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bit.ly/3jpYwgJ)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저는 지금 서울에 잠깐 와 있습니다. 학회 참석차 왔으며, 이제 곧 머지 않아 출국합니다. 며칠 안되는, 아주 짧디짧은 국내 체류였지만, 느낀 바 있어 여기에 적어 봅니다. 제가 여실히 본 것은 무엇보다 일차적으로 “격차”의 나라였습니다. 제가 다녔던 학술회의는, 언급만 하면 누구나 익히 알 수 있는 한 “명문대”에서 열렸습니다.
그 대학 교정은, 아주 멋진 신설의 건물도 있어 아마도 웬만한 구미권 대학보다 훨씬 멋지게 보일 겁니다. 구내에 백화점처럼 필요한 상점도 다 구비돼 있고, 제가 본 학생들의 영어 실력이라면 아마도 프랑스나 이탈리아 등 남유럽보다는 훨씬 좋을 것입니다. 한데 그 학교 학생들에게는 그 가족 배경을 물어보면 거의 다 중상층이나 그 이상, 상당수는 강남 등 “특정 지역” 출신들입니다.
옛날에는 그 학교에서는 마르크스주의 학습도 이루어지고 그랬지만, 요즘 그런 걸 거의 만나보기가 힘들게 됐습니다. 학생층 구성부터 획기적으로 바뀐 거죠. 이젠 “운동”을 가장 열성적으로 하는 쪽은 학생이라기보다는 청소 노동자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학교의 청소 노동자라면 과연 그 자녀를 그 학교 학생으로 보낼 수 있을까요? 노르웨이만 해도 충분히 가능하지만, 대한민국에선 어려울 듯합니다.
학계에서는 이런 “격차의 사회”는 연구 대상과 연구 주제의 태생적인 구분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번 학술회의에서는 여러 주제 중에서의 하나는 바로 이주민, 그 중에서는 이주 여성이었습니다. 보통 서구라면 이주민 연구를 바로 학교에서 학술적 훈련을 받은 이주민 출신들이 흔히들 하는 추세입니다. “스스로”의 문제를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마스터하는, 이런 식이죠.
일본만 해도 재일조선인 관련 연구를 대개 재일조선인 출신의 학자들이 많이들 하지 않습니까? 한데 대한민국에서는 예컨대 동남아 이민 여성 출신으로서 동남아 이민자 연구를 하거나 재중동포 출신으로서 재중동포들의 한국 귀환 이주 현황을 연구하는 경우들은 드물지요. 물론 없진 않습니다. 한성대학에 재중동포 (조선족) 출신의 교수 한 분이 계시고 관련 연구를 하는 걸로 제가 압니다.
그 분이 쓴 글들을 거의 다 찾아 읽었기 때문이죠. 한데 아주 드문 경우죠. 대개 대한민국에서는 이주 연구를, 한국 중산/중상층 출신의, 많은 경우 외국 학위를 소유하는 한국인 연구자가 맡아 하는 것이죠. 이주민들 스스로는 대부분 한국 사회의 “하층”에의 편입을 강요받아, “스스로의 연구”를 하지 못하게 돼 있는 “대상”으로 머물러 있습니다. 거의 세습화돼 가는 계급 사회의 우울한 풍경….
이외에 또 한 가지 느낀 것은 … 어쩌다가 이 사회가 이렇게 외롭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딜 가도 “혼밥”이나 “혼강”, 혼자서 이것저것 하는 것은 “기본”이 된 것 같습니다. “있는” 쪽에서는 재산, 상속 등의 문제가 걸려 있어 “가족”의 틀은 강하게 유지되지만, 중하층이나 그 이하의 사람들에게는 연애, 가족, 출산은 물론 친구 관계 같은 것을 맺을 만한 여유도 거의 남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매일매일 “죽도록” 피곤하게 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원자화는, 사회의 상층보다 그 하층을 더 심하게 강타한 것 같습니다. 이 분들은 과연 보수화 내지 우경화된 것인가요? 한국 사회 중산층 이상은, 분명히 자유민주주의적 근본주의로 회귀하는 모습을 많이 보이긴 합니다. 혐중 감정도 그 기원들은 다양하지만, 그 중의 하나는 미국이나 서구식 의회 민주주의와 본질적으로 다른 그 어떤 체제도 더 이상 용납하지 못하는 그런 “리버럴 근본주의”와 좀 관계 있는 듯합니다.
한데 중하층이나 그 이하의 경우에는, 그저 탈정치화되어서 그런 경향에 저항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죠. 물론 희망은 없지 않습니다. 대우조선 하청 노동자들이 이 악조건 속에서도 파업을 (부분적인)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걸 보면, 한국 노동 계급 특유의 “투쟁성” (militancy)은 여전히 잘 유지됩니다.
노조 조직률이 느리긴 하지만, 꾸준히 늘어납니다. 제조업 하청 노동자, 서비스업 노동자, 대학 청소 노동자들의 투쟁 속에서는 희미하게나마 “희망”은 보입니다. 한데 이와 별도로 제가 대한민국에서 이 번에 느낀 것은 “격차 사회”의 무게와 외로움의 쓰라림 같은 것입니다. 그 느낌을 잊기 전에 여기에 적어 놓는 것입니다.
(기사 등록 2022.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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