니다.
"동원 해제"란 탈정치화를 의미하기도 하며, 탈정치회가 강할 수록 그 누구도 실제로 선출하지 않은 권위주의적 통치자들이 안심을 하고 사회 위에서 군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동원 해제"는 또한 이라크, 아프간 침공 때 미국인 다수의 그 침략들에 대한 상대적 무관심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사실 "동원 해제"와 극단적 원자화 등은 미, 중, 러 등 신자유주의적 제국 사회들의 하나의 공통점이기도 하죠.
그런데 미국인 다수의 상대적 무관심 속에서는 아프간 침공만 해도 거의 20년 정도 지속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중-러의 대외적인 제국주의적 행위들도, 국내 사회로부터 제재를 받지 않는 채 생각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훨씬 더 지속적으로 계속 이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탈세계화가 진행되고 제국 사이의 각종 대립과 전쟁이 갈수록 많아지는 현 세계의 "불안정성"이 얼마나 높은지 단적으로 잘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어느 시기보다도 국제화된 반전 운동이 시급한 것은 지금인데, 이건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기사 등록 2023.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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